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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이라크인의 해방전쟁은 곧 시작될 것이다
로버트 피스크 인터뷰
로버트 피스크 RobertFisk
『인디펜던트』(Independent)의 세계적인 중동 전문기자. 1971~75년에 『더 타임즈』(The Times)의 벨패스트 특파원으로, 1976~87년에는 중동 특파원으로 근무했고 1985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디펜던트』에서 중동을 비롯한 이슬람권 분쟁의 종군취재로 맹활약하고 있음. 북아일랜드 분쟁,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이란혁명, 이란·이라크전쟁,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차 걸프전, 보스니아 전쟁, 팔레스타인 봉기,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을 취재하였고, 영국 국제사면위원회 언론상(1998, 2000)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언론상을 수상함. 저서로는 『돌아갈 수 없는 지점』(The Point of No Return: The Strike Which Broke the British in Ulster, 1975) 『전쟁의 시기』(In Time of War: Ireland, Ulster, and the Price of Neutrality, 1983) 『이 나라를 가엾게 여겨라』(Pity the Nation: The Abduction of Lebanon, 1992) 등이 있음.
에이미 굿먼 Amy Goodman
미국의 언론인이자 인권운동가로서 현재 미국의 독립방송 디마크러씨 나우(Democracy Now)의 팀장.
*이 대담은 2003년 4월 22일 ‘디마크러씨 나우’(Democracy Now)에 방영되었으며 홈페이지(www.democracynow.org)에서 들을 수 있고, 그 스크립트는 Znet(www.zmag.org)에 올라와 있다. 고딕체로 표시한 부분은 피스크가 방송에서 특별히 강조한 대목이다.–옮긴이
굿먼 오늘(2003. 4. 22) 우리는 영국 『인디펜던트』의 특파원 로버트 피스크와 대담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지난 한달간 이라크전을 취재하고 방금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루트로 돌아왔습니다. 로버트, 이라크에서 한달간 종군취재를 하신 소감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피스크 글쎄요, 역사란 반복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불과 5일쯤 전에 나는 나자프 출신의 상당히 전투적인 시아파 이슬람교도를 취재하고 있었는데, 다른 기자 하나가 그에게 “요즈음이 얼마나 역사적인 날들인지 실감합니까?”라고 질문하기에 나는 그에게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걸 실감합니까?”라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그가 나를 돌아보며 “그렇소, 역사가 반복되고 있소”라고 답했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았지요. 그는 1917년 영국의 이라크 침략과 육군중장 스탠리 모드(Stanley Maude)경을 염두에 둔 것이지요. 그때 영국인들이 바그다드에 진격했고 스탠리 모드경이 “우리는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여러 세대의 독재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해방자로서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적힌 포고문을 발표했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3년 동안 우리 영국인은 이라크인과의 게릴라전에서 매년 수백명의 군인을 잃었어요. 이라크인은 우리 영국인의 힘으로 오토만(오스만)제국에서 벗어나는 그런 해방이 아니라 그들의 힘으로 우리한테서 벗어나는 진정한 해방을 원했는데, 난 그와 똑같은 일이 이라크에 들어온 미국인들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해방전쟁이 곧 시작될 것인데, 그건 물론 처음에는 테러리스트들, 알카에다, 사담정권의 잔여세력–‘잔여세력’이란 말을 기억해두세요–등이 벌이는 전쟁으로 언급될 테지만, 그 전쟁은 누구보다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이 우리를 이라크에서 몰아내기 위해 영국과 미국에 대항하여 벌이는 전쟁이 될 것이며, 이런 사태는 분명코 벌어질 겁니다. 이 씨나리오에 따르면 이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우리의 꿈은 이뤄지지 않을 겁니다.
내가 지난 며칠간 쓰고 있던 내용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이런 것이에요. 우리는 이라크 사람의 민족적 유산을 보존하기 원한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떠나기 직전 바그다드에 불타고 있는 정부청사의 수를 세어보니 158개였고, 미 육군과 해병대가 보호하는 정부청사는 이라크의 정보부가 있는 내무부와 석유부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다른 모든 부서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고등교육·컴퓨터과학부조차 불타고 있었어요. 그리고 몇몇 경우에는 미 해병대원들이 근처의 담 위에 올라앉아 청사가 불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나는 컴퓨터과학부에서 해병대 상병 티나하(Tinaha)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사실 내가 그의 약혼녀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안전하게 잘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줬지요.) 그러니까 미국인들은 내무부와 석유부만 지키고, 차기 이라크 정부의 핵심과 기간시설 전체의 파괴를 묵인한 겁니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뻔하지요. 게다가 나는 국립고고학박물관, 오토만제국 및 국가의 문서들이 보존된 국립문서도서관, 그리고 종교부의 꾸란도서관(Koranic Library)에 들어간 최초의 기자 중 하나인데, 이 건물들이 모두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런 문서들에 휘발유를 부어서 3000도의 고열로 모두 태워버린 겁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정말 섬뜩한 아이러니지요–나는 오토만 서고에서 오토만 문서 26쪽을 가까스로 구해낼 수 있었어요. 오토만제국의 군대와 낙타도둑들의 문서와 메카의 후쎄인 지사가 (바그다드의 오토만 통치자인) 알리 파샤(Ali Pasha)에게 보낸 편지인데, 내가 요르단 국경에 도착하자 요르단 세관당국이 이 문서들을 탈취하고는 나한테 영수증조차 끊어주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아랍세계도 그렇지만 특히 미국의 바그다드 점령을 매섭게 질타하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요.
꾸란도서관에 불이 난 후에 내가 바그다드의 제3해병대 사단본부로 달려가서 이 거대한 꾸란도서관이 불타고 있으니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없겠느냐고 했지요. 제네바협약에 의해 미 점령군은–어떤 나라의 점령군이든 마찬가지지만 이번 경우는 미군들인데–서류들이랑 각국 대사관을 보호할 도덕적·법적 의무가 있어요. 한 젊은 장교가 무전기를 켜고는 “어떤 성경도서관 같은 곳에 불이 났대”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그 장교에게 정확한 지점들을 표시한 지도를 주고 해병대원들에게 그 지점들에 관한 부대상황까지 일러주었는데, 아무도 거기에 가지 않았으며, 꾸란들이 몽땅 타버린 겁니다. 16, 17세기경의 꾸란들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차기 이라크정부의 핵심과 이라크의 문화적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속셈이 있는 거지요. 지금 미국의 노선은 이들이 사담의 잔여세력, 사담정권의 잔여세력이라는 겁니다. 나는 이를 믿지 않아요. 내가 사담정권의 잔여세력이고, 가령 내게 도서관을 파괴하라고 2만 달러를 주었다면 나는 무척 고맙다고 하면서 정권이 사라졌으니 그 돈을 착복하겠지요. 하지만 도서관을 파괴하러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돈을 이미 챙겼으니까요. 오늘 바로 이 시간에 어떤 사람이나 기관 혹은 어떤 조직이 이라크의 문화적 정체성과 차기 이라크정부의 핵심이 될 정부 부처들을 파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겁니다. 과연 누가 배후세력인가, 누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바그다드에 입성할 만큼 막강한 전투력의 미군이 무엇 때문에 제네바협약에 따라 이런 기관들에 대한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으려는 걸까요? 그게 문제예요. 근데 나는 그 답을 갖고 있지 않아요.
굿먼 미군이 민간인 고문들의 경고를 들었더라면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의 약탈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 경고를 무시했다는 런던 『업저버』(Observer)의 보도가 오늘 나왔더군요. 재건을 감독하기 위해 설치된 재건인도지원청은 한달 전 미군 지휘관들에게 보내는 비망록에서 국립박물관이 약탈자들에게는 최고 표적임을 분명히 밝혔다고 해요. 비망록에는 그것이 미군에게 국립은행을 방비하는 것 다음의 우선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답니다. 인수책임자 제이 가너(Jay Garner)장군이 격노했다고 하는군요. 분노한 재건청 관리 하나가 『업저버』 기자에게 “우리는 각각의 건물에 다만 몇명의 군인이라도, 만일 저격수들이 두렵다면 최소한 탱크 한두 대라도 배치해주기를 요구합니다”고 말했답니다. 탱크가 일단 시내로 들어온 후엔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장군들은 탱크 배치를 거부했다는군요.
피스크 그래요. 그런데 『업저버』는 항상 뒷북을 치지요. 몇주 전에 이미 미국의 고고학자들과 국방부를 이어주는 웹싸이트가 만들어져 거기에 약탈·손상·습격·방화의 가능성이 있는, 이라크의 정말 중대한 민족적 유산들의 목록이 올라 있었거든요. 그 목록에 박물관이 끼여 있었습니다. 미 해병대원들이 바그다드 시내에서 기동하기 위해 소지하고 있는 위성사진에 그 박물관이 뚜렷하게 표시된 것을 내 눈으로 보았어요. 그들은 박물관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어떤 박물관인가를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박물관에 갔더니–그때가 일주일도 더 지났지요–폭도들과 약탈자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져 총탄이 박물관 밖의 아파트 벽 사이로 쌩쌩 날아다니고 있었어요. 약탈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보니 상황이 아주 분명했어요. 누군가가 박물관 창고의 거대한 안전문들을 열쇠로 연 거예요. 약탈이 더없이 치밀하고 정확하고 조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약탈자들은 자기네들이 어떤 물건을 가져가고 싶은지 미리 알고 있었던 거죠. 그들이 원치 않은 그리스 조상(彫像)들은 목을 부러뜨려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노리던 귀고리들이랑 황금 장신구 그리고 황소모양의 귀고리 신상은 가져갔거든요. 그리고 며칠이 안되어서 이라크 역사의 소중하기 짝이 없는 문화재들이 유럽과 미국의 시장에 나왔습니다. 난 이런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믿지 않아요.
흥미로운 사실 두 가지만 말하지요. 하나는, 약탈자들이 자기네들이 무얼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물건을 너무나 신속하게, 우리 기자들이 국외로 기사를 송고하는 것보다 더 재빨리 나라 밖으로 빼돌렸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장기적인 견지에선 훨씬 더 심각한 것인데, 돌아다니면서 불을 지른 방화범들은 지도를 갖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고 미국인들이 어디를 보호하지 않을지도 알고 있었어요. 한 경우에는, 알다시피 전기와 수도가 끊긴 이 도시에서 내가 불지르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알아본 적도 있었어요. 그는 염소수염처럼 짧은 턱수염을 하고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다시 마주쳤을 때 내가 그를 쳐다보았더니 내게 총을 겨누더라구요. 그 순간 나는 그를 전에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들 방화범들은 푸르스름한 버스를 타고 현장에 왔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약탈자들은 바그다드 시내버스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이 버스는 그런 시내버스가 아니었어요. 이 방화범들은 훈련받은 무리였어요. 그들은 조직적이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고 지도를 갖고 있었으니, 어디로 가라는 말을 들었던 게지요. 누가 이들에게 어디로 가라고 지시한 걸까요? 누가 이들에게 어디로 가면 미군들이 쏘거나 해치지 않을 거라고 일러준 것일까요? 이건 지금이라도 답을 구하고 풀어야 할 필요가 있는 진짜로 중요한 물음입니다. 나는 답을 갖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불행하게도 내 동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까타르 도하(Doha)의 미군에게 이에 대한 답을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이들에게 어디로 가라고 했고, 이들은 지도를 갖고 있었고, 가서 불지를 곳들을 알고 있었고, 미군이 거기에는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리고 거기에 가서 실제로 불을 지른 겁니다. 누가 이들에게 이런 지시를 했는지, 나는 정말 그 답을 알지 못하지만 답은 분명히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 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굿먼 시카고대학의 뛰어난 메소포타미아 학자인 맥과이어 깁슨(Maguire Gibson)은 박물관에서의 예술품 약탈과 도난이 지게차와 심지어 지하 저장실 열쇠까지 갖고 들어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게 나라 바깥에서 총괄적인 지휘를 받은 것으로 믿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하던데요.
피스크 열쇠를 갖고 있었다고 믿을 이유는 분명히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본 저장실 몇몇은 망치나 총, 폭탄으로 뚫은 것이 아니라 열쇠로 연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게차요? 이 약탈자들은 무거운 조상들을 트럭에 옮길 능력이 있었습니다. 내가 거기 도착하니까 이들이 막 그런 짓을 해치웠더라고요. 하지만 이들이 지게차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건 좀 할리우드적 발상이 아닐까 해요. 긴 회색 턱수염을 한 박물관 경비들이 남아 있는 물건들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AK-47라는 무기를–들었더라구요. 하지만 내게 “지게차를 사용한 증거를 갖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증거는 없소”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가지러 왔는지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느냐구요? 그건 있지요! 방화범들이 외부에서 훈련받고 조직되어 미국인들이 있을지 없을지, 혹은 미군이 특정한 건물을 방어할지 아닐지 알고 있었다고 믿느냐고요? 그래요! 이들은 미군들이 자기한테 들이닥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어요. 실제로 미군들은 이들을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며칠 전에 바그다드를 돌아다니다가 불꽃이나 연기가 치솟는 광경을 볼 때마다 황급히 그 지역으로 차를 몰아 가곤 했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가본 불타는 건물은 고등교육·컴퓨터과학부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까 미 해병대원 하나가 근처의 담 위에 앉아 있는 게 보이더라구요.(웃음)
난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달려가면서 저 친구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의 이름도 받아적었어요. 그의 이름은 테드 나이홈(Ted Nyhom)이고 미 해병대 3사단 4연대인가 4사단 3연대 소속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있는 자기 약혼녀 제시카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더군요. 나는 실제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당신 남자가 당신을 끔찍이 사랑한답니다”–그는 실재 인물이지요–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그에게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바로 옆에서 일어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글쎄요, 우린 병원을 지키고 있습니다”고 대답하기에 내가 “바로 옆에서 불이 나고, 정부청사 하나가 몽땅 타고 있잖소”라고 대꾸했지요. 그는 “그렇지만 우리가 모든 곳을 동시에 감시할 수는 없잖습니까”라고 하더군요. 내가 “테드, 뭔 일이 일어난 거요?”라고 묻자 “나도 모르겠어요”라고 하더군요. 가서 함께 앉아보니 그는 괜찮은 친구였고 난 기꺼이 그의 약혼녀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안전하다고 알려주었지요. 그러나 거기에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그의 옆에서 불이 나 정부청사 하나가 통째로 불타고 있는데, 그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거든요. 어떤 조치를 취하라는 요청을 받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이상한 점이에요. 미국 학자가 어떤 말을 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약탈과 방화를 중지시키지 않는 군대라면 도덕적 품성에 뭔가 잘못된 게 있다는 거지요.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겁니다.
바스라에 있는 영국군 역시 이 점에서는 직무태만이었습니다. 영국 국방장관 지오프 훈(Geoff Hoon)은 사람들이 병원을 약탈하고 있는데도 “그런데 그들이 가져간 게 원래 자기들 재산 아닌가”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했죠. 그러니 영국군들도 이 점에서는 책임을 면할 수 없어요. 하지만, 미군들의 직무태만은 정말 심했어요. 모든 국제협약들, 특히 약탈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있는 제네바협약–사실 약탈은 1949년 제네바협약의 기초가 된 1907년 헤이그협약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로 표현되지요–에 반하여, 약탈에 대한 이렇게 많은 조항들에도 불구하고 바그다드에서 미국인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라크의 문화적 사료 전부와 박물관, 국립문서도서관이나 종교부 산하 꾸란도서관의 사료, 혹은 바그다드 주변의 다른 155개 정부청사들의 약탈을 막기 위해 미국인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데, 난 그 답을 알지 못합니다.
굿먼 로버트, 당신은 병원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셨지요? 거기서 본 것, 그리고 어쩌면 현재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말씀해주실래요? 당신이 여기 미국에서의 보도를 점검하고 있었다면 말이에요.
피스크 글쎄요, 오늘 오후에 사실은 몇통의 필름을–디지털 카메라 필름이 아니라 진짜 필름인데–이곳의 내 현상소에 가져와 내가 힐라와 바빌론에서 찍은, 미국측의 집속탄(集束彈, cluster bomb)에 맞은 아이들의 필름을 다시 보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그런 고통에 처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는 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자로서 공정해야 하니까, 내가 보기에 이라크측이 민간인 지역에 탱크와 미사일을 배치했다는 점은 밝혀야겠지요. 그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미국측이 민간인 지역을 폭격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군사장비들을 그곳에 보존하려고 한 것이에요. 근데 미국측은 민간인 지역을 폭격했어요. 미국측이 과연 군사 목표물을 파괴했는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 무고한 민간인들을 파괴한 것은 분명합니다.
전쟁이란 역겹고 잔인하고 사악한 짓입니다. 난 사람들에게 전쟁이란 일차적으로 승리와 패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관한 문제라고 거듭 말하지요. 그리고 내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내 곁에 놓인 이 사진들, 미국의 집속탄의 금속 파편에 맞아 여자아이들의 얼굴 옆면에 생긴 엄청난 상처를 찍은 이 사진들을 훑어보노라면 프랑스인들이 ‘데구땅’(degoutant)이라고 할 때처럼 바라보기조차 역겹습니다. 하지만 난 그 상처들을 봐야만 해요. 내가 이 사진을 찍었으니까요.
야만적이고 잔인한 이라크정권, 이런 사진들을 말뜻 그대로 ‘매우 흡족해하며’ 선전물로 활용한 이라크정권 역시 물론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가장 소름끼치는 대목은 문명화된 동맹–미국, 영국, 몇몇 오스트레일리아인을 뜻하지요–이들 동맹이 한 주거지역, 즉 만수르 지역을 2000파운드짜리 대형폭탄 4기로 폭격하기로 작정했을 때 그것을 용인했다는 것입니다. 난 ‘벙커깨기폭탄’(bunker-buster) 같은 유치한 용어들을 사용하긴 싫지만 이것들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이 은신하고 있었던 토라 보라에 그들이 떨어뜨렸던 바로 그 폭탄들입니다. 이 거대한 폭탄들은 최소한 (만수르의) 민간인 14명의 생명을 파괴했어요. 까타르 도하의 미 중부군사령부는 사담이 거기에 있었다고 믿고 있으며, 법의학 전문가들을 보내겠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내가 미군들의 바그다드 입성 일주일 후에 가봤더니 실제로는 거기에 법의학 전문가가 한명도 파견되어 있지 않았더라고요. 내가 현장에 출동한 날–그러니까 나흘 전의 이야기예요–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는 갓난아이의 시신 한 구가 파편더미에서 나왔는데–그게 사담 후쎄인이 아니라는 건 장담할 수 있어요–미국측은 자기네 법의학자들이 사담 후쎄인이 거기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색중에 있다고 계속 주장하는 겁니다. 실제로 사담은 거기서 죽지 않았고, 중부군사령관이나 그네들 법의학자들은 알아볼 생각도 안했어요. 심지어 거기 가볼 생각조차 안한 거예요. 천인공노할 짓이지요.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천인공노할 짓이에요. 나는 기자지만 동시에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도 사담 후쎄인–그는 아직 살아 있다고 확신해요–이 정말 구역질나는 인물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란인들과 쿠르드족에게 독가스를 사용했어요. 그가 이란인들에게 독가스를 사용했을 때 당시 내가 일하던 신문 『더 타임즈』(The Times)에다 그에 관한 기사를 썼더니 영국 외무성은 우리 신문 편집인에게 그 기사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 단계에선 사담 후쎄인이 우리편이었고 우리 영국인들은 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전쟁의 위선이 풍기는 악취는 민간인 사상자들의 그것만큼 지독합니다.
하지만 병원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미국측은 군사적 목표물이 있다고 믿는 민간인 지역에 집속탄을 사용했습니다. 십중팔구 이라크측이 힐라 인근에 군사장비를 배치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게 변명이 되진 않습니다. 제네바협약에는 설령 적 전투원들의 면전에 있는 경우라도 ‘피보호자’라고 불리는 민간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언급과 조항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라크측이 군대를 민간인들 한가운데 배치시킨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 말하자면, 미군의 바그다드 입성 전에 이라크 군대는 나중에 약탈로 인해 미군의 명예를 상당히 실추시킨 그 박물관 안뜰에다–미군의 진주 후에 그 박물관에 가보니까 사태가 명명백백했어요–포대와 포대용 참호를 구축해놓았고, 어떤 지점에선 그게 3000년 전의 아름다운 날개 달린 황소상 바로 곁에 놓여 있더라구요. 휴대용미사일 SAM-6을 민간인 주택들 아주 가까이에 세워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라크측이 민간인을 방패로 사용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미국측은 민간인들이 거기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상관 않고 민간인들을 폭격했어요. 그러면 누가 전쟁범죄자입니까? 양쪽 다 전쟁범죄자들인 것 같아요. 그래요. 그게 사실입니다.
굿먼 현재 사상자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피스크 아뇨, 그건 알 수 없어요. 전혀 불가능하지요. 아시다시피 내가 공책을 가지고 다니니까, 그걸 보면 특정 병동이나 특정 병원의 각 병동마다 다친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려줄 수 있어요. 특정한 날짜에 A병원, B병원, C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어느 의사가 내게 일러줬는지를 알려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전체 수치에 관해서는, 통계란 당연히 패배한 정권과 더불어 사라지기 때문에 지는 쪽은 통계를 갖고 있지 않고 이기는 쪽이 모든 수치를 통제하지요. 분명 수천명의 이라크인이 죽었을 겁니다.
8번 간선도로로 알려진 곳에서 아주 끔찍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도로는 티그리스강을 따라가는 주요 도로로 강 건너편에는 바그다드의 무슨 대학이 있는데, 거기서 이틀 반 동안 제3보병사단 미군들이 복병들과 대치하면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복병들 대다수는 공화국수비대 소속이었어요. 군인들은 저쪽에서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고 나는 여기서 당사자들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에게 말을 걸고 민간인들에게 말을 걸고 탱크 위의 미군들에게 말을 걸었어요. 매복은 이 전쟁의 마지막 월요일 아침 7시 30분에 개시되었는데, 차도는 민간인 차량들로 붐볐어요. 미군 제3사단 사령관은 민간인 차량을 보고는 부하들에게 경고사격을 하라고 명령했는데, 자기 말로는 부하들이 두어 차례 경고사격을 한 다음 차량들에 발포했다고 합니다. 그는 “난 부하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소”라고 했어요. 공정하게 그가 말한 대로 인용해야죠. “나는 내 부하들을 보호할, 내 병사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으며 그들이 총류탄발사기(RPG)를 가졌는지 모르는 일이었소”라고 말했어요. 어쨌든 정지하지 않은 차량들은 미 제3보병사단 탱크의 포격을 받았어요.
나는 미군 탱크포탄에 갈가리 찢긴 차량 행렬을 따라 걸어가봤습니다. 어떤 차의 뒷좌석에는 아주 젊은 여인이 검게 불타 있었고, 그녀의 남편인지 아버지인지 오빠인지가 죽은 채로 곁에 있었어요. 미군 M1-A1 탱크의 포격에 반쪽이 홀랑 날아간 또 한대의 차 옆에는 한 남자의 다리 한쪽이 있었어요. 담요더미들이 미국인들의 포격에 산산조각이 나버린 아이들과 그 가족들을 가리고 있었어요. 진짜 매복이긴 했어요. 미군이 RPG-7의 공격을 받았거든요. 한번은 다섯 발을 맞은 탱크 한대를 보았는데–미군 사령관이 나를 데리고 둘러보았지요–한 발은 엔진에 맞았더군요. 그런데 그 탱크대원은 이라크 공화국수비대원 두 명을 태운 자동차에 발포했던 사람입니다.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나는 피가 하수구로 흐르는 채 그의 시체가 길가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다른 한 명은 부상을 당했는데 미군이 그를 탱크로 데려가 응급처치한 후 의료부대로 후송했답니다. 미군 사령관–탱크대원들에게 민간인 차량에 발포명령을 내린 바로 그 사령관–은 자동차에 타고 있던 두번째 공화국수비대원의 목숨을 자기가 구해주었다고 내게 말하더군요. 그러려니 생각할 수밖에요. 그 사람을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사흘 뒤에도 그 젊은 여성을 포함한 시신들은 차 안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유해 조각들이 담요에 쌓인 채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어요. 악취가 진동하고, 파리떼가 사방에 우글거렸어요. 그 미군 장교는 이슬람의 적십자사에 해당하는 적신월사(赤新月社, Red Crescent)에 시체를 옮기고 차량들을 치워줄 것을 요청했다고 내게 말합디다. 하지만 그 다음날에도 차량들은 시체들과 나란히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어요. 이건 사실입니다. 내 눈으로 보았거든요.
굿먼 언론인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외국인 사상자 비율에서 언론사 특파원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 같은데, 이런 일은 우리가 오랫동안 보지 못한 일이지 않습니까. 현재 수치는 팔레스타인 호텔 폭격을 포함해서 14명의 언론인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피스크 글쎄요, 전쟁을 취재하는 언론인의 숫자가–언론인 전체의 숫자도 그렇구요–계속 증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다지 낭만적인 말은 아니지만, 언론인의 수가 늘수록 언론인 가운데 사상자 수도 함께 늘어나리라고 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진상을 대충 파악한 사건들도 많아요. 바스라 인근 미군측 전선에서 북쪽으로 올라갔던 ITV 기자는 돌아오는 중에 동료들과 함께 미 해병대의 총에 맞았지요. 또다른 영국 기자 한 명은 자살했는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만일 자살이라면 미군이나 이라크군과는 아무 상관도 없지요. 하지만 팔레스타인 호텔의 포격, 이건 대단히 심각한 경우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제의 그날은 알자지라 기자의 살해로 시작되었지요. 물론 까타르 도하의 텔레비전 방송사인 알자지라는 오사마 빈 라덴의 테이프를 제작·방송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유명해졌지요. 우연히 나는 타리끄 아유브(Tariq Ayoub)가 죽기 나흘 전에 그 텔레비전 방송국 지붕에서 도하로 생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방송을 하고 있는데, 크루즈미사일 한발이 건물 뒤편에서 번개같이 지나가더니, 정확히 오른편 다리를 넘어가 티그리스강 상류를 따라가서 공중에서 내 뒤쪽을 폭격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내가 타리끄에게 말했어요. “여긴 세계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엿같은 언론사 건물인 것 같애, 안 그래? 여기 있다간 자네 진짜 위험하겠어”라고요. 건물 오른쪽에는 포탄 자국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내 말에 동의했어요. 그리고 나흘 후, 그가 방송국 지붕에서 방송준비를 할 때 미군 제트기 한대가 너무 낮게 날아와–아래층에 있던 그의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그게 지붕에 착륙할 거라고 생각했대요–타리끄 옆에 있던 발전기에 한발의 미사일을 쏘았고, 그가 죽은 겁니다. 약 3시간 15분 후에, 언론인들이 묵고 있던 팔레스타인 호텔에서 1.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주메이라강 다리 위에서 미군 M1-A1 에이브럼즈 탱크 한대가 다리 위의 바로 그 탱크들을 찍고 있던 로이터통신 사무실에 한차례의 일제포격을, 내가 알기로는 열화우라늄탄 공격을 가했습니다.
일제포격이 있을 때 나는 실제로 탱크와 호텔 중간에 있었어요. 내가 맡아서 공들여온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포탄이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내 머리 위로 날아가더니 호텔을 맞추면서 ‘꽝!’ 하더군요. 무지하게 큰 폭발음이었지요. 흰 연기가 났어요. 내가 호텔에 도착하니까 동료기자 두 사람이 피에 젖은 침대시트에 감긴 채로 들려나가고 있었어요. 하나는 로이터통신사 기자이고 다른 하나는 에스빠냐 텔레비전 방송사 기자인데 두 사람 모두 몇시간 내에–첫번째 사람은 30분 내에–죽었습니다. 그리고 동료 가운데 레바논 여성인 사미아 마훌(Samia Mahul)은 머리에 금속 파편이 박혔어요. 그녀는 회복됐습니다. 뇌수술을 받았지요. 사미아의 남편은 런던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의 베이루트 특파원입니다. 사미아는 살아남았어요.
이 사건에 대한 초기반응이 매우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BBC가 문제의 포탄이 이라크의 RPG 총류탄이라고 방송해버린 겁니다. 누군가가 언론을 겁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늘이 진실을 구하려 했는지 TV3이라는 프랑스 채널이 탱크들의 움직임을 촬영한 사실이 드러났어요. 내가 직접 TV3의 사무실에 달려갔더니 내게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주는데, 거기엔 사건 직전 5분 동안 미군 탱크들이 전혀 소리도 내지 않고–그러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는 거지요–다리 위로 가더니 탱크 포탑을 돌리고는 호텔을 포격하더군요. 그 순간 카메라가 흔들리면서 카메라 바로 앞에서 회반죽과 회칠 조각들이 떨어지는 겁니다. 그게 문제의 포격임이 분명한 거지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 4, 5분간 나는 탱크와 호텔 사이에 있었고, 그땐 완전한 침묵이었어요. 근데 미국측은 처음에 이 포격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발뺌하다가 프랑스쪽이 필름을 갖고 있음이 분명해지자–공격 얼마 전부터 필름이 돌아갔는지 미처 알지 못하고(웃음)–탱크가 끈질긴 저격과 RPG 공격을 받았다고 말을 바꾸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 공격이 있었다면 내가 탱크에 가까이 있었으니 소리를 들었을 것이며 싸운드트랙에도 녹음되었을 텐데, 실제로는 녹음이 안되어 있었거든요.
이 진술을 한 사람은 제3보병사단장인 뷰포드 블라운트(Buford Blount) 장군인데, 이 작자는 한달 전인 3월에 『르 몽드』(Le Monde)와의 인터뷰에서 전쟁 동안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할 거라고 자랑스럽게 말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저격수의 사격이 먼저 있었는데 미군 탱크가 일제포격을 한 후에는 그것이 그쳤다고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여기에 함축된 분명한 의미는 로이터통신사 사무실에서 먼저 총격을 했다는 것인데, 이건 블라운트 장군의 가증스럽고 악랄한 거짓말이에요. 그는 언론인들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겁니다. 실제로 당시는 미군이 바그다드 중심부에 들어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 어떤 언론인도 방금 입성한 미군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점이 흥미롭습니다. 마땅히 제기했어야죠…… 사실 내가 제기하기는 했지요. 이틀 후 내가 주메이라 다리에 가서 두번째 탱크에 기어올라가 탱크 지휘관에게 언론인들에게 포격하지 않았는가 물었더니 “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여기 처음입니다”라고 답하더군요. 그럴 법도 하겠지요. 그가 그전에 왔는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탱크의 일제포격은 의도적으로 호텔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고 제3보병사단 사령관 블라운트 장군의 발언은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완전한 거짓말이었어요. 내 동료들에게는 엄청난 공격에 해당하는 해괴한 거짓말이었어요. 사미아는 머리에 금속 파편이 박혔어요. 레바논 내전을 누구보다 용감하게 보도한 젊은 여기자한테, 또한 로이터통신사의 우끄라이나 카메라기자한테, 그리고 그 위층의 에스빠냐 카메라기자한테는 더없이 역겨운 거짓말입니다.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런데도 블라운트 장군은 아직 사과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 거짓말을 하고서도 지금까지 아무 탈이 없어요.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요.
굿먼 프랑스 신문인 『누벨 오브쎄르바뙤르』(Nouvel Observateur)는 월포드(Wolford)라는 미 육군대위가 군부의 보고와는 달리 팔레스타인 호텔에서 저격수의 사격을 보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호텔의 발코니에서 쌍안경의 빤짝거리는 빛 같은 것을 보았다는 겁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호텔이 바그다드 내 거의 모든 국제 언론인들의 본거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 이런 생각을……
피스크 아,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요. 그건 알고 있지요. 그런데 미군의 야전 지휘관이 누가 어떤 호텔에 있는지 정보를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미국 군대를 잘 모르는 소리예요. 그렇다고 내가 미군들을 타고날 때부터 잘못되었거나 끔찍하다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다시피 난 수많은 미 육군과 해병대원을 만났어요. 해병대원들은 나한테 자기네들은 보통 군인과는 다르다고 내게 계속 주장하던데 영국인으로서는 듣기가 뭣하지만, 그렇다고 해둡시다.하여간 그들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젊은 해병대원이 내게 다가왔어요. 그가 내 휴대폰을 빌려서 자기 집에 전화를 걸고 싶다고 하기에 나는 당연히 그렇게 해줬지요. 그러자 그는 “당신 동료들의 죽음에 대해서 정말 미안합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진심이 실려 있는 듯한 말투로 말이에요. 난 그들이 본질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미군들한테는 뭔가 섬뜩한, 이를테면 뭔가 사악한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발상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건 믿지 않습니다. 미군들은 괜찮은 사람들이고 괜찮은 사람들이 되고 싶어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뷰포드 블라운트처럼 미국의 장군들이 거짓말을 하면 괜찮은 사람 되기가 어려워질 수밖에요. 블라운트 장군은 언론인들에 대해 거짓말을 했어요. 그는 엿같은 군인이에요.
그러나 내가 만난 보통의 군인들은 상당히 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몇몇 경우 그들은 우리 기자들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했고 또한 자기들 때문에 생긴 민간인 사상자들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 같았어요. 이를테면 8번 간선도로에서 민간인 차량에 발포명령을 내린 미군 탱크부대 지휘관과 인터뷰하면서 나는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메모한 것을 읽으며, 무고한 사람들의 시신이 사흘 후에도 그대로 차 안에 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음미해보니 그 사람에 대한 호감이 떨어졌다는 것은 밝혀야겠지만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덜해졌거든요. 하지만 미군이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미군들은 자기네들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믿을 수 있을 만큼은 믿었다고 생각해요. 내 생각은 다르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벌이는 전쟁을 명예로운 전쟁이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사전에 미군들은 잘못 인도되었으며, 언론에 관해 거짓말하는 블라운트 같은 장군이 있으니 미군 지도부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창문에 반사되는 카메라나 무슨 기구의 빛을 본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국제적인 통신사에서 정당하게 전쟁취재를 하는 사람을 처형하라는 신호가 된다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거예요. 끝까지 추궁하자면 진짜 문제는 백악관의 부시 대통령한테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만난 미 해병대원과 군인들 가운데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하는 데 내게 상당히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때에 내가–어디에선지 모르지만–사격을 받고 있는 미군 탱크 옆에 있었던 경우도 있었는데, 군인들이 상당히 자제력을 가지고 행동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민간인들을 쏘려면 쏠 수도 있었거든요. 바그다드의 다른 곳에선 미군들이 실제로 발포하여 사람들을 죽인 몇몇 경우를 알고 있는데, 그런 짓은 전쟁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동행한 미군 탱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 군인들은 훌륭하게 행동했어요. 그 점은 인정해야겠어요. 내 생각에는 그들이 겁을 먹은데다 지쳐 있었어요. 그들은 오랫동안 씻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군인들을 썩 낭만적으로 대할 순 없군요. 그러나 솔직히 그들의 규율은 상당히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그러지 않았어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전쟁은 일차적으로 승리와 패배에 관한 문제나 대통령들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 고통과 죽음에 관한 문제예요. 아, 당신네 대통령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이라크 대통령도 사실은 그래요. 솔직히 상당히 사악한 인물이지 않습니까. 물론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말이에요. 근데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에이미, 그게 당신의 마지막 질문이 돼야겠지요? 사담 후쎄인은 어디 있는가?
굿먼 글쎄요, 난 아직 질문할 게 더 있는데요. 언급하신 당신 동료는……
피스크 아니, 나한테 후쎄인이 어디 있는가 물으려고 하지 않았어요?(웃음)
굿먼 좋아요.(웃음) 그 사람 어디 있습니까?
피스크 뭐랄까, 그가 이전의 쏘비에트 가운데 현재 가장 끔찍해진 나라인 벨로루시의 민스끄에 가 있다는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네요.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할게요. 이란전쟁 훨씬 전에–미안합니다, 무의식적인 말실수를 했군요–이라크전쟁 훨씬 전에 민스끄가, 난 거기에 가봤어요, 민스끄가 끔찍한 도시라는 강한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지요. 그곳은 온통 술과 부패와 창녀와 축축한 아파트로 가득하지요. 이라크의 바트당에 엄청 호의적이기도 하고요. 여기 베이루트의 신문에서–그게 아마 6, 7주 전의 일일 겁니다–민스끄에 있는 벨로루시 올림픽위원회가 ‘이라크의 위대한 통치자’의 경애하는 아들인 우다이 후쎄인(Uday Hussein)을 민스끄의 체스시합에 초대했다는 기사를 보고는 ‘맙소사, 걔들이 여기로 가려는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걔들이 러시아 대사와 함께 시리아 횡단열차로 빠져나갔다는 등 완전히 꿀꿀이죽 같은 온갖 무성한 이야기들을 새겨보면, 민스끄 외에 달리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웃음) 사실 외신부에 이런 말을 했더니 외신부 편집장이 “자네, 당장 벨로루시로 출발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안돼요, 제발, 제발, 벨로루시는 안돼요! 거기 가봤더니 정말 끔찍하더라구요!”라고 거절했지요.(웃음) 하지만 내가 이런 식으로 그가 어쩌면 거기 있으리라는 의심을 품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알 수 없지요. 그가 어쩌면 바그다드에 있을 수도 있고 오늘밤에 체포될 수도 있겠지요. 사실 난 전혀 알지 못합니다.
굿먼 당신은 머리에 파편이 박힌 당신의 레바논 동료를 언급했고, 그녀가 베이루트 내전을 취재했다고 하셨죠. 베이루트 내전 하니까, 우리가 이라크에서 곧 목격하게 될 것은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내전이 시작되는 게 아닌지를 묻는 당신의 기사가 생각납니다. 지금 생각은 어떻습니까?
피스크 글쎄요, 이라크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내전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면, 그것은 수니파와 시아파 자신들이 미국에 대항해서 싸우는 해방전쟁의 시작이 될 겁니다. 내 느낌은 미군에 대항하는 이라크인들의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것입니다.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쿠르드족은 여러가지 이유로 다른 역할을 할 것이지만, 수니파와 시아파는 그들의 점령군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에서 당연히 얼마간은 단합하려고 할 겁니다. 아시겠지만, 중동에선 역사의 아이러니를 피할 수가 없지요. 미국의 이라크침공이 있기 일주일 남짓 전에–아니, 이주일 전에–문서 하나가 경매에 부쳐졌어요. 영국 서남부의 도시 스윈던에서 열린 공개 경매였습니다. 나는 그 경매에 입찰했어요. 사실 나는 그 문서가 시장에 나오리라는 것을 알았는데, 그 문서는 1917년 육군중장 스탠리 모드경이 영국 육군을 거느리고 이라크를 침공한 후 발표한 대영제국의 공식문서였어요. 그것은 바그다드 통치지역을 뜻하는 질라야(Zilayah)의 주민에 대한 그의 포고문이었어요. 첫단락을 인용해볼게요. “우리는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여러 세대의 독재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해방자로서 여기에 왔습니다.” 지금 부시 대통령이 하는 말과 똑같죠. 나는 실제 이 문서에 대해 신문기사를 썼고 그것이 경매에 부쳐질 것이라고 했는데, 그건 상당히 고약한 실수였지요. 왜냐하면 경매인들이,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여기 베이루트에서 세 명의 이라크 난민들과 인터뷰하고 있을 때 영국의 스윈던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온 거예요. 그들은 입찰이 개시되었으니 입찰을 원하느냐고 묻더라고요. 나는 입찰하겠다고 대답했어요. 그 문서는 원래 미화 156달러에 낙찰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내 기사를 읽은 『인디펜던트』의 수많은 독자들이 경매장에 나타나는 바람에, 입찰가는 실제로 2000달러까지 올라갔어요. 하느님 맙소사, 그래도 나는 그걸 샀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스탠리 모드경 문서의 소유자가 되었어요. 바그다드 시민들에게 새로 온 점령군인 1917년의 영국군이 정복자가 아니라, 수대에 걸친 독재자와 폭군들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줄 해방군으로 거기 왔다고 말하는 그 문서의 주인이 된 거죠. 그리고(웃음) 당신도 아시다시피 경매 후 몇주 지난 다음, 내가 바그다드에서 미 해병대가 자신들이 정복자가 아니라 해방군으로 왔다고 이라크 사람들에게 말하는, 똑같은 문서를 포고한다는 소리를 들은 겁니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역사책을 조금이라도 읽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굿먼 우리는 지금 『인디펜던트』의 특파원 로버트 피스크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는 피곤한 상태입니다. 한달간의 취재 후 지금 막 이라크에서 나왔습니다.
피스크 그가 피곤한 건 확실해요. 그는 정말이지 피곤하답니다, 맞아요.
굿먼 그런데 내가 아까 질문하고 싶었던 것은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의 쥬디스 밀러(Judith Miller)의 보도에 관한 것인데, 아마 들어보셨겠죠. 내용은, 한 전직 이라크 과학자에 따르면 이라크가 전쟁개시 며칠 전에 화학무기와 생물학적 전쟁장비를 파괴했고, 80년대부터 이라크가 비밀리에 비재래식 무기와 기술을 시리아로 보내기 시작해서 좀더 최근에는……
피스크 (질문과 겹치면서) 얼마나 신통합니까. 참으로 신통하지요. 그 특집기사가 지금 나오다니 정말 안성맞춤이지 않습니까. 들어보세요. 나는 『뉴욕타임즈』에서 쥬디스 밀러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도인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는답니다. 그 말밖엔 할말이 없군요, 에이미.(웃음) 미안해요. 그 기사에 대해선 논평조차 요구하지 말아주세요. 그건 진지하게 다룰 화제가 아닙니다.
굿먼 그렇다면 현재 시리아를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하기로 하죠.
피스크 보세요, 시리아는 미국의 침공을 받지 않을 겁니다. 석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에요. 아마 미국이 이스라엘 편을 들어 위협은 하겠지만, 시리아는 침략할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석유가 풍부하지 않아요. 그러니 답은 시리아는 침공받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굿먼 당신이 이제 이라크에서 떠나와 목격한 것을 돌이켜볼 때, 가령 이번 전쟁이 걸프전 또는 그후의 사태와 다르다고 파악하는 핵심적인 지점들은 무엇이고,현재 당신이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피스크 글쎄요, 이번은 앨런비(Allenby) 장군이 예루살렘에 진입한 이래, 그리고 스탠리 모드경이 바그다드에 진입한 이래 서양군대에 의한 아랍 수도의 첫 점령이라는 거죠. 2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미국의 군대가 다마스쿠스뿐 아니라 베이루트에도 잠시 진주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건 비시(Vichy)정권의 프랑스와 연합국 간의 전쟁의 일환이었습니다. 제국주의전쟁의 일부는 아니었던 겁니다. 지금은 미국 군대가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아랍국가를 점령한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의 충격파는 다가올 수십년간 계속될 겁니다. 당신과 내가 무덤에 들어간 후에도–우리가 거기 갈 거라고 봐야겠죠–오랫동안 계속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에 연루된 군인들이나 대통령들도, 지금껏 일어난 일에 내포된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제국주의시대로 이미 들어섰습니다. 이 시대의 삶의 실체를 우리는 판단하지도 평가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어요.
지금 내 나이가 56살이니, 아마 나는 이 시대의 종말을 볼 수 없을지도 몰라요. 십중팔구 보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내가 중동에 온 지 27년간 이렇게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난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결과가 좋을 리가 없어요. 나는 우리가 대량살상무기 때문에 이라크를 침공했다고 믿지 않아요. 그게 이유였다면 북한을 침공했을 겁니다. 인권유린 때문에 침공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후쎄인을 지원한 오랜 세월 동안 그런 인권유린을 묵인했으니까요. 나는 석유 때문에 거길 침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석유를 차지할 수는 있겠지만 그 댓가는 매우 비쌀 것이라고 봐요. 그 이상은 알지 못해요. 늘상 말하듯이, 내 수정구슬(예지력)은 오래 전에 깨져버렸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머니보다 연세가 훨씬 많았고 1차대전 당시 군인이었던 내 아버지처럼, 나는 이 이야기의 진행을 계속 주시할 생각이며, 어떤 역사가 전개될지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에이미, 당신 프로그램에서 수없이 인용했지만 다시 한번 이스라엘 신문 『하아레츠』(Haaretz)의 그 멋진 언론인 아미라 하아스(Amira Haas)의 말을 인용하고 싶군요. 그는 “언론의 목적은 권력의 핵심을 감시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아직 그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의 핵심을 감시해야 하고, 왜 정부들이 지금 하고 있는 그런 일을 하는지, 그리고 왜 정부들이 그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지 물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하지 않고 있어요.
굿먼 로버트, 당신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姜美淑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