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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전성호 田成浩
1951년 경남 양산 출생. 2001년 『시평』으로 등단. antony100@hanmail.net
물별을 따라서
오대산 계곡
물은 물별로 태어난다
햇빛을 받고 물속에서 부는 바람
너는 세상 바람개비로 나와
물살에 소금쟁이처럼 회돌다
바람으로 사라지는 날개
언제부터
뿔뿔이 흩어져 이곳에 와 있는가
저 물별을 데리고 가는 바람 바라보면
나도 물별로 태어나고 싶다
잃어버린 시간 기억하지 않는
물별같이 제 그림자를 동반하고
나는 아이들 같은 물별을 따라간다.
✽ 흐르는 계곡물이 작은 웅덩이를 거쳐 회돌아나갈 때 수면에 생기는 볼우물 같은 별 모양의 물무늬를 물별이라고 한다. 햇빛이 비칠 때 물별은 하상(河床)에 자신의 원형 그림자를 데리고 흘러간다.
사할린 까마귀 1
뙈기밭둑에 누가 전화기를 버렸나.
누구도 사할린 섬을 모른다고 말한다.
도로변을 지키고 선 베료쟈 나무들께서도
입을 다물었다 오래된 일본식 지붕도.
나도 침묵해야 하는가.
이곳의 모든 것은 느리게 흐르며 빨리 늙고
북동풍은 남서로 낮게 엎드린다.
무서운 것은 떠나는 것들의 잔영.
석탄가루를 덮어주는 눈발과
눈의 결정들을 물고 있는 따순 햇빛들의 먼 땅.
조합으로 찾을 수 없는
다꽝씨의 숫자판 검정 전화기, 열자리 숫자
새된 소리를 돌리고 싶지만.
높은 구름은, 뙈기밭둑 풀대를 내려다보며
바람의 반대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도 하나의 그림자처럼 오래 서 있다.
12월, 우포늪에서
얼음빛에 고방오리들이 귀엽다
눈감아 귀 열면
보이지 않던 철새들의 또다른 행로가 보인다
날개 가진 것들은 쇠잔한 몸 의지하며
종착지에 다다르고, 서쪽 하늘
가물가물 떠나는 자들 누구인가
저 아름다운 여운 속엔
시린 가슴 견디고 있을 뿐
먼산도 구름도 얼어붙은 늪가에서
소주 한잔 쭉 들이켜면
가슴 갈피마다 타올랐던 불꽃 새삼스럽다
역광의 물오리 한 마리
수없이 퇴적되어온 햇살과 빗물의 수렁 헤치고
쪼르르 얼음판에 미끄러지는 발걸음이 뜨겁다
산다는 건 저렇게 휴식조차 잊은 물그림자 밖인데
가벼운 발걸음 보폭마다 별이 뜬다
언 우포가 자신을 끌어당길 때
제 몸이 쓰린 것처럼
모든 길 걸어온 내 뒷모습은 구름에 실려
산그늘과 함께 수면을 건너간다
저물어오는 둑가
꽃대도, 구름도 엇누울 무렵
늪은 쓸쓸한 새를 품고 한 세상을 뛰어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