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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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지아 鄭智我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내며 작품활동 시작. jiajeong@hanmail.net

 

 

 

행복

 

 

토요일 정오가 지난 서울역은 발디딜 틈 없이 혼잡했다. 웅웅거리는 사람들의 소음으로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부모님을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플랫폼에서 기다리기로 하고서는 차가 막히는 바람에 근 이십분이나 늦어버린 것이었다. 일단 몇번 폼으로 도착했는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전광판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나는 저만치 등을 돌리고 서 있는 한 늙은이를 발견했다. 제법 떨어져 있었고 사람들 틈에 끼여 뒷모습의 일부만 언뜻 보였을 뿐이지만 아버지가 분명했다. 혼잡한 역에서 아버지를 한눈에 알아차린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아버지를 쉽게 알아본 것은 얼마 전에 사서 보낸 상아색 여름점퍼 때문은 아니었다. 시골 장마당에서 산 것처럼 후줄근한 점퍼가 백화점 마네킹에 입혀져 있던 바로 그 옷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은 아버지가 차에 오른 한참 뒤였다. 아버지를 알아보게 한 것은 뒷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뒷모습은 유분이 적어 갈라터지기 시작한 황갈색의 유화 같았다. 조금의 윤기도 없이 푸석푸석한 아버지의 등은 자칫 손이라도 대면 한줌의 먼지로 내려앉고 말 것 같았다. 아버지, 하고 다소 물기 젖은 음성으로 불렀을 때 아버지는 8·15 특사로 출감하던 이십년 전의 그날처럼 멀뚱한 얼굴로 나를 일별하고는 내려놓았던 짐을 집어들었다. 뒷모습보다도 더 건조한 표정이었다. 아버지의 표정은 늘 그랬다. 우리 동네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서울의 사년제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남편을 처음 소개했을 때도, 사립학교 선생으로 취직이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그렇게 무표정했다. 아이, 느그 아부지 땜시 민망해서 죽겄다. 니가 서울서 젤 좋은 핵교 선생이 됐다고 만내는 사람마동 얼매나 자랑을 해대는지 몰러야, 어머니의 자랑 섞인 투정을 듣고서야 아버지도 내심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아이, 승원이는?”

차에 오르던 어머니가 물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승원이를 큰집에 맡기고 오는 길이었다.

“델꼬 오제. 보고 잡그만.”

“거봐, 보고 싶어하실 거라고 그랬지? 데리고 오자니깐, 일곱살이면 이제 다 컸는데 성가실 게 뭐 있다고……”

온 가족이 어딘가를 다녀와야 휴일다운 휴일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남편은 승원이를 두고 온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엊저녁 음식 준비할 때부터 놀러 간다고 잔뜩 들떠 있던 승원이는 저만 큰집에 남겨지자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제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섧게 우는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남편은 내게 눈을 흘겼다. 그런 남편에게 부모님과의 첫 나들이라는 말을, 무슨 치부라도 되는 양 나는 하지 못했다.

연애시절 자취방에 처음으로 놀러 갔을 때 남편은 수줍은 미소와 함께 낡은 사진첩을 내밀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꽃무늬가 그려진 겉표지에는 ‘Happiness’라고 적혀 있었는데, 양 귀퉁이가 너덜너덜하게 닳은 세월의 흔적 속에서 사진첩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축제의 순간에 느닷없는 화산폭발로 고스란히 묻혀버린 고대 유적지의 비밀스런 문 앞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라난 남편도 나처럼 가족과의 단란한 한때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도 빛바랜 사진 몇장으로나마 행복했던 시절이 박제되어 있는 것이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사진첩을 넘기면 박제된 행복의 순간에서 피어오른 바람이 내 몸을 한줌의 먼지로 날려버릴 듯했다.

멀거니 겉표지만 들여다보고 있던 나를 대신해 그가 페이지를 넘겼다.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그의 아버지가 좁은 골목길에서 썰매를 탄 어린 그를 밀고 있는 사진이 첫장에 꽂혀 있었다. 웬일인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거구나 하는 소소하나 서서히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과 함께, 연탄재가 쌓인 골목길에서 아빠와 함께 썰매를 타고 한나절 신나게 놀 수 있었던 그, 고사리손으로 사진첩에 사진을 끼워 넣고 그 밑에 ‘아빠와 썰매를’이라고 정성들여 써놓은 후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사진 속의 한때를 추억했을 그가 갑자기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뭔가가 서걱거리며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내 사진첩에도 이제 그리워하며 추억할 부모님과의 한때가 담기게 될 모양이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듯한 이번 나들이를 나는 오롯이 부모님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아들 녀석의 눈물바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떨어뜨려놓고 온,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한 저간의 사정은 그러했다. 남편에게 굳이 얘기 못할 사정도 아니련만 몇번 입을 달싹이다 만 것은 자취방에서 사진첩을 내밀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우리에게도 셋이 함께 찍은 한장의 사진이 있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가족이 함께 밖에 나간 것을 나들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날, 나들이의 기억도 있었다. 중3 여름방학 때였다. 사상범으로 십여년간 복역했던 아버지가 8·15 특사로 풀려났다. 광주교도소 앞 짧은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몇시간을 기다린 끝에 십여년 만에 상봉한 우리 가족은 곧장 고향으로 내려왔고, 다음날엔가 할머니와 아버지의 형제 누이, 사촌들까지 사진관으로 몰려가 ‘출소기념’이라고 박힌 사진 한장을 찍은 후 우리 세 식구만 피아골 계곡으로 떠났던 것이다. 구름 한점 없어 한여름 뙤약볕이 거침없이 대지를 달구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수건과 비누를 든 채 부신 햇살을 토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 뒤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작열하는 햇빛 속에서 십 몇년 만의 자유를 만끽하며 목욕을 했을 것이다. 나와 어머니는 한여름인데도 얼음장처럼 차디찬 계곡물에 목욕할 엄두가 나지 않아 계곡물에 담가놓았던 참외나 깎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얼마 후 팬티차림으로 수건을 머리에 둘둘 감고 우리에게 돌아왔지만 나는 십여년 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별로 할말이 없었다. 한동안 계곡물처럼 서늘한 침묵만 흘렀고, 그후 우리는 당시만 해도 복원되지 않아 허허롭기 그지없던 연곡사를 한바퀴 휘 둘러보고는 돌아왔다. 반나절도 안되는 짧은 나들이였다.

통행증을 끊기 위해 내린 창문 틈으로 알싸한 매연냄새 가득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어머니의 손에 쥐여 있던 손을 차마 빼지 못했는데 내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인 어머니의 손가락은 잔가시라도 박힌 양 따갑고 거칠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승원이는 제 외할머니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눈물을 글썽이며 아파? 하고 물었다. 어머니가 일흔일곱이 되도록 나는 그 손 한번 어루만져본 적이 없었다. 이번 여행의 추억은 빈 위장에 들이켜는 새벽의 소주처럼 지독히도 씁쓸할 듯싶었다.

남편은 차창을 연 채 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햇볕에 후끈 달아올랐던 차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어머니는 창문을 닫으라고 말하는 대신 벗어놓았던 점퍼를 어깨 위에 걸쳤다.

“폴쎄 가을인갑다. 코스모스가 다 피었그마이.”

어머니는 고속도로변에 드문드문 피어난 코스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후 고향마을에서 공부한답시고 소설책이나 펼쳐보며 빈둥빈둥 시간을 보낼 때였다. 잠시 바람을 쐬러 마당에 나왔는데 참깨 두드리던 어머니가 멍하니 화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심고 거두지 않아도 철따라 봉숭아며 맨드라미, 백일홍, 채송화, 코스모스 따위가 잡초처럼 무성하게 피어나던 화단에는 늦가을이라 시든 코스모스 꽃잎 몇개가 앙상한 대궁에 붙어 찬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화단을 향했던 시선이 먼산으로 옮겨지는가 싶더니 어머니는 반쯤 풀어져 있던 머릿수건의 끝자락을 당겨 눈께를 닦아냈다. 내가 멍석에 널린 마른 참깨단을 바삭바삭 밟고 다가갈 때도 어머니는 눈치채지 못했다. 한번도 어머니의 눈물을 본 적이 없던 터라 당황한 나는 어머니의 어깨를 무작정 잡아흔들었다. 엄마, 왜 그래? 눈물로 부옇게 흐려진 시선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을 풀고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촛점 없는 어머니의 멍한 눈빛이 너무도 낯설었던 것이다. 객사 직전의 떠돌이에게나 가능할 것 같은 섬뜩하도록 막막한 그 눈빛은, 남편도 돈도 없이 심지어는 세상의 작은 동정도 없이 혼잣몸으로 어린 자식을 그러안고 십년 세월을 꼿꼿이 버텨냈던 어머니, 사십 킬로도 되지 않는 가녀린 체구로 열 마지기 농사를 혼자 지어내던 어머니, 그 독한 어머니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달빛 아래 피를 뽑고 걸어올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어두컴컴한 자갈투성이 신작로를 네 발로 기어왔던 어머니, 다른 여자들은 화장을 지우는 데나 쓸 가제수건으로 피가 줄줄 흐르는 무릎을 동여맨 채 식은 밥 한덩이를 찬물에 말아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넣듯 꾸역꾸역 쑤셔넣던 어머니의 눈에서는 호랑이눈 같은 불덩이가 이글거렸고, 내가 아는 한 어머니의 눈빛은 그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어야 했다. 마른 감잎이며 은행잎 따위가 바람에 쓸려 나뒹구는 마당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앞에서 어머니는 무안한 듯 먼지가 보얗게 내려앉은 머릿수건을 무릎에 대고 탁탁 털었다.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으로 어머니는 배시시 웃음까지 흘리며 참깨타작을 계속했다. 낙엽이 진 걸 봉께 맴이 어째 좀 그래야. 타닥타닥, 참깨를 털며 어머니는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등받이에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껏 내 뇌리에 각인된 그 가을날의 눈빛은 아니다. 어머니의 시선은 그저 밖을 향해 무심히 열려 있을 뿐이다. 후면경으로 잔뜩 웅크린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는지 남편은 창문을 닫았다. 차 안이 이내 후끈 달아올랐다. 아직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다. 후텁지근한 공기 탓에 졸음이 밀려들었다. 차의 움직임에 따라 머리가 흔들리고 있는 걸 보니 아버지는 진작부터 졸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모님, 음악 틀어드릴까요?”

낯선 목소리가 ‘돌아가는 삼각지’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잘 듣지도 않는 트로트였다. 이번 여행을 위해 일부러 산 게 틀림없었다.

“배호 좋아하신다면서요.”

애 어른 할 것 없이 ‘저 푸른 초원 위에’를 흥얼거리고 다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남진이 좋냐, 나훈아가 좋냐고 묻는 내게 일에 치여 라디오 들을 짬도 없던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좋기야 배호제,라고 대답했다.

“젊을 때 좋아했제. 오랜만에 들응께 좋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어머니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두번째 곡이 채 끝나기 전에 어머니의 어깨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새벽부터 이것저것 챙기느라 부산했을 것이다. 조금 당겨앉아 어머니의 머리를 내 어깨에 얹어놓았다. 어머니는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대학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가던 기찻간에서 내가 몇번이나 자세를 바꾸는 동안 어머니는 초상화의 모델이라도 되는 양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머니가 입까지 벌리고 잠든 것이다. 남편 말마따나 늙은이 냄새도 나는 듯했다. 지난 구정 무렵 남편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향수를 사들고 왔다. 나는 몇달이 지나도록 그것을 보내드리지 못했다. 구정 선물은 약간의 돈을 송금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이, 느그 아부지한테서 늙은내가 나야. 얼마 전 어머니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남편의 선물은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어머니 몫의 향수는 아직 내 책상서랍에 남아 있다. 어머니에게 향수를 내민다는 것은 당신에게서도 냄새가 난다는 의미일 것만 같아 차마 건네지 못한 것이다.

희미하게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지난 학기말 회식자리에서 나를 옆에 불러앉혀 한바탕 사설을 늘어놓던 늙은 교장에게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냄새와 흡사했다. 송선생은 교사가 된 목적이 뭔가, 목적이. 비싼 등록금 내며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약간의 지식이 아까워서였는지 돈이 필요해서였는지, 대답이 궁색해서 머뭇거리고 있던 내게 교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교사는 학생을 대학에 진학시키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요. 그 외에는 말짱 도루묵이야.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지요? 알고말고였다. 지난 몇년 동안 내가 담임한 반의 성적이 늘상 하위권이었기 때문일 것이고, 더 직접적으로는 학교 이사회의 뭐라나 교장과도 각별한 사이라는, 내 반 아이 한 녀석의 어머니 때문일 것이었다. 전교 일이등을 다투던 녀석은 도무지 인간미라고는 없어 성적을 최우선으로 아는 공부 잘하는 애들 사이에서도 이른바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집에 털어놓았는지 한 번은 이사회에 참석했던 녀석의 어머니가 교장실로 나를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교장과 시시덕거리고 있던 그녀는 인사랍시고 고개를 까닥이고 나서는 불쑥 봉투를 내밀었다. 전에도 몇번 그녀의 봉투를 거절한 적이 있었다. 남달리 청렴해서나 철저한 교육관을 갖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작은 선물 하나 건네지 않는 학부모에게는 서운한 느낌도 없지 않을 정도로 어찌 보면 나는 닳은 선생이었다. 봉투를 받은 적은 없지만 자의적으로 내가 정한 기준에 따라 오만원 안쪽의 선물은 기꺼이 받는 편이었다. 나에 대한 기본 정보가 있었는지 봉투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내게 그 어머니는 교양있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 돈 아니에요. 물론 현금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고액의 백화점 상품권일 테지.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애가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그러지 않아도 그 문제로 상현이 어머님을 일간 뵈려고 했습니다. 상현이가 다소 이기적인 편입니다. 친구들에게 노트 필기 한번 보여주는 법이 없고, 제 물건 하나 빌려주는 법이 없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저도 몇차례 타일렀지만 소용이 없더군요. 부모님께서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면서 무슨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상현이는 어려서부터 공부 못하는 애들하고는 놀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상현이의 문제는 고스란히 제 아버지나 어머니의 문제이기 십상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녀는 내 말에 발끈해서 아들과 별 다르지 않은 인생관을 한참 늘어놓았다. 결국 자기애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도 지금까지 남부럽지 않게, 아니 외려 남 부러워하게 잘 살아왔을 그녀를 상대로 토론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상현이 녀석에게 별다른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성공학 서적깨나 읽은 듯한 그녀의 달변을 별 하나 나 하나, 어린시절 잠 못 이루던 밤처럼 천 넘게 헤아리며 간신히 견디고 있던 나를 결정적으로 한방 먹인 것은 교장이었다. 상석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이십분 넘게 이어진 그녀의 성공학 강의를 듣고 있던 교장이 자기도 지겨웠는지 불쑥 다가와 봉투를 집어들고는 내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던 것이다. 이봐 송선생, 상현이 성적 좋잖아.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야?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니 친구들하고 놀 시간이 없는 것뿐이지. 공부하려는 애들이 공부에 전념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선생의 본분 아니요? 본분에만 충실해요, 본분에만. 봉투를 꺼내놓고 말없이 돌아선 것은 할말이 궁색해서가 아니었다. 바싹 붙어선 교장의 몸에서 풍기는 늙은이내를 도무지 참기 어려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냄새가 내 부모에게서 풍기고 있는 것이다. 젊을 때는 사람마다 다르던 체취가 왜 늙어지면 누구랄 것 없이 똑같아지는 것인지, 그것은 어쩌면 한 인간이 평생 자신만의 무엇을 찾기 위해 발버둥쳐보았자 생물학적 한계 앞에서는 망망대해의 한점 시든 잎사귀에 불과하다는 무서운 자연의 전언은 아닌지.

배호의 목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테이프를 남편이 꺼버린 모양이었다. 오른쪽 미등을 깜박이며 차가 휴게실로 들어서고 있다. 시동이 꺼진 후에야 어머니는 눈을 떴다. 눈가에는 질척한 눈곱이 끼어 있었다. 기차로 다섯 시간 달려온 서울행만 해도 노인네에게는 힘에 부칠 터였다. 아무래도 무리한 일정이었다. 서울에서 며칠 쉬다 여행을 가자고 했건만 여행 당일에야 올라온 것은 올밤 수확을 끝내고 오겠다는 부모님의 고집 탓이었다. 인건비, 비료값 제하고 나면 오십만원이나 남을까. 늘그막에까지 그토록 악착을 떨어야 하는 부모님의 고단한 생이 안타깝기보다 짜증스러웠다.

“가락국수 드실래요? 여기 국물맛이 일품이에요.”

승원이가 걸음마를 시작한 이래 거의 주말마다 전국을 누비고 다닌 남편은 휴게소 음식까지 죄 꿰뚫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점심 묵었는디 국시는 멀라고. 권서방이나 묵고 오소.”

어머니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럼 내려서 다리라도 푸시죠.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힘드실 텐데요.”

남편이 뒷문을 열고 팔까지 붙들었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차가 멈춘 것도 모른 채 잠에 취해 있었다. 나 역시 가락국수 생각은 없었으나 혼자 먹게 하기가 뭣해서 따라내렸다.

“맛있지? 여기 국물맛이 내가 먹어본 중에 최고야. 나와서 바람도 쐬시고 국물이라도 좀 드시면 좋을 텐데. 점심이래야 기차 안에서 고작 김밥으로 때우셨을 거 아냐?”

남편 말대로 얼큰한 국물맛이 제법 개운했으나 입맛은 당기지 않았다. 삼천원을 헛되이 쓰지 않을 생각으로 차에 남아 있는 어머니가 가슴에 얹혀 국물조차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았다.

“왜 그래? 어제 밤늦게까지 음식 장만하느라 무리한 것 아냐?”

나는 내 몫의 국숫가락을 남편 그릇으로 옮겼다.

“좀 맛있게 먹을 것이지, 아침에 토스트 한쪽밖에 먹지 않아놓구선……”

“음식 만들면서 이것저것 집어먹은 게 속이 더부룩해서 그래요. 국물 마실게. 맛있네.”

남편에게 미안해서 억지로 국물을 몇 숟가락 떠넣었다. 나는 남편에게 왠지 늘 미안한 느낌이었다.

차가 달리자마자 어머니는 다시 졸기 시작했다. 이제 막 여행을 시작했다기보다 힘든 여정을 끝내고 귀향길에 오른 풍경이라는 편이 더 적확할 듯했다. 이걸 과연 나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 첫 나들이치고는 참 스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 역시 운전하는 남편만 아니라면 좀 자두고 싶었다. 온몸이 비에 젖은 청바지처럼 무거웠다. 남편이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대개 내 몫일 수밖에 없는 살림과 직장일과 병행하는 탓만은 아니었다. 승원이가 갓난애던 시절에 비하면 일은 한결 수월했다. 걸을 때 자연적으로 흔들리는 팔조차 거치적거린다고 느껴지는 것은, 때로 숨쉬기조차 귀찮아지는 것은, 나이 먹어간다는 징조일지도 몰랐다.

식후인데다 차창으로 제법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 때문에 졸리운지 남편이 창문을 내렸다. 깊은 잠에 취한 채 어머니는 양팔을 쓸어내렸다. 추운 모양이었다. 흘러내린 어머니의 점퍼를 끌어올렸다. 뒤창으로 스며든 햇살을 반짝반짝 튕겨내는 화사한 오렌지색 점퍼만이 지금 우리가 여행지를 향해 질주하는 중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요즘 노인들 사이에서 오렌지색이 유행이라나 뭐라나, 점원이 뭐라고 꼬드겨도 늘 사던 베이지색이나 검자주색으로 골랐어야 했다. 주름진 고랑마다 지난 삶의 행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어머니의 얼굴을 배경으로 오렌지색 점퍼는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지난해 이맘때. 어느 학생의 질문이 불쑥 떠올랐다. 수업시간에 백석의 짧은 수필을 막 읽어준 후였다. 이 좀말로 할까고 머리를 기울여도 보았으나 그래도 나는 그 처량한 당나귀가 좋아서 좀더 이놈을 구해보고 있다, 마지막 구절의 여운으로 잠시 침묵하고 있던 참인데 한 녀석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묻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몇년을 살고 왔다는 녀석은 애널리스트인지 뭔지 나로서는 이름도 생소한 직업을 갖는 게 꿈이라고 했다.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 사람 가난했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녀석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비효율적인 생각을 하는데 잘살 리가 없죠. 선생님, 사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문학 따위를 우리가 왜 알아야 되죠? 누군가 냉큼 말을 받았다. 그걸 몰라서 묻냐? 수능을 잘 봐야 되니까 그렇지. 작년에는 이용악이 출제되었으니까 올해는 백석이 나올 확률이 높다고. 질문을 한 녀석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대답인가보았다. 출제확률이 높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부분의 학생들이 나를 주시했다. 역시 공부 잘하는 외국어고등학교다웠다. 아이들이 원한 것은 출제 가능성이 높은 백석의 시를 샅샅이 분해해주는 것이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시나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한바탕 사설을 늘어놓지도 못했다. 등골이 서늘한 채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다. 어느 학부모가 기증한 에어컨이 쌩쌩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도 두꺼운 백석전집을 든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처량한 당나귀라도 된 기분이었다.

녀석에게 내 부모의 삶이란 돌아볼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실패자의 삶일 것이다. 초등학교 일학년 담임만 삼십년 하면서 긁어모은 돈을 부동산에 투자해서 돈푼깨나 만지게 된 사촌이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을 때, 구멍가게를 하는 먼 친척이, 그래도 아는 사람 물건 팔아줘야 한다며 십분씩이나 자전거를 타고 가서 솔 한 보루를 찾는 아버지에게 요즘 누가 솔을 피냐며 타박을 할 때, 명절날 모인 사촌들이 그렇게 된다면야 좋제만 누가 그러고 삽디여, 요새 세상에야 돈이 최고제,라며 아버지의 말을 잘라먹을 때, 내 가슴속에서는 불덩이가 치솟았다. 그러나 그 불덩이는 입밖으로 터져나올 만한 힘도 없이 저 혼자 맥없이 사그라들곤 했다. 뜨거운 불덩이를 식힌 것은 어쩌면 대상이 내 부모여서 무시나 경멸이 담겨 있지 않을 뿐 남과 다르지 않은 내 시선이었는지도 몰랐다. 영웅까지는 아니어도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인간으로 내 부모를 바라보았던 적도 있었다. 이상을 위해 목숨도 내걸었던 부모님은 내 삶의 지표였고, 고난에 찬 두 분의 인생은 감히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서 피곤을 이기지 못해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부모님은 억압과 착취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던 혁명가가 아니라 다만 가난하고 볼품없는 늙은네일 뿐이었다.

탄 사람이 들뜬 여행객이든 휴식이 필요한 지친 영혼이든 차는 애초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저녁때가 가까워지면서 햇살이 누그러들자 굳이 창문을 열지 않아도 차안 공기가 서늘해졌다. 산중턱으로 뚫린 길이라 평지보다 기온이 더 낮은 듯했다. 답답하게 막아서던 산이 멀찌감치 물러나더니 낮은 구릉지대가 나타났다. 먼 초원 위로 소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멀리 펼쳐진 구릉은 푸르렀지만 가을 문턱의 푸르름은 한여름의 맹렬한 기세를 잃은 채 쇠락의 싹을 품고 있었다.

“여그가 워디다냐? 우리나라에 이런 디도 있다냐?”

두 시간 가까이 깊게 잠들었던 어머니가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더니 차창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삼양목장 아니다고. 우리나라서 방목이 가능한 디는 여그뿐이여. 것도 모르고 5공 때 멀쩡한 나무 베내고 사방디다 초지 만들었다가 낭패만 안 봤능가. 여그는 한여름에도 기온이 낮아서 풀들이 웃자라들 않는다등만.”

자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잠기라고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참말 좋소이. 이런 디서 살았으먼 쓰겄소.”

“여그 목장엔 늙은이들도 많다등만 우리는 너무 늙어서 안될 것이여. 한 칠십까지나 받아줄랑가 모르제. 허기사 젊었어도 당신같이 일도 못하는 골골이를 누가 받아줄 것이여?”

산에서 워낙 고생을 한 탓에 어머니는 늘 어딘가가 좋지 않아서 골골 앓았던 것이다.

“내가 왜 일을 못해라? 당신 없을 제 나 혼자 열마지기 논농사를 다 지었는디. 힘은 없제만 악으로 버티기로 하믄야 나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이요.”

“허기는 산에서 당신 벨멩이 독종이었다등마.”

한 고향 출신이지만 어머니는 남부군, 아버지는 전남도당 소속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산에서는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독종이 아니었으먼 그 시절을 워치케 젼뎠겄소. 그때 우리들이야 다 독종이었제.”

두 사람의 대화는 빨치산 시절로 이어졌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부모님이 나누는 모든 대화의 끝은 늘 그랬다. 빨치산 시절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었다. 낯설고 강렬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깊이 각인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군대 가서 첫휴가 온 남자들이 입만 열면 군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사람들이 첫사랑을 좀체 잊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군대 이야기도 첫사랑도 몇년쯤의 세월이 지나고 나면 빛이 바랜다. 현재형이 아닌 이상 아무리 아름답고 강렬한 기억도 세월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그래서 인간은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누군가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내 부모는 무려 오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세월에 붙박여 있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마저 금지되어 있던 시절에는 이불 속에서라도 끊임없이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고작 오년에서 육년에 불과한 젊은날의 짧은 시간이 두 사람의 평생을 단단하게 얽어매고 있는 것이다.

“그람 여그부터 대관령이다요?”

“글제. 쪼까 더 가먼 정상일 것이여.”

깊고 찬 겨울강처럼 가라앉아 있던 어머니의 눈 깊숙한 곳에서 생기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지금 후평 후퇴시절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현상 부대 소속으로 낙동강 전투에 합류했던 어머니는 9·28 후퇴 시 태백산맥을 따라 북으로 올라갔다. 다가올 비극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이현상 부대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평생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그때를 간직하고 있다.

“워디가 워딘동 통 모리겄네.”

“근 오십년 전에 와본 디를 워치케 알겄능가.”

남부군이 9·28 후퇴 소식을 들은 것은 인민군이 이미 철수해버린 며칠 뒤였다. 그러니 시월 초순경에나 이 부근을 지났을 것이다. 정상에서 불타기 시작한 단풍이 칠부능선쯤 내려갔을까. 잎을 떨구기 직전 마지막 생명의 힘까지 끌어올려 붉게 타오르는 단풍을 헤치고 남부군은 자신들의 코 앞 운명도 모르는 채 단풍보다 더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을 혁명의 열정을 품고 이 길을 걸었으리라. 후퇴하는 길이긴 했지만 아직 승리를 장담하고 있던 때이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에 개입한 미군이 서쪽으로 너무 빨리 치고 올라가는 바람에 태백산맥 쪽에는 전선이 형성되지 않아 벌건 대낮에도 혁명가를 큰 소리로 외쳐 부르며 북진을 했다고, 어머니는 말했었다. 창문을 열었으나 우렁찬 혁명가는 들리지 않았고, 차들의 소음 사이로 소슬한 바람만 끝부분에 붉은 기가 도는 나뭇잎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제법 세차진 바람이 가는 나뭇가지들을 뒤흔들 때 나는 문득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자기 키만한 장총을 멘 인민군 차림의 젊은 어머니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 듯도 했다. 그러나 이내 바람은 잦아들었고, 코앞의 혁명을 믿으며 숨져간, 혹은 실패한 혁명에 통분하며 눈감은 무수한 죽음과 슬픈 청춘의 기억을 깊숙한 품에 그러안은 산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나는 오직 고요했을 뿐이라는 듯 시침을 떼고 있었다. 정상이 가까워올수록 쇠락의 기미가 농후한 대관령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무심한 산이었다. 모퉁이를 돌자 잠시 모습을 드러내던 검은 바다가 다시 산 뒤로 숨었다.

“여그 워디를 지났는갑소. 오른짝으로 바다가 보이다 말다 그랬응게……”

남편이 비상등을 켜더니 갓길에 차를 세웠다.

“멀라고?”

“여기서 한번 찾아보시라구요.”

“멀라고. 봐야 알 수나 있간디.”

“그래도……”

“봤응게 되얐네. 후딱 가세. 폴쎄 해가 질랑갑그마. 어둬지기 전에 당도해야 할 것 아닌가.”

아직 여섯시도 되기 전이고 정상에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한낮에는 여름기운이 선연한 초가을인데 벌써 거뭇거뭇한 어둠이 숲 안쪽에서 음험하게 스멀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굽이진 길 때문에 멀미가 나는 모양이었다.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바다가 조금씩 가까워졌지만 어머니는 내처 눈을 감고 있었다. 간혹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청춘의 흔적을 조금도 담고 있지 않은 산 대신 어머니는 당신 마음속에 생생하게 간직된 그 시절로 눈을 돌린 것인지도 몰랐다. 보름만 지나면 이 길에는 행락차량들이 끝도 없이 늘어설 테고, 또 보름만 지나면 정체되어 있던 길이 뚫리듯 산은 나뭇잎을 떨궈 여름내 감추고 있던 제 속살을 열어 보일 것이다.

바다가 불쑥 옆으로 나타났다. 산에는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으나 바다는 늦은 오후의 시든 햇살을 품고 아직 푸르렀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짭쪼롬한 바다냄새가 달려들었다. 오싹 소름이 돋도록 시린 바람이었다. 어머니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따, 좋다이. 뭐니뭐니 해도 동해바다가 젤이드라. 저렇게 탁 트여야 맛이제. 남해는 오종종허니 섬들이 가로막아갖고 답답하기만 허등만.”

“그럼 전망 좋은 데서 차를 좀 세울까요?”

남편이 묻자 어머니는 또 휘휘 고개를 저었다.

“멀라고. 차에서 봤으먼 됐제. 후딱 가소. 피곤할 것인디 후딱 가서 쉬어야제.”

우리끼리 온 여행이었다면 남편은 경치 좋은 곳마다 차를 세우고 바람을 쐬며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 집안 곳곳에 넘쳐났다. 사진첩 정리하기 좋아하는 남편마저 포기했을 정도이다. 거실 한켠에 사진첩을 곱게 꽂아두고, 빈 벽마다 가족사진을 걸어두는 사람들은 내가 맛보지 못한 인생의 어떤 달콤함을 알고 있는 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보는 것이 어린시절부터의 소원이었다. 그 소원을 넘치도록 이루었으나 인생의 어떤 달콤함을 나는 아직 맛보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기른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사진첩으로 표상되는, 내가 꿈꾸던 무엇은 아니었다.

남편이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정차할 곳을 찾는 모양이었지만 마땅한 갓길이 없었다.

“운포라고 하지 않았어?”

아버지 생일날 무슨 선물을 할까 망설이는 내게 부모님을 모시고 동해바다나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물은 것은 남편이었다. 혼자서는 오십 미터도 걷지 못하는 어머니와 장거리 여행을 한다는 게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동해바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운포가 떠올랐던 것이다. 운포에나 한번 가봤으먼 쓰겄다,는 게 오래 전부터 어머니의 바람이었다. 아버지가 올밤을 주우러 산에 갔다 운좋게 송이버섯이라도 하나 캐오면 운포 솔밭에는 송이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는디 했고, 눈알이 희끄무레한 생선들뿐인 장에서 몇번이나 생선전을 돌다가 별수 없이 물 간 생선을 살 때면 운포에서는 펄펄 살아뛰는 것들만 묵어도 생선이 남아 돌았는디, 했다. 38선이 안방을 가로지른다는 어머니 친구네 집이며 봄이면 푸른 바닷가에 새빨갛게 피어났다는 열구꽃까지도 나는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운포는 어머니의 고향과도 같았다. 미두(米豆)를 하다 삼천석 살림을 날린 외할아버지는 홀연 집을 떠났고 3년 후에야 반 거지꼴이 되어 나타났다. 그러고는 전라도 땅에서 머나먼 양양 운포로 식솔들을 끌고 간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고향에서 가급적 먼 곳으로 떠난 것은 굶어죽을 지경이 되어서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전주 이씨 후손으로 생선장수나 하며 살아가는 꼴을 외할아버지는 친형제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벌이만으로는 아홉이나 되는 자식을 제대로 거둘 수 없어 마침내 막내를 영양실조로 잃은 외할머니가 남편이 장사 나간 사이에 넉넉한 친정 그늘로 되돌아갈 때까지 근 십년을 어머니는 운포에서 살았다. 운포로 떠날 때가 여섯살이었고 전라도에 돌아와서는 곧장 결혼했으므로 어머니에게 고향은 누가 뭐래도 운포였다. 어머니의 운포 타령을 어려서는 귓전으로 흘려들었다. 내게는 고향이라는 의미가 그닥 절실하게 와닿지 않았던 탓일 게다. 취직을 한 후로 나는 고향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고향은 그야말로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그제야 어머니의 운포 타령이 실감나게 느껴졌고, 떠난 이후 단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곳이 어머니의 마음속에 얼마나 절절하게 사무쳤을지 조금은 짐작이 되었다. 언젠가 한번은 어머니를 모시고 가야지 생각한 게 벌써 십여년이 훌쩍 지나고 만 것이다.

“방금 운포라는 표지판을 지나친 것 같은데……”

마땅히 차를 댈 곳이 없자 남편은 비상등을 켜고 끝차선에 반쯤 걸친 채 차를 세웠다.

“한번 보세요. 바로 전에 지났으니까 운포가 맞다면 기억이 나실지 모르잖아요.”

왼편으로 멀리 태백산맥이 뻗어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갈대 무성한 평지가 바다까지 잇닿아 있었다.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 것 같은디…… 잘 모리겄네. 그때는 이런 땅을 워디 그냥 놔뒀간디. 머라도 심어 묵었제. 운포에는 이런 들이 없었는디…… 지나왔다냐 어쩐다냐.”

“돌아가볼까요?”

“쪼깐 더 가보세. 운포를 방금 지났으먼 바로 현남국민핵교가 나올 것잉게. 애들 걸음으로 한 삼십분 남짓 걸렸응게 차로 가먼 금방일 것잉마.”

“운포가 무슨 면이죠?”

“이. 양양군 현남면 운포여.”

혹시나 나올지도 모르는 표지판에 대비해서 남편은 시속 사십 킬로로 차를 몰았다. 마을을 멀찌감치 두고 쫙 뻗은 8차선 도로에는 한동안 표지판이 나타나지 않았다.

“장모님. 양양시라는데요. 보자, 한계령 가는 길인 걸 보니까 이건 시내 들어가는 길인데……”

“워디?”

어머니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목을 빼고 표지판이 가리키는 삼거리를 유심히 살폈다.

“여그가 워딘고?”

“양양 시내예요. 현남초등학교가 시내 지나서 있었나요?”

“워디가, 운포 지나서 핵교가 있었고, 또 거그서 한참을 더 가야 양양인디.”

“자세히 보세요. 여기가 속초하고 양양 시내가 갈라지는 삼거린데, 길이야 확장됐겠지만 아마 옛날에도 삼거리였을 것 같은데요.”

“장꾼들이 읍내 갔다온 거야 봤제만 직접 와본 적이 있어야제. 모리겄그마.”

아무래도 지나온 모양이었다. 여섯시 반. 되돌아가서 운포를 찾기에는 조금 늦은 듯했다.

“어떡할까요? 멀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 돌아가서 찾아보고, 거기서 저녁을 먹을까요?”

“아매 식당 같은 것도 없을 것잉마. 원체 작은 동넨디. 그냥 가세. 니알 밝을 제 찾아보제 뭐.”

열여섯에 떠나오고 처음 찾은 고향인데 하루쯤 더 늦는다고 대수랴. 남편은 가속페달을 밟았다. 아마 대포항쯤에서 저녁을 먹어야 할 듯했다. 이내 속초비행장 표지판이 나타났다. 왼쪽으로 꺾어져 조금만 들어가면 진전사가 나올 것이다. 은빛 억새 위로 달빛 부서지는 밤의 폐사지가 한결 운치있을 테지만 부모님과 함께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폐사지에 왔던 것은 교사가 된 첫해 가을이었다. 문예반을 담당한 지 몇달 만에 이런저런 대회에서 입상자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성적과 상관없는 일은 무엇이든 이브를 꼬드긴 사악한 뱀쯤으로 여기는 교장이 학교버스까지 내주면서 답사를 허락했던 것이다. 그해 봄 백일장에서 ‘바람’이라는 제목을 냈더니 바람은 기압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서 바람의 종류에는 편서풍 운운하던 아이들이 문예반을 하면서 놀랍게 달라지는 모습에 나 역시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사년 가까이 근무했던 사회과학 출판사가 영업난으로 문을 닫은 뒤 하릴없이 돈이나 쓰며 대학원에 다니다가 남편 벌이만으로는 십년이 지나도 셋방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 같아 선택한 교직이었지만 나는 마치 교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사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진전사까지 버스가 들어가지 못해 마을 어귀에서 차를 세웠을 때 아이들은 긴 잠에서 깨어나 투덜거렸다. 아무리 공부벌레들이라고 해도 여행의 설렘조차 없이 서울서부터 내리 잠만 잔 아이들에게 거의 절망하고 있던 나는 얼마나 걸어야 되느냐, 폐사지라면 볼 것도 없을 텐데 뭐하러 가느냐, 그냥 갔다온 것으로 치고 숙소에 가서 밥이나 먹고 노래방이나 가면 안되느냐는 등의 질문에 일일이 대꾸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말없이 앞장서 걷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여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녀석들을 깨워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 깊숙한 곳까지 외지인의 별장이 간간이 들어서 있었지만 그래도 주변경관을 크게 해칠 정도는 아니었고, 조금 더 들어가자 인가도 없이 깊은 계곡을 끼고 있는 호젓한 길이 제법 걸을 만했다. 시험이니 뭐니 일상사로 시끄럽던 아이들이 언젠가부터 침묵하고 있었다. 폐사지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시커먼 먹구름이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더니 이내 마른번개가 번쩍였다. 신기하게도 조금 먼 하늘은 눈부시게 파랬다. 잡초 무성한 빈터에 탑 하나만 달랑 서 있는 폐사지를 만난 것은 대낮의 어둠속에서였다. 천여년 전 수행자들이 고요히 오갔을 진전사 터에는 당시의 침묵이 그대로 고여 있는 듯했다. 갑작스런 날씨 변화는 마치 그 침묵을 지키려는 하늘의 뜻인 듯했다. 혼자 있을 때는 휴대전화로라도 친구들과 수다를 떨어야 하는, 잠시도 입 다무는 법이 없던 아이들마저 침묵의 무게에 짓눌려 미동도 않고 폐사지 빈터에 묵묵히 서 있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부도를 보러 가는 길에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이내 굵어졌다. 살갗이 아프도록 굵은 빗줄기가 온 세상을 난타하고 있었다. 풀숲과 나무와 천년 된 부도를 두들겨대는 빗방울이 아이들의 영혼까지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먹장구름은 갑자기 온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 싶게 청명해진 가을하늘을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날 아이들은 폐사지에서 멀지 않은 저수지 둑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풀물이 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폐사지의 정적을 깨뜨리던 아이들의 거칠 데 없는 웃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폐사지의 깊은 외로움이 소나기가 되어 우리를 맞았다고, 그 비가 우리의 영혼을 적셔 알몸으로 자연과 만날 수 있었다고, 한 아이가 졸업문집에 그렇게 그때를 회상했다. 아이들은 오래도록 그 경험을 잊지 못했다. 그러나 그 한순간의 경험이 아이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는 없었고, 나 역시 조금 색다른 선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별로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연이나 생의 신비보다도 아이들을 더 강렬하게 흡입하는 것은 돈이나 간판 없이는 행세할 수 없는 냉정한 현실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첫 햇살을 받으며 돌아가는 노동자의 지친 어깨나 농사꾼의 거친 손마디, 상처입은 자들의 슬픔 따위는 몰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돈이나 간판 없이는 살기 힘들다는 것을, 아이들은 머리가 채 굵기도 전에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요즘에는 일년 단위로 세대차이가 발생한다더니 아이들은 해가 바뀔수록 놀랍게 영악해졌고, 나는 도무지 그 발빠른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뭉크의 ‘절규’를 보여주며 소감을 말하라던 첫수업에서 첫해에 만난 아이들은 이미 절반쯤 마음의 문을 열었지만, 삼년 전에 가르친 아이들은 나름대로 모범답안을 말한 뒤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선생님,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수업하나요? 자주 그럴 거라고 했더니 녀석은 말했다. 그럼 진도에 차질이 생기지 않나요? 수능에서 언어영역이 제일 중요한데…… 그 다음해에는 그렇게 묻는 녀석도 없었다. 무성의하게 답변한 후 보란 듯이 영어단어장이나 수학책을 꺼내놓았던 것이다. 내 책상에서 교과서와 참고서 외의 자료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아마 교장이 바라는 선생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출제유형을 파악하고 출제가능성을 점찍어 가르칠 만큼 유능한 선생도 아니어서 나조차 정답을 찾아내기 어려운 오지선다형 문제나 풀어주며 적어도 겉으로는 교장이나 학생들이 원하는 선생의 흉내를 충실하게 내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수능문제나 내가 낸 시험문제조차 다 맞춰본 적이 없었다. 두 개의 답을 놓고 망설이다 틀린 쪽을 고르는 경우가 번번이 두어 문제는 되었다. 그놈이 그놈 같은 다섯 개 중에서 정답을 쏙쏙 찾아내는 아이들이 신기할 정도였다. 시나 소설을 놓고 단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오리무중 혹은 어불성설이었다. 만점을 기대하고 그래서 좋은 대학 잘나가는 과에 진학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아이들에게나, 일류대 진학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는 학교에서 나 같은 사람이 과연 선생의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열정이나 희망은커녕 최소한의 자신감마저 나는 상실해버린 게 아닐까. 학교생활이 버거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진전사는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그 뒤로 남편과 여러차례 속초비행장 부근을 지나면서도 나는 진전사에 가보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남겨놓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곳에서조차 어떤 희망이나 위안도 얻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대포항 표지판이 나타났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집어드는 참인데 차는 주차장을 지나쳐 내처 달리고 있었다. 대포항쯤에서 회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하는 걸로 생각했던 나는 잠시 의아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남편의 옆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막 튀어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켰다. 재작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달 전 마지막으로 함께 온 곳이 바로 대포였던 것이다. 두 번에 걸친 항암치료로 몸무게가 고작 삼십 킬로밖에 나가지 않던 시어머니는 죽음에 대한 무슨 예감이 들었던 것인지 불쑥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대장암을 앓던 시어머니는 대포항 횟집에서 겨우 회 두 점을 먹었을 뿐이다. 오리털 파카를 뒤집어쓴 채 망연히 바다를 보던 시어머니는 불쑥 앙상한 손으로 잔을 내밀었다. 남편은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 동네 시장 어귀 포장마차로 어머니를 불러내어 멍게나 곱창 따위를 안주 삼아 소주 한병씩을 비우곤 했다고 한다. 소주를 두 잔 마시고 좀 걷고 싶다던 시어머니는 방파제 끝에 쭈그려앉아 노래를 불렀다. 겨울밤, 하늘과 바다를 구분할 수 없는 깊은 어둠속에 멀리 오징엇배의 불빛만 아득했다. 일찍 남편을 잃고 검은 바다처럼 막막했던 인생과 마지막 작별이라도 나누는 듯한 시어머니의 여윈 뒷모습에 남편은 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이 부러웠다고 하면 남편은 벌컥 화를 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부러웠다. 어둠속에 쭈그려앉아 먼 바다를 보며 노래를 부르는 시어머니의 모습에 슬픔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허락된 아주 짧은 순간조차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평생 단 한순간이라도 저렇듯 슬픔이든 아픔이든 상처입은 자신의 내면을 고즈넉하게 들여다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해본 적이 있을까 싶어, 건강하게 살아 있는 내 부모가 더 안타까웠던 것은 비정하게도 한 다리를 건넌 남이라서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시어머니의 그 모습을 기억할 때마다 저릿한 슬픔과 함께 부러움을 느낀다.

남편이 차를 세운 곳은 고속버스터미널 앞 설악해수욕장이었다. 카디건을 걸쳤는데도 밤바람이 차가웠다. 횟집 뒤로 돌아가는 길 대신 남편은 백사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백사장을 가로질러 방파제로 갈 모양이었다. 지름길이기는 했다. 몇년 전에 새로 생긴 방파제에는 싼 횟집들이 몰려 있었다. 임시 포장마차긴 해도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가 투명 비닐창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다른 어느 곳보다 근사했다. 파도가 먼 바다의 어둠을 조금씩 백사장으로 물어나르고 있었다. 흰 반팔 티에 반바지 차림의 젊은 여자가 우리 옆을 휙 스쳐 뛰어갔다. 쌘들 자국 선연한 맨발이었다. 모래에 묻혔던 여자의 하얀 발은 모래알을 사방으로 튕겨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머니의 체중이 점점 내 두 팔에 쏠리고 있었다. 모래사장은 뻘이라도 되는 듯 어머니의 발을 빨아들인 채 쉽게 토해내지 않았다. 내 팔에 매달린 어머니가 견딜 수 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백사장을 절반이나 가로질렀을 때 어머니는 털썩 모래 위에 주저앉았다. 어머니의 시선은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더욱 희게 부서지는 파도나 먼 수평선이 아니라 흰 반팔 티의 여자를 뒤쫓고 있었다. 여자는 샌들을 양손에 든 채 파도를 향해 달려나갔다. 먼길을 달려와 마침내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 사이로 여자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겅중겅중 뛰고 있었다.

“멋이 저렇게 좋을끄나?”

어머니의 얼굴에는 뜻밖에 희미한 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여행도 젊어서 다녀야제 늙응께 힘만 들고 뭘 봐도 좋은 중도 모리겄다. 산도 시시허고 바다도 시시허고……”

산도 바다도 시시한 것은 늙어서가 아니라 늙은 어머니의 가슴속에 더이상 혁명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붙잡혔을 직에 죽을라고 했는디 죽을 틈을 안 주드라. 그때 나는 이미 죽은 것이여. 언젠가 무슨 말끝엔지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남편은 방파제 맨 끝의 횟집 앞에서 산소 호스가 꽂힌 붉은 통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횟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살집 좋은 중년여자가 남편이 가리킨 광어를 뜰채로 건졌다. 광어가 뜰채 안에서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자는 익숙한 솜씨로 광어를 시멘트 바닥에 팽개쳤다. 반쯤 기절한 광어가 정신을 차릴 때쯤에는 이미 온몸의 살이 솜씨 좋게 발라져 앙상한 뼈만 남아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 집에서 잡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 나에게 아버지는 화를 냈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것이고, 먹는 것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것은 삶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던가. 개고기 안 먹는다고 굶어죽을 것도 아니지 않냐는 말을 나는 하지 못했다. 여기는 총탄과 굶주림에 맞서 싸우던 그 옛날의 전쟁터가 아니지만, 동지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던 아버지에게는 아무리 넘쳐나더라도 먹을 것은 곧 생명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아버지는 산에서 보름을 굶은 적도 있다고 했다. 먹을 것을 찾아 산을 내려가던 아버지는 도중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동지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일어나보려고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몇사람의 목숨을 희생한 보급투쟁으로 고작 몇줌의 보리쌀 정도를 구한 동지들이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한 동지가 어렵사리 구한 계란 하나를 깨트려 아버지 입에 흘려넣었고, 그 계란이 식도를 통과해 위에 도착하는 순간 아버지는 눈을 떴다. 아버지에게 먹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몇시간씩 요리와 대화를 음미한다는 프랑스의 정찬 같은 것을, 아마 아버지는 부르주아의 사치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돈이면 가난한 노동자들 수백명의 배를 채워줄 수 있다고 덧붙일 테지.

남편이 물컵 가득 소주를 따랐다. 아버지는 한자리에서 물컵으로 한잔 이상은 절대 마시지 않았다. 매일 소주 두 병을 먹는 애주가이면서도 아버지에게 소주는 노동의 피로를 덜어주는 음료수일 뿐이었다. 대학시절 이문구의 ‘공산토월’을 읽으면서 나는 석공의 결혼식 잔치에 참석한 주인공의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춤추는 장면에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내게 익숙한 것은 두 고랑쯤 고추를 따고는 흰 플라스틱컵 가득 소주를 따라 물처럼 마시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천천히 술에 취하고 취한 만큼 마음이 열려 내가 달이 되고 달이 내가 되는 그런 술꾼의 경지를 아버지는 느껴본 적도 없을 것이고, 아마 그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처갓집 식구들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노래도 한 곡 뽑는 흥건한 술자리를 기대했던 남편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절대 술꾼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술꾼이란 술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술의 흥취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나. 니네 식구들은 참 재미없어, 하는 말끝에 남편이 우스개로 덧붙인 이야기였으나 나는 우습지 않았고 입안에 모래를 털어넣은 듯 껄끄러웠다. 자신이 도저히 섞여들 수 없는 우리 식구를 남편은 간혹 니네 식구들이라고 불렀다. 아마 나까지 포함된 지칭일 게라고 나는 짐작했다.

주고받는 말도 없이 회 한접시를 다 비우고 매운탕에 공기밥까지 먹고 난 부모님은 혹시 아깝게 남겨놓은 것은 없는지 탁자 위를 유심히 살폈다. 아버지가 하나 남은 메추리알을 집어들었다.

“뭘 좀 더 시킬까요?”

식욕이 당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남편이 물었다.

“아녀. 냉기기 아까와서 그랴. 바닷가라 회가 싱싱허니 맛나그마. 맛나게 잘 묵었네. 여그 얼마요?”

아버지가 바지 뒤춤에서 지갑을 꺼냈다. 남편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그러지 마세요, 아버님.”

“아녀. 나가 권서방 맛난 것 한번 사주도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랑께 가만있게.”

아버지는 남편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횟값을 치렀다. 어제 오후까지 올밤을 수매해서 받은 돈인 듯했다. 기어이 수매를 마치고 오겠다더니 여행가서 자식들 밥 한끼라도 사줄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 방식의 자식사랑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매번 그런 아버지가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편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휭하니 나가버렸다. 언젠가 남편이 부모님에게 함께 살자고 한 적이 있다. 장인 장모를 모셔야 한다는 것은 남편이 무남독녀인 나와의 결혼을 결심했을 때부터 각오한 바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멀라고 자식헌티 짐이 될 것잉가. 자네 장모가 안즉 밥은 끓에 묵을 만헝게 지금은 되얐고, 누가 먼저 죽등가 움직일 수 없게 되믄 양로원으로 들어갈 것이여. 좋은 디 봐놨응게 신경쓸 것 없네. 넘헌티 짐이 될 정도먼 살 필요도 없제. 나야 늘 듣던 말이라 그러려니 흘려듣고 있는데, 남편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언성을 높였다. 자식을 두고 어떻게 양로원 가신다는 말씀을 하세요? 자식이 남입니까? 남편은 정말 섭섭한가보았다. 하기야 남편은 장남이 아니면서도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늙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정작 같이 살지는 못했지만 시어머니는 함께 살자는 남편의 말에 늘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다.

화장실에 다니러 간 남편은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밥 한끼 얻어먹지 않으려는 장인에 대한 서운함이 돌아간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고, 남편은 지금 한겨울 매서운 삭풍처럼 아직도 가슴을 후벼 파고 있을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등에 짊어진 채 방파제나 백사장을 걷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남편이 반쯤 남겨놓은 소주잔을 털어넣었다. 김빠진 소주는 싱겁고 맹맹했다.

“아버지, 한잔 더 하실래요?”

“나는 됐다. 느그들은 한잔 더 할라믄 하등가.”

어머니가 휘휘 손사래를 쳤다.

“아이가, 운전할 사램이 폴쎄 두 잔이나 마셨는디, 멀 더 묵어라. 가서 권서방이나 찾아봐라. 그만 쉬었으먼 쓰겄다.”

어머니의 눈가가 약간 짓물러 있었다. 약시인 탓에 어머니의 눈은 조금만 피곤해도 핏발이 서곤 했다. 아픈 눈을 몇번 문지르고 나면 이번에는 유독 약한 눈꺼풀이 짓물렀다. 어머니는 짓무른 눈을 자꾸 비벼댔다.

영랑호 주변의 별장형 콘도에 여장을 풀자마자 부모님은 시계를 보았다. 아홉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쉬고 싶다던 어머니는 방에 들어가는 대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다. 뉴스 볼 시간이었던 것이다. 부모님의 하루는 텔레비전 첫 뉴스로 시작해서 배급소를 직접 찾아가서 받아온 두 종류의 신문을 샅샅이 읽는 것으로 이어졌고, 중간중간의 뉴스를 거쳐 아홉시 뉴스를 보는 것으로 끝났다. 전기세 몇푼이 아까워 촉수 낮은 전등불 아래 침침한 눈을 비비며 뉴스에 몰두하는 부모님을 보고 있으면 가슴속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부모님은 빨치산 시절 이래로 세상의 변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일종의 체질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 두 분에게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죽음은 부모님을 비켜갔다. 몇백분의 일, 혹은 몇천분의 일이 넘을지도 모르는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부모님 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희망의 불이 꺼진 컴컴한 암흑, 혹은 실낱 같은 희망이 남아 있다고 해도 정작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암흑보다 더한 절망이었다.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했지만 한때는 혁명가였던 내 부모가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산골에서 농투성이로 살며, 산에 가려 지직거리는 텔레비전 뉴스에 목말라하고, 누구보다 정확하게 정세를 꿰뚫어볼 수 있다 한들 어디 가서 마음속의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슬픔을 넘어선 잔혹이라고나 해야 적확할 것이다. 죽는 것보다 못한 세월도 있는 법이다. 침침한 방안에서 뉴스에 몰두해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행위할 수 없는 열정을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인가. 부모님은 창밖의 영랑호 한번 내다볼 여념도 없이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행보다 함께 뉴스나 보고 두어 시간쯤 정치정세를 논해드리는 것이 두 분에게는 가장 즐거운 생일선물이었을지 모른다. 민노당이나 경실련, 혹은 무슨무슨 환경단체에 가입한다든지 진보적인 잡지 몇개를 정기구독하는 것도 값진 선물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주무실 방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돌아왔을 때 남편은 소주를 반병이나 비우고 있었다.

“뉴스 끝나려면 아직 멀었나?”

가는귀먹은 아버지가 잔뜩 키워놓은 볼륨 때문에 거실의 텔레비전 소리가 우리 방에까지 왕왕 울려대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신 양반들이야. 하루쯤 뉴스를 거르면 세상이 뒤집어진다니?”

남편은 조금 전 바닷가에서 만나고 온 어머니를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망자를 애틋이 회고하는 자리에 왕왕거리는 뉴스 소리가 어지간히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굳이 속초가 아니었다고 해도 장인 장모와 함께 하는 여행길 내내 어머니는 남편의 등에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제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작정한 순간부터 남편은 문득문득 어두운 표정이 되곤 했다.

“여기 좋네…… 여기서 묵었더라면 좋았겠다.”

잠시 끊긴, 남편이 차마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랬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이곳에 왔다면 도착하는 즉시 창문을 활짝 열었을 것이고, 뉴스를 보는 대신 베란다 파라솔에 앉아 술을 한잔 나누었을 것이고, 약간의 취기를 빌려 노래를 한 곡조 뽑았을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 나는 울컥 목이 메었다. 눈물샘으로 터져나오지 못하고 온몸의 모세혈관으로 슬금슬금 퍼져가는 울음기가 이제 죽어 다시는 그럴 수 없는 시어머니를 위한 것인지, 살아 있으면서도 그럴 수 없는 내 부모를 위한 것인지는 정확지 않았다.

다음날 번쩍 눈을 뜬 것은 새벽이었다. 습관처럼 후다닥 일어난 후에야 이곳이 여행지임이 생각났다. 다시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창문으로 새벽빛이 부옇게 스며들고 있었다. 문밖은 온통 안개의 늪이었다.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면서 안개는 집과 풀과 호수 언저리를 조금씩 토해냈다. 안개가 토해놓은 풍경 속에 남편이 서 있었다. 쌀쌀한 새벽공기 탓에 어깨를 잔뜩 움츠린 모습이었다. 나보다 좁고 가녀린 어깨를 가진 남편이 등을 내민 적이 있었다. 산동네 골목, 나무상자에 심어진 파와 부추에 햇살이 쏟아지던 한낮이었고, 좁은 땅을 비집고 간신히 자라난 라일락의 투명한 보랏빛이 산동네의 누추함을 더욱 잔인하게 드러내던 오월이었다. 업혀, 너를 업고 이 길을 걸어보고 싶었어. 아버지의 등에도 업혀본 적이 없던 나는 남편의 등이 생각보다 넓고 따뜻한 것에 놀랐다. 남편의 등에 업힌 채 골목길을 이리저리 걷는 동안 우연찮게 기웃거리게 된 달동네 집집마다 이를 데 없이 따뜻하고 소박한 온기가 적막하게 고여 있었다. 작은 꽃송이마다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살 탓이었는지 눈이 시렸다. 시린 눈을 깜박이며 나는 남편의 목을 단단하게 옭아쥐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키다리 아저씨의 정원’이 떠올랐다. 남편의 등에 업혀 있으면 삭풍만 몰아치던 내 정원에도 봄이 찾아오고 온갖 꽃들이 피어날 거라고, 나는 기대했던 모양이다. 나를 내려놓은 건 남편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이 휑한 방에서 수십년을 살아오는 동안 빈 공간에 익숙해진 나는 남의 담장을 기웃거리며 거기 피어 있는 꽃을 탐낼 뿐 내 담장 안에는 아무것도 키울 수가 없었을 뿐이다.

남편은 승원이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네활개를 펴고 잠들어 있을 시간인데, 맺힌 데 없이 밝은 성격이라고 해도 부모와 처음으로 떨어진 밤이 힘들었던가 보다.

“응, 하나도 재미없었어, 승원이가 없으니까. 승원이는 어제 뭐했어? 전화하니까 잔다고 하더라……”

승원이는 나보다 남편을 더 잘 따랐다. 하기야 갓난아이 때부터 손발톱을 깎아준 것도, 생일마다 온갖 모양의 풍선으로 집을 꾸미는 것도, 머리를 깎아주는 것도 남편이었다. 너무나 친밀한 두 사람의 관계가 나는 부럽고 신기했다. 출감하던 날, 십여년간 철창 너머로만 두어 차례 보았던 아버지가 나를 덥석 끌어안았을 때 나는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긴 듯 어색했다. 배 아파 나은 내 자식인데 승원이를 안을 때도 나는 어쩐지 낯선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남편은 내가 자신과 승원이를 밀어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날씨 좋은 날 산책하자는 제의를 거절했다거나 가족여행을 내켜하지 않았다거나 생일 혹은 결혼기념일 따위를 잊고 지나쳤다거나 할 때 남편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정말 이상해. 대체 뭐가 문제니?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문제는 없었다. 다만 남편처럼 자연스럽게 즐길 수 없을 따름이었다. 함께 간 여행에서 나는 도무지 남편과 승원이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에버랜드 튤립축제에서는 꽃만큼 많은 인파 사이를 거닐어도 아무 흥취가 생기지 않아 꽃샘추위에 덜덜 떨며 벤치에 앉은 채 잔뜩 신이 난 남편과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렸고, 스키장에서는 스키를 탈 줄도 모르고 별로 배우고 싶은 생각도 없어 콘도에 틀어박힌 채 밀린 잠이나 실컷 자곤 했다. 아마 여행도 습관성인 모양이라고, 두 사람과 공감하지 못하는 나를 변명하며 지내오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우리 사이에서 버석이고 있었다. 어쩌면 남편의 자취방에서 사진첩을 보는 순간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이물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 단단하게 영글어갔다.

통화에 정신이 팔린 남편을 두고 나는 돌아섰다. 문을 열자 커다란 뉴스 소리가 와락 엉겨붙었다. 부모님은 내가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여전히 세상을 향해 곤두세운 부모의 침침한 눈과 귀가 나는 짜증스러웠다. 뉴스는 부모님이 잠든 사이에도 세상은 별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전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혁명의 낭보를 기다리는 유배지의 혁명가처럼 뉴스에 전존재를 던지듯 빠져 있는 것이다.

남편은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할 무렵에야 들어왔다. 손에는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일부러 시내까지 다녀온 것이다.

“케이크는 멀라고. 달아서 묵을 수나 있간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남편은 케이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생일상인데 케이크가 있어야죠.”

“생일상은 무슨……”

7년 전 아버지 칠순에 이르기까지 우리집에서는 한번도 무슨 상을 차려본 일이 없었다. 내 다섯번째 생일이랬던가, 미역국만 달랑 올라와 있는 밥상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살구나 한 사라 따다놓제, 하고는 쯧쯧 혀를 찼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 허전했던 모양인데, 그랬던 나는 요즘 아들이나 남편의 생일조차 종종 그냥 지나치곤 했다.

“나갔으먼 신문이나 사오제 그랬능가.”

“일요일이라 어제치뿐이던데요.”

“참, 일요일이제. 요즘 기자들은 팔자 좋아. 일요일이라고 사건이 안 터지는 것도 아닐 것인디.”

“그만큼 세상이 안정되었다는 뜻이겠죠.”

남편이 그렇게 말을 받아친 것은 아마 먹지도 못할 케이크를 사온 무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화는 그뿐이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탁자에 모여앉았을 때 부모님은 구석에 놓여 있는 케이크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수저를 들었다. 남편의 눈길이 찬밥 신세로 구석에 밀려나 있는 케이크 쪽을 향하는 듯했다. 나는 접시를 밀어 가운뎃자리를 비우고 케이크를 가져다놓았다. 큰 초 일곱 개와 작은 초 일곱 개가 작은 봉투에 담겨 있었다. 초를 일일이 꽂고 불을 붙이는 것도 제법 손 가는 일이었다. 이런 걸 멀라고, 하면서도 아버지는 촛불을 훅 불었다. 서너 차례 입바람을 일으킨 후에야 열네 개의 초가 모두 꺼졌다. 그사이 촛농이 생크림 위로 몇방울 떨어졌다.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돌렸지만 부모님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부모님을 대신하는 심정으로 나는 달디달 것이 분명한 생크림을 한입 떠 넣었다. 나는 부모님 입맛을 그대로 닮아 달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진저리를 치면서 케이크 한조각을 다 먹어치우고나자 비로소 입맛이 돌았다. 짜고 매운 고추장 생각이 간절해진 것이다. 부모님은 케이크를 놓고 촛불을 껐던 생애 최초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오늘 아침의 이 자리를, 어색하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한순간으로 기억의 한 장에 저장해놓을까. 부모님에게 케이크가 있는 최초의 생일상 따위는 장기수 북송문제나 하다 못해 미군의 기름유출 사건만큼도 못할지 모른다는, 머위나물처럼 씁쓸한 예감이 입안 가득 고였다.

영랑호를 떠난 것은 아홉시 무렵이었다. 남편은 좀더 쉬고 싶은 눈치였으나 일찌감치 채비를 끝낸 어머니가 자꾸만 시간을 물어보는 통에 꾸물거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장모님 이러시는 거, 처음 보네요.”

시동을 걸던 남편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멀 월매나 좋아서 글간디. 뭉그적거리다 늦어질까배 글제.”

짝사랑이라도 들킨 양 어머니는 애써 변명을 해댔다. 어제 지나온 길을 되밟아가는 내내 어머니는 차창에 바싹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저기다!”

남편이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남편이 가리킨 곳에 작은 표지판이 서 있었다. 운포. 표지판에는 오른쪽으로 빠지라는 작은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장모님, 운포예요. 잘 보세요.”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어머니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여. 바다가 저만치 있응께 이짝에 산이 하나 있어야 되는디 여그는 평평한 들 아닌감. 운포 아니여. 만날 그 산에 다님시로 나물 뜯고 그랬는디.”

그러나 남편은 깜박이를 키고 오른쪽의 이차선 도로로 빠져나갔다.

“그래도 한번 가보죠 뭐. 표지판에는 분명 운포라고 적혀 있으니까.”

길은 방금 전에 빠져나온 8차선 도로 밑의 굴다리를 지나 바다를 향해 달렸다. 오백 미터쯤 지나자 길 양편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횟집들이 나타났다. 어머니에게 들은풍월로만 짐작컨대도 운포일 리가 없었다. 운포는 제대로 된 배 한척 가진 사람이 없던 궁벽한 어촌이었다. 이십여호 남짓 되는 마을에 땅이라고는 드넓은 백사장뿐 논마지기나마 가진 사람도 없어서 가을이면 볏짚 대신 억새를 베어다 지붕을 올렸다고 했다. 어머니네 집과 정화네 집은 마을 끝에 나란히 있었고, 남의 집 억새지붕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부서져도 지붕을 새로 올리지 못한 두 집은 달빛마저 꿀꺽 삼켜버리는 듯했다고, 어머니는 기억했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든 곳은 횟집 뒤쪽으로 아담한 이층 벽돌집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고, 백여호는 충분히 될 법한 제법 큰 마을이었다.

“내릴 것도 없그마. 여그 아니여. 그냥 가세.”

“지도상으로 봐도 여기가 맞아요. 좀 달라졌을 수도 있죠.”

“쪼깐 달라진 것이 아니랑께. 완전 딴판이여. 아니랑께.”

“그래도 내려서 한번 물어보기나 하죠.”

횟집마다 두어 대의 차들이 서 있긴 했지만 주말 장사치고는 한산한 편이었다. 횟집 앞 수족관에서 헤엄친다기보다 느릿느릿 흘러다니는 듯한 도미와 광어, 오징어 몇마리도 수족관 생활을 오래 한 것인지 생기가 없어 보였다. 수족관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종업원인 듯한 젊은 청년이 드르륵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들어오세요. 이거 다 자연산이에요.”

반듯한 서울말이었다.

“여기가 운포 맞아요?”

운포라는 표지판을 보고 들어온 곳에서 운포 맞냐고 묻다니. 게다가 바로 옆에는 운포횟집,이라고 눈먼 이도 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랗게 ‘운포’가 적혀 있었다.

“네. 운포 맞는데요.”

대답을 듣고 나자 더이상 할말이 없었다. 서울말 쓰는 청년에게 육십년 전의 그 운포가 확실하냐고 물어봤자 뾰족한 대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입맛이나 다시며 돌아섰을 것이다.

“젊은이는 여그가 고향이요?”

“아닌데요.”

자기 집에 들 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청년의 얼굴에는 짜증이 역력했다.

“그람, 운포 사램이 허는 횟집은 없소? 횟집 아니라도 운포가 고향인 사램을 쪼깐 만났으먼 허는디.”

청년은 말도 없이 옆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이편이 무안해질 만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아버렸다. 회를 시켜 먹으며 물어볼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장사 안되는 일요일, 오랜만에 손님인가 하고 반갑게 뛰어나왔다가 허탕친 심사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으나 유쾌하지 않았다.

“이보게, 젊은이.”

아버지가 큰 소리로 청년을 불렀다. 들리지 않았는지 혹은 무시한 것인지 출입문 안으로 들어간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아버지의 팔을 붙들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되느냐, 고등학생이 담배를 피느냐, 새치기를 하면 되느냐, 아버지는 못 볼 꼴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불의를 묵인하는 것도 불의라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고, 별볼일 없는 노인네로 늙어가면서도 아버지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했다.

“좀 참으세요. 아버지가 뭐란다고 콧방귀나 뀌겠어요.”

뒤따라나올 말을 짐작하고도 남아서 아버지의 말을 막는 심정으로 남편을 향해 얼른 덧붙였다.

“당신이 두 분 모시고 어디 좀 가 있어요. 내가 알아보고 올게.”

“당신이 모시고 가 있지? 내가 알아볼 테니까.”

“아니에요. 내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래요. 어디 솔숲이 있나 좀 찾아봐요. 솔숲이야 변하지 않았을 테지. 엄마가 늘 솔숲 얘기했거든.”

차 안에 있던 어머니가 내리는 걸 보고서야 나는 청년이 가리켰던 운포횟집으로 갔다. 사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억센 얼굴의 남자가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저,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여기서 현남초등학교가 가까운가요?”

“차로 한 오분 걸릴 거요. 새로 난 큰길말고 옛길로 가요. 그게 가깝고 찾기도 쉬울 거요. 옛길 바로 옆에 있으니까.”

표정과 달리 남자는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애들 걸음으로 삼십분 남짓이었다니까 차로 오분이라면 얼추 맞아떨어졌다. 이제 뭘 물어봐야 할지 망설이고 있던 참에 드르륵 문이 열렸다. 어머니였다.

“운포 맞다냐?”

“그렇대요. 현남초등학교가 이 근처래.”

“근디 요로크롬 변해부렀다냐? 한나도 모리겄다.”

우리 모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횟집 주인이 끼여들었다.

“운포가 고향이세요?”

“옛날에 잠깐 살았지라. 아자씨도 여그가 고향이요?”

“네. 여기서 태어나서 죽 여기서 살았지요. 운포가 고향이면 누구집……”

“아매 모릴 것이요. 뜨내기로 잠깐 살다 갔응께. 근디 옛날에는 요 앞에 작은 산이 하나 있었는디……”

“그랬지요. 몇년 전에 새길 뚫으면서 깎아 없앴지만.”

양편으로 횟집이 줄지어 선 마을 진입로에 시선을 둔 채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그가 운포라고?

“완전히 달라졌지요? 조금 일찍 오시지 그러셨어요. 한 십년 전만 해도 옛날 그대로였는데. 서울 사람들이 해수욕하겄다고 몰려들면서부터 조금씩 커졌지요. 회 먹으러 오는 사람도 생기고, 그러다보니 돈냄새를 맡고 외지인들이 하나둘 밀려들데요. 저놈의 도로가 생기기 전만 해도 경기가 괜찮았지요. 도로 확장한다고 좋아했더니만 옛길을 넓힌 게 아니고 서울 사람들 속초 가기 편하게 직선으로 새로 뚫는 바람에 손님이 확 줄었답니다. 그래봤자 한 이삼분만 돌아오면 되는데 서울것들은 그것도 귀찮은지 쌩 달려가버리더군요. 해수욕철에나 좀 반짝할까 운포도 이제 다 끝났지. 쥐구멍에 한 십년 반짝 볕이 든 셈이죠.”

손님도 없는 참에 횟집 주인은 신세한탄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혹시 유정화라고 아시오? 내 또랜디.”

주인의 이야기를 듣기나 했던 것인지 어머니가 불쑥 물었다. 유정화라는 이름을 나는 유년기부터 들어왔다. 그녀는 유난히 욕심이 많아서 뭐든지 어머니보다 뒤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고, 때로는 머리카락을 휘어잡는 패악도 서슴지 않았다. 공부는 별로였어도 조개를 잡거나 송이를 따는 데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고 수놓는 솜씨도 일품이었다고 했다. 장사 나간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굶고 있을 때, 자기네도 멀건 죽 두 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에 몰래 보리쌀 한 됫박을 훔쳐다 어머니네 열 식구의 허기를 면하게 해준 사람은 바로 전날만 해도 어머니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놓던 정화였고, 곶감이니 말린 오징어를 간혹 대문 안으로 밀어넣어준 이도 정화였다. 어머니에게 정화는 곧 운포였고, 운포는 곧 정화였다. 그 정화라도 이 운포 아닌 운포에 남아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자기 이야기가 중간에서 잘렸는데도 기분 상한 기색도 없이 곰곰 생각하던 남자는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씨라, 우리 동네에 유씨 성 가진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 마을 사람입니까?”

어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보아하니 여자 같은데, 여자라면 어디로 시집을 갔겠지 여기 살겠어요?”

“남편 죽고 친정 와 산다는 말을 들었는디……”

“그게 언젯적입니까? 여기 살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요.”

“그 소식을, 긍께, 아매 해방 무렵에 들었을랑가.”

“할머니도 참. 그러니 내가 모르죠. 세월이 얼만데 이제 와 어떻게 찾아요?”

남자의 말이 옳았다. 애당초 육십년 전의 고향을 찾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터무니없는 짓이었는지 모른다. 남자에게서 더이상 얻어낼 정보가 없는 듯한데 어머니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뭘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저 무심한 시선을 거리에 두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 한떼의 손님들이 밀어닥쳤다. 주인이 손님을 맞느라 부산한 틈에 나는 어머니의 팔을 붙들었다. 어머니의 촛점 없는 시선이 나를 향하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머니의 눈빛은 그 옛날 참깨타작을 하던 그날처럼 텅 비어 있었다.

“엄마.”

그제야 어머니의 시선이 명료해졌다.

“그만 가요.”

어머니의 팔짱을 끼고 막 돌아서는 참이었다. 손님 테이블에 물잔을 내려놓고 돌아서던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학주 할머니는 아시려나 모르겠네.”

남자가 쟁반을 든 채 우리보다 성큼 앞서서 문을 나서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동해횟집 보이죠? 그 옆으로 골목이 있어요. 그 골목이 원 마을이었는데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네요. 길도 넓어지고 집도 새로들 지어서 완전히 딴판이지만. 아무튼 그 길 끝에 똘이민박이라고 있어요. 그 집 할머니가 이 동네선 젤 연세가 많으니 혹 아시려나 모르지요. 거기서도 모르면 포기하고 우리집에 와서 회나 먹고 가세요. 고향분이시니 특별히 싸게 해드리죠.”

십년은 젊어진 듯 어머니의 걸음이 빨라졌다. 동해횟집을 끼고 꺾어지자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뭐 기억나는 게 있어요?”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무슨 민박, 욕실 완비를 내걸고 있는 집들은 지은 지 몇년 되어 보이지 않는 새집들이었고, 차 한대가 간신히 지날 만큼 좁은 길이긴 했지만 골목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추억은 저 육십년 세월만큼 단단한 시멘트 속에 파묻혀 있을 터였다. 지난여름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골목에는 가을햇살만 적막할 뿐 개 짖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똘이민박집의 새로 칠한 초록색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시멘트로 하얗게 발라진 마당에 햇살만 콩 볶듯 튀고 있었다. 어머니가 성큼 문 안으로 들어서서는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그러나 빨간 벽돌로 지어진 이층집과 시멘트 발라진 흰 마당 어디에도 어머니의 추억이 깃들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뭐 알아볼 만한 게 있어요?”

“통 모리겄다. 저짝이 산인 걸 봉께 우리집 터 같기도 허그만은 이렇게 넓들 안했는디. 정화네꺼정 터갖고 집을 지었으까?”

집 왼편은 담도 없이 야트막한 산과 잇닿아 있었다.

“우리집 옆으로 산이 제법 가팔랐는디 여그는 그냥 평평허네. 여그가 정화집 터고 우리집 터는 산이 돼부렀는지도 모르제.”

하기야 그 시절에 궁벽한 촌으로 이사오는 사람도 없었을 테니 어머니 집은 폐가로 버려져 있다가 잡초가 우거져 산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육십년이면 평지가 숲이 되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었다.

“아이, 저것이 백일홍 아니냐?”

어머니가 가리킨 것은 백일 동안 꽃이 피어 있다고 해서 목백일홍으로 알려져 있는, 아직 붉은 꽃을 매달고 있는 배롱나무였다. 배롱나무는 대문 오른켠의 좁은 화단에 갇혀 있었다. 화단에는 배롱나무 한그루만 심어져 있었고, 나무 그늘이라 햇빛도 별로 들지 않았을 좁은 터에 그래도 여름꽃들이 피어났던 모양인지 봉숭아 몇포기가 씨앗을 터뜨려버린 채 시들어가고 있었다.

남쪽에서 잘 자라는 배롱나무를 누가 심었을까? 담 안에 심어져 매서운 바닷바람을 피할 수 있었던 탓인지 나무는 살아남았고 가을의 문턱에서도 아직 꽃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여름의 열기를 추억하듯 꽃은 붉었다. 만물을 녹일 만한 뜨거운 태양을 이기고 여름 내내 피었을 꽃은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도는 가을날까지, 아직도 무언가를 기다리듯 차마 꽃을 떨구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가 잰 걸음으로 화단을 향했다. 열댓 뼘이나 될까, 배롱나무 한그루 서 있기도 벅찬 좁은 화단을 유심히 뜯어보던 어머니가 문득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여그가 정화네 집턴갑다. 정화네 집에 똑 이만한 화단이 있었서야.”

넓은 집터와 어울리지 않게 좁은 화단은 어머니의 말대로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커보였다. 언제 정화네 집을 사들여 새 집을 지었는지 확실치 않아도 배롱나무는 더디 자라는 나무였다. 둥치가 저만해지려면 적어도 몇십년의 세월은 버텨왔을 것이다. 어느 절에서 삼백년 되었다는 배롱나무를 본 적이 있는데 몇십년 자란 리기다소나무 정도의 둥치밖에 되지 않았다. 정화네 집을 사들인 사람이 오래된 나무를 베어버리기가 무엇해서 화단을 남겨두었는지도 모른다. 꽤 넓은 마당을 시멘트로 죄 도배할 정도의 주인이 화단을 만들고 배롱나무를 옮겨심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도 백일홍이 있었어?”

“워디. 그때야 맨 봉숭아, 분꽃 그랬제.”

그렇다면 배롱나무는 어머니가 고향을 떠난 후에 심어진 모양이었다. 친구를 그리워 함,이라는 배롱나무 꽃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전라도로 돌아간 친구를 그리워하며 정화가 손수 심은 나무일지도 모른다. 정화와 아무 상관없는 나무일지라도 어쩐지 나는 운포에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고향을 만난 느낌이었다. 돌담 안에 갇힌 좁은 땅이 어머니에게는 유일한 고향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화단 경계에 누군가 서툰 솜씨로 쌓아놓은 나지막한 돌무더기를 어루만지며 어머니는 시간을 거슬러오르고 있었다. 붉은 꽃이 송이지어 매달린 배롱나무 부근은 세월 속에 농익은 그리움인 양 가을햇살이 유독 붉었다. 느닷없는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어디선가 개가 짖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전화 걸어보라시는데. 빨리 오라셔. 우리는 금방 올 줄 알고 지금 솔숲에 있는데, 친구분 만난 거야?”

남편의 말을 전하기도 전에 어머니가 몸을 일으켰다.

“아부지제? 그만 가자.”

“이 집 주인 만나보고 가야지.”

“정화나 있으먼 모릴까 누가 됐든 만나서 뭐 하겄냐.”

“친구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지 알아요?”

송이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는 솔숲이며 열구꽃 빨갛게 피어난 백사장보다도 고향을 더 그립게 한 건 바로 정화였다. 정화가 없는 운포는 설령 옛 모습 그대로일지라도 어머니에게 반쪽짜리 고향에 불과했다. 하물며 외지인들이 밀려들고 횟집과 민박이 즐비한 이 운포는 어머니의 고향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정화 소식을 더 알려 하지 않고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추억을 배반한 육십년 전의 고향에서 어머니는 정화만이라도 온전한 기억 그대로, 아릿한 그리움인 채로 남겨두고 싶은 것일까.

비 내리는 가을 아침이면 죽순처럼 송이버섯이 고개를 내밀었다는 솔숲은 보잘것이 없었다. 어딘가에 쓰레기를 내다버리는 곳이 있는지 왕파리가 들끓었고, 사람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 똥무더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소나무도 시원치 않았다. 영동지방에서 몇년째 기승을 부린다는 솔잎혹파리 탓으로 잎마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땔감을 하려고 잘라 없앤 것인지, 작전지역이라 군인들이 감시를 위해 없앤 것인지, 아무튼 어머니 추억 속의 그 숲은 아니었다. 드넓었다는 솔숲의 크기도 형편없이 줄어든 것 같았다. 남편과 아버지는 똥냄새 풀풀 나는 솔숲에서 콘도에서 싸들고 온 몇가지 반찬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왜 여기 있어? 어디 횟집에라도 들어가 있지.”

“금방 올 줄 알았지. 아버님께서 친구분이 살아 있을 리 없다고 금방 오실 거라잖아.”

어머니는 막 일어나려고 엉덩이를 들썩이는 아버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머니는 끌어안은 양 무릎에 얼굴을 올린 채 백사장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바라보았다. 변변찮은 솔가지 틈새로 희디흰 백사장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바다에 이르기도 전에 백사장을 걷다 지칠 것 같았다. 어린 어머니는 한여름 태양이 작열하는 저 백사장을 걸어 바다로 갔던 것일까? 플라스틱병이며 못 쓰는 그물이며 스티로폼 따위가 군데군데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백사장 어디에도 붉은 열구꽃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주말인데도 사람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드넓은 백사장은 고요하다 못해 버려진 듯 쓸쓸했다.

“그만 가세. 볼 것도 없는디 한정없이 앉아 있으먼 뭐할 것이여.”

아버지가 몇번이나 재촉했으나 어머니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똥파리 한마리가 끈질기게 얼굴 주변을 맴돌고 있는데도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머니는 정화와 함께 송이를 뜯던 유년의 어느 가을 아침으로 돌아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어머니는 허리가 굽고 늙은이내가 나기 시작한 노인네였고, 어머니의 고향 운포 역시 죽는 날 받아놓은 노인네마냥 골골거리는 행색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아버지가 아이스박스에 남은 음식들을 챙겨넣고 담배꽁초까지 주워 인근의 쓰레기통에 버린 후에야 어머니는 한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힘겹게 일어섰다. 차에 오르기까지 어머니는 자꾸만 보잘것없는 솔숲과 먼 바다를 돌아보았다. 육십년 만에 찾은 고향을 벗어나는 데는 이삼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유리창에 얼굴을 맞대고 횟집 즐비한 운포를 내다보던 어머니는 차가 주도로로 들어서서 한참을 달린 후에도 그렇게 망부석처럼 굳어 있었다. 양양 삼거리를 지나서야 어머니는 뒷좌석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침에만 해도 생기가 돌던 어머니의 얼굴은 더이상의 일정이 무리가 아닐까 싶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바다는 따가운 가을햇살에 은빛 비늘을 뒤치고 있었다. 현란한 빛의 잔치가 벌어진 듯했다. 어젯밤 어둠속에 가만히 몸을 도사리고 있던 바로 그 바다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남편의 탄성에 눈을 뜬 어머니는 무심한 일별을 던지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어머니는 볼품없어진 솔숲과 즐비한 횟집을 털어내기 위해 저렇듯 미간이라도 찌푸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움의 대상은 함부로 대면해서는 안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 가족의 난생 첫 나들이가 후회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당신, 이 근처 어디에 좋은 절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거기나 들렀다 갈까?”

차는 막 속초비행장 삼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나중에요.”

지금쯤 진전사에는 그때처럼 억새가 은빛으로 피어나고 들국화가 진한 향기를 터뜨리며 바람에 살랑이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을 함께 했던 한 아이가 얼마 전 내게 말했다. 사법시험에 이년째 미역국을 먹은 녀석은 졸업을 앞두고 방황하는 듯했다. 철학과를 가고 싶어했던 녀석은 그런 데 갔다가 굶어죽기 십상이라는 부모에게 등 떠밀려 법대에 진학했다. 선생님이 그랬죠? 아무도 가지 않는 호젓한 숲길에서 아무도 손대지 않은 한 무더기의 산딸기나 나비의 황홀한 춤사위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정말 그럴까요?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녀석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너 자신을 믿고 거친 숲길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녀석이 기대하고 있을 그 말을 해줄 수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평생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전의 나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었고, 그 길의 끝에 여느 길과 다를 바 없는 허방이 기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떤 꿈으로 어떤 세월을 버텨왔든, 그 긴 여정이 끝나가는 지금, 늙고 초라할 뿐인 내 부모를 보는 일이, 그래서 나는 더욱 두려웠다.

“엄마, 힘들면 그냥 설악산에나 들렀다 갈까? 설악산은 바로 근천데.”

“지리산이나 설악산이나 그것이 그거제 뭐. 산이사 집에서도 맨날 보는디.”

아버지가 먼저 말을 받았다. 애초의 일정은 통일전망대를 가는 것이었다. 멀어봤자 차로 삼십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이 횟집 즐비한 운포와 다름없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인데 부모님은 기어이 가보고 싶은 듯했다. 민간인 통제구역에 들어서자 부모님은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차창 밖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분단된 후에 태어나 분단이라는 것을 당연한 조건으로 알고 살아온 나로서는 겉에까지 드러나는 두 분의 긴장이 조금은 과장된 것처럼 느껴졌다. 요즘에도 자유수호, 멸공 따위의 촌스러운 구호가 적힌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가두홍보를 벌이는 한국자유총연맹의 그 과장된 애국심이 문득 떠올랐다. 분단의 현실을 몸으로 겪은 극과 극은 어딘가 닮은 데가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기억이 과장된 포즈를 만들어낸 것일까.

차에서 내려 몇걸음을 걷고 난 어머니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전망대까지 오르는 일직선의 계단이 너무 가파르고 길었던 것이다.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길이었다. 남편이 등을 내밀었지만 어머니는 한사코 손을 저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에둘러오르는 길로 들어섰다. 계단보다 멀기는 하지만 오르기는 한결 수월했다. 내 팔에 매달린 어머니는 열걸음 만에 한번씩 주저앉아 허리를 두드렸다. 언덕 저 너머에 목숨을 걸고 추구했던 세계가 존재한다는 희망이 아니었다면 설령 선경이 펼쳐져 있다 해도 어머니는 오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리가 휘고 척추 몇마디가 혹처럼 불거진 다음에는 이만한 거리를 걸어본 적이 없는 어머니였다. 가보았자 북한의 산과 전시용으로 지어진 아파트 몇채 외에는 볼 것도 없다는 말을 나는 차마 하지 못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남한의 산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산일지라도, 전시용의 아파트 몇채일지라도 그것이 북한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부모님에게는 가슴 떨리는 감격일지 모른다.

지척의 전망대를 근 삼십분 만에 올랐을 때 아버지와 남편은 이미 구경을 끝내고 벤치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한발짝 내디딜 기력도 없던 어머니는 지금까지와 다른 날랜 걸음으로 전망대 난간을 붙잡고 섰다. 민둥산 위로 철책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오십여년 전 어머니와 아버지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로 철책은 변함없이 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다. 야트막한 잡초들이 누르스름하게 시들기 시작한 산등성이는 시야 확보를 위해 나무를 베어버린 섬뜩한 존재이유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양떼만 풀어놓는다면 그림엽서 같은 정경일 듯했다. 나는 전망용 망원경에 오백원짜리 동전을 집어넣었다. 전시용 아파트에 촛점을 맞춰놓고 어머니를 불렀을 때 나를 돌아본 어머니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손으로 망원경을 붙들고 멍하니 서 있는 나 대신 아버지가 어머니를 붙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팔에 기대어 북녘을 바라보았다. 어제 지나쳐온 대관령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대관령 초지에는 소떼가 풀을 뜯고 있었지만, 군사분계선 안에는 오십년 분단의 무게만한 적막만 감돌고 있었다.

“그때 후평에서 이승엽을 못 만났으먼 워치케 됐으까라?”

후평에서 당시 전선사령관이었던 이승엽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다시 후방 교란을 위해 유격활동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더라면, 남부군은 평양으로 갔을 것이다. 후평에서 어머니는 인민일보 기자의 요청에 따라 어느 인민군의 말에 올라탔는데 평생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했던 그 모습은 사진 속에 영원히 붙박였다. 당시의 인민일보를 뒤지면 아마도 어머니의 사진이 실려 있을 거라고 했다. 그날 밤 남부군은 국기훈장1급이니 2급이니 훈장세례를 받았고 다음날 힘들여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지리산에서 죽었다. 어머니처럼 살아서 지옥을 살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워치케 되긴. 미제의 간첩이라고 몰려서 다 숙청당했겄제.”

아버지의 대답은 냉정했다. 여순반란사건 직후부터 남한 사회주의운동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남부군은 위로 가도 아래로 가도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내년 봄에는 금강산 관광을 시켜드려야겠네. 여기 오지 말고 금강산에 보내드릴 걸 그랬나봐.”

아침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남편이 그렇게 속삭인 것은 부모님이 그나마 흥미로워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테지만 진작 금강산에 보내드리지 않은 것은 돈이 없어서도, 걷지도 못하는 어머니에게 무리가 될까봐서도 아니었다. 동료 선생 중에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있었다. 대학시절 운동권까지는 아니었어도 돌멩이는 몇번 던져보았다던 그 선생은 운동권 잡아들일 필요가 뭐 있느냐, 한총련 애들 몽땅 쓸어서 북한여행을 시켜주면 스스로 다 돌아설 거라고 금강산 기행의 소감을 잘라말했다. 꿈꿔왔던 것의 실체가 너무나 보잘것없고 초라할 때, 초라하다 못해 되레 자신의 꿈을 배반한 것일 때도 사람은 평생의 꿈을 버릴 수 없는 것일까. 아버지는 주체사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건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부모님이 목숨을 바쳐 꿈꾸던 세상은 지상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금강산에 다녀온 사람들은 반공주의자가 되어서 돌아온다는군요.”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에 먼 북한땅을 보고 있던 부모님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물기 젖은 눈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가슴속에서 근질거리던 것을 내처 말하고야 말았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으세요?”

나를 응시하는 아버지의 눈길에 노기가 서려 있음을 눈치챘다. 뭔가 말할 게 있는 듯 입술이 순간 달싹였으나 아버지는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김선생이랑 다들 잘 지내고 있을랑가.”

내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어머니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김선생이란 남부군의 몇 안되는 생존자였고, 지난해 가을 북으로 송환된 장기수였다. 북으로 떠나기 전 장기수들은 노구를 이끌고 지리산을 찾았다. 자신들의 청춘이 묻힌 땅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싶었던 것일 게다.

“지난번에 신문에 안 났등가. 평양 시내에 아파트를 줘서 같이 지내고 있다등만. 따지고 보믄 염치없는 짓이제.”

“지발 그런 말 좀 마씨요. 그 양반들이야 여그 가족도 없는디 아무래도 거그가 더 낫지라. 글고 펭상 조국을 위해서 고생했는디 늘그막에 그만한 대접도 못 받겄소. 호의호식허는 것도 아니고 게우 묵고사는 것 같등마 뭘 그래싸요.”

어머니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아버지를 타박했다.

“당신도 똑같그마이. 우리가 원제 댓가를 바라고 싸웠간디? 크든 작든 대접받아도 된다는 생각부텀 잘못이여. 어찌됐든 묵을 것도 없는 북한 인민들헌테 얹혀사는 꼴이 아닌가? 여그서 제 손으로 벌어먹고 삼시로 작은 힘이라도 통일운동에 보태야제.”

“펭상 감옥에만 있다 다 늙어가꼬 나왔는디 머슬 해서 묵고살며, 먼 통일운동을 헐 것이요. 아즉 청춘인 줄 안갑소이.”

“알고 봉게 당신, 순 패배주의자구만. 우리가 옛날 역사를 지대로 알리는 것도 통일운동이요, 혁명가답게 넘헌티 신세 안 지고 똑바로 사는 것도 통일운동에 일조허는 것이여. 노조운동 허고 환경운동 허는 젊은 친구들헌티 잘허고 있다고 칭찬 한마디 해주는 것도 다 통일운동인 것이여. 늙었다고 할 일이 없간디?”

“당신은 아즉 몸이 정정헝께 그런 말을 허는 것이제, 그 냥반들은 여그저그 안 아픈 디가 없는 환자들이란 말이요. 사상 하나 지키겄다고 펭상 감옥서 고생헌 사람들인디 조국 품에 돌아가서 죽겄다는 것이 뭐가 잘못이요? 당신 말대로 하자먼 그 냥반들은 펭상 사상을 지킨 것으로 지 역할을 다한 것이제. 자석 보고 손주 보고 산 우리에 비하겄소이.”

당신들끼리 하는 말이었지만 두 사람은 내 질문에 충분히 답하고 있었다. 북한의 현실이 어떻든 현재 자신들의 모습이 어떻든, 자신들은 정의와 진리를 위해 청춘을 바쳤고, 그것은 옳았노라고 두 사람은 나에게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노고에 대한 약간의 보답을 받아도 문제될 것 없다는 어머니나, 보답을 따지는 것은 진정한 혁명가의 자세가 아니라는 아버지나,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을 듯한 문제에 눈을 반짝이며 설전을 벌이는 모습이 나는 어쩐지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불쑥 우리의 유일한 가족사진이 떠올랐다. 십여년 만에 바깥세상으로 돌아온 다음날 찍은 사진 속의 아버지에게서 출소의 기쁨, 그러니까 자유의 기쁨 따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출소기념이라고 박힌 글자만 아니었다면 감옥행을 앞둔 사진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했다. 아버지에게 사회주의가 금기시된 남한땅은 어디든 창살 없는 감옥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언제 어디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긴장의 순간, 그러나 그 긴장조차 드러내서는 안되는 견고한 혁명가의 자세로 아버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더이상 아무도 혁명을 꿈꾸지 않는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누가 뭐라든 아버지는 아직도 혁명가였다. 역사의 진보를 위해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칭찬 한마디 해주는 것도 다 통일운동이라는 아버지의 말은 아름답기는 했으나, 그러나 생기없이 공허했다. 방향이야 어찌되었든 분단의 벽을 조금이나마 허문 것은 평생 혁명가로 살아온 아버지가 아니라 대기업의 자본이 아니었던가. 부모님의 삶을 지리산에 가둔 것은 남한의 독재체제가 아니라 어쩌면 당신들이 그토록 신뢰했던 역사라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비정한 괴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사를 신뢰하는, 청춘의 꿈을 신뢰하는 부모님의 순정 또한 나는 비정한 역사만큼이나 당혹스러웠다.

“당신, 장모님 옆으로 좀 당겨앉아봐.”

남편은 언제부턴가 사진기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이미 몇장 찍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말을 멈춘 부모님은 경직된 자세로 사진기를 바라보았다. 남편이 우리 셋을 뷰파인더 안에 가둔 채 셔터를 눌렀다. 이번 사진도 그 옛날 출소기념 사진과 별반 다르지 않을 성싶었다. 사진 속에서 우리 셋은 뷰파인더의 한 점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뷰파인더가 감옥이라도 되는 양 딱딱하게 굳은, 두번째이자 아마 마지막일 게 분명한 우리 가족사진이 나는 서럽도록 쓸쓸하게 느껴졌다. 어떤 인생이든 한순간쯤은 행복의 흔적을 남겨도 좋을 만한 권리가 있는 게 아닐까.

“권서방, 나 독사진 한장 찍어주소.”

웬일로 어머니가 사진찍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폭삭 늙은 할망구를 멀라고 찍어야, 하면서 승원이와 함께 찍는 것조차 마다하던 어머니였다. 좋은 배경을 찾는 것인지 이리저리 살피던 어머니가 북녘을 뒤로 하고 난간에 기대섰다.

“난간 안 나오게 잘 찍소이.”

남편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어머니는 뜻밖에 양 입술을 밀어올려 웃음을 지어냈다. 누가 봐도 억지로 만든 것임이 분명한 그 웃음은 너무나 어색해서 무표정한 얼굴이 차라리 나아 보였다.

“장모님, 승원이가요, 지난주에 결혼할 여자를 데려왔어요. 늘씬하게 예쁘던데요. 손주며느리 보시게 생겼어요.”

웃으라고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어머니 입가에는 그제야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났고, 순간 남편은 서너 차례 연거푸 셔터를 눌렀다. 권서방도 참 실없기는, 하면서도 어머니는 처음으로 웃으며 찍힌 사진이 흡족한 모양이었다.

“당신도 여그 와서 독사진 한장 박으씨요.”

“독사진은 멀라고. 그만 가세.”

“아따, 글지 말고 찍으란 말이요. 우리 죽고 나먼 영정으로 씰 사진 한나가 없습디다.”

그제야 아버지는 무뚝뚝한 얼굴로 어머니가 섰던 그 자리에 와 섰다. 이번에는 실없는 농담조차 건네지 못한 채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아버지의 얼굴을 남편은 사진에 담았다.

“글고 봉께 이것이 처음이지멩?”

“첨이제 그람?”

“누가 여그 온 것 말이요? 우리 서이 나들이헌 것 말이지라.”

어머니의 무의식적인 계산 속에는 남편이 또 빠져 있었다. 평소라면 남편의 눈치를 살폈을 테지만 나는 영정사진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영원히 잊히지 않는 여행을 기대한 것이라면 이번 여행의 목표는 초과달성한 셈이었다. 영정사진으로 마무리한 여행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아이가, 옛날에 피아골에 한번 갔잖애. 긍께 두번째그마.”

그 어색하고 씁쓸했던 짧은 나들이를 첫 여행으로 꼽는 아버지의 냉정한 기억이나, 이번 것을 온전한 첫 여행으로 여기면서 영정사진을 찍은 어머니나 내게는 당신들을 배반한 역사만큼이나 알 수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내 감정 따위야 어떻든 북녘을 배경으로 한 사진은 어머니가 살아낸 한 생의 그럴듯한 압축이자 평생 처음으로 웃음을 포착한 행복의 증거로 남게 될 것이다.

“권서방 덕이그마. 권서방 덕에 존 구경했네. 권서방 아니었으먼 우리가 원제 동해 구경을 다 해봤겄능가.”

어머니는 남편의 노고에 대한 입치레인지 권서방 소리를 몇번이나 해가며 나에게는 좀처럼 보여준 적 없던 환한 웃음을 던졌고, 남편은 우리 서이, 속에 자신이 빠진 서운함을 그 웃음으로 상쇄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조금의 서운한 기색도 없이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남편의 걸음은 어머니를 배려한다고는 해도 나보다 빨랐다. 남편의 팔에 매달려 끌려가는 듯한 어머니의 걸음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지만 운포를 떠날 때처럼 완연히 지친 기색은 아니었다. 횟집 즐비한 운포를 보고도, 전시용으로 지은 아파트조차 남녘 소읍의 것만도 못한 북녘땅을 보고도, 심지어는 영정사진을 찍고도,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끝내 쓰러지지 않는 어머니를, 어머니를 끝내 버티게 해준 그 무언가를 나로서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장모님, 시장하시죠? 뭐 드시고 싶으세요? 말씀만 하세요. 젤 비싼 걸로 사드릴게요.”

“멀 묵어야 맛나까? 우리 승원이가 왔으먼 갈비를 묵을 것인디.”

승원이는 달짝지근한 양념갈비를 제일 좋아했고, 고기를 즐기지 않는 어머니도 승원이와 함께라면 몇점이나마 맛있게 먹곤 했다.

“그럼 서울 가서 며칠 쉬다 가세요. 갈비는 서울 가서 승원이랑 먹죠. 바닷가에 왔으니까 오늘은 회나 드시죠.”

“회는 어제도 묵었는디 그 비싼 걸 멀라 또 묵어. 나는 된장찌개가 백날 묵어도 젤 맛나드만.”

“에이, 그래도 오늘은 회 드세요. 돈 내는 사람 맘이죠 뭐.”

세 사람 속에 내가 아니라 남편이 있었다면 전혀 다른 그림이 되지 않았을까. 다정한 모자처럼 도란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남편과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우리 가족사진의 감옥 같은 분위기에 나 역시 한몫 거들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미헌테 물어보소. 쟈가 회를 잘 안 묵잖애. 아이.”

어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어깨에 걸친 어머니의 오렌지색 점퍼 위로 햇빛이 내려앉았다. 계단 옆의 나뭇가지와 햇빛이 직조한 무늬 탓일까. 나는 일순간 어머니의 몸이 얼룩덜룩한 배롱나무 기둥으로 느껴졌다. 문득 배롱나무 전설이 떠올랐다. 이무기를 죽이러 간 청년은 이기면 흰 돛을 달고 돌아오겠노라고 약속했다. 처녀는 매일 기도를 드리며 바닷가에서 청년을 기다렸다. 마침내 배가 보였으나, 배에는 흰 돛이 아니라 붉은 돛이 달려 있었다. 절망한 처녀는 그 자리에서 자결을 했다. 이무기가 죽을 때 내뿜은 피가 흰 돛을 붉게 물들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처녀가 죽은 자리에서는 이듬해 나무 한그루가 솟아났고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웠다. 배롱나무는 간절한 소망과 그리움의 꽃인 것이다. 처녀가 죽어서도 바랐던 소망은 사실 죽기 전에 이루어졌지만 배롱나무 전설에서 소망의 성취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노기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미처 하지 않은 말을 나는 짐작할 수 있을 듯도 했다. 부모님에게 소망이란 애초에 도달 불가능한 유토피아이며, 그들의 인생이란 배신과 실패마저 제 심장과 동맥으로 삼아 앞으로든 뒤로든 뛰든 기든 여하튼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유토피아를 향한 멈출 수 없는 마라톤 같은 게 아니었을까. 도대체 내게는 그런 소망이 있기나 한 것인지.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이면서 내 얼굴로 햇살이 한움큼 눈부시게 쏟아졌다. 부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남편, 내 가족 셋은, 부시기는 해도 뜨겁지는 않은, 어느새 시든 기운이 느껴지는 어른거리는 가을 햇살 속으로 스며들 듯 천천히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