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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복잡한 세상에 대한 과학의 콘서트
정재승 『과학 콘서트』, 동아시아 2001
이덕환 李悳煥
서강대 화학과 교수 duckhwan@sogang.ac.kr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동아시아 1999)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교양과학 출판계를 흔들어놓았던 젊은 물리학자 정재승 박사가 다시 역작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전공하고 있는 복잡성의 과학과 관련된 주제들만을 모아서 한편의 멋진 과학 콘서트를 연주한 셈이다. ‘연주’만 한 것이 아니라 뇌의 기능에 대한 자신의 연구결과까지 소개하여 ‘작곡’에도 직접 참여함으로써 작품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복잡한 세상 & 명쾌한 과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콘서트에 앞서」에서 경제·사회·문화·음악·미술·교통·역사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사회현상들이 사실은 카오스(chaos)와 프랙탈(fractal) 등의 몇가지 개념만으로 설명된다는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명쾌하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과연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그의 콘서트는 흔히 과학의 대상이 아닐 것이라고 여겨지던 문제들에 대한 절묘한 과학적 설명을 제시했고, 어느정도 인내심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그의 콘서트에서 충분한 감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제1악장 ‘매우 빠르고 경쾌하게’에서는 확률이라는 개념 속에 감추어진 흥미로운 특성들을 소개하였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예측하는 확률은 분명 매우 과학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그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는 경우가 드물고, 오히려 그런 확률을 이용해서 과학적인 것처럼 위장을 한 엉터리 상식이 판을 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확률 속에 깜짝 놀랄 정도로 복잡한 진실이 감추어져 있으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그런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제2악장 ‘느리게’에서는 겉으로는 매우 혼란스럽게 보이는 자연과 사회 현상에도 사실은 절묘한 규칙성이 감추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관찰하는 시각의 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서 마치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규칙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과학적 도구가 바로 프랙탈이라는 새로운 수학적 개념이다. 자기 유사성을 보여주는 프랙탈의 구조는 추상화가의 작품은 물론이고, 서태지의 머리 모양, 바흐와 비틀즈의 음악, 우리의 일상언어, 그리고 심장의 박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3악장 ‘느리고 장중하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는 이 콘서트의 절정이다. 온갖 현란함과 예측 불가능성으로 가득한 곳으로 보이는 백화점과 주식시장 그리고 도로에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리성이 존재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런 곳에서 현대 과학자들은 고도의 비선형성에 의해서 나타나는 카오스의 특성을 발견한다. 물론 모든 것이 엉망인 ‘혼란’의 상태가 아니라 확률적 분석이 가능한 ‘혼돈’의 상태이다.
마지막 제4악장 ‘점차 빠르게’에서는 새로 태어나고 있는 복잡성의 과학이 얼마나 다양한 문제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콘서트 과정에서 쌓인 흥분을 오히려 더욱 고조시킨다.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소음이 사실은 우리의 뇌를 움직이는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소음에 적응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놀라운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발견이 질병을 치료하는 도구도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은 더욱 흥미롭다.
저자가 「콘서트를 마치며」에서 고백한 것처럼 이 책에 소개된 글만으로 복잡한 세상을 모두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내용·소재·글솜씨가 모두 외국의 고급 과학전문잡지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이다. 우리도 이제 이런 높은 수준의 과학적 내용을 담은 글을 쓸 수 있는 젊은 전문저술가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반가운 일이다. 역시 난해한 현대음악과 같은 현대과학을 멋지게 연주하는 일은 작곡을 담당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저자와 같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과학 연주자의 몫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옥에라도 티가 있기 마련이다. 우선, 사람 이름과 전문용어의 원어를 밝히려는 노력이 오히려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power law”처럼 우리말로 옮기기를 포기한 경우도 많고, “left superior frontal gyrus”나 “sinoatrial node”에 이르러서는 저자의 능력을 제대로 살려주지 못하는 편집자가 몹시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각 주제와 관련된 글들을 친절하게 소개하는 노력은 내용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훌륭한 작품에 대한 ‘해설’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복잡성의 과학에 대한 해설이 부록으로 덧붙여졌다면 그야말로 손색없는 훌륭한 콘서트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복잡성의 과학이 2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 그 뿌리는 195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비평형 통계열역학’에서 찾아야만 한다. 자연에서 변화가 멈추어져서 결정론적 예측이 가능한 평형의 상태는 오히려 예외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비평형 통계열역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시작했던 벨기에의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은 1977년에 그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복잡성의 과학은 프리고진의 비평형 통계열역학에서 잉태되었고, 지난 20년 동안에 급격한 성과를 거두게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복잡성의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흔히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고 여겨왔던 ‘요동’이다. 이 책에서 ‘소음’ 또는 ‘잡음’이라고 부르는 그런 요동이 경우에 따라서는 크게 증폭되어서 기계론적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그야말로 깜짝 놀랄 만한 현상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그래서 프리고진은 “이제 (기계론적인) 확실성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주장한다.
1972년생으로 과학영재 교육을 위해 설립된 경기과학고를 거쳐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뇌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훌륭한 과학의 연주자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평소에 흥미를 가졌던 영화와 복잡성의 과학을 넘어서서, 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 수준의 연주자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