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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역사유물론의 법정에 선 범죄소설
E. 만델 『즐거운 살인』, 이후 2001
김홍중 金洪中
빠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사회학 박사과정
주검이 하나 있다. 뻣뻣하게 경직된, 대개는 눈을 감지 못했고, 자신의 주변에 피 웅덩이를 하나 만들어놓았으며,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 이상한 시체다. 숨쉬던 몸뚱이는 자료가치와 조사가치만을 보유한 기호학적 사물이 되어 차가운 관찰의 대상으로 놓여 있다.─범죄소설(추리소설, 미스터리 소설, 써스펜스 소설, 스파이 소설, 스릴러 소설 등을 아우르기 위해서 만델이 사용하는 포괄적 용어)은 늘 이렇게 시작한다. 살인은 이미 일어났고, 이야기는 그 이후에 펼쳐진다. 처음에 미궁에 빠져 있던 수수께끼는 단서의 해독과 추리를 통하여 해결되고 범죄가 불러일으킨 불안은 종식된다.
이 독특한 소설장르는 19세기 중·후반 서구의 독서시장에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처음 등장하여,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대중적 인기의 정점을 구가하고 다양하게 분화된다. 그러나 1945년 이후에만 전세계적으로 약 100억부 정도 팔린 것으로 집계되는(122면)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 범죄소설은 기본적으로 그 통속성과 대중성(12면)에 호소하는 상업문학에 속한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은 비교적 뒤늦게 형성되고 진행된 것이 사실이다. 가령, 루카치(G. Lukács)의 문예학에서 이는 ‘비문학적 문학’으로 외면되었고, 골드만(L. Goldman)의 소설사회학도 마찬가지였다. 벤야민(W. Benjamin)과 블로흐(E. Bloch) 등이 예리한 통찰을 보여주었으나 이는 다소 파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비로소 이딸리아의 기호학자·사회사가들, 프랑스의 구조주의자들이 이 대상에 체계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범죄소설은 서구의 모더니티를 이해하는 중요한 징후로 재평가받은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맑스주의 경제학자인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의 『즐거운 살인』(Delightful Murder, 이동연 옮김)은, 전통적인 역사유물론 문예학이 공백으로 남겨놓은 대상을 사회사적으로 접근하고 비판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이 연구에 동원하는 접근법은 ‘맑스와 헤겔의 전통적인 변증법’(10면)이다. 이는 머리말에 천명된 다음의 문장에 잘 드러나 있다. “맑스주의자가 범죄소설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이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로서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변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역사유물론은 모든 사회현상에 적용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역사유물론이라는 이론의 권위─그리고 이 이론이 타당하다는 증명─는 다만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12면) 여기서 우리는, 상부구조의 현상을 사회·경제적 토대와의 관련 속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는 저자의 의지를 읽는다. 이 끔찍하고 비정한 살인의 이야기에 대중들은 왜 매혹되는가? 만델이 보기에 이 매혹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이며, 그리하여 “무의식적 공격충동, 유혈을 향한 본능적인 갈망, 혹은 죽음에 대한 소망”(123면) 등의 심리학적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범죄소설이 다루는 죽음은 실존적이고 인류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바로 ‘물신화된 죽음’(81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범죄소설이 표상하는 죽음의 물신화는 어떻게 진행된 것일까? 만델은 장르의 진화를 연대기적으로 배열하고, 그에 해당하는 사회구성체의 자본주의적 특성을 조응시킴으로써 이를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악당소설은 초기 자본주의에 의해(14〜16면), 고전 추리소설은 자유경쟁 자본주의에 의해(37〜40면), 써스펜스 소설은 권위주의적 국가와 독점자본주의의 결합이 가져온 충격에 의해(156〜57면), 스릴러 소설은 국가가 기업적 성격을 띠고 경제영역에 대규모로 개입하는 후기자본주의에 의해(187면) 각각 설명된다. 사회학적 차원에서 이를 환언하면, 범죄소설의 죽음, 즉 제목이 시사하듯 ‘즐거운 살인’은 ‘부르주아 사회’가 요구하고 생산하며 소비하는 특수한 죽음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사회는 “식민지인들에 대한 폭력, 가난한 자들에 대한 폭력, 외국인에 대한 폭력, 비순응자에 대한 폭력, 여성에 대한 폭력, 그리고 봉기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에 대한 폭력”(126면)으로 얼룩진, 죽음과 범죄에 기반을 둔 사회이다. 따라서 저자는 묻는다. 이렇게 이미 범죄적인 사회의 구성원들이 “대리폭력으로의 회귀라는 좌절된 형식으로 폭력적인 충동을 승화시킨다는 것이 이상한 일일까?”(같은 곳)
무고한 자신들의 삶이 실제로는 구조적 범죄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은폐하고, 이를 환상적인 범죄자들의 이야기 속에 투사하는 대중의 의식은 따라서 ‘분열된 개인들’(119면)의 사물화된 의식에 다름아니다. 범죄소설은 그리하여, 아무리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할지라도, “장르가 지닌 태생적 한계”(229면)를 벗어나 진보적 원동력으로 기능할 수 없다고 만델은 진단한다. “객관적인 잠재력을 가진 사회세력—즉, 노동자계급—에 기반을 둔,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저항만이 돌파구를 만들어줄 수”(223면) 있는 것이며 범죄소설은 “이런 집단적인 저항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같은 곳)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리하여 “왜 범죄소설이 씌어지고 읽히는가?”라는 최초의 질문에 대한 저자의 최종적 해답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부르주아 사회가 기본적으로 “범죄사회이기 때문”(241면)이다.
관점에 따라서, 저자의 논지와 방법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가능하고 또 필요한 것이지만(특히, 변증법적 사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매개가 부재하여, 문화현상〔소설 장르〕이 토대〔자본주의 양식〕로 직접 설명된다는 사실과 비교적 최근인 1984년에 씌어진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범죄소설을 대상으로 집적된 인문·사회과학적 성과를 거의 참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좀 의아한 점이다), 이 저서가 내장한, 풍부하고 자상한 서지(書誌)는 범죄소설의 역사를 총괄적으로 조망하고픈 독자들에게 매우 유용한 지표들을 제공한다. 역주와 부록 역시 대단히 정성스럽게 첨가되어 생소한 인물과 사건 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인’ 비판의 문법, 즉 역사유물론의 법정에 범죄소설을 불러세운 만델의 이 저서는 우리의 범죄소설, 우리의 현실, 그리고 우리의 비판문법에 비추어 어떻게 다시 해석되어야 하는가? 책을 다 읽고 나서, 잠시 이런 상념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