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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전쟁복구보다 더 중요한 것
이덕아 李德兒
법명은 선주(善駐). 경주 불국사 근무. 1991년 정토회 입제 후 한국 JTS(Join Together Society), 인도 JTS근무. 2002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난민 구호활동을 하고 있음. 현 아프간 JTS소장. iafgjts@yahoo.co.kr
지난 6년 동안 인도의 불가촉 천민 마을에서 살다가 이곳 아프간에 첫발을 내딛던 충격의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기아·질병·문맹 퇴치 민간기구인 JTS는 인도 보드가야 근처 둥게스와리 지역 불가촉 천민 마을에서 지난 1993년부터 약 10년간 14개 마을을 대상으로 학교·병원 건설, 마을 개발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벽이란 벽은 포탄으로 뚫린 구멍과 곰보자국처럼 난 총알자국이 있었다. 곳곳에 파괴된 도로, 돌아오는 난민들의 행렬, 연도에 널려 있는 지뢰표시, 그 엄청난 전쟁의 흔적들……
인도에서의 6년은 나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갖게 한 시간들이었다. 함께 했던 불가촉 천민들의 찢어지게 가난한 삶과 수천년을 이어온 천대와 무관심을 보면서 가난과 계급문제, 각종 분쟁 등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몇번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생각으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세상의 문제가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잃었으며, 삶의 터전이 무너져간 비참한 역사의 흔적이 있는 이 아프간에 나는 도착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아프간사람들은 미국을 좋아하진 않지만, 탈레반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좋아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탈레반의 학정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 같고, 아프간사람들의 민심을 반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프간이 이토록 초토화된 것에는 미국의 폭격뿐만 아니라 20여년간 소련과의 전쟁 및 내전도 있다. 이것은 내가 한국에 있을 때의 생각과는 다른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카불(Kabul)에 도착해서 우리가 처음 한 일은 시내에 들어온 난민들에게 겨울 의류를 지원하기 위한 실태조사였다. 현재 아프간의 수도인 카불은 해발 1800m 고지에 위치한 도시이다. 현재(2003년 3월) 카불의 인구는 300만명이 넘는다. 귀환난민도 예상했던 120만명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이 들어왔고 이들 대부분이 카불로 이주해 살고 있어 카불 시내는 주거환경뿐 아니라 제반시설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온통 총탄과 포탄으로 구멍이 난 건물, 문도 창문도 없는 무너진 집에 파키스탄과 이란 등으로 피난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살고 있다. 그들은 20여년간의 전쟁으로 이미 집들이 무너지고 더욱이 6년간의 극심한 가뭄으로 농토가 말라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카불에서 직업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고 아이들은 학교에 갈 엄두도 낼 수 없다.
학교에 있어야 할 아이들은 자동차 정비점에서 기름을 뒤집어쓰고 심부름하거나 시장통에서 짐꾼으로 일하거나 구걸해야만 먹고살 수 있다. 공기도 안 통하는 먼지 자욱한 작은 방에 하루종일 앉아 오빠들과 카펫을 짜는 다섯살짜리 여자꼬마의 빠른 손놀림을 보고, 그리고 나의 손을 잡자마자 울면서 그동안 살아온 사연을 이야기하던 전쟁통에 남편 잃은 아주머니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집에 늙은 할머니와 어린 손녀가 구걸해 먹고사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어떻게 이들의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을까. 누가 그 한맺힌 설움을 다 들어줄 수 있을까. 더욱이 살길이 막막한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시내뿐 아니라 도처에 푸른색 깃발이 나부끼는 묘지들을 보면 20여년의 전쟁으로 이땅에 묻힌 억울한 죽음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우리가 지원하고 있는 톱다라 마을은 산기슭 계곡에 있는 작고 아담한 시골마을이다. 우리가 학교 공사를 위해서 마을에 갈 때마다 항상 꼬마들은 마을 어귀에 나와 손을 흔들어주면서 앗살람(안녕)!이라고 인사를 하며 하나같이 작고 귀여운 손을 내민다. 산골아이들 눈망울 속에 비친 특유의 순진한 미소와 밝음을 보면서 모두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고 나야 마을에 들어갈 수 있다.
그 아이들의 사연들을 하나하나 들어보면 지난 20여년간의 전쟁을 모두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전쟁중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되어 형제들이 이모나 삼촌 집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지뢰를 밟아서 한쪽 다리가 없는 아이, 지뢰의 파편이 한쪽 다리에 박혀서 절룩거리지만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하루종일 일을 해야만 하는 아이, 수류탄인지도 모르고 갖고 놀다가 한쪽 팔을 잃은 여자아이, 폭탄에 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은 아이, 소련의 폭격으로 집이 부서져 사랑하는 모든 식구들이 몰사하고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되어 구걸하는 아이들, 또한 그런 충격으로 정신장애를 앓는 아이들. 800가구가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에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무려 100명이 넘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사람들을 모두 보듬어안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친척이든 이웃이든 다들 궁핍한 생활이지만 마을의 고통을 함께 지고 살아가는 모습은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지금 이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을 자재로 해서 학교를 짓고 있다. 지금은 나무밑이나 부서진 집, 모스크 건물을 학교로 사용하고 있다. 여학생들은 모스크 옆 건물의 작은 방에서 책걸상도 없이 흙바닥에 그냥 앉아서 수업을 받는다. 우리는 여학생들에게 교복을 지원하고 있는데 교복 치수를 재러 간 날, 그곳의 선생님은 오히려 옷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흙바닥을 덮을 깔판을 먼저 지원해주었으면 했다. 여학생은 절대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탈레반 정권하에서 붕괴된 교육씨스템은 현재도 아주 열악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은 2학년까지밖에 없고 그것도 적은 수의 아이들만 학교에 다니고 있다.
칸다하르(Kandahar)는 아프간 남부사막지역의 도시로 탈레반의 근거지였고 지금도 알카에다의 활동으로 치안이 심각한 지역이다. WFP(세계식량계획)의 2002년도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아프간 전체에서 절대식량부족지역이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지역이었고 특히 지난 6년간의 극심한 가뭄으로 유목민들의 대량이동으로 칸다하르 주에만 해도 IDP(자국내 난민)는 2만5789가구나 되며 대부분 지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난민들은 비만 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나는 칸다하르에 두 번을 다녀왔다. 한번은 JTS 해외사업부의 박지나 본부장님과 정토회 지도법사이신 법륜스님, 카불지원사업팀장인 유정길님과 함께 차를 빌려서 육로로 갔다. 엄두를 내기가 어렵고 치안문제로 모두 말리는 코스였다. 부서진 도로를 15시간을 달리는 일은 마치 청룡열차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랄까? 카불보다 더 심한 지뢰매설 때문에 길 양옆은 지뢰제거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번 여행은 칸다하르 근교 판즈웨이 지역의 IDP 캠프를 지원하기 위한 2차 답사였다. (1차는 작년 9월 본부장님과 법륜스님께서 하셨다.) IDP 난민캠프 아이들의 교육을 지원하는 것이 올해 아프간 JTS의 주 사업이기 때문이다. 가뭄으로 메마른 긴 강을 따라 60곳 9500가구의 난민들은 텐트 하나에 한가족이 기거하고 있었다. 배급해주는 식량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난민들에겐 먹는 것 외는 모두 사치로 느껴질 것이다. 파키스탄의 아프간 난민캠프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두번째 방문은 혼자서 NGO 비행기를 타고 갔다. 첫번째 방문시 1박 2일이 걸린 거리를 한시간 만에 도착하니 왠지 섭섭하기도 했다. 칸다하르 공항에 도착했을 때 미공군부대에 잘못 착륙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공항건물은 보이지 않고 온통 철조망투성이로 전투기와 미군들만 보였다. 미군들은 검문검색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일반 차량도 통제되고 있었다. 두번째 방문은 UNHCR(유엔난민고등판무관)을 통해 지원한 헌옷 약 십오만벌이 잘 도착했는지를 확인하고 분배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엔 요원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여자 혼자서 어떻게 칸다하르에 겁도 없이 내려왔냐고 아우성이었다. 나보다 더 심각하게 긴장한 UN 직원들 때문에 UNHCR 숙소와 사무실에 꼼짝 못하고 머물면서 보안담당요원과 유엔차로 함께 다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다시 올라와야만 했다. 이들의 그러한 유난스러움이 무리도 아닌 것이, 최근 적십자사 활동가인 스위스 여자가 탈레반세력으로 여겨지는 사람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고, UNICEF(유엔아동기금)가 지원하는 여학교가 폭격당하고 불이 나는 등 칸다하르는 아직도 곳곳에서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 칸다하르는 여자들이 교육받는 것 자체를 유독 싫어하는 곳이어서, 여자가 혼자 내려왔다는 것은 놀라움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알카에다와 탈레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노력한다.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의 가치에서는 외국인이 자신의 땅을 밟는 자체도 범죄로 삼을 수 있는데 아무리 내가 그들을 돕겠다는 선한 의지로 다가간다고 해도 결국 그들에겐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며, 자신의 문화를 파괴하고 전통을 훼손하며 자선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소비적인 문화를 이식하게 하는 세력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부심 강한 아프간사람들에게 공연한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을 갖게 하는 존재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몸서리치는 광경을 보면 평화에 대한 절실함은 아프간에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두처럼 다가온다. 아프간사람들에겐 그 많은 전쟁의 흔적과 아픔은 이미 하나의 일상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는 20여년간 있어온 전쟁의 포화가 멈춘 곳에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더욱 치받쳐오는 생각은,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과 도로는 복구할 수 있지만,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따뜻한 사랑을 나눠줄 부모를 땅에 묻은 그들의 서러운 마음은 어떻게 복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전쟁으로 파괴된 후의 지원활동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은 우리가 이러한 지원활동을 할 필요가 없도록 전쟁을 막는 일이다. 자신과 같게 만들려는 생각과 어떤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제하려는 욕심이 결국 전쟁을 일으키는 씨앗이 된다. 다른 점을 존중하며 여러가지 꽃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화단을 이루는 화엄의 세계, 그렇게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더 아름다운 세상이 평화의 마음이라는 것을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폭력적인 마음으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없다는 것과, 바깥의 평화뿐 아니라 내부의 평화를 이루는 일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한시간이나 지난 이후에야 알았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우리가 그렇게 염원한 평화를 뒤로 하고 또다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곳 아프간에 온 이후 언제나 보이는 전쟁의 흔적들, 길가에 그냥 버려진 탱크들, 무장한 군인들, 장갑차, 무수한 총탄 자국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들 그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난민들, 불구자들, 구걸하는 아이들과 과부들…… 또다시 이라크에서 보아야 할 모습들이다. (2003년 3월21일 수행일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