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기억의 갈피와 상식의 틀을 넘어서

권지예 소설집 『폭소』, 문학동네 2003

 

 

이현식 李賢植

문학평론가. agiko3@hanmail.net

 

 

권지예는 소설을 잘 쓰는 작가다. 소설가가 소설을 잘 쓴다는 말 자체가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이야기의 선을 뚜렷하고 능숙하게 구축할 뿐만 아니라, 언젠가 박완서도 지적한 것처럼 독자들에게 적절한 싯점에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서사의 긴장과 흥미를 조절할 줄 아는 재능을 지니기도 했다. 그녀의 소설들에서 여러 서사적 장치들이 주제와 매끄럽게 연결되는 장면들을 보면 이 작가가 오랜 시간 소설수업을 거친 사람임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을 잘 쓴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한번 곰곰이 되새겨볼 만한 일이다. 소설을 잘 쓴다는 건 그만큼 소설가가 현실을 요령있게 요리한다는 뜻일 터이고 그것은 소설가가 현실과 맞대면할 만큼 스스로에 대해 자신을 갖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서사는 그런 데서 가능해지는 일이 아닐까.

예컨대 오늘날 우리 소설가 중에서 성석제는 능란한 이야기꾼으로 통한다. 그런데 그가 구사하는 이야기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터이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그가 세계와의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대응을 고의적으로 포기한 데서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세상은 세상대로 굴러가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겠다’라고 작심하고 쓴 것이 성석제의 소설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반어적으로 세상에 대한 조롱과 위트가 유머러스하게 묻어 있다.

그렇다면 권지예는 무슨 힘으로 세상과 대면하는 것일까. 이번에 출간된 두번째 소설집 『폭소』에는 그녀가 세상과 어떻게 대결해왔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첫 소설집인 『꿈꾸는 마리오네뜨』에 채 묶지 않은 소설들과 최근 발표한 소설들까지 한데 묶여 있으므로, 등단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세계를 일별할 수 있는 『폭소』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작가 스스로의 모습이 투영된 초기작들이다. 「누군가 베어먹은 사과 한 알」이나 「풋고추」 「내 가슴에 찍힌 새의 발자국」이 그것들인데 이 작품들은 『꿈꾸는 마리오네뜨』에 실린 작품들과 유사하다. 다만 첫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이 부부 또는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를 주로 다룬 것이라면, 이 작품들에서는 기억에 의한 과거의 회상들이 주조를 이루면서 부부나 연인이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자기를 탐색한다. 그들은 가족이나 친족 혹은 친구들이다. 그렇지만 그 역시 변함없이 남성과 여성, 혹은 여성과 여성의 관계들이다. 아버지와 딸(「풋고추」), 외삼촌과 조카(「누군가 베어먹은 사과 한 알」), 친구로서의 여성(「내 가슴에 찍힌 새의 발자국」) 들인데, 작가는 그들과의 관계를, 그리고 관계의 역사를 주로 기억에 의해 파고들어간다. 기억은 그녀에게 서사를 구축해가는 하나의 힘으로 작용한다. 기억을 반추하고 재구성해가면서 작가는 거기에서 하나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매력적이면서도 흥미로운 것은 기억에 의해 복원된 사람들과 세상의 모습들, 그리고 거기에 투영된 화자의 모습이다. 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기존 여성작가들의 그것과는 다른 모습들이다. 그들은 소극적이지도 않으며, 남성적 권위 속에 억압당하는 피해자로서도, 그렇다고 전사(戰士)로서의 여성도 아니다.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들은 특정한 방향으로 정형화되어있지 않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들이 남성적 권위와는 담을 쌓고 사는 존재들이라는 점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근친애적 감정을 보이는 외삼촌(「누군가 베어 먹은 사과 한 알」)이나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허풍만 남은 아버지의 모습(「풋고추」)은 전통적 의미의 남성상과는 거리가 멀다.

폭소물론 보기에 따라서 이 작가가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미약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베어먹은 사과 한 알」에서 보이는 여성 3대의 삶에 대한 작가의 소설적 배치나 「풋고추」에서 절망의 탈출구로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식을 그려내는 장면 등은 오히려 여성성을 다른 각도에서 깊이있게 천착하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나는 그것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성된 젠더(gender)가 포착하지 못하는 잉여의 부분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고 싶다.

예컨대 「내 가슴에 찍힌 새의 발자국」은 장애여성이었던 대학시절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작품에서 장애여성인 그녀는 사회적 약자로서 ‘장애여성’이라는 코드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훨씬 복잡한 관계와 감정의 켜가 쌓여 있는 것이다. 화자인 나와 그와의 우정·질투·애정이 복잡하게 얽혀들면서 그녀는 장애여성 그 이상의 모습을 갖고 있는 존재로 우리에게 각인된다. 권지예 소설이 갖고 있는 장점은 바로 그런 복잡한 관계의 얽힘과 감정의 교착들을 하나의 서사적 사건으로 짜내는 데에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은 한편으로는 과거에 대한 기억과 회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적 관계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이다.

그러나 권지예 소설은 어떻게 보면 그 한계가 너무 분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앞에서 그가 그려내는 여성성의 모습을 젠더가 포착하지 못하는 잉여의 부분으로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잉여의 부분이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즉 젠더로서 여성의 문제를 포괄하면서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영역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요컨대 현실에 대한 그녀의 시각은 상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상식이 무슨 문제라고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오늘의 시대가 상식만으로는 삶의 진실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다.

나름대로 소설적 변신을 꾀하고자 하는 최근작들에서 그녀는 기억의 갈피에서 빠져나와 주변의 현실로 눈을 돌린다. 나로서는 이 소설들을 무척 기대하면서 읽었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어떻게 과거로부터,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그 관계로부터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지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작품들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밀도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의 현실과 대결하기 위한 새로운 가치관이나 모럴(moral), 혹은 그도 아니라면 감수성이 아쉬워지는 대목이었다.

「스토커」는 O. 헨리(O. Henry)가 연상될 만큼 서사적 구성의 치밀함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는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소품으로 보인다. 「설탕」은 주변부 신세대들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흥미로운 점은 있지만 세태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는 명제는 아포리즘 이상으로 상승되지 못하고 있으며 주인공의 자의식은 구체적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표제작인 「폭소」는 그녀가 앞으로 어떤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자폐아를 둔 가족의 삶이 어떻게 파탄에 이르고 다시 살아가야 할 힘을 얻는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요컨대 상식의 세계가 포착한 아름다움이 「폭소」에는 담겨 있는 것이다.

과도한 요구처럼 들릴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진부한 말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녀의 소설들이 조금 더 사회를 향해 열려 있기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조금 더 밀접하게 접속하기를 바란다. 상식과 통념도 그것이 여러 겹의 껍질들로 에워싸인 것임을 날카롭게 보여주는 작품들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특유의 서사적 구성력과 묘사력이 그런 고민과 만난다면 그녀는 아마도 우리 소설의 새로운 단계를 여는 작가로 다시 한번 비약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