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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영웅 만들기의 함정

도오몬 후유지 『사카모토 료마』, 지식여행 2001

 

 

박유하 朴裕河

세종대 일문과 교수parkyh@sejong.ac.kr

 

 

20세기를 마감하는 2000년도에 일본인들에게 ‘일본 1000년의 리더’ 1위로 꼽혔다는 사까모또 료오마(坂本龍馬, 1835〜67)라는 인물이 실제로 이 책에서 그려진 인물상과 얼마만큼 가까운지 가려낼 역량이 아쉽게도 필자에게는 없다. 하지만 일단 근사(近似)하다고 전제한다면 이 책을 통해 떠오르는 사까모또 료오마라는 인물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을 사람이 없을 만큼 이 책은 에도(江戶)막부시대 말기를 치열하게 산 일본의 한 정치지도자를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평전이라기보다는 사까모또론이라 해야 할 이 책에 따르면, 료오마는 변화에 대한 강한 적응력과 유연한 발상력의 소지자이며, 봉건적 사고가 남아 있던 시대에 신분이 아닌 능력주의로 일관하는 현실주의자이며, 리더십으로 사람을 이끄는 매력의 소지자일 뿐 아니라, 넓은 시야에 기반을 둔 복합적 사고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도 과시하지도 않는 겸허함의 소지자였다. 그런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료오마는 사쯔마성(薩摩城)과 )오슈우성(長州城)의 연대를 이끌어냈고 막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이양한 타이세이(大政) 봉환을 실현시켜 메이지(明治)유신을 가능케 했다. 보기 드물게 유연한 사고로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여 이후의 일본의 ‘성공적’ 근대를 준비하는 데 기여한 그런 청년이 훗날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팽팽히 대립하던 사쯔마성과 )오슈우성의 화해를 이끌어내 ‘해외 열강들에게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내란을 피하였다’고 평가되는 그의 공적만으로도 이유야 어떻든 해외 열강들에게 발을 들여놓을 빌미를 제공해버린 씁쓸한 역사를 지닌 우리에게는 일독의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또한 자신의 성(城)을 벗어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한 다른 공동체를 만드는 식의 탈공동체적 사상은 혈연·지연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의 지침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의 료오마의 능력과 자질에 경애와 존경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료오마가 만든 ‘해원대’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꿈꾼 것이 ‘해외개척’이라는 이름의 세력확장이고 구체적으로는 ‘바다와 섬의 개척’이라고 하는 영토확장이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가 1867년 유신을 눈앞에 둔 해에 암살당한 것은 분명 비극이지만, 그가 혹 살아 있었다면 그와 의기투합했던 사이고오 타까모리(西鄕隆盛, 1827〜77)와 함께 ‘정한론’을 펼치는 인물이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또 그가 칼이나 총 대신 새로운 무기로 삼았던 ‘만국공법’이란 서양 열강이 각국의 주권을 인정하자면서도 실은 그들 자신만을 ‘문명국’으로 설정하면서 여타의 나라들을 ‘야만’으로 간주한, 따라서 법을 ‘공유’할 생각은 하지 않아 이후의 모든 불평등조약의 기원이 된 ‘그들만의 법’이었다. 그 만국공법이 막부 말기에 ‘베스트쎌러’가 되면서 일본은 그러한 사고를 내면화했고, 그들에게 메이지유신이란 서양으로부터는 ‘야만’으로만 간주되던 그들 자신을 서양과 같은 ‘문명국’으로 가도록 해줄 진입로이기도 했다. 그 길이 동시에 제국주의로의 길이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115-431저자 도오몬 후유지(童門冬二)는 사까모또가 무사적인 중농주의에서 벗어나 ‘경제’를 중시했다고 평가한다. 동시대의 중심사고를 벗어난 사고의 소지자였다는 점에서 사까모또는 분명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그 발상은 분명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근대 일본’을 만든 기반이 된 중요한 발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동시에 근대 자본주의의 처참한 이면을 준비하는 길이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은 저자에게 없는 듯하다.

또한 료오마가 단순한 ‘근황파’가 아니었고 천황과 자신의 고향인 ‘성’을 뛰어넘어 ‘일본’이라는 국가를 생각했을 뿐이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하지만, 지역공동체를 초월한 ‘일본’을 강조하는 일은 그의 말대로 ‘일본민족의 에너지를 통일’시켜 일본을 이후 국가주의로 몰아갔다. 물론 그의 뜻은 료오마를 근황파라고 말하는 것이 현대 일본의 일부 우익들에게 이용될 수 있음을 우려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사고야말로 실은 제국주의 ‘메이지일본’의 기반을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것을 위해 ‘일본’은 구심점으로서 천황을 내세웠고, 수십년 후에는 각기의 ‘개인’으로서의 출신을 잊은 채 ‘천황의 자식’이라는 환상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걸 수 있는 충실한 ‘일본’ ‘국민’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오끼나와나 홋까이도오가 실은 ‘일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때는 이미 잊혀졌던 것이다.

료오마를 국민의 영웅으로 만든 것은 1996년에 작고한 작가 시바 료오따로오(司馬遼太郞)였다. 이미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료오마가 간다(龍馬がゆく)』에서 그는 료오마를 극도로 미화했고, 그러한 그의 소설들은 “패전 후의 일본을 일구어낸 ‘기업전사’들이 자신의 인생과 국가를 연결시켜 생각하면서 자신(自信)을 형성하는 이야기를 시대적인 리얼리티를 내재시키는 형태로 제공하는 일에 성공”(코모리 요우이찌 「문학 속의 역사, 역사 속의 문학」, 코모리 요우이찌·타까하시 테쯔야 엮음 『국가주의를 넘어서』, 삼인 1999 참조)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사까모또 료오마라는 인물은 지극히도 20세기적인 영웅이었다 해야 하리라. 그러나 그의 ‘개척주의’의 함정을 보지 않은 채로 영웅화하는 일은 위험할 수 있다.

물론 저자의 의도는 1차적으로는 ‘변화와 개혁’의 주인공으로서의 료오마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를 ‘자기발굴’의 한 전형으로서 제시하려는 데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천재적 발상력과 성공신화의 CEO’라는 명함과 함께 갑자기 한국땅에 나타난 ‘사까모또 료오마’를 읽고 ‘성공신화를 꿈꾸는’ 이땅의 정치인·경제인들이 그의 유연한 ‘발상력’을 배워 그들의 잠재능력을 발휘하게 된다면 그 자체에야 이의를 달 필요는 없으리라. 그들이 그 ‘성공’의 이면에 존재할 무수한 폭력과 죽음에 자각적이기만 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