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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국민문학의 반어법, 재일문학의 ‘기원’
김달수의 소설을 중심으로
박광현 朴光賢
안동대 강사. 주요논문으로는 「경성제대 ‘조선어학조선문학’ 강좌 연구」 「식민지 조선에 대한 ‘국문학’의 이식과 高木市之助」 등이 있음. park-kh2000@hanmail.net
1. 서론: 디아스포라의 ‘귀환’
“김 선생” 하고 엄숙하게 나를 불렀다.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게 도대체 뭘까?”
“그런 걸 어찌 알아”라며 나는 화난 듯 걸어갔다.
“알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지금 당신이 울었다는 거야.”1
김달수(金達壽)의 소설 「쯔시마까지(對馬まで)」(1975)의 마지막에 나오는 대화 장면이다.‘현해탄’ 너머의 부산으로 ‘귀환’하지 못한 두 ‘재일(在日)’ 조선인(한국인)이 눈물을 흘리며 대마도(쯔시마 섬)에 서 있는데, 이는 바로 망향의 아픔을 안고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더이상 다가서지 못하는 김달수(문학)의 위치이다.
한 일본 평론가의 지적처럼 일본의 전후(戰後)문학은 ‘귀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2 귀환은 ‘외지〓식민지’에서 일본열도로의 ‘내국인’의 신체적 인양(引揚)뿐만 아니라, 새로운 국민적 장소로의 정신적 귀환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일본의 전후문학에는 김달수에서 시작된, ‘귀환’을 성취하지 못한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일본어 문학 즉 ‘재일문학’이 엄연히 존재한다. 김달수 문학은 귀환할 수 없는, 혹은 귀환하지 못한 데서 시작한다.‘귀환’은 소설 「대한민국에서 온 남자」(1949)나 『밀항자』(1958~63)에서처럼 정신적 도항(渡航)과도 같은 밀항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런 김달수가 역사학 잡지 『삼천리(三千里)』의 편집진과 함께 1981년 3월 20일에 고국땅을 밟는다. 그들의 방한은 ‘재일교포 수형자에 대한 관용을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의 각 신문은 그들의 방문을 ‘재일 좌경 「삼천리」지 편집진 4명, 김달수씨 등 40년 만에 귀국’(『동아일보』 1981년 3월 20일자)이라는 머릿기사로 일제히 보도하였다.8일간의 체류일정 동안 당시 언론들은 그들 ‘재일’ 역사학자가 밝히는 ‘일본 속의 한국·한국문화’라는 주제에 관심을 보였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좌담회에서 강재언은 당시 모국방문의 최대성과로 “고난을 이기는 민족의 슬기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으로 꼽았고, 김달수는 자신의 조국에 관한 정보가 일본의 매체들에 의해 편향, 왜곡되었다고 고백(?)했다.3
그리고 몇년의 시간이 흘러 당시 일본에서 9권이나 출간된 『일본 속의 조선문화(日本の中の朝鮮文化)』(이후 전12권까지 출간)를 다이제스트한 『일본 속의 한국문화』가 조선일보사에서 출간되었다.4 1981년의 방한 이후 한국에 처음 소개된 그의 글이 ‘일본 속의 조선문화’라는 점은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어디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1980년에 『전집』(전7권)을 출간한 소설가로서보다는, 역사학자 특히 ‘일본 속의 한국문화’ 연구자로 소개된 것이다.1988년에 장편 『태백산맥』 상·하(연구사), 그 이듬해에 소설집 『박달의 재판』(연구사)과 『현해탄』(동광출판사)이 각각 번역된 이후에야 소설가로서의 그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월북작가’의 해금과 함께 그 작가들의 작품이 출판 붐을 이루던 1980년대 말의 문학계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민족·민중문학 진영이 그의 문학을 ‘해금작가’의 문학과 동일한 선상에서 다루기 시작하면서 김달수는 분단조국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한 ‘민중과 민중문학에 대하여 하나의 예술적 모범’5을 제시한 작가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한민족 공동체론’(혹은 네트워크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서 그의 문학은 ‘해외동포문학’ 혹은 ‘재외한국인문학’의 범주에서 재일문학의 ‘기원’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편 1990년대는 김달수가 생애의 후반부에 진력해온 ‘일본 속의 한국문화’라는 테마가 다시금 한국의 독자에게 다가온 시기이기도 했다. 번역된 그의 소설들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던 반면, 오문영·김일행 편역의 『일본열도에 흐르는 한국혼』(동아일보사 1993년)과 배석주 번역의 『일본 속의 한국문화 유적을 찾아서』(전3권, 대원사 1995~1999) 등이 차례로 출간된 것이다.
그렇게 김달수는 한국사회로 ‘귀환’되어 왔다. 그러나 김달수의 일본어 원작과 번역본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차가 존재한다.6 홍기삼(洪起三)은 재일문학을 다루면서 ‘재일’작가들에게서 보이는 “텍스트로서 과거와 그들의 실제적 삶이 선택한 현재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7함을 지적한 바 있다. 특히 김달수의 문학에서 ‘재일’이라는 현재의 장소는 과거라는 시간의 구속과 자유 사이에서 갈등을 되풀이하는 곳이다.
2. ‘복원〓귀환’으로서의 ‘전후’
1980년대 일본의 포스트모던적 실천은 주체와 장소의 동일성보다는 장소의 제약을 넘어서는 것이 인간의 자유라는 기본적인 사고에 충실하였는데, 이는 일본문화의 중심기제로 여겨지던 많은 것들을 동요시켰다.8 그런 움직임에 대한 반작용으로 주체와 장소 사이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1990년대 신민족주의의 대두는 주체의 위기를 의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주체의 위기론에 대한 대항담론으로써 재일문학의 성격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일본사회의 다문화주의, 탈식민주의, 크리올(creole, 혼성)주의의 가능성을 진단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더불어 한일 양국 모두가 재일문학의 국적에 관한 오래 묵은 논의를 거두고 그것이 탈근대 경험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며 양국의 국민문학론에 대한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기 시작했다.
카와무라 미나또(川村湊)는,“단순히 민족적 소수자의 ‘특수’한 문학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일본근대문학’이라는 환상의 문학사를 상대화하는 거의 유일한 계기로 재일문학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누가’ ‘어떤 언어로’ ‘무엇을’이라는 세 가지 문제범주에서 재일문학을 규정하고 “재일 조선인의 놓여진 주체적 혹은 사회적 상황과의 관계”를 재일문학 성립의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9 그러나 그의 논의는 ‘재일’ 자체를 전후(戰後)라는 시간과 일본이라는 장소에 종속시키려는 오류를 보이고 있다. 최근의 저서에서 그는 “그것(장르의 고정화·경직화를 파괴하는 것―인용자)은 이미 ‘재일조선인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모든 ‘재일’하는 자들에 의한 ‘일본어’ 문학 중의 하나라고 보아야”10한다고 주장하는데, 거기에는 ‘전후(문학)’가 끝났다고 일찍이 선언하고 싶은 초조함과 조급함이 배어 있다. ‘재일’이란 말에는 이미 어떤 형태로든 식민주의 기억을 통해 주체와 장소의 긴장관계가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1945년 8월 해방부터 이듬해 ‘10월봉기’까지를 다룬 『태백산맥』에서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기자로 취직되어 일본에서 역이민(逆移民)해온 서경태가 자신을 비롯한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인을 ‘국경을 잃어버린 사람’(상권 191면)이라고 규정했듯이, 민족해방은 이산의 역사를 접고 ‘국경’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 소설이 서경태와 그의 아내 김분녀가 미점령군의 비상경계령 속에서 서울 한복판을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맺음을 한 것은 ‘국경’을 찾아 방황하는 민족의 현재성을 형상화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 현재성은 주체와 장소가 일치하지 않는, ‘재일’이라는 ‘이산적 정체성’11을 의미하는 것이다.
『태백산맥』에서는 ‘일본에서 온 반편’ 혹은 ‘반일본인’이라는 서경태의 삶을 통해 ‘재일’을 규정한다. 기자의 신분으로 해방을 맞이했지만 조선어로는 기사를 쓰지 못하던 서경태라는 존재는 식민지 역사가 해방 후에도 지배함을 표상한다. 이는 과거에 대한 강한 구속력으로 표현된다. “조선, 이 조국은 내게 이제까지 고통과 굴욕밖에 주지 않았어”(상권 94면)라는 그의 절망은 오히려 조국에 대한 동경과 욕망을 더욱 깊게 만든다. 그는 자신에게 ‘고통과 굴욕’만을 주었을지라도 조국을 떠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재일 조선인(한국인)으로서 과거에 구속된 김달수 자신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 주체와 장소가 일치하는, 조국에 남은 서경태의 삶과, 균열 속 ‘재일’의 삶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런 차이는 작가 김달수라는 ‘재일’ 지식인이 안고 있는 딜레마이자 그가 서 있는 위치이다. 그런 위치에서 태어난 『태백산맥』이 ‘민중과 민중문학에 대하여 하나의 예술적 모범’으로 우리에게 번역·소개된 것은 번역자의 말대로 1980년대에 맞이한 민중민족운동의 절정기라는 사회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번역은 읽기의 연장이고 필연적으로 두 언어의 차이를 넘나들며 행해지게 마련이다. 궁극적으로 번역자는 번역될 텍스트와 번역된 텍스트 사이의 차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텍스트에 존재하는 시간차는 정치성의 차이를 동반하기 일쑤이고, 이는 자주 원작에 대한 오독을 낳곤 한다. 유희석(柳熙錫)은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작품을 다루면서 그들의 이질적 근대체험과 함께,“식민지근대라는 한반도의 ‘현재적 과거’가 독서과정에서 끊임없이 환기”됨을 지적한다.12 이는 비평의 차원은 물론이고 일차적인 번역단계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김달수 소설의 번역자들은 작품에서 진정 의미있는 ‘재일’의 위치를 오히려 작품상의 한계로 설명하려 든다. 이를테면 작가의식의 한계를 ‘일본에 거주하는 교포작가라는 현실적 제약’의 결과나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진’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박달의 재판』), 작품에 드러나는 리얼리티의 부족이 ‘재일동포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주의적 거리’(『현해탄』) 때문이라 지적하기도 한다. 일본어 원작이 주체와 장소가 동일하지 않은 존재인 ‘재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면, 번역본은 역으로 주체와 장소를 동일화하는 민족주의 담론 안으로 작품을 회수해 오독을 초래한다. 그 위에 1990년대 들어서 ‘민족문학으로 다룰 만한 가치’를 찾아 ‘민족문학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하는 방향13에서 주로 논의되어온 재일문학 연구는 최근 ‘해외한국인문학 조사사업추진위원회’가 ‘한국문학의 외연확장’이라는 사업목표로 재일문학 안에서 “우리문학으로 편입시켜야 할 성질”14을 모색하거나 세대론의 입장에서 각 세대를 관통하는 민족적 정체성의 변화과정을 규명하려는 태도15로 이어져왔다. 최근 최원식(崔元植)은 당면과제로 한국문학과 해외동포문학의 차이를 인정하고 “한국문학은 해외동포문학을 거울로 민족주의적 함몰을 해독하고, 또 후자는 전자를 거울로 탈민족주의적 탈주를 돌아보는 상호균형”16을 강조하였다. 그의 지적은 일국적 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동아시아론과 ‘한민족공동체론’의 성과를 통해 발의된 양자의 상호균형론이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의 필요성에 관한 논의가 이제 시작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아꾸따가와상이나 나오끼상 등을 수상하며 일본문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유미리(柳美里), 현월(玄月), 카네시로 카즈끼(金城一紀) 등은 거류민단과 조총련은 물론이고, 선배 세대가 문학투쟁의 장으로 삼았던 『민주조선』 『삼천리』 『민도(民濤)』 등과 같은 문학·역사잡지와 거의 관계없이 출발하고 있다. 일면 고립되어 보이지만, 작품의 주제나 소재 면에서 상당한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는 그들은 민족적 주체의 문제에서 이전보다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 그러면서 일본문학이라는 이념적 틀의 구속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것을 재구축하려는 역동적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문화공동체론’ 같은 담론이 내포하기 쉬운 환원론적인 민족주의를 경계한다. 그들이 겪는 디아스포라는 나리따 류우이찌(成田龍一)가 정리한 것처럼, 기원이 되는 토지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나 그 토지와 정신적으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기억’이라는 시간적 요소가 개재하고 있는 상태–존재를 의미한다.17 그들은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고향〓고국’에 구속받으면서 ‘고향〓고국’에 대해 비동일화된 위치를 유지하려 한다. 그런 그들에게 공동체라는 장소를 제공하려는 선의(?)는 오히려 위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들에 대한 지적·문학적 탐구는 한반도에 있는 우리들 스스로가 장소의 구속에서 더욱 자유로운 자세, 즉 국민국가의 경험과는 다른 체험계를 상상하는 방향에서 접근해가야 할 것이다.
나오끼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에 소개된 카네시로 카즈끼는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재일(조선인)’이라 밝혔고, 자전적 소설인 『GO』에서는 국적을 ‘임대계약서’ 정도로 치부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국경을 없애버리겠’18다고 말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있다. 민족의 현재성을 ‘재일’이라는 위치를 통해 보여준 김달수의 『태백산맥』에서 주인공 서경태가 민족의 울타리, 즉 ‘국경’을 찾아 방황했음을 상기하면 두 소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두 소설 모두 ‘국경’을 갖고 있지 않은 ‘재일’의 이산적 정체성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카네시로가 스스로 ‘재일’임을 확인하는 절차는 ‘너희들〓일본인’이 ‘내’가 무서워 ‘재일 한국인’이라고 이름붙인 것을 통해서이다. 그럼으로써 ‘정체성의 무정체성화(無正體性化)’19를 보여주는 주인공 스기하라(杉原)처럼 ‘너희들〓일본인’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도발적 위치에 서 있고자 한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간 체제’를 인정하고 나면 천진하고 도발적으로 보이는 이것은 단지 카네시로의 특수성으로 간주될 문제는 아니다. 현실에 대해 천진하고 도발적인 점이야말로 ‘재일’의 위치나 그들의 문학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에네르기가 아닐까.
김달수와 같은 세대로서 일본어를 일본인을 향해 ‘최대의 무기’로 구사하고 싶다던 김시종(金時鐘)은 제3세대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세대의 모국어와의 격리, 이것은 그 자체로 고유의 민족문화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심각한 재일 조선인의 문제이지만, 반면 그것으로 인해서 열리게 될 미지의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재일 창조의 한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20
3. ‘재일’하는 자의 선택
자이니찌스루(在日する, 재일하다), 이 낯선 말은 1980년대 이후 재일 한국인(조선인) 사이에서 사용되어온 말이다. 한국어로 번역해놓고 나면 문법적으로 어색해 보이는 이 말에서 ‘자이니찌’21란 전후에 만들어진 신조어로서 일반적으로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지칭한다. 이 말은 기존의 피동적인 ‘재일’의 의미에서 벗어나 변화가능한 정체성과 그 실천의 차원에서 사용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기정사실화된 국적이 아닌 “가정적(假定)적인 삶”22을 영위하는 존재로서의 ‘재일’은 그런 면에서 능동적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모어(〓현실)와 모국어(〓동경)의 갈등은 ‘재일한다’는 말의 능동성을 창조한다. 주체인식과 사회적 환경변화에 따라 ‘재일한다’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현실처럼 ‘재일’은 결국 본질적이기보다 가변적이다. 김달수의 말처럼 ‘일본인에게 지배당하는 식민지인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던’ 식민지 민중으로서의 과거가 이미 체화된, 흔히 1세대라고 불리는 ‘재일’ 문학인들이 ‘재일’ 창조의 과제를 언급하는 전향적인 태도는 재일문학(론) 자체를 새롭게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은 아닐까.
『태백산맥』은 미군정기를 배경으로 서경태와 백성오, 그리고 이승원이라는 세 인물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서경태는 조국을 향한 정신적 밀항을 하는 자전적인 인물이다.‘조국’이라는 명분을 좇아 행동하는 서경태가 조국에서 겪는 삶의 역경은 작가가 왜 지금 일본에 살아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반면 지주의 아들이며 낭만적 좌파인 이상주의자 백성오를 통해서 작가는 운동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고등경찰 출신으로 해방 후 미군정의 하수인이 된 이승원과 그 주변을 통해서는 당시 매판적 지배세력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공산주의자나 좌파 인물의 긍정성을 극도로 강조하여 전형화하는 편향을 보이면서도동시에 우파 애국주의자인 소박한 청년 김상녕을 등장시켜 북조선의 과도한 소련 경사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는다. 심지어 작가는 고등경찰로서 일제에 부역한 이승원마저 외세권력에 의해 일할 기회를 제공받은 인물로 설정한다. “‘조국’이라든가 ‘우리나라’라는 말조차 잃어버린 채 살아온 식민지인”(하권 46면)이었던 그지만, ‘조국’ 혹은 ‘민족’이 해방 후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그런 감정’을 초월해 존재함을 각인시킨 계기가 된다. 그렇게 ‘조국을 위하여’라는 명분의 다층위성을 드러내면서, 이 소설은 사상적 지향보다도 더 본원적인 곳에 존재하는 조선성의 회복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소설에서는 조선성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그 하나는 ‘진짜 조선인다움’(상권 282면)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조선―인용자) 땅에서 생을 부여받은 인간’(상권 285면)의 문제이다. 식민지 본국에서 역(逆)이민해온 자칭 ‘반(半)일본인’ 서경태가 조선인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해가는 과정에서 그 두 가지 문제는 풀려간다.
전자는 ‘재일’이라는 주체의 불충분함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진정한 ‘조선인다움’이란 서경태가 백성오의 제안으로 ‘민족열사조사소’의 일을 도맡아하면서, ‘고통에 가득 찬 조선의 피어린 저항의 역사’를 알고 난 후 ‘조선인으로서의 자신감’을 통해 획득된 것이다.‘다시 태어난 듯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민족열사조사소’ 사업은 김달수 자신이 일본어를 ‘최대의 무기’로 구사하여 작품활동을 하는 것에 비유된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일본인에게 전달하는 조선성, 그것은 식민주의로 인해 상처입은 인간성의 회복, 즉 ‘인간화’의 맥락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창작목표는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구체적으로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가 그렇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해 그 관계를 ‘인간화’하는 것이었다.23
그것을 위해서 김달수는 우선 ‘진짜 조선인다움’을 복원하고 드러내는 데 노력을 경주한다. 결국 그런 자기(‘우리’)의 복원은 “우리로서는 ‘선’(38선―인용자)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상권 80~81면)라는 자조 섞인 ‘우리’ 안의 분열에 대한 투쟁에서 출발한다. 물론 이는 ‘재일’이라는 위치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는 과거 식민지 본국인 일본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위치가 바로 분열을 강제하는 외세와 싸우는 장소라 믿었던 것이다.
8·15 해방 직후 비워진 혹은 감춰진 조국의 진정성을 채우고 드러내기 위해 서경태가 민족해방의 실천사업의 하나로 심혈을 기울인 ‘민족열사조사소’도 그런 인식에서 설정된 것이다. 미군정의 공안당국이 이 조사소를 탄압한다는 스토리는 조국과 비귀속(〓무국적)의 ‘재일’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이 조사소에 대한 분단권력의 탄압은 조국의 진정성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또한 그 권력이 일제의 연장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비귀속의 존재로서 ‘재일〓자기’는 정당화되고, 또 그 위치로부터 발굴된 조선성은 조국의 분단에 대한 강한 비판일 수 있다. 후자는 ‘재일’이라는 장소가 갖는 결여성에서 비롯된, 조국에 대한 강한 본원적 귀속의식을 의미한다. 자신의 생을 부여해준 장소로서 조국은 동물의 귀소와는 다른 의식적인 자리이다.‘텍스트로서 과거와 그(들)의 실제적 삶이 선택한 현재 사이의 차이’가 만들어낸 의식적 자리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존재하는 장소와 의식(적 동경)의 장소가 불일치함은 더욱더 본원적인 장소를 지향하게 한다. 그곳은 지금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나, 과거에 있었고 또 미래에 있을 자기 복원과 귀일의 장소이다. 특히 식민지 종주국의 피차별 소수자(minority)이자 디아스포라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이중적 고통에,1945년 8월 15일 이후 “장차 조선민족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겨줄 운명적인 선”(상권 80면)이 내면화된 ‘재일’의 현재적 삶은, 그만큼 ‘텍스트로서 과거’에 집착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 복원에 대한 절실함의 표현인 것이다. 또 그 과거는 자기 복원의 장소를 찾기 위한 오늘의 투쟁을 추동하는 모든 것이다.
『현해탄』에 씌어진 것과 같은 생활과 저항, 그것은 지금 또한 조금도 변한 것 없이 계속되고 있다. 적어도 오늘의 그 싸움의 원인은 여기에 그려진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다.(「講談社文庫版へのあとがき」, 『玄海灘』 1974; 『全集』 6권 336면)
「박달의 재판」에서 작가는 형무소를 의식화의 장으로 삼고 자진해 드나들다시피 하는 주인공 박달을 통해 조선민중의 삶과 저항을 해학적으로 그린다. 거기서 형무소는 암담한 조국의 현실을 표상한다. 형무소는 미군 점령하에 들어간 조국(형무소가 있는 K시)이 일제 식민지 역사의 연장선에 있음을 환기시킨다.
여기는 옛날 그 형무소를 가지고 온 일본인들이 살던 곳으로 속칭 일본인 거리(町)로 불리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 관아의 주인인 대한민국의 관료와 지주들, 그리고는 아메리카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이다.(「朴達の裁判」, 『全集』 6권 8면, 강조는 인용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특히 경찰서 안에서는 이들 정치·사상범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자(박달―인용자)는 수감해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거의 상대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경찰도 검찰도 바빴다.(같은 책 20면, 강조는 인용자)
이렇듯, 작가는 ‘지금’이라는 ‘귀환’하지 못한 ‘재일’의 시간을 통해 상상 속 현재의 조국과 경험 속 과거의 조국을 동일화시킨다. 그리고 이미 떠나온 조국의 과거와 현재, 조국에 대한 배반감과 동경, 현실의 ‘나’와 민족으로서의 ‘우리’를 동일화하는 통로는 바로 그 ‘재일’의 시간에서 떠나는 정신적 ‘밀항’이다. 그런 정신적 ‘밀항’은 김달수에게 본원적인 장소인 조국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적으로 혹은 감각적으로 조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자각케 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 거리를 확인하는 순간, ‘재일하는 자’로서의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된다.
4. 노스탤지어에서 ‘재일성’으로
『현해탄』에서 서경태는 일본인 애인인 오오이 키미꼬(大井公子)에게 자신이 조선인임을 고백한다.(『태백산맥』에서는 그것이 회상으로 재현된다.) 그녀는 “조선사람도 이젠 일본사람이니까요”(『현해탄』 129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나는 과연 일본인인가?”(같은 곳)라며, 그녀의 선의(?)를 동정으로 받아들여 괴로워한다. 오히려 그런 동정은 자신과 민족에 대한 모멸이라고 생각한다.1925년 일제 치하에서 그의 부모는 집안이 몰락하자 도일(渡日)하게 된다. 그들은 탄광이나 군수공장 등으로 강제 연행된 사람들과 더불어 ‘재일’1세대의 전형이다. 작가 김달수와 개인적 이력이 대개 일치하는 서경태는 고학으로 N대학을 나와 지방신문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그 고백을 계기로 10여년 동안의 일본생활이 ‘민족’을 잃어버린 ‘반(半)일본인’의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서경태는 “자신을 죽이고 민족까지 죽이면서 지배자인 일본인이 될 수는 없”(상권 285면)다는 생각을 조선에서 “생을 부여받은 인간”(같은 곳)이라는 혈통으로 확인하려 한다.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건너간 서경태는 식민지인으로서 자기를 느끼는 정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일본인과의 사랑이 ‘자신을 죽이고 민족까지 죽이는’ 일이라는 믿음이 분명해져간다. 또 그는 현실의 굴욕을 조국의 먼 과거에서 위안받고자 한다. 그런 의식은 『태백산맥』에서 ‘민족열사조사소’를 둘러싼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사를 통해 민족의 우월성을 확인하려 한다는 설정은, ‘먼 과거’에서 ‘도래인(渡來人)’의 역사를 찾기 위해 작가가 1970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일본 속의 조선문화』 씨리즈의 의도와 일맥상통한다.
『밀항자』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소설이다. 이 작품은 조총련의 ‘귀국운동’(남한에서는 ‘북송’이라 함) 시기에 임영준과 서병식이 북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한 후 5년간 일본에서 생활한 바를 다룬다. 일본에 도착한 즉시 일본당국에 체포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살아가는데, 소설은 그 각각의 삶을 따라간다. 임영준은 수용소를 탈출해 사업하는 고향 동료의 도움으로 대학에 다니며 살다 다시 한국으로의 밀항을 결심하는 데 비해, 서병식은 밀항자 수용소에서 ‘귀국지 선정의 자유’ 투쟁을 통해 북조선으로의 송환을 쟁취하게 된다. 이 작품 4장의 많은 부분은 ‘재일’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임영준은 일본 고대사에 나타난 ‘도래인’의 역사를 통해 고대사 연구자 마쯔끼(松木)와 정신적 연대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일본인 애인 아이까와 케이꼬(相川景子)와도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동일한 인식을 통해 정신적 동질성을 획득하면서 민족의 차이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을 해소하고 있다. 이런 상징들은 이 작품이 임영준과 서병식이 각각 통일을 위한 투쟁장소로 한국과 북조선을 선택한다는 설정과 함께 이 작품의 큰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오다기리 히데오(小田切秀雄)는 김달수가 먼 과거, 특히 고대사로 회귀하는 것을 가리켜, ‘악전고투 속에서 힘겹게 찾아낸 혈로(血路)’24라고 했다. 그 의도야 어쨌든 ‘혈로’라는 말이 사상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길이자, 문화적 혈통주의의 길을 은유한다는 점에서 김달수의 방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고향〓고국’으로의 귀환을 간절히 원한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노스탤지어25를 상기하게 된다. 김달수는 1971년 1월 21일자 『아사히(朝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각지에 산재해 있는 ‘조선의 유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태평양전쟁 직후인 쇼오와(昭和)21,22년(1946,47년)경’인데, 당시 처음으로 나라(奈良)와 쿄오또(京都)를 여행했을 때 본 그곳의 민가 풍경이 마치 조선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후 ‘향수’를 달래기 위해 그곳을 자주 찾았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의 고도(古都)로 알려진 나라와 쿄오또에서 발견한 조선의 풍경은 바로 노스탤지어의 심상인 것이다.
그가 선택한 ‘혈로’는 당시의 한일관계나 민족의 현실을 도외시한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는 전후 일본이 ‘제국’의 역사를 망각하고 단일민족(국민)론을 공식화하는 것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의 의미가 있다. 어쩌면 그는 전후 일본의 배타적 ‘단일민족 신화’에 도전하기 위해 현실 도피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김달수는 차별과 멸시 속에 살아온 ‘재일’의 과거를 ‘도래인’의 역사 속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일본의 역사를 소급하다 보면 전후(戰後) 일본보다 역사적으로 더 근원적인 곳에 ‘재일’이 존재하는데, 거기에서 구해진 자기정체성이야말로 바로 재일성이라는 것이다.26
1980년대는 ‘재일’의 삶이 ‘가정(假定)적인 삶’일 뿐이라는 인식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기였다. 그래서 ‘재일하다’라는 신조어로 표현되는 주체는 민족 정체성에 귀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서 표현되었다. 그런 점에서 김달수의 『태백산맥』은 ‘재일’에 관한 문제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최근 민족문학론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차이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 사이의 통일성을 확보하는 ‘비환원적 통일성의 연대’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27 재일문학에서 ‘우리문학으로 편입시켜야 할 성질’을 찾고자 하는 의도 자체가 이미 그것에 ‘환원적 통일성’을 강요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의도는 식민지 시대에 국가를 상실했을 때도 ‘잠재적 국민문학’은 존재했다는 식의 초역사적인 논리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은 자명하다.28 ‘재일’의 존재적 의미와 그 모순된 삶을 생략한 채, 주체와 장소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절차를 통해 김달수의 문학을 민족문학으로 환원하는 것은 민족담론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계 미국작가들에 대한 논의처럼 적어도 그들의 작품은 대다수 독자들이 ‘번역으로 접하기 마련인 엄연한 외국문학’일 수도 있다.29 그러나 재일문학은 ‘재일’이 ‘가정(假定)적’임을 내세워 삶의 장소에서 이뤄지는 국가주의 담론을 거부하며 전개되어왔다. 스스로를 국민에 귀속되지 않은(시킬 수 없는) 존재라는 자의식에 바탕을 둔 ‘재일’의 삶과 그 존재이유를 다룬 소설은, 국적이 기호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만큼이나 국가주의 담론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그것은 다른 언어권의 동포문학보다 재일문학이 민족문학으로 환원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가능성은 다분히 유전적 특수성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우리 문학계가 재일문학의 수용과정에서 범해온 오류와 한계는 다른 하나의, 아니 서로 다른 『현해탄』과 『태백산맥』, 그리고 「박달의 재판」을 존재케 했던 것이다.
5. 결론을 대신하여
오다기리 히데오가 김달수의 초기작 『후예의 거리(後裔の街)』(1946)를 가리켜 ‘조선민족의 문학인 동시에 일본문학의 하나’30라고 한 것은 작가 김달수와 이 작품이 지닌 경계성을 지적한 말이면서도, 그의 문학적 성격 자체가 두 국민문학 범주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김달수 문학에서 출발한 재일문학이 이미 언어선택이나 작가의 실존적·문학적 정체성 문제에서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김석범(金石範)은, 제1세대 재일 한국인(조선인)에게 있어 ‘재일’의 의미를 ‘부(負)’‘피(被)’ ‘불우(不遇)’의 입장에서 출발하고 그 입장에서만이 주체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한다.31 그런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1세대 재일문학은 전후 일본사회의 계급문제와 연계되어 ‘민주주의문학’이라는 아프리오리적인 전제 위에서 출발하였다.
이제까지 재일문학 연구는 그 안의 (문학)사적인 내적 동인을 통해 고찰되기보다 세대구분론에 치우쳐왔다. 세대구분론은 ‘재일’의 역사에서 드러난 삶의 장소의 가변성(可變性)과 구속성 사이의 균열을 발견하고 세대차를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각 세대가 변화의 내적 동기를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그 양상들이 문학작품에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변화는 남북간의 정치적 관계나 남북 내부의 정치변화, 그리고 한반도와 일본 사이, 혹은 일본사회 내부의 정치사와 같은 사회적·역사적 환경변화와 궤를 같이하여 나타난다. 그래서 ‘재일’ 문학사의 측면에서 1980년대는 중요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윤건차(尹健次)의 말처럼, 그때부터 ‘재일’을 ‘전체’로서 논하는 것이 곤란하게 되었다. 이는 ‘재일’의 중심축으로 여겨지던 민족이라는 이념이 리얼리티를 상실해간 과정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32 모어와 모국어의 갈등에서 비롯된 언어선택 문제를 그것의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그 선택가능성마저 상실되어(모국어를 구사할 수 없어) 그런 갈등이 해소된 세대가 작가로 데뷔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은 자기정체성조차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전 세대의 재일문학에서 보이는 장소의 가변성과 구속성 사이의 균열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가변성과 구속성의 해체로 나타나고 있다. 태어나서 부여된 장소도, ‘뿌리’로서 조국이라는 장소도 그들을 구속하지 못한다. 문학적이든 실존적이든 그 자기정체성에 대한 그들의 선택은 주위로부터 ‘나’를 낯설게 하거나, ‘나’로부터 주위를 낯설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나’나 주위에 대한 이질감은, 민족에 대한 리얼리티의 정도차 즉 세대차를 초월해 나타나며, 이는 재일문학의 출발이며 근거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전후 일본사회의 근대서사에 균열을 초래하였고, 그 서사에 침윤되어 있던 사람들의 자기정체성과 감정표현을 뒤흔들며 이화작용을 초래하는 재일문학의 ‘탈식민주의’적 역동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장소의 이질성(낯섦), 즉 주체와 장소의 비동일성의 측면에서 재일문학이 국민문학 담론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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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對馬まで」, 『金達壽小說全集』(이하 『全集』) 3, 筑摩書房1980년,216면. 이후 인용하는 작품의 본문 면수는 번역이 있는 경우 번역서의 면수를 표기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전집』의 면수로 표기한다.↩
- 川村湊 『戰後文學を問う』, 岩波書店 1995,1면.↩
- 좌담회 「일본 속의 한국·한국문화」, 『신동아』 1981년 5월호,119면.↩
- 조선일보사 ‘신서’ 제1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김달수 자신의 번역인지 편집자의 번역인지 알 수 없으나, 그 후속이 간행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신서’의 기획 자체가 이 책의 간행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 임규찬 「역자 후기」, 김달수 장편 『태백산맥』 상권, 연구사 1988,300면.↩
- 원작의 집필 또는 출판 순서는 다음과 같다. 『玄海灘』(1953), 「朴達の裁判」(1958), 『太白山脈』(1964~1968).↩
- 홍기삼 「재일한국인문학론」, 홍기삼 엮음 『재일한국인문학』, 솔출판사 2001,24면.↩
- 姜尙中 『反ナショナリズム』, 敎育史料出版社 2003,34~35면 참조.↩
- 川村湊, 앞의 책 199면,201~202면.↩
- 川村湊 『生まれたらそこがふるさと』, 平凡社 1999,301면. 이 책의 ‘태어난 그곳이 고향’이라는 타이틀은, ‘재일’ 문인 이정자(李正子)의 단가(短歌)‘태어난 그곳이 고향, 그 아름다운 어휘에 괴로워 덮어버린 그림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 박진영 「이산적 정체성과 한국계 미국작가의 문학」, 『창작과비평』 2004년 봄호.↩
- 유희석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현주소: 민족문학의 현단계 과제와 관련하여」,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 268면.↩
- 이한창 「재일동포문학연구」, 『외국문학』 1994년 여름호 100~101면.↩
- 2003년 10월 26에 열린 ‘해외한국인문학 조사연구사업을 위한 토론회’의 자료집 5면에서 특히 본고에서 다루는 『태백산맥』을 가리켜 그렇게 말하고 있다.↩
- 유숙자 『在日한국인 문학연구』, 月印2001.↩
- 최원식 「민족문학과 디아스포라」, 『창작과비평』 2003년 봄호 39면.↩
- 成田龍一 『「故鄕」という物語』, 吉川弘文館1998,221면.↩
- 카네시로 카즈끼 『GO』(김난주 옮김), 현대문학북스 2000,218면.↩
- 박진영, 앞의 글 300면.↩
- 金時鐘 『‘在日’のはざまで』, 平凡社2001,199면, 강조는 인용자. 김달수는 일찍이 “조선의 모든 것이 1945년 8월 15일을 경계로 해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며, 창조된다라는 점에 ‘조선’의 고통이 있고, 기쁨이 있다”고 하였다.(김달수 「新しい朝鮮の文學運動について」, 『世界文學硏究』 1,1948 참조. 이 글의 말미에는 1948년 11월 25일에 썼다는 기록이 있다.)↩
- 일본에서는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흔히 ‘자이니찌(在日)’라고 통칭한다. 그것은 일본의 패전 이후 무국적 상태에서 국적란에 기호로서 ‘조선’이라고 적었던 사람들이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한국과 ‘북조선’ 사이에서 한국 국적으로 변경한 사람과 ‘조선’을 국적으로 그대로 둔 사람들의 존재를 의미한다. 아직도 적극적으로 기호로서 ‘조선’을 주장하고 무국적자 혹은 망명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 글에서 특별히 ‘한국인’ 혹은 ‘한국인(조선인)’으로 표기하지 않고 ‘조선인’으로 표기한 부분은 위와 같은 그들의 주장을 염두에 둔 것이다.↩
- 김달수는 「後裔の街」(『全集』 4)에서 등장인물을 통해, 조선인을 진정한 예술로 그릴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적어도 진정한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은 한가지 근본적인 이유로 인해 모두 가정적(假定的)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가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72면, 강조는 인용자)라고 밝히고 있다.↩
- 金達壽·姜在彦 공편 『手記=在日朝鮮人』, 龍溪書舍1981,27면.↩
- 小田切秀雄 「孤獨な鬪いのなかから」, 『全集』 6권의 「月報1」(1980.4),2면.↩
- 成田龍一, 앞의 책 173면.↩
- 김달수와 함께 1975년 2월부터 『삼천리』를 창간해 공동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1981년에는 함께 방한한 이진희와 강재언이 공동 집필한 『韓日交流史』(有斐閣1995)의 집필의도와 책의 구성에서는 그런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도래인의 관점에서 일본사를 해체시킨 이 저서는, ‘고대조선과 야요이·고분시대’라는 제목의 제1장에서 시작해 ‘재일을 살다(在日を生きる)’라는 마지막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거기에서 ‘도래사’라는 저서 전반의 관점과 ‘재일을 살다’라는 현재 진행적 관점의 결합은 ‘재일’의 자기정체성을 ‘도래인’ 역사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 김재용 「민족문학론과 주체의 문제」, 『실천문학』 1999 봄호 313면.↩
- 같은 글 300면.↩
- 유희석, 앞의 글 270면.↩
- 小田切秀雄 「この本のこと」, 『全集』 4권 300면. 이 글은 1948년에 朝鮮文藝社에서 『後裔の街』가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을 때 수록된 글이다.↩
- 金石範 『ことばの呪縛』, 筑摩書房 1972,45~48면.↩
- 尹健次 『‘在日’を生きるとは』, 岩波書店1993,240면. 윤건차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1970년대 말부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