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제21회 신동엽창작기금 발표

 

 

고 신동엽(申東曄) 시인의 문학과 정신을 기리고 역량있는 문인을 지원하기 위해 신동엽 시인의 유족과 창작과비평사가 공동제정한 신동엽창작기금의 제21회 수여대상자가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습니다. 수여금은 1000만원이며, 수여식은 오는 11월 26일(수) 오후 6시 한국프레스쎈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만해문학상·백석문학상·창비신인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열릴 예정입니다.

 

 

제21회 신동엽창작기금 수여대상자

 

소설가 천운영(千雲寧)

 

심사위원 염무웅 이시영 성석제

 

2003년 6월

만해문학상 및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

 

 

◼ 수여대상자 약력

 

1971년 서울 출생. 한양대 신문방송학과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바늘」 당선. 2001년 소설집 『바늘』 출간.

 

 

 

심사평

 

제21회 신동엽창작기금 수혜자는 소설가 천운영으로 결정되었다.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로부터 심사를 위촉받은 세 사람이 논의한 결과이다.

심사위원들이 1차 심사자료로 넘겨받은 작품은 소설·시·평론 부문에 걸쳐 50여권에 달할 만큼 양적으로 풍성했다. 그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어느 하나 쉽게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주밀했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의 위기가 운위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오히려 진지한 문학의 흥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우리 문학사 또는 오늘의 외국 어디에도 유례가 드물 것이라는 데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한편 심사대상에는 1970년대 산업화 이후에 태어난 작가들의 작품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그 이전에 태어나 작품을 써온 작가들이 존재론적인 충동, 사회공동체적 경험과 역사적인 충격에 의해 촉발된 글쓰기를 해온 것과는 달리 글쓰기 자체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과 전문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은 주목했다. 전쟁과 혁명, 절대빈곤과 같은 극단적인 인간조건에 의해 배태되는 문학과, 취재와 정보수집에 의한 직업적인 글쓰기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으나 산업화에 따르는 규격화·획일화에 의한 ‘스트레스’ 역시 치열하고 진지한 문학을 낳을 수 있는 기반임을 최근의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해볼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6월 7일 1차모임에서 대상자를 소설가 다섯 명, 시인 두 명으로 압축하고 집중적인 독서에 들어갔다.6월 20일 2차모임에서 대상자 중 누가 수혜자가 되어도 좋겠다는 행복한 고민을 토로하면서도 쉽사리 수혜자를 결정할 수 없었다. 자리를 세 번 옮기는 긴 논의 끝에 마침내 소설가 천운영으로 수혜자가 결정되고 나자 큰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천운영의 소설은 낯설다. 또 이색적이다. 천운영 소설집의 표제작 「바늘」은 이제까지 한국문학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문신을 다루고 있고, 「숨」은 도살장을, 「행복고물상」은 부인의 상습적인 폭행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고물수집상을 다룬다. 그러나 그의 소설에는 비참과 비루함, 가난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다. 피비린내와 육식성, 불구와 성의 불모성에 대해서도 하나의 현상으로 보여줄 뿐 도덕적인 가치판단을 내리지도 유도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이는 과거 우리 문학에 왕왕 드러났던 지식인적 서술자의 책임감, 가책과 명백히 다르다. 일상에서 발견하는 미학적인 서술 또한 개성적인 특징이다. 한편 우리는 몸으로 돌아다니며 얻어냈을 정밀한 묘사와, 감정이입을 배제, 수술실을 연상하게 하는 서사의 이면에 인적이 드문 낯선 세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작가의 그림자를 본다. 멀지 않은 도시와 유원지에서 명멸하는 주마등이며 신기루를 좇거나 천편일률의 도시성에 안주하지 않는 성실한 자세에 감명을 받은 건 당연했다.

천운영의 이 소설집은 작가로서 처음 낸 창작집이므로 다소간 소재의 기이성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든가, 어딘지 만들어진 느낌이 든다는 약점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동엽의 이름을 앞세운 이 창작기금이, 여타의 문학상과는 달리 과거의 집적이나 결과보다는 미구에 구현될 작품세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적절한 사람에게 기금이 돌아갔다는 것이 심사위원 공통의 판단이다. 신동엽의 젊고 뜨겁고 치열한 정신을 담은 이 기금이, 그늘 속에서도 광명 속에서도 끊임없이 정진하는 작가에게 격려와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廉武雄 李時英 成碩濟]

 

 

 

수혜소감

 

그녀들의 등을 쓰다듬는 글

 

천운영

 

 

이제 막 그녀를 배웅하고 오는 길입니다. 버스 타는 곳까지만, 터미널까지만, 차가 떠날 때까지만 하다가 기어코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습니다. 눈물을 훔치면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그녀를 태운 차가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는 또다시 그곳으로 뛰어가 그녀를 향해 폴짝폴짝 뛰며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울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웃었습니다. 나는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버스가 사라지고 나서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녀를 배웅하는 일은 매번 이렇게 어렵기만 합니다. 다시 그녀가 내게로 오면 다시는 보내지 않을 작정입니다. 하지만 예전에도 이렇게 다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기차역까지만, 수원까지만, 대전까지만 하다가 순천까지 따라갔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배웅을 받게 되면서, 남겨두고 떠나는 것 또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진즉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오늘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내내 울었을 겁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터미널 근처를 배회했겠지요.

베개를 나눠 베고 누운 밤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끔 서로의 손을 잡았고 가끔은 서로의 등을 토닥이기도 했습니다. 등을 돌리고 숨을 죽인 채 울기도 했고, 누군가를 신나게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네 시간을 너무 뺏었구나, 나는 이렇게 쉬어가는데, 그래도 네가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른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괜히 한번 쓰다듬습니다. 그러다가는 불현듯 일어나 씽크대의 묵은 때를 닦거나 냉장고 정리를 한다고 부산을 떨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게 와서조차 편히 쉬지 못하는 그녀를 나는 말리지 못합니다.

때로는 배웅을 하게도 되고 때로는 배웅을 받게도 됩니다. 어떨 땐 배웅도 없이 떠나거나 떠나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소설쓰기 또한 등돌려 떠나는 사람을 잡거나 발걸음을 돌리는 일과 같습니다. 매번 힘들고 아쉬우니까요. 그래도 나는 생각합니다. 이제 그녀를 위해 소설을 써도 좋겠다고. 어느 한번도 누구를 위해 글을 쓴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녀에게 위안이 되고 휴식처가 되는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녀는 신동엽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내가 멋진 일을 해낸 줄만 압니다. 소설 쓰느라 밤잠을 자지 못하는 나를 보고는 언제까지 그 짓을 해야느냐고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도 그녀는 내가 소설가라는 것에 위안을 받습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까지라도 그 짓을 해야 될 겁니다.

가슴 퍽퍽한 때였는데, 맘속에 밑줄을 그어가며 글로만 읽던 신동엽이 제게 어떤 위안을 주었습니다. 위안을 받았으니 이제 더 열심히, 그녀들의 등을 쓰다듬는 글을 써야겠지요. 고맙다는 말을 누구에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네가 있어 고맙다는 그녀의 말만 입안에서 맴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