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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한국차(茶), 차의 클래식

『지허 스님의 차』, 김영사 2003

 

 

송재소 宋載邵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skjisan@hanmail.net

 

 

내가 차를 마시기 시작한 지 20여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차의 오묘한 맛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저 차가 좋아서 마실 뿐이다. 왜 좋으냐고 물으면 ‘맑아서’ 좋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우선 차는 입안을 맑게 해준다. 특히 밖에서 온갖 화학 조미료로 범벅이 된 음식을 먹고 난 후 차를 마시면 시궁창같이 텁텁한 입안이 더없이 맑아진다. 입안뿐만 아니라 뱃속까지 상큼하게 맑혀준다. 차는 또 머리를 맑게 해준다. 술을 많이 마시고 난 다음날 차 몇잔을 마시면 머릿속이 가뭄에 단비를 만나듯 맑아진다. 그래서 차를 마셔왔고 지금도 마시고 있다.

지허스님1993년 중국에서 6개월 동안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다양한 중국차를 맛볼 수 있었다. 한 지방에 도착하면 의식적으로 그 지방의 술과 차를 먼저 맛보곤 했다. 중국은 그 영토의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차가 있어서 일률적으로 어떻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반 발효차와 완전 발효차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어서 집중적으로 마셔보았다. 반 발효차로는 철관음(鐵觀音)이 무난했고 무이암차(武夷巖茶)의 맛이 뛰어났다. 완전 발효차인 보이차(普茶)는 그 맛을 아직도 모르는데, 술 마시고 난 후나 뱃속이 더부룩할 때 마시면 효능이 있어서 지금도 약처럼 즐겨 마신다. 그런데 이른바 ‘녹차’류는 우리나라의 차보다 더 나은 것 같지 않았다. 항져우(杭州)의 용정차(龍井茶)나 타이후(太湖)의 벽라춘(碧螺春) 그리고 황산모봉(黃山毛峰) 정도가 그나마 ‘녹차’로서의 품격을 지니고 있어서 마실 만했지만 매우 우수한 차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밖에도 그 유명한 군산은침(君山銀針), 육안과편(六安瓜片)을 비롯해서 중국의 명차로 일컬어지는 수십종의 차를 마셔보았다.

일본의 차도 웬만큼 맛보았고 중남미에서는 멕시코, 뻬루, 빠라과이, 칠레의 여러 차를 두루 섭렵해보았으며 우즈베끼스딴, 독일, 인도의 차들도 구해서 마셔보았지만 중국차나 한국차에는 멀리 미치지 못했다.

이런 편력 때문에 차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허 스님의 차』를 읽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책은 ‘놀라운 책’이다. 내가 지금 마시고 있는 이른바 ‘지리산 야생 작설차’라는 것이 자생 차나무에 비료를 주어 횡근(橫根)이 된 “변종 자생 차나무”의 찻잎으로 만든 것이고, ‘전통 수제품’이란 것이 변종 자생 차나무의 찻잎을 “시루에 찐 뒤 한두 번 비비기도 하고 덖기도 한”(92면) 차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또한 시중에서 대량 시판하고 있는 차의 대부분이 일본의 야부끼따(藪北) 종이라는 사실도 이 책에서 알았다.

한국 자생 차나무에 대한 지허(指墟) 스님의 애정은 신앙에 가까울 만큼 절대적이다. 이런 애정과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자생 차나무의 성질과 재배법, 찻잎 따기와 차 만들기에서부터 차 달이기와 마시기, 다구(茶具)에 이르기까지 차에 관한 모든 것을 스님은 치밀하게 서술해놓았다. 마치 과학자가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듯 한치의 빈틈이 없다.

그러나 지허 스님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차의 ‘정신’이다. “조상들은 차로써 마음을 가다듬고, 차로써 인생과 자연을 생각하며 차를 우주를 만나는 매개체로 삼았다”(14면) 또는 “인간이 추구하는 정신적인 과정의 중심에 늘 차가 있었다”(33면)는 것이 스님의 기본적인 ‘차철학(茶哲學)’이다.그러기에 차나무를 묘사하면서 “자생 차나무는 단아한 몸으로 고결하게 살아가는 학 같기도 하고 (…) 청빈한 선비 같기도 하며 때로는 고행하는 수도승 같은 삶을 영위하며 천년을 넘나드는 수명을 누린다”(63면)라 말할 수 있고, 차 만들기에 대해서도 “좋은 차를 만들려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차나무 앞에서 진실해서 헛욕심이 없어야 하고 마음을 허공처럼 비울 줄 알아야 차나무가 사람을 알아보고 좋은 차를 성취시켜 준다”(72~73면)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차의 향(香)을 가리켜 “좋은 차가 담긴 다관에서는 처음에는 하늘땅이 생기기 이전의 향이 나고, 조금 뒤에는 새털구름 어린 가을 하늘의 향이 나며, 좀더 뒤에는 온 산의 초목이 움트는 오색의 봄날 향이 난다”(134면)고 말했다. 이것은 분명 후각으로 맡는 향이 아니고 정신으로 맡는 향이다.

이렇게 차와의 정신적인 교감을 통하여 도달하는 최고의 경지는 “다아일체(茶我一體)요 다선일여(茶禪一如)”(109면)의 경지이다. 지허 스님은 이에 대하여 “내가 차에게로 가서 차가 되는 것이 다아일체요 다선일여이다. 내가 차나무가 되고 찻잎이 되고 그래서 마침내 차가 되어야 한다”(같은 곳)고 설파한다. 그러고 나서야 마침내 신선차(神仙茶)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스님은 신선차를 처음 마셨을 때 “첫 방울이 혀 위에 퍼지는데 마치 숲속 길을 새벽 바람이 밀려들어와 양쪽 귀 밑으로 사라지는 듯”하고 “온몸이 서늘해졌다”(110면)고 했다. 이쯤 되어야 차의 참맛을 터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허 스님에게 있어서 차나무를 심고 찻잎을 따고 차를 만들어 마시는 것은 이렇듯 하나의 경건한 구도과정(求道過程)이다. 그러기에 스님은 형식을 철저히 배격한다. 소위 일본식 다도(茶道)에 대해서 “잘 차려 입은 부인들이 짙은 화장을 하고 복잡한 형식만을 추구하는 다례를 행해 보이는 것은 차의 이름을 빌린 또 하나의 쇼”(207면)라고 일침을 가한다. 참으로 통쾌무비(痛快無比)한 지적이다.

지허 스님이 이 책에서 시종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한국 자생차의 우수성이다. 스님은 “한국차는 차의 클래식이다”(246면)라 말했다. 음악으로 치면 한국차는 고전음악인 셈인데,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찌 고전음악만 들을 수 있겠는가. 고전이 아닌 음악도 들을 만한 것이 있다. 또한 스님처럼 차의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자생 찻잎으로 법제(法製)한 좋은 차가 있어야 하는데 중생들이 그런 차를 구하기 어렵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스님은 “홍차나 보이차나 녹차도 모두 좋은 차”(144면)라고 말한다. 다만 한국차의 우수성을 알고서 다른 차를 마시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이 책은 차에 관하여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속설(俗說)들을 명쾌하게 변증(辨證)해놓아서 올바른 차문화 형성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언젠가는 선암사로 가서 스님이 달여주시는 따뜻한 차 한잔 얻어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