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동북아 특집 글들을 읽고
지난호 창비의 ‘동북아 경제중심’ 특집 글들을 반갑고도 유익하게 읽었다. 참여정부 최대 국정과제를 발 빠르게 포착하여 다각적인 점검을 시도한 점은 편집진의 우려대로 “한가한” 일이 아니라, 새롭게 제시된 국가발전 비전에 대한 건설적 검토의 절실성에 비추어 큰 의의를 갖는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을 터인데 각기 개성이 뚜렷하고 수준도 만만치 않은 글을 선사한 필진의 역량을 높이 사고 싶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겠지만, 특집 글들은 청와대 정책팀이 눈여겨보고 크게 참고했다는 점에서 이번 기획이 담론적 차원에서도 중요했거니와 정부의 정책추진과정에 실사구시적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이중적 의미를 부여받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 글들이 발표된 후인 6월초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여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론을 강조한 나머지 ‘동북아 경제중심’ 개념은 또 한차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이어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를 중심으로 ‘동북아시대 신구상’론이 제기되었고, 거기서 제시된 10대 제안이 주목받음에 따라 정부 안팎에서 동북아시대론은 각광과 더불어 적잖은 진통을 겪고 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동북아시대론은 앞으로도 뜨거운 논의의 대상이 될 것으로 예견된다.
참여정부의 동북아구상이 안고 있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인식론과 관련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구상의 실현가능성과 관련된 것이다. 특집 글들 가운데 굳이 분류하자면 우정은 교수의 글은 전자와 친화력이 있고, 나머지 글들은 후자와 연관되어 있다. 우교수의 글도 개념이나 동북아 인식을 다루었다기보다는 이 비전이 미래 한국(한반도)의 어떤 모습으로 연결되는가에 대한 세 가지 정체성 문제를 논하고 있다. 동북아 여부를 떠나 우교수의 글은 여러모로 매력적이면서 자극적인 글이며 논쟁의 소지를 안고 있다. 3층위 접근법은 매력적이고, 국제적 정체성이나 지역적 정체성 부분은 자극적이며,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용합”이나 “중립화된 한반도” 관념은 다분히 논쟁적이다.
특집 글들은 왜 동북아(시대)인가, 동북아(시대)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동북아구상을 실현할 것인가에 무게가 더 두어져 있다. 이런 방향성은 정책팀이나 정책과학자들이 취할 것이지 창비와 같은 인문학적 담론 교류장에 요구되는 성격이 아닐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아쉽기도 하다. 약간의 개념 논의를 하고 있는 김원배 교수의 글만 하더라도 ‘중심’ 개념에 대한 논의가 동북아 논의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동북아는 지리적 범위를 설정하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우교수의 글은 동북아론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동아시아론이다. 우교수는 한반도문제나 안보와 관련된 논의에서만 동북아라는 용어를 동원한다. 한반도문제 해소나 역내 안보문제에 이르러서야 그의 시야에 북한이 들어오고 러시아가 잡히는 것이다. 동아시아 발전의 정치경제학자로서 아직 동북아라는 관념이 그의 인식체계에서는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남주 교수는 ‘동북아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나머지 글들과 차별적인데, 그 역시 동북아시대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북아 혹은 동북아시대는 이미 개념적 정당성을 획득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정돈된 개념이라기보다는 혼란스런 개념인 측면이 다분하다. 이번 특집은 개별 글들이 각기 논조가 선명하고 완성도도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근본적인 문제를 피해갔다는 점이 아쉽다.
쉽게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동북아는 동아시아와 다른가 같은가, 만약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동북아는 아시아 태평양과는 다른가, 어떻게 다른가. 동북아시대는 또 무엇인가. 한 정치지도자와 그 핵심지식인들이 국가발전과 관련하여 거대한 담론을 채택했을 때는 만만찮은 배경이 있고 깊은 고민이 자리잡고 있다. 단순하게 득표를 위한 정치적 슬로건일 수 없고, 툭 던지는 화두일 수도 없다. 우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우리의 미래 국가상과 관련되는 문제이며, 한반도의 미래상과 관련되는 중대한 사안인 것이다. 그 정치지도자의 시대를 읽는 시대인식,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 미래와 과거를 잇는 역사관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창비의 특집이라면 이런 차원의 글이 하나 정도 나와야 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김원배 교수는 동북아 경제중심에 대한 계보에 정통한 듯하며, 이 문제에 관한 한 분명 전문가이다. 그래서 그의 물류 우선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다가온다. 특집의 다른 글들도 물류를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높인다. 김교수는 물류 우선론에다 동북아 경제중심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내부적 제도와 관행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네덜란드를 거울로 삼아 정치·교육·언론 등 우리 사회의 개혁을 동북아 경제중심 과제의 성공요건으로 다루고 있는 최병권 선생의 글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다만 최선생의 글은 나머지 글들과는 여러모로 개성이 뚜렷한데 ‘정신 인프라’‘끌림’ 등 재미있는 개념을 제시한 점이 주목받을 만하고, 우리 내부의 부단한 성찰과 쇄신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북아 전략이 결코 외형적 성장전략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메씨지를 분명히하고 있다. 내적 성숙과 외적 발전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동북아시대론에서 남북문제를 제외한다면 그것은 정말 죽도 밥도 아닐 것이다. 동북아시대론의 최대 강점은 내재적으로 한반도의 남북을 아우르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북한이 기계적이고 대증요법적(對症療法的)으로 다루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동북아 질서 구축에 있어 역내 여러 해당세력들과 유기적 연관성을 맺고 있는 행위자로 자리매김된다. 한반도문제를 동북아의 틀 속에서 접근하고 동북아시대를 열어가면서 문제를 해소하는 그런 복합적 사고가 필요한데, 동북아시대 남북경협의 현주소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은 이남주 교수의 글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지금 북핵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기는 하나 결국 경협의 활성화가 한반도 문제의 돌파구이자 추동력일 것임은 정치경제학적 입장에 서면 자명한 일이다. 마침 경의선·동해선 연결 기념식이 열렸고 개성공단 착공식이 있었으며 금강산관광사업도 재개되고 있어, 북핵문제가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남북간 교류협력은 불가역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화해협력정책의 성과라면 성과이고, 역내 증가하고 있는 통합의 물줄기를 북한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의 반영인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참여정부의 동북아 경제중심 과제는 국부를 늘려 부국이 되자는 전략이다. 이미 통합되고 있는 동북아 역내 제반 협력사업을 통해 그것을 도모해보자는 것이다. 3대 국정목표 가운데 하나인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는 동북아 경제중심보다 그림도 훨씬 크고 역사관과 지역관이 담긴 역내 비전이다. 경제중심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어야겠지만 동북아시대에 대해서는 앞으로 한층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동북아시대는 경제를 넘어 문화와 가치, 상호소통과 교류, 공동체의식의 발현 등 더욱 포괄적인 의제들을 그 범주에 포함시킨다. 즉 동북아 경제중심은 동북아시대를 여는 경제적 기초를 다지는 과제에 불과하다. 지식인사회가 동북아시대 담론에 개입하는 그 자체가 바로 동북아시대의 구성요소이며 동북아시대를 여는 일환인 것이다.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이수훈 leesh@kyungnam.ac.kr
동북아 경제협력, 평화로 가는 길
올 여름 우리는 정전협정 50주년을 맞이했는데, 이제 정전협정은 불안한 평화나마 제대로 보장하기 어려운 체제가 되고 있다. 또 몇개 재벌그룹의 위기나 공공부문노조와 대기업노조의 쟁의양상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하던 기업-노동체제가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전략과 씨스템은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데, 새로운 패러다임은 요원하기만 하다.
새 정부가 뚜렷하고 일관된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지만, 지식인사회도 국가적 차원의 의제를 설정하고 논의하는 데 무관심하고 무능력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전환기의 새로운 비전 모색이 절실한 싯점에서 창비 여름호에서 다룬 ‘동북아경제중심’에 관한 특집은 오랜만에 우리 운명을 스스로 설계해보는 의미있는 시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기획의도와는 달리 한 세기의 향방을 가늠하는 거대한 구상도 잘 떠오르지 않고 무언가 핵심적인 전략과제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동북아’라는 화두는 한반도의 핵위기, 중국의 급부상, 국내 씨스템의 한계 등 세 가지 계기가 강제한 결과라고 생각되는데, 특집 전체를 통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거대한 전환’의 폭·깊이·방향이 충분히 제시되지는 못한 것 같다.
그중에서도 우정은 교수는 한반도의 새로운 포지셔닝에 있어서 중국의 급성장과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는 서울의 가능성을 중국으로 통하는 “3등급 ‘관문’ 거점도시”로 보고 있는데, 이는 ‘경제중심’과는 달리 한반도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금 미시적인 관찰이 추가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중국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는 전통적인 중화세계질서에 속하는 국가들이 광대한 중국시장에 통합되는 것을 동아시아의 독특한 지역조직 형태로 보았다. 그러나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미국과 일본이 이를 용인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화-동아시아경제권 논의는 역사적 발전과정이 결여된 이념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 중국 내부의 사정, 즉 공산당 영도하의 정치체제와 시장경제화하는 경제체제 사이의 모순, 국영부문-농업부문-외자·사영 부문 사이의 갈등과 구조조정 문제, 극심한 연해-내륙 간 격차확대와 지역간 분열 등을 생각하면, 중국의 장래를 반드시 낙관할 수만은 없다.
둘째는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문제이다. 그는 한국의 미래를 비추는 세 개의 거울, 즉 금융 거점, 물류 거점, 민주주의 실천의 거점은 한반도의 비핵화·중립화를 통해서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비핵화·중립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또는 경로에 관하여는 구체적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쎌리그 해리슨이다. 그에 의하면 북한의 핵 포기와 미국의 체제보장을 교환함으로써 북한과 미국이 화해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또 연방제 방식으로 공존을 이룬 상태에서의 한반도의 비핵화·중립화가 미국의 이해에도 부합된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이 해법을 찾아가는 최적의 경로라 할지라도, 균형에 도달하는 데 관건이 되는 것은 역시 미국의 입장이다.
이렇게 해서 중국과 미국이 결정적인 변수임이 다시 확인되고 있다. 물류를 강조하거나 남북경협을 중시하는 특집의 논의도 이러한 동북아의 국제환경과 관련지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미국·일본의 압도적인 힘이 작용하는 공간에서는, 자유무역지대(FTA)나 경제공동체 결성이라든지, 대북한 경제지원, 동북아개발은행(NEADB) 설립 등도 당장은 우리 힘으로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전략적 과제가 되기 어렵다. 때문에 우선은 동북아지역의 교통망 통합이나 에너지 개발 등과 같이 민간 차원에서 자금조달이 가능한 부문부터 협력사업에 참여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해서 격자형의 그물망이 촘촘하게 형성되면 몇군데에서는 그 그물망들이 바퀴통의 바퀴살처럼 집중되기도 하는 법이다. 그 과정에서 평화체제로 가는 길은 조금씩 넓어질 것이다.
한신대 국제학부 교수 이일영 ilee@hs.ac.kr
논단 「검은 아테나 여신」에 대한 반론
3년 전 출판사의 번역의뢰를 받아 『검은 아테나 여신:그리스 고전문명의 아프리카-아시아적 뿌리들』(Black Athena: The Afroasiatic Roots of Classical Civilization, Rutgers University Press, 1987~)을 읽게 되었을 때, 서양고대사를 전공한 나에게 그 책은 충격으로 와닿았다. 고대 그리스문명의 뿌리가 고대 이집트문명과 셈문명이라니. 그런데 버널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록을 근거로 이집트문명과 셈문명이 고대 그리스문명의 뿌리가 되었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음을 주장한다. 그 구체적인 예로 그는 기원전 1720년~기원전 1575년 어느 땐가 이집트 왕자로서 그리스의 아르고스에 와서 왕이 된 다나오스를 통해, 그리고 페니키아의 왕자로서 그리스의 테바이에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고 알파벳을 전한 다나오스의 사촌 카드모스를 통해 영향을 끼쳤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에 대해 창비 지난호 논단에서 김경현 선생은 “왜 카드모스·다나오스 전승처럼 몇몇 도시국가가 외부(즉 동방) 식민자에 의해 지배받았다는 전승이 나왔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그런 전승은, 가령 아테나이처럼 토착기원을 자랑하는 도시국가가 적성국가의 평판을 깎아내리기 위해 날조해낸 선전술의 잔영이라는 것이다”라고 다른 학자의 견해를 소개하며, 버널을 비판하고 있다. 지면이 제한된 관계로, 다나오스를 예로 들어보자.
아테나이 사람 아폴로도로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폴로도로스가 태어난 시기는 기원후 2세기, 즉 아테나이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인들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때이니, 각별히 아테나이인들의 순수한 혈통을 자랑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쌍둥이가 왕국에 관한 문제로 말싸움을 벌였고, 다나오스는 아이깁토스의 아들들을 두려워하여, 아테나 여신의 충고로 배 한척을 짓고는 딸들을 태우고 도망하였다. 로도스 섬에 닿자 그는 린도스에 아테나 여신상을 세웠다. 그곳으로부터 그는 아르고스로 가자, 그 지역의 왕 겔라노르는 왕국을 그에게 내주었다. 그 지역의 지배자가 되자 그는 주민을 자신의 이름을 따 ‘다나오이’라고 불렀다.”(아폴로도로스 2.1.4)
그 외에도 아테나이 사람들인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 폰토스의 스트라본, 압데라의 헤카타이오스, 리디아 출신으로 알려진 파우사니아스가 다나오스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아테나이인들만이 아닌, 이 다양한 출신의 많은 그리스인들이 아테나이의 ‘적성국가의 평판을 깎아내리기 위해’ 다나오스에 관한 날조된 기록을 남겼단 말인가.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4세기에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펠롭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를 잡고, 그의 아들 아트레우스는 미케나이를 차지한다. 그러다가 기원전 1200년경 펠로폰네소스 밖으로 쫓겨났던 원래의 미케나이 왕가의 후손들이 도리스족의 도움을 받아 아트레우스 왕가의 제4대 왕을 쫓아낸다. 이 사건을 오늘날 보통은 ‘도리스족의 침입’으로 부르고 있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헤라클레스 왕가의 복귀’라고 더 많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헤로도토스(6.53.2)는 “도리스족의 지도자들은 순수한 이집트인의 혈통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말은 허무맹랑한 말이 아니다. 그리스 저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다나오스가 아르고스 왕이 된 후, 그의 후손들이 아르고스를 통치했으며, 몇 세대 후 그의 후손 페르세우스가 미케나이를 창립하였고, 세월이 흘러 페르세우스의 증손자 헤라클레스가 미케나이 왕위를 이어야 했으나 헤라 여신의 농간으로 왕위를 잇지 못하고 방랑과 모험의 삶을 살게 되었고, 왕위는 페르세우스의 다른 후손 에우리스테우스에게 이어졌다가 마침내 아트레우스에게 넘어갔던 것이다. 아트레우스의 손자 오레스테스 치세에는 아르고스도 미케나이에 복속된다. 그러다가 헤라클레스의 제3, 4대 후손들이 도리스족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침입하여 아트레우스 왕가를 축출하고 재집권한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 저자들의 기록들을 통해 다나오스로부터 도리스족의 지도자들에 이르는 족보를 하나의 대(代)도 빠뜨리지 않고 완전하게 구성해낼 수 있다. (나는 올해 봄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에서 「아르고스왕 다나오스와 그 후손들」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헤라클레스가 이집트 사람 다나오스의 후손이니, 도리스족을 이끈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곧 다나오스의 후손이기도 한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말을 신빙성이 없는 말로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버널의 주장은 버널의 반대자들의 날조론보다 그 근거가 더 확실하다.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록을 날조해가며 남겨놓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하자. 수세기에 걸쳐,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여러 도시 출신의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사람 다나오스가 아르고스 왕이 되었다는 동일한 내용의 기록들을 남기고 있는데, 왜 그러한 기록들이 무시되어야만 하는가? 버널의 주장의 기본틀은, 그 세부에 설혹 문제점이 있다 하더라도 무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서강대 겸임교수 오흥식 oh-elpis@unitel.co.kr
사랑이란 신호체계의 내밀한 법칙
지난 6월, 동네서점 한 구석에서 어정쩡하게 지겟다리를 하고 문예지를 뒤적이다 맘에 쏙 드는 시 한편을 만났다. 여름호에 실린 윤성학의 「내외」였다. 그 자리에서 읽고 덮어두기가 아쉬워 책값을 지불하고 손바닥으로 책등을 꼭 받쳐들고 나왔다. 한달 도서구입비를 책정하고 한정된 범위에서 책을 골라서 구매하는 이에겐 분명 이례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단행본 한권에 해당하는 책값을 시 한편에 선뜻 내놓은 셈이니 말이다. 집에 와서 거푸 작품의 율격과 내용을 음미하니 여전히 반갑고 좋았다. 윤성학의 나머지 두편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필요한 말만 잘 추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배열해놓은 정갈한 상차림. 여러 맛과 향을 동시에 취하며 전체의 느낌을 지속시키는 힘. 요즘 시들의 부산스러움이나 너저분함은 없었다. 시로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추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사람의 정신을 가늠할 수 있지 않은가.
「내외」는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사랑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 풍경 속 두 사람의 모습에서 나와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이 비친다. 시가 감동적인 것은 한편의 짧은 시에서 스스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기 삶의 비밀을 슬쩍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두 남녀가 길을 나선다. 사랑의 길, 우거진 수풀이 무성한 길섶을 스치며 아무도 없는 숲길을 나란히 걸어간다. 누구도 훈수를 두어 개입할 수 없고, 누구도 득실을 따져가며 슬그머니 개평을 달라고 우길 수도 없는 단둘만이 걷는 길이다. 당사자간의 이해와 양보가 필요한 철저하게 상호적인 행위의 지속. “조붓한 산길을 오붓이 오르”는 동안에는 행복하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현실적 상황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시시각각 부닥칠 문제에 해법을 찾아야 한다.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이야 맘대로 할 수 있지만 생김생김이 다른 사람이 만나 이루는 관계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삐걱거림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관건이다. 요의를 느낀 여자의 다급함이 상징하는 것은 이러한 삐걱거림이다. 사소한 삐걱거림으로부터 시인은 살아간다는 것의 비의(秘意)를 읽어낸다. 시인은 인간관계 중 가장 작은 단위인 연인 사이가 대단히 복잡한 신호체계를 지닌 게 아닌가 하고 묻는다. 그러한 신호체계의 내밀한 법칙을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로 표현된다. 산길에서 만난 요의를 풀기 위해 바위를 사이에 두고 숨은 애인, 그녀가 설정한 금기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개인성의 공간을 의미한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만의 생애, 생의 공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보호받을 권리를 지닌다. 가장 내밀한 관계에서의 소통이 원활해야 다른 모든 관계가 원만하게 풀린다. 이 시의 묘미는 이러한 관계의 법칙을 일상적인 사건에서 유추해내고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런 리듬과 편안한 호흡으로 형상화한 데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한 연인관계에서도 여전히 작용하는 그 법칙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그 간극/바위를 사이에 두고/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內通하기 적당한 거리”라고. 세상의 안팎, ‘내외’의 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간결하게 표현한 구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체험에서 우러난 표현은 요새 발표되는 과장되고 위악적인 시들과 사뭇 다르고 희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작품 「소금詩」에서처럼 시인 역시 한달 내내 땀에 절고 소금으로 월급을 받는 소금병정(쌜러리맨)이라면 그의 고단한 일상이 「내외」와 같이 활달하고 시원한 성찰들로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파주시 월롱면 이시평 mandala33@empal.com
미야지마 히로시의 글을 읽고
초등학교 때 읽었던 세계명작동화에는 유럽과 미국 이외의 동화는 거의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영화스타나 외국노래는 거의 전부 서양 것이었다. 대학생 때 둘러본 도서관 서가에는 ‘동양문화사’란 책 옆에 ‘세계문화사’가 꽂혀 있었다. 물론 내용은 서양문화사였다.
되돌아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자타전도(自他顚倒)를 공식화시킨 것이 세계사 교과서일 것이다. 여기에는 항상 로마문명이 진한제국(秦漢諸國)보다 앞장에 서술되어 있었다. 유럽의 르네쌍스는 휘황했고 친근한 근대문명으로 다가왔지만, 명청시대(明淸時代)는 고색창연하고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별세계였다. 이 교과서로 세계사를 배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아테나이에서 워싱턴에 이르기까지 서양문명의 우월성과 선진성이 선명하게 찍히게 된다.
최근 동아시아의 성장과 함께, 학계에서는 동아시아문명의 우월성과 주도성을 입증하는 연구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런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하루빨리 우리 교과서를 개편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화가들은 눈앞의 조선 산수(山水)를 놔두고 중국대륙의 산수를 상상하여 그리기도 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를 바로 잡은 이가 겸재 정선이다. 그러나 훗날의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역사인식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는 그런 조선의 화가들을 나무랄 자격이 있는가?
세종연구소 연구원 박훈ticotahiti@hotmail.com
정신 인프라의 중요성
최병권의 글은 동북아의 중심에 서기 위한 우리나라의 처지를 잘 설명했고, 더구나 네덜란드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설명한 부분은 가슴에 와닿는다. 모든 부분에서의 지적과 처방은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문제 자체도 조금은 추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대책마련도 추상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실천의 목표를 삼아야 할 것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없다. 그냥 잘하면 된다는 식의 대책은 교과서적인 것이 아닐까? 부정부패에 대한 대책으로는 입법화를 권고한다든가, 사치와 과소비에 대해서는 네덜란드의 예처럼 돌을 던지고 페인트를 뿌리자는 좀 선동적이긴 해도 적절한 해결책의 제시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정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고, 국민들의 정신 인프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글이라도 자주 읽고 조금씩은 반성하는 국민이 되어준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네덜란드와 같은 중심국가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회초리를 맞고도 개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글이라 생각한다.
김창국 kim99k@hanmail.net
닮아가는 세상의 아버지들
‘관촌수필’ 연작은 이문구 선생의 추억담과 피폐해져가는 농촌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토속어와 풍자적인 문체로 잘 그려진 작품이었다. 선생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입담 좋은 황석영 선생이 풀어낸 ‘이문구론’은 그의 곡진한 삶이 실은 소설보다 더 스펙터클했음을 곳곳에서 느끼게 했다. 나는 선생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그런데 「우리동네 촌장 이문구」를 읽는 내내 가슴 한켠이 아련해져왔다. 특히 스승에 대한 의리와 정(情), 막역한 문우였던 조태일 시인과의 몇가지 일화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충분히 알 수 있게 했다.
책에서 선생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내게 글쓰기 앞서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신 분, 그분이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도 없지만 언제부턴가 두 분의 이미지는 항상 내게 오버랩되었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더욱 선명한 영상이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버지의 모습들은 어쩌면 그렇게 닮아가는가. 평론을 읽으며 지금은 곁에 없는 아버지를 생각하다가 나는 소리죽여 울었다. 그래도 아직 내겐 아직 한 분이 남아 계신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한번 찾아뵈어야겠다.
서울 강북구 미아5동 허은경 hurbaek@hotmail.com
‘참말’로 귀를 울리는 현장통신
‘이라크 통신’에 빠졌다. 피스크와는 처음이었다. 그 참혹한 전쟁 얘기를 재밌게 읽었다면 어불성설이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페이지를 아끼면서 읽었다. 역자의 번역이 빼어나서일까. 무딘 의식 속에서 평면으로 깔려 있던 전쟁현장이 느닷없이 내 앞에 입체적으로 바짝 다가섰다. 고백하자면 나는 바그다드로 밀려드는 연합군 탱크가 계속 비춰지는 그 절체절명의 전쟁실황을 보면서 화면전환이 더디다고 짜증을 냈던 사람이다. 마치 스포츠 중계의 묵은 화면에 실증내듯이. 그 순간 거기서는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한국의 한 무지한 어미는 그러고 있었다! 할말이 없다. 앞으로 좀 헤맬 것 같다. 피스크와 이라크 전쟁을 찾아서, 부시를 찾아서…… 늦었지만 눈을 비빌 것 같다. 내 문밖 일, 무엇보다 ‘참말’에 귀기울일 것이다. 이토록 나를 건드려준 ‘현장통신’에 감사한다.
서울시 구로구 구로1동 주공아파트 112동 602호 이난호
독특한 실험과 연륜이 느껴지는 소설들
『창작과비평』은 마치 길잡이 같다고나 할까. 답답한 일상 속에서 삶의 방향을 모색하고 싶거나 현대 문학의 흐름을 훑어보고 싶을 때 나는 창비를 본다. 특히 이번 여름호에선 얼마 전 작고하신 이문구 선생에 관한 평론을 눈여겨보았다. ‘문구 형’으로 시작하는 황석영의 글은 한 작가의 부재를 통감하게 만들며 가슴 절절하게 다가왔다. 다음으로 관심있게 본 것은 소설이었다. 우선 독특한 구성 방식을 택한 서정인의 「쟁몽두」가 눈에 띄었다. 오직 두 남자의 대화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는데 비슷한 형식의 마누엘 뿌익(Manuel Puig)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가 생각났다. 노장의 소설가로서 여러 시도를 하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재미있게 읽은 것은 박완서 소설이었다. 연륜 있는 작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소설 전반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아 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다. 또 공선옥 소설은 더러 감상적인 부분이 눈에 거슬렸지만 결말 부분의 힘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권은정 candid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