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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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시와 양심, 혹은 절규

고은 시집 『늦은 노래』, 민음사 2002

 

 

박영근 朴永根

시인

 

 

보라 내 늙은 안식 사악하여라

–「절벽」에서

 

고은(高銀) 시집 『늦은 노래』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다이다. 「추억」에서 시인은 “책이 없었다/젊은 날 바다밖에 없었다/병든 몸 바쳐/날마다/파도 소리를 들었다/(…)/오늘 바다 앞에 서서/내 늙은 노래는/해질녘 다음/어두워가는 파도 소리였다”고 쓰고 있는바, 그 바다는 정신의 어떤 기원으로서 그의 삶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표상하는 것은 우리 시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과거 회귀로서의 유년의 화해로운 정경도 아니고, 뭍의 시선으로 추상한 내면풍경도 아니다. 고은의 바다는 그와 같은 지향에 대하여 도리어 강렬하게 저항한다. “뭍에서/한발짝 벗어나지 못하고/바다를 바라보며/바다를 내 품에 안았다고 45도 술에 취했지”(「이어도」) “오 바닷바람은 집이 없다”(「거문도」) 등의 단장들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의 바다 시편에서 내가 보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들’로서 존재하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부정의 태도이다. 시집을 가로지르고 있는 또다른 이미지인 바람 혹은 태풍을 불러들여 그 바다는 안주나 정착, 또는 일상의 행복 따위를 허위의식으로 이름짓고 격렬하게 타매(唾罵)하는 것이다. 바다를 통해 그가 꿈꾸는 것은 세계의 실체와 본질을 확연히 보는 일이며, 생성으로서 새로운 운동을 막힘없이 펼쳐나가는 것이다. ‘집’에 대한 잦은 부정과 ‘봄날’에 대한 고창(高唱)의 거절은 그런 의식의 산물이다. 그의 의식의 또다른 거처로서 바다 주변에 ‘폐허’와 ‘고독’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안일보다는 고통을 선택하려는 창조적 열정의 역설적 표현일 것이다.

 

여름이

나의 여름인 것은

저 거역할 수 없는 노여운 먹구름장 속에서

터트리는

천둥 때문이다

 

천둥 친다

 

비로소 나는 인간이 된다

–「천둥」 부분

 

“절벽이 있어야겠다/절벽 아래/거기 내가 있어야겠다/부동자세/거기에/온몸 부숴버려야겠다”(「절벽」)는 시구와 더불어, 의식의 점등을 가리키는 절등(絶等)한 표현이다. 기이할 만큼 비애가 드러나지 않는 점은 한 특장이거니와, 「천둥」의 경우 인용된 부분의 마지막 시구가 성취하고 있는 놀라운 비약은 이미지 사이의 통상적 연관을 훨씬 뛰어넘는 장쾌한 울림을 준다. 그 앞연과의 사이,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 사유들이 들끓고 있는 것일까.

‘천둥’이 가열한 의식으로 불러올리는 자기변혁의 태도와, 정신의 ‘절벽’이 꿈꾸는 신생의 의지는 그 의미연관에 있어 바다 시편의 한 연장이면서도 다르게는 지금의 역사현실에 더욱 밀접하게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시인은 특유의 지칠 줄 모르는 몸과 사유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면서 지역과 대륙을 뛰어넘는 긴 여정을 치렀던 듯하다. 그 과정 속에서 고은의 시가 통찰하고 있는 80년대 이후 우리 문화지형도의 모순과 좌우편향(「일인칭은 슬프다」), 그리고 과거 역사를 신비화하여 그에 의지하려는 의고적 민족주의(「적」 「개천절」) 등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문화적 의제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전자에 대해서는 “‘우리’와 ‘나’의 유령들을 파도에 묻는다”고 응답하고 있으며, 후자의 경우는 각성된 현실로서 “벌거숭이 현재”를 내세워 일종의 추문으로 돌리고 있다.

「신록」 「그」 「자화상」 등은 고은 시의 여정 속에서 우리가 시인의 지향과 의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시편들로서, 가히 절규라 부를 만하다. 거기서 그는 전쟁과 폭력의 다른 이름으로 가차없이 미국을 호명하고 있으며(「그」), 또한 ‘한국문학사’를 주어로 내세워 그 야만적 역사의 ‘환관’으로 시종했던 전말을 고해성사로 진술하고 있다(「자화상」). 「신록」은 그것을 아우르면서 우리 시의 현재와 양심의 문제를 정면에서 묻고 있다.

 

또다시 학살이 오기 전에

팔레스타인으로 가야 한다

가서

목쉰 다르위시를 화상 입은 짐승처럼 만나야 한다

이스라엘 포대 앞

세계의 시인 몇명 모여들어

무서우면

노래해야 한다

노여우면

소리쳐야 한다

(…)

 

죽은 시가 살아나야 한다

–「신록」 부분

 

늦은노래시가 응당 가져야 할 양심과 관련하여 내가 여기서 쓰고 싶은 말은 이 시편들이 2002년 팔레스타인 사태와 더불어 우리 앞에 제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새삼스럽게 우리 시의 세계현실에 대한 태도를 묻는다면, 그것은 무지와 망각, 침묵과 외면 따위가 될 것이다. 고은은 「신록」에서 “폭염에 헐떡이는 개의 혀”라는 탁월한 비유를 들어 ‘애소’와 ‘절규’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는 현실을 절박하게 목도하고 있는 (또는 살아가는) 자의 양심일 것이다. 그 시편의 낱낱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 산문적 언술과 시적 비유의 결합은 한 성취로서 되새겨 읽어볼 만하다. 사건을 진술하고 묘사하는 산문적인 정보들은 단정적이고 격렬한 언술을 통해 고발과 폭로를 행하고 있으며, 부정과 명령, 청유와 고백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시적 언어들은 반복되는 리듬을 타고 어떤 회의도 없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큰 이야기」는 앞의 시들에 대한 어떤 주석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 시에서 고은은 역사적 사유로서의 거대담론이 몰락한 이후 한국사회에서 진행된 문화적 재편과정을 살피고 있다. 역사허무주의라고 부를 만한 가치의 전면적 해체와, “이웃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네 마리 중/한 마리는 며칠 뒤 죽었다/죽은 강아지를/미례 아빠가 묻었다/미례가 울었다”와 같은 시구가 말하는 바의 지극히 사적인 서사로의 변질, 그리고 ‘심야 인터넷’ ‘밤의 욕망’ 따위의 시어가 가리키는 쾌락과 소비의 현장 등이 그가 바라본 문화적 현실일 터이다. 여기서 시인이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슬퍼 마라

작은 마을들이 있다

작은 마을들이

커다란 공화국에 흡수 통일되지 않기 위하여

돼지들을 기른다

거위를 기른다

하루에도 몇번씩 달걀을 낳는다

아 달걀 속의

몽롱한 작은 목숨

작은 이야기가 있다

(…)

 

아무래도 큰 이야기가 있어야겠다

진지할 것

의고전적일 것

유연한 살갗

자운영 들판 위의 훈풍

지극정성

고행

 

시의 앞부분이 그리고 있는 정황을 나는 시인이 자신의 공부와 상상력으로 선취한 어떤 이상향으로 읽는다. 최원식이 그의 글 「나와 우리, 그리고 세상」(『창작과비평』 2001년 봄호)에서 말한 바, “탈중심적 소국주의를 품은 유토피아적 충동”이 낳은 삶과 문화의 지형이 아닐까? 시의 뒷부분은 ‘큰 이야기’를 지향하기 위한 정신의 태도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작은 마을’을 이루기 위한 성찰에 다름아닐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유와 태도의 공존을 보거니와, 진지함과 유연함, 훈풍의 부드러움과 고행의 엄격함 등이 그 경계와 분별을 버리고 하나의 세계를 향한다. 그렇다면 중심으로의 욕망이야말로 상호 대등한 소통을 가로막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고은의 시가 여러차례 언급하고 있는 ‘큰 이야기’의 소생은 그러므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유와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일 터이다. 소국주의의 본마음으로 바라볼 때 갈등과 대립으로 주어진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의 경계는 본래 없는 것이거나, 또는 패권적 허위의식이 만든 샤머니즘일 것이다.

『늦은 노래』의 북한시편은 ‘6·15 선언’의 와중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거기에는 고은 특유의 감격과 열정 그리고 낙관적 예언들이 들끓듯이 울리고 있다. 당시 그 정치적 사건을 하나의 축복으로 감싸안을 수밖에 없는 남한 대표시인의 자리를 감안하더라도, 그 시들은 지나칠 만큼 분단의 그늘을 사는 자의 불안과 고뇌를 비켜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와 같은 태도는 고은 시정신의 핵심인 ‘미지의 암흑’을 시적 자유로 헤쳐나가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나로서는 고은 시집 『남과 북』(창작과비평사 2000)의 어디쯤에서 보았음직한 「삼지연 젊은 아낙」을 기억해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