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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유럽과 중국의 비교사
에릭 밀런츠 Eric Mielants
유타대학 사회학과 교수. 이 글의 원제는 “Europe and China Compared”이며 Review 제25권 4호(2002)에 실린 것을 필자가 축약한 것임. ericmielants@yahoo.com
ⓒ Eric Mielants 2002/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3
중국은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찬란한 문명들 중의 하나로 여겨져왔다. 중세에 중국은 십중팔구 모든 권역 중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발달한 권역이었을 것이다. 1100년 무렵 중국의 인구는 약 1억명이었으며, 화폐경제의 발전(지폐, 서면계약서, 신용대부, 수표, 약속어음, 환어음의 사용) 수준이 높았다. 군사적으로 말하자면 중국 황제는 전 유라시아대륙에서 최강의 맹주였다. 중국을 기원후 1000년의 유럽과 비교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회경제·군사·기술상의 발전에 관한 내기에서 중국에 돈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 800년 뒤에는 유럽이 정치·군사·경제·기술면에서 지구를 제패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중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중국 제국에는 서유럽이 했던 대로 그 주변부를 정복하고 복속해서 체계적으로 수탈하는 식으로 발전할 능력이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럴 의향이 없었던 것인가?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중국과 유럽 사이에 존재한 ‘거대한 분기’(great divergence)의 발생시기를 산업혁명기로 잡아왔다. 이렇게 되면 중국은 왜 산업혁명 그리고 반복성장(recurring growth)의 이익을 경험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포머런즈(Kenneth Pomeranz)의 연구(The Great Divergence, Princeton Univ. Press 2000)는 왜 서구가 궁극적으로 반복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고 중국(이나 인도)은 그렇지 못했는가에 관한 설득력있는 설명을 내놓으려는 시도로 세계사 분야에 크게 이바지한 업적이다. 포머런즈는 주로 서구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전통적인 입장에 도전한다. 그들은 서구시장이 다른 지역보다 ‘완전경쟁’과 자유노동을 더 많이 제공했기 때문에 유럽에서 도약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했다고 믿어왔다. 마치 유럽의 산업혁명이 유럽의 독특한 내재적 특징 덕분에 거의 필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입수가능한 문헌을 파고들어서 1800년 이전의 유럽이 독특했다는 주장을 파기하는 대단한 작업을 한다. 근본적으로 그는 서구가 흥기한 것(또는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나타난 것)을 오로지 유럽만을 살펴봄으로써, 또는 이 지역에 존재하는 문화 및 종교적 특수성의 관점으로 유럽의 우세를 설명함으로써 해명하려는 학계의 모든 시도의 토대를 뒤흔든다. 그는 유럽이 산업혁명 이전에는 세계사 배후의 원동력이 아니었고, 세계무역을 석권한 19세기 이전에 핵심은 여럿 존재했으며, 이 지역들이 모두 다 적지 않은 일인당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음을 거듭해서 지적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서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은 인구가 밀집한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극히 중요한 경제적 특징을 지녔던 듯하다. 상업화하고, 재화·토지·노동이 상품화되고, 시장을 동력으로 삼는 성장이 이루어지고, 가계가 출산과 노동배분을 경제에 맞추어 조정하는 것이 그것이다”(같은 책 107면). 문헌을 철저히 검토하면서 포머런즈는 유럽중심적인 신화들을 깨뜨리지만, 19세기 이전 시기를 “지배하는 중심이 없는” 근본적으로 “다중심적인 세계”로 재평가하려고 한다(같은 책 4면, 273면).
서유럽이 신세계와 맺은 독특한 수탈관계, “그리고 이 관계가 낳은 신세계라는 횡재(windfall)의 이례적인 규모”(같은 책 11면)에 맞춰진 포머런즈의 촛점, 그가 ‘자본주의, 해외의 강제, 산업화’ 사이의 연계에 부여하는 중요성, 그리고 유럽(특히 영국)이 세계의 나머지 지역과 맺은 독특한 관계를 핵심부-주변부의 관계들 중에서 독특한 사례로 만든, (유럽으로서는)아주 운좋은 몇몇 전지구적 국면과 결합된 ‘유럽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적 제도와 폭력적 국가 간 경쟁’이라는 보이는 손에 대한 그의 강조는 세계체제론에 아주 가깝게 다가간다. 실제로, 월러스틴과 마찬가지로 그는 신세계 정복(과 이 때문에 벌어진 ‘유럽 내부의 격렬한 군사적 경쟁의 결과’)이 유럽의 대두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포머런즈 스스로가 유럽의 지배를 받는 주변부들과, 중국이 그 주변부와 맺은 관계들 사이에 있었던 근본적인 차이점들의 중요성을 역설한다는 점이다(같은 책 255면, 267면, 289면). 포머런즈의 연구는 사회경제적 발전의 관점에서 비유럽(특히 동아시아) 세계의 활력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려고 노력했으므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의 연구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근대 초기’ 이전의 장기발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과 중국의 다른 정치적·경제적 궤도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해하려면 중국이 안고 있던 구조적인 지리·지정학적 구속과 한계, 그리고 엘리뜨가 내린 정책 선택, 이 두 가지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비록 유럽의 영향이 가져온 충격을 시간상 매우 제한된 기간에 국한하거나 그것을 (주로) 산업혁명 때문에 일어난 군사·기술상의 비약적 발전 덕택으로 돌리는 것이 요즈음의 유행1이지만, 나는 거대한 분기의 뿌리를 13〜15세기에서 찾아볼 것이다.
1. 송조(900년경〜1280년) 중국의 사회경제 혁명
아시아의 무역망 규모와 교환되는 재화의 양은 전근대 시기 대부분에 걸쳐 유럽과 견주어볼 때 놀랍기 이를 데 없다는 포머런즈의 주장은 물론 옳다. 10세기부터 200톤짜리 정크선을 타고 바다를 누비는 중국인의 수가 늘어났다. 송조(宋朝)에는 쌀·자기·후추·목재·광물 같은 재화들이 엄청나게 많이 바다 건너로 운송되었다.2 송나라 때 해운업에서 합작투자와 선박대여업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무역세로 얻은 중국정부의 세수가 유례없이 높은 지점에 이른 것은 바로 송나라 때였다. 그때 해운기술이 훨씬 더 개선되고 중국정부가 굵직굵직한 조선(造船) 프로그램에 착수하자 무역량은 급증했다. 늘어나는 비단무역을 제쳐두더라도 대규모로 거래되는 자기가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송나라 때 사람들은 “차츰차츰 상업 지향적 농경에 의존하거나 농업 이외의 직업에 의존하게 되었다.”3 그리고 “바다 건너에 있는 나라들과 통상관계를 촉진하려는 적극적인 대외무역정책이 공식화되었다.”4 그러므로 무역이 그토록 번성했다는 사실은 황실이 무역을 적극적으로 북돋웠다는 사실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12세기말경 차·소금·술에 매겨진 간접세에서 나온 세금은 국세총액의 70% 가량 되었다. 이렇듯 송나라 때 중국의 주요한 부는 상업과 수공업에서 나왔다. 송나라 초기의 세수 대부분이 아직 농업에 가해진 조세에서 나온 데 비해, “북송 시대 중엽 이후 국가는 점점 더 큰 비율의 세수를 무역에서 끌어냈다.”5 남송 당국은 유목민의 침입으로 “거상들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했으므로” 무역에 훨씬 더 많이 의존했다.6 그 거상들은 무역이 팽창해서 도시가 점점 더 발달하고 공업, 특히 채광·자기·제염산업에서 분업이 더 심화된 송대에 등장했다. 이 산업들은 유럽의 직물공업과 광산업에서 나타난 자본주의와 유사하게 발전한 듯이 보였다. 단지 규모가 훨씬 더 클 뿐이었다.7 따라서 이 시기 중국의 생활수준은 틀림없이 유럽보다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유목민에 의한 위협의 증대가 바로 이러한 국제무역의 급증과 연관되어 있다. 이 위협 때문에 “무역 팽창을 통해서 어떻게든 국부를 늘리려고 노력한 송의 상업중시 정책”이 생겨났다.8 이 점에서 중국정부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즉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이 번창하고 세계의 다른 권역들과의 상업적 접촉 또한 늘어났던 것이다. 중국의 해군력이 막강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이것은 유목민 침입의 직접적 결과였다. (여진족이 중국 북부를 정복한) 1127년 이래로 ‘아시아의 훌륭한 마지막 목초지’와 중앙아시아를 통과하는 대상로(隊商路)가 송과 단절되었다. 이 때문에 도리없이 중국정부는 “강한 해군을 만들어내어 돌이킬 수 없는 말〔馬〕 부족을 상쇄”해야만 했다.9 이렇듯, 송나라 정부는 금(金)과 몽골의 침입이라는 위협이 커졌기 때문에 a) 군사적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국세 증대를 꾀하는 무역을 촉진하고, b) (대규모 기병부대 양성이 더이상 택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니었으므로 유목민족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송의 해군을 막강한 군대로 확대해야만 했으며, 이는 해상무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배가 유럽이나 아랍의 배보다 훨씬 더 커진 것은 십중팔구 대형선박 건조에 국가가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남부가 번영하고 북부에서 유목민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유민이 북부에서 남부로 엄청나게 많이 흘러들어갔고, 이들은 이 지역에서 기술혁신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12세기와 13세기에 사람들이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것은 1127년 이후 남부에서 일어난 경제활황(농업의 특화, 상업화·도시화의 증대, 공업화)과 뒤이은 해상무역 증가와 떼어놓을 수 없다.10 송나라 때 상인들이 올린 엄청난 이익에도 불구하고 소금·주류·향·차 등 가장 수지가 맞는 상품에 국가독점을 부과함으로써 제국은 경제의 특정부문들을 여전히 확고하게 통제했다. 이윤이 남는 산업부문들은 정부의 통제를 받았는데, 이는 서유럽의 조건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중국정부는 “운송과 유통을 직접 감독할 수 없는 지역을 제외하고 이 품목들의 거래에 사기업이 손을 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11 11세기와 12세기를 중국판 상업혁명의 시대라고 일컫는 것은 과대평가가 아니다. 이 혁명은 분업·지역특화·해외무역에 토대를 두었으며, 그 당시 서유럽의 어떤 것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다. 사실, 제국국가 자체는 그 부 때문에 엄청난 사회경제적 발전의 배후에 있는 추동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제국국가가 수요를 촉발하고 도로와 운하를 만들고 지폐를 찍어냈기 때문이다. 송나라 때를 ‘중국의 가장 위대한 시대’로 일컫는데, 괜히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 “도자기 생산이 유례없이 팽창했으며” 도자기가 인도양 전역으로 수출되었다.12 더욱 중요한 것은 원격지 무역의 수지가 의심할 여지 없이 중국의 흑자였다는 점이다. 중국의 수입품은 (직물을 제외하고는) 대개 원료인 데 비해 수출품은 거의 공산품이었다. 송나라 때 가장 큰 중국 선박은 대체로 550톤으로 추정되며, 원(元)나라 때에는 1350톤, 명(明)나라 때에는 2000톤이어서, 중세 서유럽의 선박보다 훨씬 더 대형이었다. 따라서 15세기 중엽까지는 중국이 기술상으로 유럽의 해운능력을 훨씬 앞서 있었다.13 송 정부가 해외무역에 의존함으로써 상인의 사회적 지위는 높아졌다. 클라크는 “상인과 상인경력이 엘리뜨사회에서 점점 더 많이 받아들여지는” 이례적인 “문화적 전환”을 언급하기까지 한다.14 그러나 남송 때 자본주의 환경으로 가는 이행을 방해한 주요문제 중 하나는 인상적인 사회경제적 발전이 유라시아 내에서 중국의 정치적·군사적 위력이 커지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 중국과 몽골인
사실, 인상적인 사회경제적 성장패턴도 13세기 몽골의 중국 정복을 막지 못했다. 이 정복이 불러온 파괴는 엄청났는데, 특히 중국 북부와 중부에서 심했다. 존스는 자그마치 “중국인 3500만명이 몽골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 몽골 정복기에 중국에서만도 사망자가 너무 많아 넓은 지역 도처에서 경제활동이 사라져버렸음이 틀림없다”고 판단한다.15 몽골의 중국 침략은 또한 ‘자본주의의 위기’로 일컬어져왔다(같은 책 110면). 스미스는 더 나아가서 “1276년에 몽골인들이 송조를 뒤엎은 뒤에 중국은 과거의 역동성을 결코 되찾지 못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16 이렇듯 이후의 경제쇠퇴를 몽골인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주 일반적이지만, 비록 초기의 공격이 분명 파괴적이었다고 해도 이것이 과장돼서는 안된다. 어떻든간에, 몽골의 송대 중국 정복은 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일어나지 않았는가의 유일한 이유일 수는 없으나, 한 주요변수로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핵심문제 중의 하나는 장기적으로 보아서 몽골 지배하의 평화로부터 누가 실질적으로 이득을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몽골 통치자 자신들은 군사적 정복으로 분명히 단기적으로는 이득을 보았을 것이다. 말할 나위 없이, 몽골인들이 일단 통치를 확립하자 많은 상인들은 보호비용이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유럽인 전체가 가장 큰 덕을 보지 않았을까?17 항해술과 화약 같은 지식이 점점 더 많이 유럽으로 넘어갔고, 그 결과 상업의 보호비용을 낮출 수 있게 되었다.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럽인들은 중동에서 무슬림 적들이 간접적으로 약해지는 득을 얻었다.
몽골 지배하의 평화 때문에 용감하게 나선 유럽인 무역상들과 더불어 사절·장인·선교사 들은 끊임없이 무사히 동아시아로 들어갔다. 그러나 같은 시기 동안 버마·베트남·일본·자바·중앙아시아에 겨누어졌던 몽골 원정의 주요 예봉은 중국인 주민에게 향했다. 몽골제국에서 ‘역참제(驛站制)’라는 정교한 연결망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안전·보급·숙박 시설을 제공함으로써 많은 외국 상인들의 비용을 틀림없이 줄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연결망의 “유지는 정주민들에게 무거운 짐이었다.”18 중국 북부에서는 특히나 그러했다.19 원 치하에서 중국 농민에 대한 수탈이 늘어난 것은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지르는 상업의 큰 증대, 그리고 동남아시아와의 대규모 상업의 지속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몽골인 무인통치자들이 정주민에게서 뽑아낸 징수액의 증가가 “그들에게 필요한 생산물과 맞바꿀 상당한 잉여를 주었다. 이번에는 이것이 수공업과 제조업을 자극했다.”20 그러나 귀족의 지출에 자극을 받은 이러한 호전, 즉 늘어나는 규모의 경제로 말미암은 상업의 초기성장과 보호비용의 감소는 지속될 수 없었다. 농민수탈이 격심해져서 농업생산이나 농업생산력이 늘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상업이 계속 팽창하기 위한 물적 토대가 결여되었기”(같은 책 8면) 때문이었다. 중국에 몽골의 유산은 장기적으로 볼 때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 유산은 “나라경제가 더 성장하는 데 방해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퇴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21 특히 무역에서 나오는 최대 이윤이 중국에서 떨어져나갔다는 사실은 치명적이었다. 이렇게 다시 한번, 서유럽에 유라시아대륙의 ‘평화로움’은 오로지 이득만을 뜻했다. 동방과의 접촉이 늘어났기 때문에 서구는 동방의 앞선 항해기술(예를 들어 나침반), 화약, 인쇄 등등에 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몽골인이 복속민을 너무 많이 쥐어짜내기만 한 나머지 복속민이 들고 일어나 반란을 일으켰다.22 1368년 원 왕조가 결국 쫓겨나자, 승리를 거둔 명나라는 힘을 유지하는 데 골몰했다. 몽골의 위협이 티무르(Tamerlane)와 몽골의 오이라트(Oyirat)족으로 인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황제는 유목민의 침략에 맞서 중국의 안전을 지키는 데, 그리고 지방을 안정화하는 데 다시 한번 집중해야만 했다. 그래서 명조는 더이상 해군력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만리장성 방어가 또다시 더욱 중요해졌다. 그랬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정화(鄭和)의 그 유명한 해상원정이 바로 명조에 의해 뒷받침됐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렇기는 해도 “중국의 원양항해, 대양항해 활동은 명이 아닌 송·원 시기에 절정에 이르렀다”는 점은 강조되어야만 한다.23 단명했던 정화 원정의 성격과 목적은 중국제국의 재기라는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3. 명조 중국과 유럽: 갈라지는 경로
15세기 초 정화의 항해에 물론 경제적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이 항해를 지배한 것은 무역에 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요소(국제적 위신)였다. 그 요소는 ‘중화제국’의 언저리에 사는 ‘오랑캐’들을 조공무역체제에 맞추도록 하기 위해 중요했다.24 사실 “중국문화 자체가 중국의 최고 상품이며 값나가는 세공품은 중국문화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비단과 도자기 같은 인기 생산물을 오랑캐에게 파는 것을 문화적 우위의 분명한 과시로 보았다.”25 따라서 중국의 힘을 과시해 얻는 외교적·문화적 위신이라는 개념이 정화의 항해에서 핵심이었다. 유럽의 자잘한 도시국가들이 보낸 선박들은 그렇지 않았다. 유럽의 도시국가는 중세 이후로 주변부에서 나온 자본을 끊임없이 축적하기 위해 직접적인 정복, 정치적 통제, 상업적 수탈의 대외정책을 체계적으로 고안하고 수행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멀고 작고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일단의 공국들에게 은덕을 베푸는 우월하고 강력한 문명이라는 맥락에서 여러 세기 동안 발전해온 의식(儀式)상의 복종, 의례적 교환, 공식적 인정의 관점에서 사고했다”(같은 책 7면). 유럽인들에게도 우월의 개념이 있었지만, 유럽의 도시국가간 체제에서 영토권의 틀은 경제적 수탈의 맥락에서 짜여졌다. 따라서 “명의 원정대가 정복할 영토나 독점할 해로를 찾고 있지 않았다”(같은 책 8면)는 것은 인상적이다. 명의 원정대는 쉽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상인들을 위한 독점 이익의 추구”26와 식민지의 유지가 도시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주요 원인들 중의 하나였던 유럽의 경험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27 힘이 비슷한 도시국가들이 경쟁하는 상황을 고려해볼 때, 베네찌아에서 총독(doge) 한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상황을 되돌려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화의 원정을 선도한 영락제(永樂帝)가 죽자, 유학자 관료들은 원정을 끝낼 수 있었다. 1433년에 딱 한번 더 원정이 있었지만, 1435년에 “유학자 관료 체제가 정책을 관장하게 되자, 한세대 만에 (…) 보선(寶船)은 조악해졌고 조선소는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으며 중국인들은 보선을 만드는 방법에 관한 지식을 잃었고, 중국의 개인 선박은 더이상 말라카(Malacca) 해협을 넘어가는 항해를 감행하지 않았다”(Robert Finlay, 앞의 책 12면). 관료들은 상인에 대한 지원을 희생해서 농업부문을 떠받쳤기 때문에 중국에서 상인은 국가가 군사력으로 뒷받침할 만큼 중요하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니덤이 지적한 대로, “중앙 관료집단이 부유한 상인들의 가치체계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중국문명에서는 상업 우위의 사회질서가 결코 생겨날 수 없었다. 자본축적이 있을 수는 있었지만, 항구적으로 생산적인 산업체에서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는 것은 학자 관료들의 지배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다른 어떤 사회행위로서 인식돼 늘 그들의 방해를 받았다. 따라서 중국의 상인 길드는 유럽문명의 도시국가의 상인 길드가 지닌 지위와 권세에 비견할 만한 것을 결코 이루지 못했다.”28
본질적으로, 명의 군사정책은 송과 원의 군사정책과 단절된 것이다. 송은 살아남기 위한 필요성에서, 원은 일본과 자바를 원정할 필요성에서 적극적으로 해상무역을 장려했다. 사실 15세기 중엽에 “명 조정의 지주-관료 당파는 군사행동을 중단시키고 해상활동을 심하게 감축시킬 수 있었다.”29 이렇듯, 몽골을 쫓아낸 뒤 중국은 모든 지역에서 위신을 드높임으로써 상징적으로 전면에 나서기를 바랐다. 일단 이것이 이루어지자 지배 엘리뜨의 견지에서 볼 때 정화의 원정은 예외적이었는데,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중국 남부에서 사람들이 대량으로 빠져나갔을 때도 중국정부는 ‘해외의 중국인’에게 어떤 후원이나 보호도 제공하지 않았으며, 천조(天朝)의 버림받은 신민을 원조하려는 정치적 열망도 없었다. 후원·보호·원조는커녕, 명은 1371년 이후로 바다에서 장사를 하는 사상(私商)을 ‘비적’이나 ‘도둑’이나 ‘해적’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점점 늘어나는 화교의 규모를 줄이려 들었다. 통상을 하려고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가고자 하는 중국인들은 모두 범법자로 간주되었다. 1410년 중국 황실은 자바의 조공 사절에게 중국 이민들을 중국으로 되돌려보내는 데 도와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이런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유럽의 열강들은 어디에서 무역을 하고자 하건간에 자기 나라의 ‘재외 국민들’을 보호했으며, 그들을 대변해 무력개입을 하기 위한 구실로 그들의 고난을 자주 활용했다.
여기서 논리적인 의문은 부와 기술적 위업 면에서 뒤처진, 주위의 부족과 왕국에 대한 팽창정책에서 중국이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명이 1371년 이후로 취한 고립정책 역시 내쫓긴 많은 외국인들에게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경제적 발전의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부가 표준이 되거나 요망되는 행동양식을 규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 상인들에게 해외진출”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래서 중국 상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국가지원을 적절히 후원받는 일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30 배를 만들지 말라는 금지령이 내려졌고 “당국이 수많은 상선을 부쉈다.” 따라서 사영 해상무역은 불법 밀수행위에 의존해야만 했으며, 명의 황제들은 “군함과 병기의 건조를 줄였다. 지방 함대가 줄어듦에 따라 대형 군함이 조악하게 만들어진 소형 평저선으로 차츰차츰 대체되었다.”31 비록 1567년 명나라 정부가 몇몇 민간인 해외사업을 합법화하기 시작했지만, 명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외무역은 여전히 범법행위였고, 해상무역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부의 단속이 해안지역에서 엄하게 실시되었다. 물론 중국의 연안지방이 광활했고, 만사를 통제하며 원활하게 작동하는 동방 전제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상무역 금지령은 실제 시행이 어려웠던 것 같고, 그래서 불법무역은 대규모로 지속되었다. 주된 결론은 중국이 세계와 단절되었다거나 중국과 그 이웃나라 사이의 무역이 극적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배척정책이 a) 정부가 수입과 수출에서 얻었을 수도 있는 많은 세수를 놓치도록 했고, b) 해안지방의 경제에 아주 부정적으로 작용했고, c) 중국 상인과 선원들로 하여금 처벌을 두려워해 본국으로 되돌아오기 어렵게 만들었고, d) 해상무역의 전반적인 규모를 제한했으며, e)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부 지원을 중국 상인들에게서 박탈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무역이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상인들이 15세기 중엽 이후 대체로 자신들의 지정학적 배후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에 국한되고 더이상 말라카 서쪽을 넘어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피어슨은 “중국정부는 견줄 데 없이 효율적인 행정기구를 통제해서 혁신과 경제 변화를 가로막는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32 그의 진술은 어느 정도까지는 맞다. 그러나 중국의 기록이 가리키듯이, 때때로 국가권력은–자주 주장되어온 바대로–과대하기도 했지만, 과소하기도 했다! 유럽의 도시국가들과 대두하고 있던 국민국가들은 가능한 한 더 많은 권력으로 철저히 ‘자신의’ 무역업자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제노바와 베네찌아 같은 도시국가에 “상업과 강제는, 비록 불가분은 아니더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33 포르투갈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오기 전 인도양에서 이루어진 아시아 무역의 평화적 성격은 대체로 그들의 공격적 정책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34 동아시아에서 상인들이 정부 자체의 국가기구를 통제–하거나 국가기구에 큰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먼 안목에서 볼 때 장기적인 효과를 지니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럽에서는 상인들의 통제를 받는 정부가 상업적 제국주의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체제로 가는 길을 닦았다. 반면, 이것이 중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시아인들이 부를 잘 모으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부-루고드가 지적하듯이 “유럽 상인들과는 달리 [중국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데 국가를 이용할 수 없었고, 따라서 고도로 수탈적인 자본주의체제를 중국에 강제로 부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35 왜 중국제국이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대외 해상무역에 관한 관심을 버리고 중국 상인들을 방기했는가를 설명하려면 우리는 상인-기업가의 과두제가 상당한 권력을 휘두른 유럽의 도시국가 체제와 중국 도시들을 비교해야만 한다. 유럽이 중국보다 더 도시화되고 더 상업화되지 않았다는 사실, “아시아 경제와 아시아 내 무역이 유럽의 무역과 유럽의 아시아 침투보다 더 큰 규모로 계속되었다”36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군주를 상대하는 상인-기업가의 정치권력은 사뭇 달랐다. 유럽의 군주가 수행하기를 바란 여하한 주요 군사원정에도 은행가들은 극히 중요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과세대상이 된 ‘그의’ 시민들이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 과세는, 상인-기업가 계급이 상당한 정치권력과 심지어는 군사권력까지 휘두르는 지역 신분제 의회와 국회, 또는 도시동맹의 면밀한 점검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농민봉기가 한 왕조를 뒤엎을 수 있었지만, 상인계급은 황실의 권위는 말할 것도 없고 귀족의 권위에도 도전할 수 없었다. 왜? 중국에서는 유럽과는 달리 상인이 장기적 정치권력을 확보하는 제도적 적소를 만들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부를 보전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결정적인 제도적 적소 하나가 바로 도시국가이다. 덩이 인정하듯이, “유럽에선 상인계급이 도시의 수립에 적극 관여한 데 비해, 중국에서는 권력당국이 도시를 세웠다. 그래서 중국에는 도시국가의 역사가 없다. 이것이 중국이 독립적인 부르주아지 계급을 만들어내지 못한 주요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37
대개 중국의 대도시는 “특히 사법문제와 재정문제에 관련되는 한 제국정부를 대표하는 관리들의 지배를 받았으며,(우리 도시들과는 달리) 대도시는 해방과 자유라는 이념을 구현하지 않았다”(Etienne Balazs, 앞의 책 16면). 송 이후로 중국제국에서 부와 정치권력 및 사회적 지위가 사실상 귀족과 동의어가 된 데 비해, 유럽에서는 상인계급이 귀족에 맞서 군주와 제휴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사실 “중세 유럽의 길드와 달리 중국의 항(行, 길드)은 도시에서 결코 정치적으로 그다지 강하지 않았으며 늘 국가의 통제 아래 있었다”(Laurence Ma, 앞의 책 83면). 그 결과, “중국의 상인길드는 유럽문명에서 도시국가들의 상인길드가 지녔던 지위와 권력에 비견할 만한 것을 결코 이루지 못했다”(Joseph Needham, 앞의 책 197면). 마 케야오는 다음과 같이 상술한다. “서구의 중세도시는 정치적 독립체로 존재하고 활동했기 때문에, 그 시민을 키웠다. 사회집단으로서 자치도시 주민은 중국의 도시 주민이 하지 못한 역할을 했다. (…) 중국의 수공업자와 상인들은 군주에 종속되고 군주의 통제를 받는 약한 계층이었다.”38 중세 중국 도시는 거대했지만,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상인-기업가 부르주아지의 대두를 촉진하지 못했던 것이다.39
명이 몽골인에게서 중국을 마침내 ‘재정복’했을 때, 중국의 중심은 남부(와 남부와 연계된 해상무역)에서 벗어나 다시 북부로 옮아갔다. 결국 존속기간 대부분에 걸쳐 중국의 제국은–유럽의 자잘한 여러 도시국가와는 대조적으로–세수를 대부분 토지세에서 끌어냈으며, 경제는–유럽의 도시국가와는 달리–기본적으로 자립적이었다. 따라서 중국 국가에는 유럽의 정치조직들이 했던 것과는 달리 상인들을 지원할 내재적 필요성이 없었다. 그리고 유목민의 위협이 일단 누그러들자, 상인들은 명 이전에 누려오던 상대적 중요성을 잃었다. 명조와 청조 치하에서 대외무역은 “정치질서에 잠재적 위협”이 되었으며 “중국의 크기와 그 대내무역의 범위를 고려할 때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을 얻어야 할 필요성은 별로 느끼지 않았다.”40 중국 국가가 “대규모 재정과 생산, 상당부분의 대외무역”을 계속 통제한 반면, “전쟁에 내몰린 유럽의 국가체계는 이런 행위를 허용하고, 가능케 하고, 요구해서 평민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따라서 자본주의를 낳았다.”41 중국 상인은 (유럽 상인과 달리) 국가를 통제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국가를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쓸모있는 도구로서보다는 시장에서 성가신 경쟁자로 행동하는 경우가 더 잦았던 제국구조와 맞부딪쳤다.42 더욱이 중국제국의 정치적·군사적 팽창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변경”의 통합으로 “정부는 주변부로부터 자원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로 자원을 돌려야만 했다.”43 유럽의 도시국가와 국민국가의 상업적 전통에서는 그 반대였다. 다른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중국인들이 비중국 지역을 상대로 사회경제적으로 종속화·식민화하거나 수탈전략을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추구하고 수행할 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제국의 자원을 고갈시킨, 그리고 중국을 막심한 파괴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중국의 군사활동을 “정복보다는 방어에 치중”44하도록 만든 끊임없는 전란이다. 이 전란은 유럽에서는 작동하지 않은 두 가지 변수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하나는 거의 항상 중국을 목표로 삼았던 유목민이 일으킨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는 농민봉기였다. 상대적으로 몇차례 되지 않는 유럽의 농민반란에 비해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반란의 목록은 엄청나다. 유럽에서 농민반란이 몇차례 없었다는 것은 서유럽 귀족의 전반적인 취약성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강력한 중국 국가는 중과세에 시달리는 농민들로부터 체계적인 무장반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에 따른 막심한 정치적·군사적 혼란 또한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투쟁에서 상인은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농민봉기가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왕조로부터 천명(天命)이 떠날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에 농민반란을 단순히 억누르기만 하는 것은 물론 현명한 정책이 아니었다. 따라서 농민봉기의 가능성을 없애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중대한 문제여서, 당국은 기근과 사회적 소요를 막기 위해 운하를 만들고 대규모의 식량 교역을 북돋웠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정부관리들이 “상업적 부의 집중을 조장하지 않으면서 교역을 지원했다”(R. Bin Wong, 앞의 책, 1997, 137면)는 점이다. 따라서 “명조 중국의 통치자들은 경제성장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는 점에서 서유럽의 거의 모든 통치자들과 달랐다”45거나 중국에서 국가의 역할은 “경제성장을 실질적으로 자극하고 촉진하는 측면에서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지 않았다”46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역사를 통틀어 시장경제와 경제성장을 위한 중국 국가의 지원은 제국 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원정책은 “시장조작을 통한 부의 집중”47의 인정과 동의어는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중국 국가는 “시장교환의 원칙을 지지했고 독점세력으로부터 구매자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R. Bin Wong, 앞의 책, 1997, 139면). 그럼으로써 중국 국가는 타인을 희생해서 부를 축적하려는 상인들의 욕망을 저지했다.48 유럽에서는 상인들이 타인을 희생해서 부를 축적했다. 중국에서 지배층은 “자본주의사회의 건설과 분리될 수 없는 집중된 부와 그러한 부의 추구 양자가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올 잠재가능성”(R. Bin Wong, 앞의 책, 1997, 146면)에 대항하는 데 성공했다.
4. 결론
20세기 주류 사회과학이 근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기원을 경제과정의 ‘자연스러운 산물’로 여긴다는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비록 경제학자들이 역사에서 경제적 성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 강제와 협잡을 자주 무시해오기는 했지만, 자본주의의 역사적 실상은 다르다. 그리고 부유한 상인계급 즉 도시에 근거지를 둔 부르주아지를 위한 정치권력은 자본주의체제 창출에 한 주요조건이었다.49 유럽에서는 많은 농민들이 12세기 이후 영주에게 고정된 액수를 지불함으로써 영주 직영지에서 하는 부역을 줄이거나 심지어는 없앨 수 있었다.50 이로써 장기적으로 볼 때 영주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훨씬 더 취약해져서 도시에 근거지를 둔 상인계급의 재산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14세기 무렵 “마지못해 부여되었던 입법권과 행정권이 상인엘리뜨의 손에 집중되는” 정치구조가 유럽의 대도시에서 전개되었다.51 궁극적으로 유럽 도시국가의 이런 구조는 유럽대륙 도처에 나타난 ‘전국적인’ 자문협의체(의회)나 신분제 의회에 도시 엘리뜨가 자신의 정치적 대표자를 두게 되는 근간을 창출했다. 이 때문에 장기적으로 볼 때 도시에 기반을 둔 상인 부르주아지의 협상력이 강화되었다. 로진스키가 지적하듯이, 대조적으로 중국의 “정치구조와 사회구조는 자본주의 발전의 편이 아니었다”(Wittold Rodzinski, 앞의 책 162면). 도시 금융가들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의미에서 유럽 귀족의 정치권력을 제한한 것은, 중국의 향신층에 대비되는 유럽귀족의 상대적 궁핍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대제국을 세울 군사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현금이 필요할 때 제후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일반적이고 이로운 일은 자기의 도시나 시민에게서 돈을 꾸는 것이었으며, 도시국가를 관장하는 도시 엘리뜨로부터 재정적·정치적 또는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댓가로 이들에게 특허장과 특전을 주어야만 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볼 때 제후의 정치권력은 약해졌다. 도시 엘리뜨의 지원은 대개의 경우 조건부였다. 온갖 종류의 특권이라는 형태를 띤 훨씬 더 큰 사법상의 자율이 늘어난 세금의 보상물이 되었다. 게다가 도시국가들이 유럽의 기존 세력균형 속에서 결정적인 행위자가 되었기 때문에,(장기에 걸친 봉건제의 쇠퇴로 발생한) 귀족들의 지속적인 소모전은 부르주아지의 권력 증대를 용이하게 했다. 도시국가체계를 관장한 엘리뜨는 귀족들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본축적을 촉진하는 전략을 면밀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13세기와 14세기 내내 유럽 도시와 그 배후 농촌에서 분업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 현상들이 유라시아대륙에서 몽골 지배하의 평화가 이루어진 시대(1250〜1350)에 발생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거래비용과 보호비용이 크게 줄어들어 서유럽의 도시국가를 위한 시장이 전례없이 팽창했으며, 이로써 많은 유럽 도시의 산업에서 노동분업이 증대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14세기경 직물을 생산해서 중동과 동아시아로 수출하는 것은, 서유럽 도시들의 불균등한 무역수지로 인해 금은이 동방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가 사라지는 것을 보충하는 데 극히 중요했다. 다시 말해 직물이 동방으로 수출되지 않았다면, 금은이 동방으로 유출되어 막심한 통화부족이 일어나고 유럽의 집약적인 반복성장이 방해받았으리라는 것이다. 이렇듯, 훨씬 더 많은 동방산 사치품을 얻으려는 욕구가 몽골 지배하의 평화로 촉진되어 식민 수탈, 임금노동자 수탈, 그리고 그로 인한 자연계의 상품화와 지배에 토대를 둔 경제적 ‘자립 성장’이라는 전략을 수행할 유인동기가 도시에 기반을 둔 유럽 상인엘리뜨 사이에서 생겨났다. 국가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동맹으로 본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권력 증대, 그리고 처음에는 지중해, 나중에는 신세계에서 이루어진 식민 정복이라는 재정상의 횡재로 인한 그 다음의 세수 증가, 이 양자의 결합이 왜 서유럽 핵심국가들이 결국은 세계지배를 이룩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준다. 아시아에서도 도시국가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상인들이 아주 막강한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국가간 체제로의 이행을 결코 경험하지 못했다. 사실, 개인이 수행하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는 유럽의 식민사업은 더 평화적인 아시아의 자유시장경제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대두하는 유럽 국민국가 속에서 상인계급은 관료제와 행정기구에서 결정적인 직위를 차지하려는 대망을 품을 수 있었다.52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식민전략과 자본주의적 전략을 지원하는 (중상주의)국가의 힘을 정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이 관행은 중세 도시국가의 정책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53 비록 많은 중국인들이 용감하게 나서서 동남아시아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대무역상이었던 유럽의 해상 상인들과는 달리”(Po-Keung Hui, 앞의 책 28면) 제국국가의 후원을 전혀 받지 못했다.54 만약 유럽 상인들에게 이런 국가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몇몇 주요 무역중심지에서 아시아 무역상들과 연계를 확립했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무역중심지 거래망에 참여했을 것이다.”55 그러나 유럽 상인들은 그들 뒤에 국가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이 상이한 정책은 중국과 서유럽 사이에 존재하는, 바탕이 다른 위계제적 사회구조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이것이 왜 서유럽이 더 못한 성취를 이루고도 자본주의의 요람이 되었는가를 밝혀줄 수 있다.
[柳翰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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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머런즈 역시 산업혁명을 세계를 변혁시킨 분수령으로 여긴다. 그러나 근대성을 산업혁명과 동일하게 보는 강박관념은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불운한 것이다. 산업혁명은 단지 서구가 1800년 이후에 더 빠르고 더 맹렬하게(궁극적으로는 핵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격차를 벌리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모즐리는 산업혁명 이전에 “유럽이 세계무역의 해상로를 통제한 덕분에 전지구적 세력균형이 이미 유럽에 유리하게 급격히 기울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준다(K.P. Moseley, “Caravel and Caravan,” Review 1992년 여름호 538면).↩
- 이 글에서 나는 촛점을 중국과 그외 지역 사이의 교환에 맞춘다. 따라서 자본주의체제의 창출에 국제시장의 획득과 지배가 극히 중요하다는 식으로 유럽과의 비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국지적이거나 지역적인 시장이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상인계급의 등장을 다루려면 최고 수준의 이윤, 즉 원격지 무역망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 Yoshinobu Shiba, “Urbanization and the Developments of Markets in the Lower Yangtze Valley,” J. Haeger, ed., Crisis and Prosperity in Sung China, Tuscon: Univ. of Arizona Press 1975, 39면.↩
- Laurence Ma, Commercial Development and Urban Change in Sung China (960~1279), Ann Arbor: Dept. of Geography, Univ. of Michigan, Michigan Geographical Publication No. 6, 1971, 33면.↩
- Yoshinobu Shiba, Commerce and Society in Sung China, Ann Arbor: Univ. of Michigan, Center for Chinese Studies 1970, 45면.↩
- Etienne Balazs, “Urban Developments,” J. Liu & P. Golas, eds., Change in Sung China: Innovation or Renovation?, Lexington, MA: DC Heath & Co 1969, 19면.↩
- 송조 중국에서 “밀과 보리의 산출량/파종량 비율이 약 10:1이었고 쌀의 경우에는 훨씬 더 양호했던 반면 중세 유럽에서 밀의 전형적인 산출량/파종량 비율이 4:1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Angus Maddison, Chinese Economic Performance in the Long Run, Paris: OECD Centre Studies 1998, 31면). 중국의 농업은 “시종일관 자립적”이었던 반면, 유럽인들은 유럽대륙에서 분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식민화 과정을 거쳐 주변부를 만드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식민화 과정은 처음에는 유럽 내부에서, 나중에는 해외에서 이루어졌다. 더군다나 금은이 동방으로 구조적으로 유출됨(아래의 논의를 보라)으로써 상대적으로 자본이 부족해졌다. 이로써 이율이 자주 높아졌고, 역으로 농업산출에 상당한 제약이 가해졌다.↩
- Yoshinobu Shiba, “Sung Foreign Trade: Its Scope and Organization,” M. Rossabi, ed., China Among Equal: The Middle Kingdom and Its Neighbors, 10th~14th Centuries, Berkeley: Univ. of California Press 1983, 110면.↩
- Paul Smith, Taxing Heaven’s Storehouse, Harvard Univ. Press 1991, 306면.↩
- (유목민의 침입으로)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대량 이주가 일어났기 때문에 “경작지가 한정되어 있던 중국 남부에서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 남동 해안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생계비를 벌기 위해 해상무역에 참여해야만 했다”(Po-Keung Hui, “Overseas Chinese Business Networks: East Asian Economic Development in Historical Perspective,” unpubl. Ph.D. diss., Sociology Dept., Binghamton Univ, NY 1995, 31면).↩
- Jacques Gernet, Daily Life in China on the Eve of the Mongol Invasion (1250~1276), Stanford Univ. Press 1962, 81면.↩
- Jacques Gernet, A History of Chinese Civilization, Cambridge Univ. Press 1982, 321면.↩
- 실트하우어는 15세기 중엽에 한자동맹 전체가 보유한 선박 수가 1000여척이며, 이들의 적재용량은 6만톤이라고 산정한다. 유럽의 도시국가들이 (13세기초 베네찌아의 1000톤짜리 네프nef선과 같은) 대형선박을 만들었던 데 비해, 중국이 만들 수 있는 수많은 군함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어떤 개별 중국 상인들은 대단한 부자였음이 틀림없다. 가장 부유한 무역상들은 외항선을 80척 이상 소유할 수 있었고 이것은 13세기의 유럽과는 견줄 수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Johannes Schildhauer, The Hansa: History and Culture, Leipzig: Edition Leipzig 1985, 150면).↩
- Hugh Clark, “Muslims and Hindus in the Culture and Morphology of Quanzhou from the 10th to the 13th Century,” Journal of World History 1995년 봄호 71면.↩
- E.L. Jones, Growth Recurring: Economic Change in World History, Oxford: Clarendon Press 1988, 109〜10면.↩
- Paul Smith, Taxing Heaven’s Storehouse, Harvard Univ. Press 1991, 27〜28면.↩
- 어떤 유럽 상인들은 몽골인 치하에서 직위를 얻기도 했으며, 다른 유럽인들은 아시아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막대한 이윤을 올렸다.↩
- Thomas Allsen, “The Yuan Dynasty and the Uighurs of Turfan in the 13th Century,” M. Rossabi, ed., China Among Equals: The Middle Kingdom and Its Neighbors, 10th~14th Centuries, Berkeley: Univ. of California Press 1983, 264면.↩
- “몽골 법에 따라, 여행하는 상인들이 잃은 모든 재화에 지역민들이 연대책임을 졌으므로” 외국 상인들은 “지역주민을 등쳐서” 절도나 강도로 인해 입는 경비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Thomas Allsen, “Mongolian Princes and their Merchants Partners,” Asia Major 제2권 2부, 1989, 99면).↩
- Herbert Schurmann, Economic Structure of the Yuan Dynasty, Harvard Univ. Press 1967, 5면.↩
- Wittold Rodzinski, A History of China 제1권, Oxford: Pergamon Press 1979, 184면.↩
- 디 꼬스모는 몽골정부가 “극히 비경제적인 행정기관이 늘어나서 골머리를 앓았으며 (…) 몽골인들이 계속 통치에 산만하고 태만한 태도를 취했다”고 주장한다(Nicola Di Cosmo, “State Formation and Periodization in Inner Asian History,” Journal of World History 1999년 봄호 34면).↩
- Gang Deng, Chinese Maritime Activities and Socioeconomic Consequences, c. 2100 BC~1900 AD, New York: Greenwood 1997, 57면.↩
- 정화의 원정은 “다음 세기에 같은 바다에 유럽인들이 파견할 수 있었던 그 어떤 것도” 단연 능가했다(William McNeill, “World History and the Rise and Fall of the West,” Journal of World History 1998년 가을호 229면). 정화 원정의 중단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인도양에서 결정적인 전략적 위치를 잡는 데 유럽인이 거둔 성공은 중국이 그 바다를 더이상 누비고 다니지 않았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의 퇴장은 유럽의 이득이었다”(William McNeill, The Global Condition, Princeton Univ. Press 1992, 113면). 중국이 물러간 뒤, 포르투갈이 “아시아의 모든 경쟁자들보다 명백한 기술적 우위”를 누렸다(Roderich Ptak, China’s Seaborne Trade with South and Southeast Asia (1200~1750), Brookfield, VT: Variorum Reprints 1999, VII면, 105면).↩
- Robert Finlay, “The Treasure-Ships of Zheng He: Chinese Maritime Imperialism in the Age of Discovery,” Terrae Incognitae, XXIII, 1991, 6면.↩
- Hendrik Spruyt, The Sovereign States and Its Competitors, Princeton Univ. Press 1994, 123면.↩
- 국가입법과 국가폭력을 이용해서 독점을 보장하고 보호하는 것은 가장 큰 이윤이 생기는 행위들 중의 하나인데, 이 점이 가장 빈번하게 간과된다. 유럽인들이 독점을 확립할 수 있었을 때 그들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이것을 성취하는 데 정부의 지원은 결정적이었다.↩
- Joseph Needham, The Grand Titration, London: Allen & Unwin 1969, 197면.↩
- Ronald Findlay, “The Roots of Divergence: Western Economic History in Comparative Perspective,” American Economic Review 1992년 5월호 4면.↩
- Mark Mancall, “The Ch’ing tribute system: An Interpretive Essay,” J. Fairbank, ed., The Chinese World Order, Harvard Univ. Press 1968, 81면.↩
- ChenXiyu, “The Treasure Ship and Cheng Ho’s Expedition to Southeast Asia and the Indian Ocean in the Early 15th Century,” The North Pacific to 1600: Proceedings of the Great Ocean Conferences, Vol. I, Portland, OR: The Oregon Historical Society 1991, 227면.↩
- M.N. Pearson, “Merchants and States,” J. Tracy, ed., The Political Economy of Merchant Empires, Cambridge Univ. Press 1991, 68면.↩
- Philip Curtin, Cross-Cultural Trade in World History, Cambridge Univ. Press 1984, 116면.↩
- 14세기 지중해에서 시작해 19세기 ‘아프리카 쟁탈전’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이 추구한 식민화정책은 본질적으로 같은 과정의 일부였다. 유럽 내부의 경쟁은 희귀자원과 이 자원에 다가가는 주요 전략적 위치에 대한 유럽의 독점적 통제의 지속적인 지리적 팽창을 부채질했던 것이다. 본질적으로, 유럽인들이 인도양에 오기 전에 아시아의 바다는 ‘공해(公海)’라고 불릴 수 있었고, 폭력에 토대를 둔 독점권이 상대적으로 부재했기 때문에 상업상의 연계들은 대부분 “조공무역이라는 호혜적이고 유연한 틀 위에서 이루어졌다”(Ng Chin-keong, “Maritime Frontiers, Territorial Expansion and Hai-fang during the Late Ming and High Ch’ing,” S. Dabringhaus & R. Ptak, eds., China and her Neighbors: Borders, Visions of the Other, Foreign Policy 10th~19th Century, Wiesbaden: Harrasowitz Verlag 1997, 212면).↩
- Janet Abu-Lughod, Before European Hegemony: The World System AD 1250~1350, Oxford Univ. Press 1989, 340면.↩
- Andre Gunder Frank, ReORIENT, Berkeley: Univ. of California Press 1998, 184면.↩
- Gang Deng, The Premodern Chinese Economy: Structural Equilibrium and Capitalist Sterility, London: Routledge 1999, 199면.↩
- Ma Keyao, “A Comparative Study of Chinese and West-European Feudal Institutions,” E. Ruano & M. Burgos, eds., Chronological Section I: 17th International Congress of Historical Sciences, Madrid: Comité International des Sciences Historiques 1992, 66〜67면.↩
- 데이의 표현대로, “상업경제의 확산이–조직화된 시장망을 지녔지만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는 지니지 못했던 나라인–중국의 예가 입증하듯이 자본주의의 대두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John Day, Money & Finance in the Age of Merchant Capitalism, Oxford: Blackwell 1999, 113〜14면).↩
- Victor Lippit, The Economic Development of China, Armonk, NY: Sharpe 1987, 43면.↩
- Robert Marks, Tigers, Rice, Silk, and Silt, Cambridge Univ. Press 1997, 12면.↩
- 몽골 지배하의 평화가 무너질 때, 유럽 상인들은 동방으로 가는 진입로를 확보하고 동방을 정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이용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대조적으로, 해상무역을 불법화한 이래 명 치하의 중국 국가는 상인들에게 비용을 늘렸고, 중국 무역상들은 “최소한의 뇌물 없이는 견뎌낼 수가 없었다”(Roderich Ptak, “Merchants and Maximization: Notes on Chinese and Portuguese Entrepreneurship in Maritime Asia, c. 1350~1600,” in K.A. Sprengard & R. Ptak, eds., Maritime Asia: Profit Maximisation, Ethics and Trade Structure, c. 1300~1800, Wiesbaden: Harrasowitz Verlag 1994, 41면). 이것은 “원격지 무역에서 가장 큰 비용이 수송과 보호에 들어가는 비용이었”기 때문에 중요하다(T. Allsen, 앞의 책, 1989, 97면). 게다가 “믿을 만한 상법과 재판의 공정성이 없어서 상인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위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Pin-Tsun Chang, “Smuggling as an Engine of Growth: Chinese Maritime Trade, 1450~1550,” The North Pacific to 1600: Proceedings of the Great Ocean Conferences 제1권, Portland, OR: The Oregon Historical Society 1994, 66면). 이것 또한 유럽의 실상과 대조를 이룬다.↩
- R. Bin Wong, China Transformed: Historical Change and the Limits of European Experience, Ithaca, NY: Cornell Univ. Press 1997, 148면.↩
- Graeme Snooks, The Dynamic Society: Exploring the Sources of Global Change, London: Routledge 1996, 320면.↩
- Richard Bonney, “Introduction,” R. Bonney, ed., Economic Systems and State Finance, Oxford: European Science Foundation & Oxford Univ. Press 1995, 3면.↩
- Peer Vries, “Are Coal and Colonies Really Crucial? Kenneth Pomeranz and the Great Divergence,” Journal of World History 2001년 가을호 418면.↩
- R. Bin Wong, “The Political Economy of Agrarian Empire and its Modern Legacy,” T. Brook & G. Blue, eds., China and Historical Capitalism, Cambridge Univ. Press 1999, 225면.↩
- 중국에서는 귀족이 늘 상인엘리뜨보다 더 강력했으며, 이것은 상인들이 사회에서 대접받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 국가에서는 “상인이 부유해지는 것은 농민의 복지와 정부의 세수를 희생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Gang Deng, 앞의 책, 1999, 96면).↩
-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중국 자본가들’의 존재가 반드시 탄탄한 자본주의체제의 성공적인 창출을 뜻하지는 않는다.↩
- 중국에서는 “실질 지대가 농작물 수확의 절대량보다는 백분율로 계산되었고, 이는 생산 증대로 이어지기 어려운 조건”(H. Schurmann, 앞의 책 26면)이었기 때문에 상황이 반대였다. 게다가, 중국의 (논벼) 농업생산성이 밭작물(dry grain)을 생산하는 유럽보다 훨씬 더 높았기 때문에, 백분율로 산정되는 실질 지대는 중국에서 더 높은 수준의 잉여 추출과 동시에 발생한 듯하다. 이것은 중국 국가가 유럽과는 달리 해외무역과 정복에서 나오는 세수를 추구하지 않은 또다른 이유일지도 모른다.↩
- Richard Holt & Gervase Rosser, “Introduction: The English Town in the Middle Ages,” R. Holt & G. Rosser, eds., The English Medieval Town, New York: Longman 1990, 8면.↩
- 동아시아에서는 귀족이 관직·직분·연금으로 사실상 국가구조에 통합되었지만,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자본주의국가들의 권력구조에 융합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도시 상인들이었다.↩
- 15세기에 영국의 국왕 헨리 7세는 존 캐벗(John Cabot)에게 그가 해외에서 마주치게 될 땅을 모두 “발견하고 탐험하고 정복하고 점령해서 소유물로 삼으라”는 조언을 했다(Michel Mollat, “L’Europe et l’Océan au Moyen Âge,” M. Balard, ed., L’Europe et l’Océan au Moyen Âge, Nantes: Société des Historiens Médiévistes de l’Enseignement Supérieur & Cid éditions 1988, 17면). 이것은 정화가 영락제에게서 받은 사명과는 전혀 달랐다.↩
- 그렇기는 하지만 중국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만약 동아시아에서 사태가 달리 벌어졌다면 “유럽은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의 주변부가 되었을”(John Fitzpatrick, “The Middle Kingdom, the Middle Sea, and the Geographical Pivotof History,” Review 1992년 여름호 513면)지언정 자본주의체제의 일부는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 Dietmar Rothermund, “Asian Emporia and European Bridgeheads,” R. Ptak & D. Rothermund, eds., Emporia, Commodities, and Entrepreneurs in Asian Maritime Trade c. 1400~1750, Stuttgart: Franz Steiner Verlag 1991,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