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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무 유고시
김영무
■ 편집자 주
1944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김영무(金榮茂) 시인은 1975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이육사론」을 발표, 문학평론가로 등단했으며, 1990년대 초부터 시창작 활동을 시작, 시집 『색동 단풍숲을 노래하라』(1993) 『산은 새소리마저 쌓아두지 않는구나』(1998) 『가상현실』(2001) 등을 출간하였다. 『가상현실』로 제3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시상식을 나흘 앞둔 2001년 11월 26일 지병인 폐암으로 서거했다. 자연의 선(善)순환이 파괴된 현실 속에서 공동체적 지혜의 회복을 모색해오던 시인은 암 투병의 체험을 담은 『가상현실』에서 각고의 고통 속에서도 순정한 시정신을 길어올림으로써 우리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 유고 중 「무지개」는 병문안 간 백낙청 교수에게 김영무 시인이 써서 전달한 것이고 나머지는 병상에서 수첩에 적은 것이다. 이 유고시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사신(死神)의 그림자 속에서 삶과 죽음을 따듯하게 포옹하는 어떤 달관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 세상천지에서 가장 먼 곳
이 세상천지에서 가장 먼 곳
북극도 남극도 아니구나
오팔 보석보다 더 어여쁜 木星도 가깝구나
멋진 테두리에 끈 끼워 목에 걸고 싶은 土星도 오히려 가깝구나
내 몸에서 가장 먼 곳
내 발끝이다
마음이 닿으려 해도 끝내 닿지 못하는 발끝
갑자기 얼어버려 마비된 곳
무감각의 땅 동토대
바다 건너 전설의 섬 이어도 되었느냐
분명 있는데 없는 듯 닿을 길 없구나
잠이 깊구나, 다리여
발이여 잠에서 깨어나라
혼수상태의 잠에서 깨어나라, 너무 외롭지 않으냐
오늘 아침 나뭇잎은 조용하고
오늘 아침 나뭇잎은 조용하고
새들은 분주하다
내일 아침 나뭇잎은 부산하고
새들은 조용할 것이다
내가 일생 동안 떨쳐버린 어둠이
내가 일생 동안 떨쳐버린 어둠이
나를 찾아와 부드럽게 안아주는 이 복된 시간
어둠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어둠을 꿈꾸며, 어둠의 씨앗, 어둠속의 씨앗을 꿈꾸며
컴컴한 자궁 속의 평화를 기억합니다.
눈을 감으니 눈뜨는 어둠
잡초와 싸워본 사람은 알리라
잡초와 싸워본 사람은 알리라
생명력·창조력이 얼마나 악마적인지를
모든 신적인 것은 또한 악마적이다
야곱처럼 이 창조력과 우리는 씨름해야 한다
포르노 인터넷 싸이트, 패스트푸드 체인점
쏟아지는 소비재들 분명히 창조력의 소산이다
의식적으로 生命 편에 서지 않으면 파괴력이 되는 창조력
성체 쪼개지는 소리
소슬한 바람 부는 가을밤
눈 날리는 겨울밤보다 더 고요한 밤
어디선가 나뭇가지 꺾어지는 소리
들리는가 아니면 병자 성사 주는
밤 신부님이 쪼개는 성체소리인가
이 소리 쌓여 죄없는 겨울밤이
다가온다
모든 흔들림에는 섭섭함이 있다
모든 흔들림은 이별의 흔적이다
쌓였던 눈송이
떨어진 직후 나뭇가지의 흔들림
병자 성사 받고 내 마음속
가지 하나 흔들린다
무지개
이땅에 시인 하나 풀꽃으로 피어나
바람결에 놀다 갔다
풀무치 새울음소리 좋아하고
이웃 피붙이 같은 버들치
힘찬 지느러미짓 더욱 좋아했다
찬 이슬 색동보석 맺히는
풀섶 세상
─참 다정도 하다
(2001. 11. 23. 오후 3시 40분
평촌 한림대학 성심병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