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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정수일 역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문명교류사의 뒤안길
이종철 李鍾徹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학과 교수 jclee@aks.ac.kr
“번역은 고단수의 창작이며, 번역 없는 학문이란 있을 수 없다. 번역 일반이 그러하거니와, 원전 번역, 그것도 역주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만큼 번역은 어렵지만 중요하다.한권의 원전번역이 수백편의 논문보다 학술적 가치가 더 높으며, 그 수준은 역자의 학문적 자질과 직결된다.” 정수일(鄭守一) 역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역주자 서문」에 나오는 구절로 역주작업에 임하는 본인의 마음가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가슴 깊이 파고드는 육중한 울림이 있다.
행색과 주변 분위기가 서로 어그러질 때 쓰는 ‘갓 쓰고 말 탄다’는 옛말이 있다. 학계의 일각에서 ‘학제간 연구’가 마치 우리가 살길인 것처럼 야단법석 떨 때 나는 이 말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곤 한다. 내가 나약한 냉소주의자라서가 아니고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을 몰라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내가 곰곰이 따져보는 것은 지금 우리 학계의 수준이 마음놓고 자신있게 ‘학제간 연구’를 내걸 수 있는 단계인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촌 양반 양복 입고 어색해하는 꼴과 영락없이 똑같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지역학 같은 분야에서 ‘학제간 연구’가 가능한 것은 미국이 그동안 기초학문 분야에서 많은 일류급 전문가를 양성했고, 또 지금도 정성스럽게 존중하고 공들여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바둑 7급짜리 몇십명 모아보았자 바둑 3단짜리 한명을 당해낼 수는 없는 일이다. 혹시 우리가 말하는 ‘학제간 연구’가 바둑 7급짜리 수십명 모아놓고 바둑 3단짜리 한명 상대하자는 것이라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알맹이 없는 겉모습만 본뜨자는 것은 무책임한 사대주의에서나 나올 법한 발상으로 속없이 끌려다니다가는 ‘노예의 학문’이 되기 십상이다. 개꼬리 삼년 묵혀도 황모 안된다는 말이 있듯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이 있듯이, 우리가 앞으로 ‘주인의 학문’을 할 수 있으려면 차라리 주인 의식을 갖고 기초학문 분야에 차분히 매진하고, 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면서도 근원적인 개혁방안이 아닐까 한다.
정수일의 역주작업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상념은 아닐 것이다. 역주작업에 임하는 정수일 본인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수 바둑의 묘미를 맛본 사람이 더이상 아마추어 바둑에서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없듯이, 뼈가 삭고 피땀으로 얼룩진 고도의 역주작업을 지켜본 사람에게는 시중의 지가만 올리는 쓸데없는 넋두리는 더이상 연구성과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는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연구해야 하는 ‘학제간 연구’의 대상이다. 이러한 고난도의 작업을 혼자서 수행했으니, 정수일의 탁월함과 국내 기초학문 분야의 전문가의 빈약함을 아울러 실감하게 해주는 것이, 정수일 역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다.
돈황 막고굴의 장경동에서 닥나무 종이 재질의 한문사본, 그것도 앞뒤가 빠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잔결본(殘缺本)이 발견되어 빠리에 있는 프랑스 국가도서관(Bibliothéque Nationale)에 ‘뻴리오 문서 3532’(Pelliot chinois Touen-houang 3532)로 소장되게 된 경위, 『왕오천축국전』이 1927년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권 51에 수록되기까지의 경위, 혜초의 생애 및 행로, 발견 이후 지금까지 『왕오천축국전』의 기록에 관한 연구사 등은 정수일 역주본의 「해설」을 참조하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연구사를 꼼꼼하게 살펴보면 알겠지만 국내 학자의 연구가 국내외 『왕오천축국전』 연구사에서 결정적인 한 획을 그은 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또 한번 좌절시킨다. 돈황 사본의 발굴에서 혜초 『왕오천축국전』의 비정(比定), 혜초가 신라인이라는 사실, 돈황 사본의 성격 규정, 혜초의 전기 및 구체적 행로 복원, 이 모든 문제에서 국내 학자가 제시한 연구의 이정표는 하나도 없었다는 통렬한 자책감이, 정수일로 하여금 『왕오천축국전』의 역주작업이라는 고행길로 들어서게 했을 것이다.
이 책을 검토해본 내가 보기에 정수일이 역주작업을 하면서 좌우에 놓은 연구서는, 일본인 구와야마 쇼오신(桑山正進)이 편집한 『혜초왕오천축국전연구』(1992)와 중국인 쟝 이(張毅)의 『왕오천축국전 전석(箋釋)』(1994)인 것 같다. 특히 『혜초왕오천축국전연구』는 불교학, 중앙아시아 역사, 이슬람 역사, 중앙아시아 언어 및 사본, 중국사, 한어사 등 각 분야 일급 전문가들의 공동작업의 성과이다. 『왕오천축국전』과 같은 여행기를 연구하는 데는 이러한 학제간 연구가 절실하게 요청되지만, 우리는 지금 아직 그만한 단계에 와 있지 않기 때문에 정수일 혼자서 이 어려운 일을 맡은 것 같아 보기에도 안쓰러울 뿐이다. 연구성과에서 진선진미는 없기에 이 두 책과 정수일의 역주작업을 대조해가면서 느꼈던 몇가지 아쉬움을 적어본다.
첫째, 아마도 시간에 쫓긴 탓이라고 생각되는데, 역주를 달 때 인용부분은 철저하게 밝혀주어야 기존의 연구서와 정수일 본인의 업적이 확연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주작업은 해외 학자들도 주목하고 있는 바이기에 곧바로 해외에서 재평가 과정을 겪게 되고, 그 점에서 이미 국내 국외의 구별이 없는 세계적 작업이다. 따라서 해외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인용하거나 비판할 경우에 좀더 철저한 고려하에 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둘째, 한자어의 우리말 표기에서 ‘于儻’을 ‘우기’로 읽고 있는데 이는 모두 ‘우전’으로 고쳐야 하고, 구로(佉盧)라는 중국식 음사(音寫)는 카로슈티(kharosthi)로 바꿔야 한다(429면). 이외에도 편집상의 실수로 보이는 잘못된 산스크리트어의 로마자 표기들이 눈에 띄었다.
셋째, 혜초의 구체적 행로 등 『왕오천축국전』을 둘러싼 학문적 논의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선결문제로서 돈황 사본의 성격 규명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타까다 토끼오(高田時雄)가 돈황 사본은 3권본 『왕오천축국전』의 초고라는 초고본설(草稿本說)을 주장한(구와야마 쇼오신, 앞의 책 206~209면) 이상, 돈황 사본은 그것의 축약본이라는 절략본설(節略本說)을 채택하고 있는 정수일로서는 이 문제를 비껴가기 어렵다.
하지만 정수일이 『왕오천축국전』 역주작업에 들인 그 연구성과와 진지함은 기초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후학들에게는 격려와 질책을, 일반 독자에게는 문명교류사의 뒤안길을 더듬는 즐거움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