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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농활
매화향 가득한 마을을 꿈꾸며
김지은 金知恩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2학년. art_sunny03@hanmail.net
지난 6월 22일부터 7월 2일까지 우리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매향리로 농활을 다녀왔다. 지금까지 학교에서는 한 마을을 정해 삼년 동안 봄 여름 가을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번에는 별도로 매향리 농활대를 꾸려 들어간 것이다. 알려진 대로 매향리는 ‘쿠니 사격장’이라는 미공군 사격장이 위치한 곳으로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50년 넘게 폭격소음으로 인해 주민들이 피해가 큰 곳이다. 2000년 지상사격장이 폐쇄되었지만 해상사격장에서의 훈련은 아직도 자행되고 있어 주민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이 고령의 농민이었다. 호별방문 때 이따금 마주칠 수 있었던 청장년층은 인근 공장에 근무하는 노동자였다. 농촌 고령화 현상은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매향리는 주한미군에 의한 피해나 불평등한 SOFA 개정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곳이다. 미군기지 내에 땅을 소유하고 있던 주민들은 헐값에 땅을 넘겨야 했고 지금은 도리어 임대료를 내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주민들은 청력이 많이 약해졌으며 오폭사고로 인해 집이 무너지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했다. 우리는 ‘미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원회’ 사무소를 숙소로 정했는데, 그곳에서 여러 자료를 통해 매향리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주민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이 특별한 농활에 임하기로 다짐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농활을 일손을 도우며 친목을 도모하는 ‘농촌봉사활동’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의 농활은 ‘농민·학생 연대활동’으로, 농민과 함께 고민하고 더불어 고쳐야 할 문제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우리는 ‘생활조’를 나누어 식사나 설거지 등을 돌아가면서 했고, 규율을 정해 벽에 붙여놓고서 농활기간 동안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속했다. 아쉽게도 우리의 농활기간은 농한기에 속했다. 게다가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도착 후 이틀은 숙소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한·칠레 자유무역협정과 현정세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을 진행했다. 하지만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없어서 부슬비로 약해질 무렵엔 호별방문을 시작했다. 직접 각 가정을 방문하여 농활대가 왔다는 것을 알리자 많은 분들이 따듯하게 반겨주셨다. 하지만 일을 맡겨달라는 말을 꺼내자 학생들에게 무슨 일을 시키겠냐며 한사코 마다하는 바람에 우리는 며칠간 매향리에서 일을 구할 수 없었다. 대신 옆마을인 이화리 포도농장으로 가서 포도 싸는 일을 했다. 새참으로 마셨던 포도즙은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맛으로 입안을 맴돌았다.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칠레산 포도가 싼값에 수입된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칠레산 포도는 껍질이 벗겨지지 않고 맛도 시큼해서 처음에는 입맛에 맞지 않겠지만 피자나 햄버거처럼 곧 우리 입맛을 바꿔놓지 않겠냐며 씁쓸해하던 그분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농민은 땅을 떠나서 살기 어렵다. 수입개방으로 인해 어떤 한 작물의 가격이 폭락한다면 농민은 다른 작물로 바꿔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되풀이되다보면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의 수는 줄어들고 그 농작물들은 과잉생산될 수밖에 없다. 과잉생산은 곧 가격폭락을 뜻한다. 수입개방은 한 작물로 시작되더라도 결국 우리 농업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싼값에 외국농산물을 살 수 있어 처음에는 좋을지 몰라도, 우리의 농업이 무너지고 나면 외국농산물의 가격이 폭등하더라도 대책이 없다. 결국 우리 국민 전체가 고통 받을 것인데, 왜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을까, 수입개방을 막아낼 수는 없을까? 농활대에게 고민을 안겨준 시간이었다.
이른 일곱시, 낮 열두시 반, 늦은 여섯시 반. 하루 중에 가장 기다려지는 식사시간이다. 항상 1조는 싱겁게, 2조는 짜게 간을 했지만 모두들 남김없이 해치웠다. 김, 오징어 젓갈, 김치에 된장찌개나 미역국은 고정메뉴였지만 가끔 3조에서 특제 주먹밥을 준비하기도 했다. 농활기간에 밥을 먹기 전에 항상 함께 외쳤던 말은 지금도 식사 때마다 가슴을 울린다. “한알의 쌀이라도 농민의 피와 땀과 정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잘 먹겠습니다.” 농민들은 휴일이 따로 없다. 그들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과 밭에서 땀 흘리고 우리는 그 열매를 먹는다.
매향2리 이장님의 밭일을 시작으로 매향리에서의 농활이 본격화되었다. 여학생들이 모를 옮겨심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왔다. 주변에 있던 주민들의 “또 시작됐네”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 소리가 폭격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멀리 떨어진 해상폭격장에서 나는 소리였지만 온몸이 먹먹할 정도였다. 지상사격장이 있었을 때에는 얼마나 더 가까이 들렸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지상사격장이 있었을 때 양계장 닭들은 자주 무정란을 낳았고, 목장의 소들은 젖이 나오지 않거나 유산을 했다고 한다. 타조사육이 유행일 때, 청력이 거의 없는 동물이라는 말을 믿고 키워봤지만 타조마저도 폭격기가 지나가면 한데 몰려 구석으로 도망가기에 바빴다고 한다. 지금 많이 나아진 것이 이 정도라며 주민들은 놀란 우리를 위로하기도 했다. 맑은 날에는 폭격이 더 심했다. 보상받는다고 주민들의 고통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도록 하루빨리 대법원 판결이 나기를 기원했다.
주말이 되어 붉은 깃발이 내려가자 우리는 해상사격의 표적으로 쓰이는 농섬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짙을 농(濃)자를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섬은 온몸에 포탄이 박혀 헐벗은 채 고요했다. 농섬 주변에 섬이 두 개 더 있었지만 오랜 동안 표적으로 쓰이면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매캐한 화약냄새가 진동하는 농섬에서 우리는 커다란 포탄을 힘들게 수거할 수 있었다. 보기에는 무겁지 않을 것 같았는데 개당 270kg이라고 했다. 겨우 두 개를 수거하는 데 반나절이 지나갔다. 언제쯤 다시 짙푸른 농섬을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남아 있는 크고작은 포탄들을 보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매일 호별방문을 하며 주민들을 만났다. 농사를 많이 지으시냐는 물음에 이제는 팔아도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식구가 먹을 만큼만 짓는다고 하시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일을 맡기면서도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던 목장 아주머니는 밤늦게 숙소로 찾아와 간식거리를 한아름 안겨주고 돌아가기도 했다. 마을 아이들은 매일 학원에서 늦게 돌아와 만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가끔씩 숙소로 찾아와 노래와 율동을 배우며 즐거워하던 그 맑은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비록 농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분반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주민들과 가까워진 하루하루였다.
떠나기 이틀 전, 우리는 각자 생각한 매향리를 그려 초대장을 만들었다. 농섬이 가장 많이 나왔고 독특하게 약도를 그린 새내기도 있었다. 가장 기억나는 것은 폭격장에서 제일 흔하게 볼 수 있다는 연습탄, 일명 ‘방망이 탄’을 물고기로 변형한 그림이었다. 주민들에게 완성된 초대장을 직접 건네며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몇번이나 신신당부했지만, 우리들은 주민들이 많이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창 일할 시간이고 숙소가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서 우리는 최대인원을 스무명으로 잡았다. 그런데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와 농활대장은 국수를 삶느라 부엌을 떠나지 못했고, 농활대원들은 음식 대접하랴 말동무하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도와줄 것 없느냐는 분이 있는가 하면, 더운 날에 전 부치느라 고생한다며 음료수를 쥐여주시는 할머님도 있었다. 우리를 한가족처럼 대해주시는 그분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새내기들이 노래와 율동을 하고, 전만규 주민대책위원장의 말씀에 이어 우리는 ‘소양강 처녀’를 개사해서 미군의 행태와 주민들의 피해를 담은 ‘매향리 청년’을 불렀다. 주민들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고, 한 할아버님은 그 노래가사를 폭격장 안에 넣어줘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웃음소리 끊이지 않던 점심시간이 끝났다. 주민들은 논밭으로 집으로 돌아가면서 잘 먹었다고 고맙다며 꼭 다시 보자는 인사말을 남겼다.
매일 모든 일이 끝나면 우리는 한데 빙 둘러앉아 하루 동안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잠이 많아 여섯시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는 친구, 흙내음과 사람냄새를 맡고 싶었는데 직접 맡아보니 흙보다는 사람냄새가 좋았다는 선배, 앞으로 농촌의 현실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후배도 있었다. 매향리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는 농활이란 형식이 아니라도 꼭 다시 이곳을 찾자고 입을 모았다. 다시 만나자는 주민의 인사가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것 같았다.
이미 변해버린 농촌의 현실을 우리가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농민들의 마음과 농활에 참가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라도 농민과 학생을 이어주는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농촌을 제대로 체감하기에는 너무도 짧았던 10박 11일의 농활이 끝났다. 우리는 각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떠안고 버스에 올랐다.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마을을 보면서 따뜻하고 인정 많은 주민들과 폭격이라는 ‘불협’ 이미지와 함께, 일하는 내내 잊고 있었던 마을이름의 의미, 梅香이 떠올라 가슴이 아뜩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