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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민족을 새로 만들어내려는 페미니즘
정현백 『민족과 페미니즘』, 당대 2003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jykim@hanshin.ac.kr
이론 뒤에 삶과 경험이 있다. 이론 뒤에 있는 삶과 경험이 이론의 모양을 많이 규정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론이 왜곡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삶과 경험은 이론을 맹목으로 이끄는 만큼 통찰로도 이끈다. 이론에 열기와 에너지를 불어넣는 것 또한 삶과 경험이다. 그래서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길은 이론 뒤로 돌아가 삶과 경험을 읽어내고, 그 삶과 경험이 얼마나 긴 우회로를 겪었든 이론 속에 삼투되어간 흔적을 살피는 것이다.
정현백(鄭鉉栢) 교수는 스스로 그의 이론적 논술을 읽어낼 이 유력한 길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책의 뒤편에 붙은 「한 여성역사학자가 살아온 시대와 시대정신」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기술할 때도 자신의 이론적 담론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각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대학시절 교지인 『향연』 편집부에서 만났던 친구 이야기이다. 유희수라 이름이 적시된 그의 친구는 대학 2학년 때 요절했다. 그에 대한 정교수의 그리움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유희수의 죽음 이후 나와 친구들은 유고집(遺稿集)으로 남은 그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경쟁자’를 잃었다는 ‘허허로움’에 빠져들었다. 그때 이래로 나는 이 땅에서 ‘진정한 자유주의 부르주아’를 만나고 싶어하는데, 이는 ‘공정한 적수’를 만나고 싶다는 욕구의 발현이었는지도 모른다.”(383면)
이런 정교수의 말은 거의 우리 사회의 사회사와 정신사의 중요한 단면을 요약해주는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가진 부르주아, 국민적 이익을 견지하며 좌우파의 대립 속에서 개혁을 이끄는 자유주의 정치문화를 가진 부르주아, 이런 부르주아의 부재가 남긴 여파는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에 깊게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좌파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정교수가 지적하듯이 “진보운동으로 하여금 과도한 도덕적 우월성과 허황한 자기만족에 빠지게”(같은 곳) 하기도 했다. 정교수의 이론적 탐구에 이 ‘요절한’ 적수에 대한 애도의 감정이 깊게 베어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칫 적수의 부재가 야기할지도 모르는 자기훈육의 태만을 경계하는 동시에 적수의 부재가 비워놓은 도덕적 공백마저 채워나가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려 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정교수가 이룩한 성과가 『민족과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스스로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치밀한 논리적 정합성의 추구 같은 것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글은 잘 정돈된 살림살이처럼 두루 허술한 데가 없다. 책 전체로 보더라도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성찬이라기보다 소박하지만 밥과 국이 정성스럽고 맛난 가정식 같다. 이런 말이 여성학자의 논저에 깃든 힘을 살림이나 상차림 같은 여성적 은유로만 포착하려는 남성적 편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여성적 힘의 한 면은 이런 것일 게다 싶은 느낌이 선명하다. 해서 비유를 이어가자면 정교수의 글은 가정식처럼 기본에 충실하고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요컨대 그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혐오하거나 외면하는 민족과 민족주의 문제와 정면대결을 벌인다. (이런 회피는 페미니스트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남한사회의 많은 노동운동가와 노동이론가들이 보이는 태도이기도 하다.) 홉스봄의 『전통의 발명』이나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 같은 저작에 영감을 얻어 민족을 해체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많았던 저간의 이론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정교수의 행보는 매우 독보적인 동시에 가치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을 이론적으로 해체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민족국가를 떠나 살 수 없으며, 그런만큼 민족국가를 재주조하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며, 페미니즘이 해야 할 일은 페미니즘적 기획을 민족의 문화적 구성방식과 민족국가의 구조 속에 침투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컨대 정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깊이있는 울림을 준다.
“여성은 민족주의 기획에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전형적으로 남성화된 기억, 희망, 분노의 표출이었다. 만약 기존의 민족주의와 국민국가에 여성적인 경험이 포함되었다면, 민족주의의 성격은 달라졌을 것이다.”(51면)
정교수의 논의에 대해 앞서 기본에 충실하다고 했는데, 이 말로 인해 자칫 그의 논술을 자기 주제에 대한 지나치게 한정되어 있다거나 예리한 비판적 힘이 약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그의 논의 가운데는 페미니즘을 넘어서는 일반적 의의를 가진 것이 많다. 예컨대 정교수는 세계화의 물결에 여성들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하며 세 가지 전략을 제시한다. 첫째는 여성운동의 국제적 연대이고, 둘째는 각 국가체제의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일이며, 셋째는 국민국가 내에서 시민사회를 강화하는 방안이다. 이 전략은 사실 여성운동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의 압력 속에서 비판적인 사회운동 모두가 추구해야 할 일반적 전략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 그의 논의 가운데는 페미니즘의 가장 큰 장점인 비판적 안목이 잘 살아 있는 것들 또한 많다. 다만 그는 그런 대목에서도 비판의 각을 세우기보다는 안타까운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다. 예를 들어 기지촌여성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지촌 여성의 잔혹한 살해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모여든 기자나 운동가들은 확실한 미군범죄가 아닌 경우에는 이내 관심이 흩어져버리고, 힘없는 기지촌여성들만 홀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253면)
이외에도 「북한여성, 어떻게 만날 것인가」 같은 글은 남한사회의 진보적인 인사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북한여성 묘사에조차 얼마나 진한 남성적 편견이 작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민족주의와 성정치가 교차하는 미묘한 지점들을 우리의 경우 속에서 잘 짚어내고 있다.
페미니즘은 지난 10여년간 크게 세력을 확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도 다분히 게토(ghetto)화되어 있는 편이다. 그 이유에 대해 나는 암암리에 그들이 대화를 건네지 않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런데 정현백 교수의 책을 읽고 많은 것을 배우며, 게토화의 책임은 그들이 공들여 쓴 책을 잘 읽지 않은 남성학자들의 게으름에서 기인하는 바가 훨씬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