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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문정연 文禎連
1974년 부산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4학년.
quszuy@hanmail.net
사육제1
때 가까운 미래의 어느 하루.
곳 예전에는 클럽으로 쓰였던, 지금은 딸과 어머니, 이모가 함께 사는 집.
나오는 사람들 딸(20살 전후의 소녀), 어머니(딸의 어머니), 이모(어머니의 언니), 남자(스무살 전후의 청년), 낯선 남자, 군복을 입은 남자들.
무대: 왼편에 작은 무대가 있다. 뒤편 오른쪽에 작은 창 하나, 그 옆에 매우 작은 출입문이 있다. 안쪽의 움푹 들어간 공간에 거울이 달린 화장대, 중앙에 매우 큰 괘종시계가 있다. 오른쪽으로 나가면 부엌, 왼쪽으로 나가면 침실이다.
배경: 지금은 전쟁중이다. 이 전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 희곡의 인물들에게 전쟁은 ‘일상’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전쟁이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1장 오후
(지직거리는 라디오 방송이 흐른다. 이모, 커다란 식탁을 밀고 들어와 무대 중앙에 고정시킨다. 거구의 비만형이며 도수 높은 안경을 썼다. 어머니, 느릿한 걸음걸이로 들어와 거울 앞에 선다. 이모, 식탁보를 가져와 깐다. 가슴께가 불편한 듯 몸을 비비적댄다. 음식이 든 접시를 하나씩 날라온다. 식탁엔 갖가지 음식이 차려진다. 어머니, 몽롱한 시선으로 거울을 바라본다.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관능적으로 고개를 젖혀보곤 한다.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오래도록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 입 저 안쪽까지 비춰보려다 구역질을 한다. 다시 여러가지 표정을 지어본다. 음식을 다 차린 이모는 식탁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앉기 전에, 팬티가 엉덩이에 끼여 불편한 듯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린다. 이 행동이 진행되는 동안 라디오 방송은 계속되고 있다.)
라디오 (신경을 거스를 정도의 깨끗하지 못한 음질이다. 단조롭고 건조한 음성) 53-1345, 65-7821, 32-3891, 44-9773…… 이상은 오늘 오전 신병소집에 불응한 자들입니다. 위 신병들에 한해 소집시한을 12시간 연장하였으니 지금 즉시 가까운 군부대로 도착해주기 바랍니다. 기한을 넘긴 신병들은 전시군사동원법 제3조 병역기피 및 도피죄에 의거 즉결처분됩니다. (사이) 다음은, 지금 이 시각 전투상황입니다. (종이를 뒤적이는 소리) 1지역, 어제에 이어 작전 129호를 진행중입니다. 민간인 통행금지령이 발효되었으니 참고 바랍니다. 2지역, 새벽 전투에서 적군의 로켓포 부대를 완전 제압, 분쇄하였습니다. 3지역, 접전지역 민간인에 대한 식량배급을 위해 쌍방간에 24시간 휴전이 합의되었습니다. 4지역, 끈질긴 탐색 끝에 은폐된 적의 무기수리 공장을 발견, 기습하여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5지역……
(멀리서, 긴 폭격음이 울린다. 이모, 창밖을 잠시 내다본다. 폭격의 진동으로 전파가 잡히지 않는 라디오를 끄고 앉는다. 불안한 표정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가슴을 싼 헝겊을 꽉 죈다. 헝겊 아래로 손가락을 넣어 긁어대다가 블라우스 단추를 잠근다. 어머니는 느릿하게 식탁 앞으로 와 음식냄새를 맡는다.)
이모 오늘따라 폭격이 요란한 것 같지 않니?
어머니 (창밖을 힐끗 보곤) 글쎄…… 어제는 어땠는지 잊어버렸는데.
이모 근데 너, 왜 오늘따라 궁둥이를 실룩거리면서 걷는 거지?
어머니 (언짢아서) 함부로 내 마음을 알아맞히려고 하지 마, 언니.
이모 아, 미안해. 알잖니. 난 네 딸이 애인을 데리고 오는 날이면 괜히 긴장이 된단다.
어머니 (음식냄새를 맡으며) 음…… 잘도 차렸네. (잠시 후 이모의 가슴을 가리키며) 왜 그렇게 납작해?
이모 (무릎 위에 책을 올린 후, 목을 빼고 내려다본다.) 더이상 커지면 책을 가릴 것 같아. 젖가슴만 너무 큰 기형적인 여자가 되는 건 정말 큰 불행이야. (어머니, 미소짓는다.) 네 딸내미가 데려오는 남자들은 언제나 내 가슴을 향해 환호성을 질러댔지.
어머니 (거울 앞으로 다가가며) ……그랬었나.
이모 (다급히) 물론, 사랑한 건 너였지만 말이야!
(어머니, 미소짓는다.)
이모 (주먹을 쥐어 입을 막으며) 큭큭큭. (비밀스럽게) 네 딸내미의 애인들이 사랑한 건 결국, 너였지.
어머니 (거울을 바라보며) 가슴 아픈 일이야. 내 딸이 매력 없다는 건……
이모 그애가 아주 매력이 없는 건 아니야. 이렇게 금방 새 애인을 만들어 소개시키는 걸 보렴. 네 피가 섞인 네 딸인 게지.
어머니 난 내 딸을 사랑해. 그애가 불행해지는 건 싫어.
이모 그건 모든 엄마들의 바람이란다. 엄마들은 딸을 사랑하면서 행복을 느끼지. 나도 만약 딸을 낳을 수 있었다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렇게 많은 아들을 낳을 게 아니라…… 아, 넌 또 내 상처를 건드리는구나. 왜 아들은 모두 남자일 수밖에 없는 거지? 내 아들 중의 단 한명이라도 여자였다면! 그랬다면, 난 이렇게 외롭지 않을 텐데……
어머니 사라진 남자들 생각은 그만 해. 그 대신 언니는 닭고기를 무척 사랑하잖아.
이모 (쿡, 웃는다. 식탁을 바라보며) 오늘도 손님을 기다리는 식탁 위에 닭고기를 올렸어. 내가 가장 아끼는 접시에 담았지. 이 오돌오돌한 껍질을 까고 가느다란 실처럼 갈라지는 분홍색 살결을 보렴. (사이) 네 딸은 어떻게 이런 걸 질색할 수가 있니?
어머니 그애가 그렇게 멍청한 건 통조림만 뜯어 먹어서야.
이모 하긴, 먹는 것과 안목은 큰 상관이 있다고 하더군. 걔가 데리고 오는 남자들을 보면 정말 기가 차잖니. 네 딸은 어쩜…… 네 딸은 어쩜 그렇게 희한한 놈들만 고르는 거니? 하하하, 하하하. (벌떡 일어나서 엉덩이 부분의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린다.)
어머니 아아,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왼쪽 넷째손가락이 없는 남자였어.
이모 그래도 그 남자가 제일로 괜찮았지. (어깻죽지를 가리키며) 여기에 훈장이 주렁주렁했잖니. 손가락이…… 아홉 개나 있었지.
어머니 ……그랬었나.
이모 (무대로 올라가) 널 사랑했던 남자들을 기억해보렴. 네가 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말이야. 우리집은 날마다 남자들로 가득 찼었지. 그때 가장 멍청했던 놈도 네 딸이 데려온 애인들보다는 봐줄 만했어.
(어머니, 시계를 쳐다본다. 째깍째깍, 희미하게 시계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이모 옛날이 좋았다는 말이 있잖니. 꼭 맞는 말이야. (사이) 기억해? 한때 넌 너무나 아름다웠지. 네 딸이 애인들에게 다리를 벌릴 만큼 활짝 피기 전에는 말이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흐르기 전에는……
어머니 무슨 소리지?
이모 무슨 소리라니?
어머니 아, 미치겠어. 이게 무슨 소리야?
(멀리서 짧게 울리는 총성. 갑자기 불이 깜빡거리다 정전이 된다. 고요한 가운데 시계소리만이 울린다.)
이모 (어둠속에서) 정전이네.
어머니 아, 미치겠어. 언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아아, 내 심장 좀 봐. 너무 빨라. 너무 빨리 뛰잖아.
이모 너는 너무 예민해. 넌 너무 예민하단다.
(불이 깜빡이다 다시 환하게 켜진다. 시계소리 사라진다.)
어머니 (시계 앞으로 급하게 가서) 그애가 태엽을 감은 거야?
이모 (시계를 보며) 종이 네 번 울릴 때쯤 새 애인을 데리고 온다고 했지.
어머니 (거울 앞으로 가며) 쓸데없는 시계소리…… 시끄러워.
이모 살짝 예민한 성질이 남자들한텐 더 매력적인 법이지. 넌 태어날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던 거야.
어머니 올 때가 됐어?
이모 왜 아직 안 올까? 혹시 길거리에서 나뒹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길엔 죽어버린 사람들 천지야. 그 사람들이 풍기는 악취를 난 죄다 기억한단다. 우, 기억이란 놈은 날 평생 쫓아다니며 불행에 빠뜨려. 봐라, 그놈 때문에 내 골통이 이렇게 흔들리고 있잖니. (사이) 나가서 보고 올까?
어머니 그앤 쓸데없는 상상을 하느라 총을 맞을 시간도 없어.
(괘종이 울린다. 땡, 땡, 땡, 땡.)
어머니 (귀를 막고) 아아, 난 저 소리를 믿을 수 없어.
이모 그렇다면, 네겐 종이 울리지 않은 거야. 사실이란 결국 네가 믿는 만큼일 뿐이라고 내가 몇번이나 읽어줬잖니.
(크게 문 두드리는 소리.)
어머니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왔어?
이모 (슬쩍 웃으며) 그래 왔어, 드디어.
(이모,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추켜세운다. 다시 크게 문 두드리는 소리. 암전.)
제2장 저녁
(음식 먹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조명, 서서히 밝아온다. 어머니, 이모, 딸, 남자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딸, 남자와 바싹 붙어 있다. 남자에게 오랫동안 귓속말을 한다. 남자, 딸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딸의 손을 잡고 이마에 키스한다.)
이모 (비웃듯 오랫동안) 낄낄낄……
(남자, 이모와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팔을 뻗어 음식을 집으려 한다.)
딸 (벌떡 일어나 남자가 집으려던 음식의 접시를 남자 앞에 갖다놓으며) 신선한 채소요리예요. 깡통에서 방금 꺼냈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배급상자에서 이 통조림을 발견했을 때 눈에서 진짜 불이 튀었다니까요. 그거 알아요? 당신한테선 고기냄새가 나질 않아.
(남자, 자신의 몸에 이리저리 코를 대보곤 동의의 표시로 딸을 보며 웃는다.)
어머니 (한숨쉬며 혼잣말인 듯) 아, 시끄러워.
(남자, 음식이 목에 걸린다. 기침한다.)
딸 어떡해! (벌떡 일어서며) 이모, 물 좀 줘.
이모 (컵에 물을 따르며) 넌, 등이나 두들기렴. (컵을 들고 남자 곁으로 가며) 내가 먹여주면 되잖니. (남자의 머리를 받치고 물을 먹여준다.)
남자 (웃으며) 고, 고맙습니다.
이모 어쩜, 웃는 모습이 내 셋째아들 같네. (어머니에게) 너도 기억하겠지. 우리 애가 날 보면서 활짝 웃을 때 말이야. (남자의 볼을 슬쩍 만지며) 요 부근에 봉곳하게 살이 돋아오르곤 했잖니. 그 모습이 너무 다정해서 난 내 아들을 사랑할 뻔했단다.
어머니 징그러운 뚱돼지 같은 년!
(사이.)
이모 그래! 하하하. 내 아들은 날 보면서 그렇게 말했어. 어쩜, 그땐 날씬했었는데. (가슴이 불편해 몸을 비비적댄다. 남자에게) 어때? 우리 아들처럼 나한테 한번 웃어줄래요?
(남자, 쑥스러워하며 웃는다.)
이모 (남자를 푹 끌어안으며) 아,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날 보고 웃어주는 게 얼마 만이야! 으음……
남자 저, 저……
이모 (남자를 확 놓으며) 엄마한테 그따위 소리 또 해봐! 혓바닥을 잘라서 냄비에 던져버릴 거야!
딸 (속이 불편한 듯) 욱!
남자 (딸을 감싸곤, 고개를 숙인 채) 저…… 제가 마음에 안 드나요?
이모 아니! 맘에 쏙 들어!
남자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제가 마음에 안 드는 거죠?
(어머니, 무심한 척 음식을 먹는다.)
이모 (제자리로 가면서 어머니에게 눈짓하곤) 어쩐지…… 이제 시작이군.
딸 신경쓰지 말아요. 엄만 원래 남자들 앞에선 말을 안해요. (남자에게 귓속말로) 머리가 텅텅 빈 걸 금방 들키거든요.
어머니 어쩌다……
남자 네?
어머니 어쩌다 우리 딸 같은 앨 만나게 됐죠?
딸 우린 첫눈에 반했어.
남자 첫눈에 반했어요. (딸을 바라보며 수줍게) 제가 따님이 일하는 공장에 찾아갔을 때, 따님은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어요.
딸 항상 하는 일이잖아. 난 군복에서 죽은 남자의 이름표를 뜯어내고 새 이름표를 달고 있었어.
남자 옷에 새 이름표를 달고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봤죠. 전 무작정 그쪽으로 걸어갔어요.
어머니 이상하네. 내 딸이 그렇게 예쁜 얼굴은 아닌데……
남자 따님은 그 아가씨 옆자리였어요. 운명적이게도…… 따님은 그때 제 이름표를 옷에 달고 있었어요.
딸 어쩐지 그 이름을 보곤 설레었어. 몇번이나 읽어봤지. ‘65-7821, 65-7821, 65-7821……’ 바늘을 꽂고 페달을 밟는데 자꾸 손가락이 찌릿찌릿했어. 운명적인 일이 일어나는 순간이 온 거야. 그때, 내 손은 이 사람의 이름 위에 있었어. 이상한 일이지? 그러자 그 이름의 주인이 와서 내 손을 꼬옥 잡은 거야.
남자 (딸의 손을 잡으며) 그래서 전 따님을…… 사랑하게 됐어요.
딸 난 예전부터 사랑을 하고 싶었어. 한번도 안해봐서 사랑하게 돼도 그게 사랑인 줄 모르면 어떡하나, 그게 제일 큰 고민이었지. (남자에게) 하지만 당신 때문에 알게 됐어요. 사랑을 하면 온몸이 그렇다고 대답하는 걸요.
(갑자기 기관포 소리가 울린다. 남자, 동요하며 식탁 밑으로 들어간다. 어머니와 이모, 큰 소리로 웃는다.)
딸 왜 그래요? 나와요. 어서 나와요.
남자 (얼굴만 내밀고) 내 옷, 내 옷은 어디 있어요?
딸 왜요?
남자 (버럭) 어디 있어?
(딸, 가방 속에서 옷을 꺼낸다. 낡은 군복이다. ‘65-7821’이라고 씌어진 큰 이름표가 번쩍이며 새 것으로 달려 있다. 남자, 식탁 밑에서 나오며 옷의 이름표를 확인한다.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딸 옷이 없으면 아무도 옷 주인을 찾지 않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남자 (딸에게 안기며) 난 이 옷이 무서워요. 지금 당장 없애버리고 싶어. (딸의 품속에서 나오며) 지금 당장.
딸 안돼요. 아이 셋이 생기기 전엔 안돼요.
(어머니와 이모, 작게 키득거린다.)
남자 아이? 셋이나?
딸 당신을 닮은 세 명의 아이를 낳을 거예요. 당신과 나는 그 아이들을 키우면서 같이 늙어가야 해요. 옛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때까지 난 이 옷으로 당신을 시험할 거예요. (남자를 감싸안으며)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날 평생 사랑하게 될 거야. 그러지 않으면, 난 이 옷을 가지고 가서 신고할 거니까.
어머니 (벌떡 일어나며) 아, 기분이 좋아. (무대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는다.) 내 딸의 애인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싶어.
이모 (박수를 유도하며) 크크큭. (남자에게) 애송이, 잘 봐. 저애한테 잘 보이면 행복이 뭔지 가르쳐줄 거야. 끝없이 불행할 테니까.
딸 (불안해하며) 엄마……
(어머니, 가벼운 춤동작으로 박자를 맞추고 있다.)
어머니 (노래한다.) 태양이 흘린 뜨거운 침 한모금. 가져와. 네 옷을 모두 벗어 담가버려. 쉭쉭, 이글거리면 그걸 몽땅 태워버려. 넌 자유, 발가벗고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총알에게 인사해. 안녕, 오늘도 우린 만나지 못하네. 음음음…… (허밍으로 간주를 넣고 있다.)
딸 그만 해! 엄마!
이모 (벌떡 일어나 딸의 뺨을 친다.) 쉿!
(어머니, 계속 허밍을 하며 남자에게 온다. 남자 곁에 서서 웃으며 허밍한다. 남자, 손을 떨며 물컵을 쥔다. 어머니를 슬쩍슬쩍 훔쳐본다. 딸,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이모 (딸에게) 넌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니?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서 울어. (조용한 목소리로) 나가렴. 말을 안 들으면 다시는 울지 못하게 눈알을 빼버릴 테다.
(딸, 일어서며 어머니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남자를 본다. 울며 나간다. 어머니, 다시 무대로 올라간다. 이모, 딸의 자리에 옮겨 앉으며 남자의 무릎에 손을 올려 만지작거린다. 어머니의 허밍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암전.)
제3장 밤
(같은 노래의 반주가 이어지면서 불이 켜진다. 조명은 약간 어둡고 조악하다. 식탁은 치워졌다. 조그마한 소파가 하나 놓였다. 어머니, 무대 위 마이크 앞에서 노래하고 있다. 남자, 바닥에 앉아 어머니를 바라본다. 어머니는 이따금 남자 가까이에 올 듯하면서 남자를 애태우고 희롱한다.)
어머니 (노래한다.) 태양을 찢은 얼음 살점 한조각. 여기 있어. 내 말랑한 입술을 벌리고 찾아봐. 쩝쩝, 이글거리면 그걸 몽땅 씹어먹어. 태양이 잊은 하얀 머리카락 한다발. 젖었어. 내 넓적한 다리를 벌리고 만져봐. 활활, 이글거리면 그걸 몽땅 빨아먹어. 넌 자유, 발가벗고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총알에게 인사해. 안녕, 오늘도 우린 만나지 못하네. 넌 자유, 오줌 누며 하늘로 날아. 떠다니는 대포에게 키스해. 안녕, 내일 만나면 날 어디로 데려갈래.
(남자, 일어서서 열광적으로 박수를 친다. 어머니, 무대 위에서 우아하게 인사한 후 남자에게 손을 내민다. 남자,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소파로 에스코트한다. 어머니, 소파에 앉는다. )
남자 (어머니 곁에 어색하게 서서) 저, 정말 (쑥스럽게 웃고는) 아름다워요. 당신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저……
어머니 귀.
남자 네?
어머니 귀가 붉게 물들었잖아.
(어머니, 귓속말을 하려고 몸을 가까이 붙인다. 남자, 어색하게 귀를 댄다.)
어머니 흥분했나봐.
남자 아, 아니에요. 그냥…… 조금 떨려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난 당신의 딸을 사랑하니까요.
어머니 ……그랬었나.
남자 그런데…… 전 사랑을 잘 몰라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따님은 아침부터 밤까지 울고만 있어요. 밥도 먹질 않아요. 걱정이 돼요.
어머니 괜찮아. 그앤 원래 밥을 안 먹어. 통조림만 뜯어 먹고 사는걸.
남자 공장에도 나가질 않잖아요.
어머니 너무 슬퍼서 출근시간을 잊어버린 거야.
남자 왜 슬퍼하죠?
어머니 버림받았으니까.
남자 전 버리지 않았어요. 아직 이렇게 사랑하는데요.
어머니 (거울 앞으로 가며) ……그랬었나.
남자 ……당신은 사랑을 굉장히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그거…… 이렇게 혼란스러운 게 정상인가요? 궁금해요. 아니, 그저, 따님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좀 가르쳐주세요.
어머니 가르쳐주면 뭘 줄 거지?
남자 뭐, 뭐든지요.
어머니 (남자의 귀를 쳐다보며) 뭐든지? 호호.
(남자, 귀를 가리며 어머니를 바라본다. 딸, 유령처럼 나타난다. 아주 깡말랐다. 오른손을 이상하게 올리고 있다. 어머니와 남자를 멍하게 바라보더니 시계태엽을 감는다.)
딸 시간이 가고 있어. 땅이 돌고 있어. 난 그걸 느껴. 그래서 이렇게 어지러워. 지구는 얼마나 어지러울까. 뱅뱅. 뱅뱅.
(끊임없이 괘종이 울린다.)
어머니 (귀를 막으며) 아, 끔찍해.
(남자, 엉겁결에 시계추를 잡아 멈추게 한다. 딸,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 나, 이 소리 듣기 싫어요.
(딸, 눈물을 흘린다.)
남자 (딸이 이상하게 올리고 있는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왜 손을 이러고 있어요?
딸 (뿌리친다. 손을 코에 갖다대고) 당신 냄새가 나요. 당신이 내 손을 잡아준 그날부터 이렇게 냄새가 나서 날 괴롭혀요. 손가락 사이로 자꾸 바람이 불어요.
어머니 휘유우우웅.
(남자, 어머니에게 신경을 쓴다.)
딸 당신과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의 바람이에요. 당신 손에선 땀이 많이 흘렀죠. 내 지문에 묻은 당신 땀이 닦이질 않아. 아파요, 이 손이 너무 아파요. 아파요.
(딸, 웅크려 한참 엉엉 운다. 어머니, 거울 앞에서 혀를 내밀어 자세히 본다.)
남자 어머닌 뭘 하는 거지?
(사이.)
딸 난 도망자의 옷을 가지고 있어요.
남자 (웅크린 딸을 일으켜 세우며) 왜 이래요? 우린 아직 한명의 아이도 갖지 못했어요.
딸 그럼…… 지금 제 방으로 같이 가줄래요?
남자 그래요. ……잠깐만, 먼저 가서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갈게요. (딸의 어깨를 안으며) 저기…… (어머니의 눈치를 보곤) 사랑해요.
(딸, 나간다. 어머니, 여전히 혀를 보고 있다.)
남자 뭘 하는 거죠?
어머니 대회를 열고 있어.
남자 대회요?
어머니 누가 더 아름다운지 뽑는 대회, 구경할래?
남자 네.
어머니 오늘 후보는 내 혀와 내 겨드랑이야.
(어머니, 거울에 겨드랑이를 비춰본다. 사이. 남자에게 겨드랑이를 보여준다.)
남자 (겨드랑이 가까이 코를 대고 숨을 들이쉬며) 냄새가 나요.
(어머니, 남자 앞에서 혀를 쭉 내민다. 남자는 자세히 혀를 들여다본다.)
어머니 난 내 몸 중에 혀가 가장 좋아. 언제나 축축하고, 한순간도 멈추질 않아. 재밌어.
남자 키스해도 돼요?
어머니 안돼.
남자 왜죠?
어머니 아직 정하질 못했거든.
남자 뭘요?
어머니 네가 나한테 푹 빠지게 될 때가 언제일지. 난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건 못 참아. 사랑할 땐 언제나 덜 애태우는 쪽이 이기는 거거든.
남자 그게…… 언제 정해지는데요?
(어머니, 미소짓는다. 사이.)
남자 안아봐도 될까요?
어머니 안돼.
남자 손을 잡아도 될까요?
어머니 안돼.
남자 왜죠?
어머니 호호호.
남자 우스워요?
어머니 손 들어! 움직이면 총알이 뛰쳐나가요! (은근한 목소리로) 오늘의 암구호를 대야지.
(사이.)
남자 사랑해요.
(딸의 울음소리가 커졌다가 사라진다. 어머니, 남자의 손을 잡는다. 둘은 끌어안으며 키스한다. 비행기 소리가 들린다. 창밖에서 환한 불빛이 들어온다. 남자, 놀라 멈추려 한다. 어머니, 남자의 머리를 잡고 계속 키스한다. 비행기 소음 계속 들리다 멀어진다. 어머니와 남자, 키스를 멈춘다. 남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본다. 어머니, 따라 일어나 창밖을 본다. 폭격소리가 들린다. 창으로 흘러 들어온 불빛에 둘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진다.)
어머니 아름답지?
남자 무섭기도 하구요, 당신처럼.
(남자, 키스하려 하나 어머니는 거절한다.)
남자 왜 그래요? 사랑해요.
어머니 배가 고파. 고기가 먹고 싶어.
남자 저보다 고기를 더 원해요?
어머니 그래.
(이모, 모포를 뒤집어쓰고 등장한다.)
이모 먹을 게 다 떨어졌어.
어머니 (남자에게) 네가 고기를 가져와.
이모 오! 그렇지. 우리집에 남자가 생긴 걸 잊을 뻔했네. 맞아, 사냥은 남자가 해야지. (모포를 남자에게 씌워주며) 난 우둘투둘한 닭살을 좋아한단다.
남자 알았어요. 하지만, 나가기 전에 한번만 키스해줘요.
어머니 다녀오면 해주지.
이모 하하하핫. (어머니 엉덩이를 치며) 아름다운 내 동생, 영리하기도 하지.
(남자, 망설이다 문을 열고 나간다. 비행기 소음 다가왔다가 멀리 사라진다. 암전.)
제4장 깊은 밤
(비가 세차게 내린다. 남자, 구석에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다. 이모가 등장하며 라디오를 켠다. 헝겊을 푼 가슴께에는 유두가 돋아 있다.)
라디오 한사람의 아군 피해도 없이 적군 4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41지역, 아군은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임무를 완벽히 수행했습니다. 42지역, 교전중입니다. 43지역……
(이모, 주파수를 조절한다. 라디오에서 끈적끈적한 교성이 들려온다. 주파수를 다시 조절한다.)
라디오 (군가가 들려온다.) 숨막히는 고통도 뼈를 깎는 아픔도 승리의 그날까지 끝까지 버티고 버텨라.
(이모, 주파수를 조절한다. 지직대다가 전등과 함께 꺼진다. 정전이다. 이모, 촛불을 켠다. 그리고 엉덩이 부분 치맛자락을 주물럭거리다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가슴에 가려 책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가슴 위에 책을 얹어놓고 읽는다. 그제야 남자를 발견한다. )
이모 (벌떡 일어나며) 어머! 하하하하, 놀랬네. (사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남자 (천천히 일어나며) 모르겠어요.
이모 음…… (치마를 예쁘게 쓸면서 앉고는) 난 네가 가져온 고기 때문에 이렇게 늦게까지 부엌에 있었단다. 살점이 하나도 안 붙게 껍질을 벗기고, 연결부위를 찾아서 관절을 잘라낸 후, 뼈를 새하얗게 발라냈어. 이건 아주 진지한 작업이야. 왠지, 젊은 남자를 만나고 온 것처럼 개운해지는 걸 느껴.
남자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다가) 책을 읽는 사람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에요. 옛날 사람들은 사랑도 책을 읽으면서 배웠다던데, 맞나요?
이모 글쎄, 옛날 사람들은 다 죽었잖아.
남자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런 건 안 나와 있어요?
이모 저런, 넌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 불쌍한 짐승이구나.
남자 (거울 쪽을 가리키며) 도대체, 어딜 갔죠?
이모 자고 있어.
남자 제가 고기를 가져오길 기다리지 않던가요?
이모 아니, 네가 나가자마자 배고픔이 사라졌다고 말하던걸. (사이) 이리로 와.
(남자, 이모 옆에 앉는다. 그리고 이모의 품에 안긴다.)
이모 넌 아직 너무 어리고…… 가슴을 애태우는 것만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소년일 뿐이야.
남자 아니, 난 남자예요. 아주 어릴 때부터 강한 남자가 되기 위해 지독한 훈련을 받았어요.
이모 아니, 넌 어린애야.
남자 아니, 난 남자예요.
이모 잘 들어봐, 자세히. 저 먼곳에서 나는 소리까지…… 이제까지 듣지 않으려고 했던 걸 들어봐. 무슨 소리가 들리지? 저 거리엔 누가 있지? 옆집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
(총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 소리에 교성이 합쳐진다. 계속되는 총소리와 교성. 남자, 불안에 떨며 머리를 감싸쥔다.)
남자 아, 그만!
(소리, 뚝 끊긴다.)
이모 하하하하, 귀엽구나. 어린애들은 환상을 마음대로 조절하지. (사이)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 (가슴 앞자락을 당기고 속을 보여준다.)
남자 (들여다보며) 어째서 이렇게 큰 거죠?
이모 난 평생 동안 너무 많이 낳았어. 외로워서 어쩔 수가 없었단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자꾸 내 곁을 떠나니까. 그래서 또 새 아이를 낳았지. 그 아이들을 다 먹여살리려면 젖통을 키워야 했어.
남자 거짓말! 그렇게 큰 걸 달고 다니는 게 부끄러워서 만든 얘기죠?
이모 (남자의 멱살을 잡으며) 네가 방금 날 모욕했다는 걸 아니? 기분이 아주 지저분해졌어.
남자 하지만, 아이는 여자 혼자서 낳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당신은 애인도 없고…… (이모가 멱살을 놓아주자) 켁, 켁. 당신을 좋아한 남자도 있었어요?
이모 물론이지.
(남자, 웃음을 참으려고 한다.)
이모 오라, 넌 역시 어른이 되려면 멀었구나.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널 사랑하지 않는다. 내 동생에게 수작을 부리기 전에 나부터 널 사랑하게 만들어보시지.
남자 당신 정도는 자신 있어요. (사이) 나한테 키스해도 돼요.
이모 하하하.
(이모, 길게길게 웃는다. 남자, 이모에게 달려들어 키스한다. 둘은 격렬하게 움직이다 소파 뒤로 넘어진다. 소파 끝에 둘의 엉긴 다리가 보인다. 옷들이 던져진다. 이모, 괴성을 지른다.)
남자 당신……
이모 어때? 촉감이 좋지?
남자 닭살이군요.
이모 그래! 이 오돌오돌한 껍질 속에 숨은 분홍색 살결을 상상해보렴.
(남자, 일어서려 한다. 소파 위로 얼굴이 드러났다 곧 사라진다.)
남자 이거 놔요!
이모 가만있어봐! 내가 널 놓칠 것 같아? 잠깐만! 잠깐……
남자 ……아, 이게 뭐죠?
이모 기분이 좋아지지?
남자 ……모르겠어요.
이모 그만둘까?
남자 아니요.
(비가 한참 세차게 쏟아진다. 다시 약해지는 빗소리. 전등이 깜빡이며 불이 환하게 들어온다. 옷을 챙겨입은 남자, 일어나 소파에 앉는다. 소파 뒤로 여전히 이모의 다리가 보인다. 딸이 들어온다. 해골 같다.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남자 옆에 나란히 앉는다.)
딸 아깐 어딜 갔었어요?
남자 먹을 걸 구해왔어요.
딸 제가 먹을 건 없나요?
남자 먹을 걸 구해왔다고 했잖아요.
딸 줄을 서면 배급해줄 텐데.
남자 줄이 너무 길어요. 그리고 그쪽엔 총알이 너무 많이 날아다녀요.
(딸, 흐느낀다.)
남자 그냥 아무거나 먹으면 안돼요?
(딸, 구역질을 한다.)
남자 제발……
딸 왜 내 방에 오질 않았죠?
남자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기다릴 줄 몰라요?
딸 왜 여길 떠나지 않는 거죠?
남자 (딸의 붕대 감은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아직도 많이 아파요?
딸 이건 내 손이 아니에요. 봐요, 나한텐 하나도 어울리지 않잖아요. 근데, 왜 여기 붙어 있을까? 무거워, 너무 무거워요.
남자 (딸의 어깨를 안으며) 저기…… (습관처럼 거울 쪽을 쳐다보곤) 사랑해요.
딸 배고파.
남자 네?
딸 배고파요.
이모 (소파 뒤에서 불쑥 나타나) 나도 배고파 죽겠어. 아까 가져온 고기는 내가 다 먹었는데……
(딸, 이모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본다. 눈물을 흘린다. 암전.)
제5장 아침
(멀리서 구보 소리가 들린다. 발걸음 소리와 욕 지껄이는 소리, 구타 소리가 섞인다. 어머니,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다. 이모,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다. 딸이 왼쪽으로 기울어진 채 등장한다. 오른쪽 손이 잘려나가고 없다.)
딸 (시계 앞으로 가서) 시계가 또 멈췄네.
(딸, 오른팔을 들어 태엽을 감으려 한다. 하지만, 손이 없어서 감지 못한다. 왼손으로 태엽을 감는다.)
딸 배고프지? 내가 밥 줄게. (태엽을 감으며) 한 그릇, 두 그릇, 세 그릇……
이모 배 터지겠다. 그 시계는 고장났어. 태엽을 감아봤자 소용없단다. 또 금방 멈춰버릴걸.
딸 시간이 지금보다 더 빨리 흘렀으면 좋겠어. 우리 우주는 조금만 더 나이를 먹으면 늙어죽을 거야. 그러면 내가 장례를 치러줘야지. 아침도, 밤도, 해와 달도, 우리집도 다 늙어죽으면, 난 혼자서 모든 것들을 기억하면서 살 거야.
이모 시간이 흐르면 난 딸을 낳을 거야. (쿡쿡거린다.)
어머니 사랑을 하면 시간이 흐르지 않아. 그러면, 늙은 것도 아름다워진단다.
딸 난 우리집에서 가장 늙었어. 내가 제일 먼저 늙어 죽으면 누가 날 기억해주지?
(남자, 모포를 들고 등장한다.)
어머니 (남자를 향해 미소지으며) 잘 잤니?
남자 (어머니의 눈을 피하며) 아…… 예. (어머니가 다가와 손을 잡으려 하자 피한다. 모포를 쓰며) 배고프죠? 저…… 먹을 걸 구해올게요. (나간다.)
어머니 (남자가 사라진 쪽을 보며) 이상하네.
이모 (책에 얼굴을 묻고 웃음을 참으며) 큭큭큭. 지난밤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어머니 언니…… 설마!
이모 대단해. 사랑에 관한 거라면 눈치채지 못하는 게 없구나. 아, 아주 뜨거운 몸이었어. 아직 어리고 감상적이긴 했지만, 여태껏 날 사랑한 몸 중엔 최고였어.
어머니 도둑년!
이모 (웃으며) 그래, 네가 질투할 줄 알았다.
어머니 질투…… (거울 앞으로 가며) 언니한테?
이모 (어머니에게 따라붙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기분이 상해서 미칠 것 같지?
어머니 함부로 내 마음을 알아맞히려고 하지 마.
이모 순진한 남자는 더 골치 아파, 그렇지? 하룻밤 사이에 자기가 누굴 사랑했는지 잊어버리고 말잖니.
어머니 저놈, 죽여버릴래.
이모 그러면 넌, 누굴 사랑할래? 넌 항상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잖아.
어머니 시끄러워! (시계를 쳐다보고) 아, 시끄러워, 시끄러워!
(어머니, 시계를 바닥에 던져버린다. 딸, 시계를 감싸안는다. 악에 받쳐 선 어머니, 딸을 본다. 사이.)
어머니 (차분해져선) 넌, 내 딸이구나. (딸을 안으며) 왜 이렇게 말랐니? 네가 우는 소리를 들었어. 무슨 괴로운 일이 있니?
딸 내가 운 게 아니야. 손이 나한테 붙어서 울고 있길래 보기 싫어서 잘라버렸어.
어머니 그래, 잘했구나.
이모 역시…… 딸을 낳아야 해. 나도 딸이 있었다면…… (배를 어루만지며) 이번엔 꼭 딸을 낳아야지.
(문이 벌컥 열린다. 남자가 사람 시체 한 구를 끌고 들어온다. 급하게 문을 닫는다. 숨을 몰아쉰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남자 (어머니에게 얼굴을 붉히며) 누가 보면, 빼앗아갈까봐서요. 제일 신선한 걸 골랐거든요.
이모 (남자의 양 볼을 감싸며) 어머, 우리집 남자가 사냥을 해왔네!
남자 (이모를 탁 쳐내며) 붙지 말라니까!
이모 흥. (시체의 냄새를 맡고는) 음…… 신선한데! (뒤적거리다) 세상에, 닭고기잖아!
(딸, 심하게 구역질한다. 소파에 쓰러져 계속 구역질한다.)
남자 (이모에게) 빨리 치워요.
이모 내가?
남자 끌고 오느라 힘이 다 빠졌어요.
(이모, 망설인다.)
남자 당신이 늘 하던 일이잖아!
(이모, 시체를 가볍게 끌고 나간다. 어머니, 몽롱하게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 (어색해져서) 저…… 배고프다고 했잖아요. 날 기다렸나요?
어머니 글쎄. (다가가 남자의 손을 잡으며) ……왜 키스하지 않는 거지?
남자 저…… 모르겠어요. 사실은 어젯밤에……
이모 (밖에서) 어머, 이 닭고기가 입고 있는 옷 좀 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홍색이야!
남자 (역겨운 듯) 자기 몸이 들어갈 줄 아나봐요.
(어머니, 남자에게 키스한다.)
남자 ……아!
(남자, 입을 떼려 한다. 어머니가 남자의 혀를 깨물자 어머니의 몸을 세차게 밀어낸다.)
남자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아, 무슨 짓이에요? 으……
어머니 네 혀는 썩었어. 그런 건 잘라버려야 해. (나간다.)
(남자, 사라진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다. 딸, 소파에 앉아 히죽거린다. 멀리서 폭격소리가 울린다. 아무런 동요 없는 남자, 딸을 바라본다. 딸, 일어나 왼쪽이 기울어진 채 걸어나간다.)
남자 잠깐! (딸의 잘린 팔을 잡으며) 이건!
딸 이젠 나의 어떤 부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남자 안돼요. (딸의 어깨를 감싸며) 안돼요.
딸 뭐라구요? 너무 배가 고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딸, 남자를 조용히 뿌리치고 나간다. 남자, 조금씩 불안해진다. 이모, 꽉 죄는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멋을 부리며 나온다.)
이모 (남자의 뒷목에 대고) 나, 어때?
남자 (노려보며) 징그러운 뚱돼지 같은 년!
이모 뭐라구!
(암전.)
제6장 낮
(불이 켜지면, 음식을 가득 차린 식탁에 이모, 어머니, 딸, 남자가 둘러앉아 있다. 이모, 소리내어 운다. 어머니, 느긋하게 식사를 한다. 딸, 통조림을 먹는다. 남자, 숟가락을 접시에 휘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모 (울며) 그러면서 저놈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아니?
남자 조용히 해요. 당신은 떠들수록 더 역겨워져.
어머니 (남자에게) 다시 말해줘.
이모 내 아들도 나한테 저러진 않았어. 내가 뭘 잘못했니?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엉?
어머니 (남자에게) 말해봐.
남자 (어머니에게) 이제 그만 해요. 벌써 몇번이나 말했잖아요.
어머니 말해봐, 진심이라면.
남자 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머니 음…… 진심일까?
남자 제발 믿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만 사랑한다구요.
이모 하, 하, 하, 쟤 말하는 것 좀 봐. 못생긴 황소개구리 같아. 비린내가 나.
남자 (이모에게) 자기 처질 생각하시지. 당신한테선 항상 역겨운 고기 비린내가 나!
이모 나쁜 놈. 내 엉덩이를 마구 주물럭거릴 땐 언제고……
남자 입 닥쳐!
어머니 (한입 먹으며) 얼마 전까지 넌 내 딸을 사랑했지. 어젯밤엔 언닐 사랑했고, 그리고 이젠 날 사랑하는구나.
이모 (어머니에게) 너도 며칠 전엔 딴놈을 사랑했잖니?
어머니 ……그랬었나.
이모 하지만, 뭐 어떠니. 원래 다 그런 거잖니.
어머니 네가 정말 날 사랑한다면 나한테 그걸 줄래?
남자 무얼요?
어머니 너의 왼쪽 넷째손가락.
남자 네?
이모 지금말고 조금 있다가 말이야. (어머니에게 눈을 찡긋하며) 그렇지?
남자 줄게요, 뭐든지.
이모 바보 같은 놈. 흐흐흐.
(어머니, 미소짓는다. 딸, 식탁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문을 열려고 한다. 남자, 딸을 가로막는다.)
남자 어딜 가는 거예요?
딸 새 직장을 구하러 가요. (문을 열려고 한다.)
남자 잠깐!
딸 왜 그러죠?
(남자, 딸의 몸을 거칠게 수색한다.)
딸 참, 당신 옷을 잃어버렸다는 얘기, 했나요?
남자 뭐라구요?
딸 당신 옷을 잃어버렸어요. 미안해요.
남자 (딸을 쥐고 흔들며) 뭐라구! 이 멍청한!
이모 잘했다! 신고했니?
남자 신고해버렸어?
딸 아니에요.
남자 그럼, 지금 어딨어? 지금 어디에 있어요!
(가까운 곳에서 폭격음이 무섭게 울린다. 전등과 식탁이 흔들린다.)
남자 아아! 이 미친놈들! 그만 쏴! (창을 마구 두들겨 창문이 깨진다.) 미친놈의 비행기! 확 추락해버려! (돌아서며) 당신들도, 당신들도 그만 해. (딸을 흔들며) 말해! 어딨어? 어딨어?
(딸, 두려워하며 어머니를 힐끔거린다.)
남자 (어머니를 바라보며) 뭐, 뭐예요? 당신이 숨겼어요?
어머니 (음식을 한입 먹으며) 통조림을 배급받으러 갔어. 내 딸이 너무 배가 고프다고 해서…… 넌 줄이 너무 길어서 갈 수 없다고 했다며?
딸 먹을 것만 준다면, 그 대신 내가 가진 걸 뭐든지 주고 싶었어.
어머니 그래서 난 네 옷을 달라고 했지.
남자 왜 그랬죠?
어머니 난 널 믿지 않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왠지 네가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이상해졌어.
남자 왜 그랬어요? 내 옷을 숨기지 않아도 당신이라면, 난 그냥……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데요.
어머니 뭐야? 호호호호홋.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온다.) 난 신고했어, 신고했는걸!
남자 아!
(문밖에서 커다란 싸이렌이 울린다. 문 두드리는 소리.)
이모 (창으로 달려가 수선스럽게) 아, 저걸 봐! 남자들이야, 모두 다 남자들이야! 남자들이 왔어! (거울 앞으로 달려가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이런, 오, 이런!
(남자, 두려움으로 몸이 얼어 마냥 서 있다. 문 두드리는 소리. 딸, 구석으로 물러난다. 어머니는 식사를 하고 있다. 이모, 동작에 신경쓰며 문을 연다. 군복을 입은 남자 1이 들어온다. 문밖은 군복을 입은 남자들로 꽉찬다.)
군복을 입은 남자 1 이름, 65-7821!
(남자, 엉겁결에 돌아서서 군복을 입은 남자 1을 쳐다본다.)
군복을 입은 남자 1 (남자의 군복을 펼쳐 보이며) 이 옷의 주인이 맞나?
(남자,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군복을 입은 남자 1 65-7821, 너를 전시군사동원법 제3조 병역기피 및 도피죄에 의거 즉결처분한다. 실시! (문밖을 향해 손짓을 한다.)
(군복을 입은 남자들, 일제히 반짝거리는 것을 든다. 남자는 죽는다. 멀리서 총소리가 끊임없이 한참 울린다.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남자의 시체를 끌고 나간다. 어머니, 따라나간다. 군복을 입은 남자들, 모두 사라진다. 어머니, 남자의 손가락을 들고 들어온다.)
이모 (창밖을 바라보며) 아아, 다 가버렸네.
어머니 (거울 앞 서랍에 손가락을 넣으며) 날 사랑한 남자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점점 지루해하며) 열하나, 열둘, 열셋, 열넷,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열일곱 다음이 뭐더라?
(딸, 남자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이모, 어머니 넌 왜 우는 거니?
(창밖에서 낯선 남자가 안을 들여다본다.)
낯선 남자 (창밖에서) 아가씨, 왜 눈물을 흘리고 있지요?
(이모와 어머니, 서로 눈짓을 하며 식탁에 무료한 듯 앉는다.)
낯선 남자 (창밖에서)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울고 있으니, 그냥 지나갈 수가 없군요. 왜 울고 있나요? ……제가 위로해줘도 될까요?
(이모, 일어나 문을 연다. 낯선 남자가 들어선다. 딸, 잘린 손을 잡고 여전히 울고 있다. 암전.)
심사평(희곡·씨나리오)
응모작품(총 92편)들의 전반적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특히 몇몇 희곡은 당장 무대에 올려도 되겠다 싶은 수준이었다. 씨나리오 부문은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았는데, 이는 씨나리오가 희곡에 비해 응모 편수가 적은데다 좀더 전문적인 이해와 기량이 요구되는 장르적 특성 때문이 아닌가 여겨졌다.
희곡의 경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문정연(한국예술종합학교)의 「사육제」, 한숙희(한국방송통신대)의 「소나무 아래 잠들다」 그리고 이승환(대전대)의 「목 잘린 자들의 대화」였다. 이 가운데 「소나무 아래 잠들다」는 간결하고 깔끔한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으나, 간결한 것이 힘을 발휘하기 위한 최소한의 내적·외적 공명(共鳴)이 부족했다는 것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목 잘린 자들의 대화」는 발상이 재미있고 상상력이나 극을 이끌어가는 솜씨 또한 눈에 띄는 수준이었으나, 각 인물의 이야기들이 아무런 필연성 없이 나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환기력이 부족하여 작가가 결국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한 것인지 모호하다는 점이 결함이었다. 「사육제」는 다른 응모작들의 수준을 현저히 뛰어넘는 성취를 이룬 작품이었다. 인물 구성이나 이야기 배치 등에서 단단한 플롯, 능란한 대사, 적절히 구사된 알레고리 등을 통해 주제를 흥미롭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은 이 작가의 재능을 입증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씨나리오의 경우에는 박민혜(중앙대)의 「벌레」와 성주현(동아대)의 「눈」이 마지막까지 경합했다. 「벌레」는 인물이나 이야기 구성, 대사 구사에서 일정한 수준은 성취하고 있었으나, 이야기 자체의 진부함, 인물 구성이 작위적이고 그들의 행태 또한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점 등이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눈」은 발상이 신선하고 발랄했으며, 그 발상을 설득력있는 인물과 이야기 가운데 흥미롭게 전개시키면서 만만치 않은 주제의식을 유지해내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결국 「사육제」를 당선작으로, 「눈」을 가작으로 뽑는 데 심사위원들의 견해는 어렵지 않게 일치하였다. 「사육제」와 관련해서는 근래에 현실주의 작품이 퇴조하는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얼마간의 우려가 있었으나, 엄격히 보면 그것은 작가 자신의 몫은 아니었고, 「눈」의 경우에는 사소하지만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사실성(예를 들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는 나이에 대한)에 실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있었으나, 두 작가의 재능은 그런 우려나 의구심을 덮고도 남을 만하다는 데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李康白 崔仁碩 李滿熙〕
당선소감
올 한해는 참 힘들었습니다. 깜짝 놀랄 만큼 기쁜 일이나 가슴이 벅차오는 좋은 소식은 멀기만 했고, 도저히 끝을 알 수 없는 막막함, 이루어지지 않는 간절한 소망, 혹은 슬픔을 조용히 견디는 일이 내게는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몸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좌절에 다시 일어나지 못할 만큼은 휘둘리지 않으려고 언제나 팽팽히 긴장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희곡을 쓰려고 앉아 있는 시간만이 나를 한없이 가치있게 하고 자신을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참 다행스럽게도 그걸 알고 난 한참 후에야 이번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쁜 일이 그러하듯이 좋은 일도 시간의 흐름을 타면 어떤 낯선 얼굴로 돌변할지 모릅니다. 이 반가운 소식 또한 내 삶을 어떤 예측하지 못한 길로 끌고 달려갈는지 두렵고 불안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더 겸손하고 더 성실해야겠다는 다짐만 한번 더 하게 됩니다.
다만, 정말 좋은 건 이 일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지면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과 선생님 한분 한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른 표정과 다른 손짓으로 말씀하셨지만 작가란,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을 견디는 습관을 가진 사람인 것을 똑같이 가르쳐주셨습니다.
미래에 대한 어떤 보장도 없기에 오늘은 그저 앉아서 쓸 수밖에 없는 친구들, 후배들에게도 고맙습니다. 이 소식이 어느 한사람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라 서로에게 자극과 격려가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백살 넘게 사실 우리 할머니, 내 맘대로 살게 놔두는 우리 부모님, 생활비를 대주는 동생들에게 즐거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건대 철학과 사람들, 졸업공연 팀, 성종이 오빠, 여림이, 착한 내 동기들에게 고맙습니다. 자기 일처럼 반겨준 은선이, 민선이, 성곤이 오빠 고맙습니다.
제 희곡을 알아봐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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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육제(謝肉祭)'는 고기가 금지되는 신성한 사순절 기간이 오기 전에 마음껏 고기를 먹으며 즐겁게 노는 풍습에서 기원한 축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