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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학문의 주체성과 오늘의 대학
‘동양사학’의 탄생과 쇠퇴
동아시아에서의 학술제도의 전파와 변형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사학과 교수. 저서로 『동아시아의 귀환』 등이 있음. baik2385@yonsei.ac.kr
1. 서(序)
대학개혁은 우리 사회의 주요 개혁과제 중 하나이기에 논의가 무성하지만,(교육이 아닌) 학문의 관점에서 대학개혁을 따져보고 실천하려는 노력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필자는 이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동아시아 학문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거기에서 우리가 새로운 학문체계를 구상하는 데 도움이 될 역사적 자산을 찾아보고자 한다.
17세기 이후 서구에서 학술지, 학회 및 대학의 긴밀한 상호연관 속에 형성된 근대학문이 전문화되는 때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1848〜1914)였다. 유럽에서 학문의 분과화(分科化)는 근대적 인간의 주요 활동영역인 정치·경제·사회에 대응한 정치학·경제학·사회학으로 나타났고, 뒤이어 역사학·인류학·동양학의 분할이 추가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분과화야말로 우리가 과학적 학문이라 일컫는 근대적 학문체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일찍이 메이지(明治)시기의 일본인들은 이것을 ‘학과(學科)’라 불렀고, 이 말에 단순히 ‘여러 학문’이란 보통의 용법이 있음을 알게 되자 더한층 전문화된 새로운 학문이란 의미를 강조하려고 ‘과학(科學)’이란 조어를 만들어냈다.1 그들이 이해한 과학은 오늘날의 개별학·전문학이란 의미인데, 일본인이 근대과학을 독창적 방법이나 패러다임보다 제도로서 파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국가권력이 주도적으로 근대를 추구하면서 서구 학문을 도입했기 때문에 먼저 제도를 도입해 근대적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가속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유럽 모델을 일본에서 수용·변용한 이 ‘제도로서의 학문’은 다시 동아시아에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개별 국민국가와 학문의 관계에 따라 변형을 겪게 되지만, 그 기본틀은 유지된 채 오늘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 근대학문의 형성과 변형의 전모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근대적 제도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 바깥에서 이뤄진 지식의 생산과 유통과정까지도 포괄해야 한다.
이 글은 앞으로 진행될, ‘제도 안의 학문’과 ‘제도 밖의 학문’2이란 두 양상이 대립하면서 교차하는 동태적 과정이란 견지에서 동아시아 근대 역사학의 궤적에 관한 연구의 서설에 해당한다. 필자는 일본 제국대학에서 형성된 역사학 3분과(서양사·동양사·국사) 체계의 일부인 ‘동양사학’이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전파되고 변형되었는지를 주로 규명하려고 한다. 특히 동아시아 근대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사회과학)의 제도적 측면이 안고 있는 식민지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서구에서 19세기에 자리잡은 전문분과로서의 역사학과 비교할 때, 근대를 강요당한 동아시아에서는, 근대적 역사학 수립과정에서 ‘과학’을 제한적이고 분열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과학’이라는 서구적 권위에 기대어 그것을 각자의 이념적·정치적 입장에 따라 보편적인 이론으로 고집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의 일방적 통제 아래 전파된 근대 학술제도인 역사학은 동아시아 자신의 역사를 온전히 해명할 언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지식과 일반대중이 분리된 지적 식민지성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학이 현실과 부분적으로밖에 접촉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이 식민성이 일본이란 유사서구의 통제 아래 역사학을 수용한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서는 훨씬 더 심각했다는 지역 내부의 차이도 이 글에서는 중시될 것이다.
동아시아의 근대적 역사학, 특히 동양사학과 국민국가의 관계의 기본틀 및 식민지성을 규명함으로써 당면한 역사학의 위기를 넘어설 길을 찾고 더 나아가 새로운 학문체계를 구상하는 데 이 글이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 일본 제국대학에서 창안된 ‘동양사학’과 민간사학
일본 사학사를 정리한 이에나가 사부로오(家永三郞)는 메이지유신(1868) 이후의 일본 역사학을 두 경향의 병행으로 파악했다. 하나는 “역사를 오로지 실천적 관심에 기반해 연구하려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에 온 힘을 기울여 엄밀한 사료조작이나 정밀한 사실천명에 뛰어난 고증학적 경향”이다.3
근대 일본에서 먼저 출현한 것은 전자의 계보에 속하는 ‘문명사’로서 메이지시대 초기에 저널리스트들이 이끈 계몽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문명발달 경로를 규명하려 한 이 조류는 메이지정부를 비판하고 인민 중심의 역사상을 제시함과 동시에, 역사학을 사회과학으로 규정하고 체계적·합리적 방법론을 내세운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1880년대에서 1900년대에 걸쳐 나타난 ‘민간사학’이다. 이것은 이미 설립된 제국대학의 관학에 대립하여 실증보다 역사서술에 비중을 두고 평민주의의 발달을 역사 속에서 드러내어 국민으로서의 공동성을 추구한다는 특징이 있었지만, 학문적 조직과 사료의 엄밀한 구사에서는 미숙했다. 그 맥을 이은 것은 맑스주의 역사학인데, 아카데미즘에 뒤지지 않는 실증성과 참신한 문제설정 및 왕성한 실천적 관심에 힘입어 1920년대부터 급속히 발달했다. 이 흐름은 카노 마사나오(鹿野政直)가 말하는 ‘민간학’의 일부인데,4 이 글에서 주목하는 ‘제도 밖의 학문’에 해당한다. 이에 대비되는 ‘제도 안의 학문’은 토오꾜오(東京)제국대학 사학과의 실증주의를 표방한 아카데미즘 사학이 그 원류이다. 이것이 대학 등 근대적 학술·교육제도의 확산과 더불어 전파되면서 주류로 자리잡는다.
일본에서 아카데미즘 사학은, 메이지정부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사편수사업기구를 설치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이 기구를 주도한 메이지 초기 역사학자들은 합리적 실증주의에 입각해 정사(正史)를 서술하고자 한 고증학 계통의 한학자 그룹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역사학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역사기술체계인 ‘사관(史官)의 기록학’과 분명히 다른 것으로서 “최근 과학이 발달하여 분과(分科)하는 대세”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근대 역사학이 국민국가 형성에 기여하는 데 그 의의가 있기에 대부분의 역사학자가 “가장 고심하는 것은 국사의 편찬이고 국사는 본래 애국충정으로 기술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5
이런 사정은 이 기구를 주도하다가 그것이 내각에서 제국대학으로 옮겨진(1888) 직후, 제국대학 사학과로 진출해 그 기틀을 다진 시게노 야스쯔구(重野安繹,1827~1910)가 사학회 기관지 『사학회잡지』 창간호에 게재한 글에서 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본회 설립의 일은 내가 종래 수사(修史)의 직을 봉(奉)하다가 제국대학으로 옮겨온 이후, 초빙교사 독일인 리스(L.Riess)와 만나 그로부터 학회를 설립하고 잡지를 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나 또한 그 필요성을 느껴 동료들에게 그 뜻을 전하고” 함께 설립에 나섰다고 한다. 그는 사학회를 만든 목적을 “종래 사국(史局)에서 채집한 자료에 의거하고 서양 역사연구의 방법을 참고하여 우리 국사의 사적(事蹟)을 고증하고 또한 그것을 편성하여 국가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6 요컨대 국가의 주도 아래 제국대학과 학회 및 학회지가 거의 동시에 만들어짐으로써 근대 역사학의 체제화 기반이 유럽에서와 달리 한꺼번에 이뤄졌던 것이다. 실증주의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1795~1886)의 제자 리스가 말한 바 “역사연구의 표준을 높이 내세우고 순수한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며 역사서를 “공중의 완독(玩讀)”에 기여하고자 설립한 사학회(1889.11)와 사학회지(1889.12)가 근대 역사학의 형성에서 맡은 역할도 중요하지만, 이를 주도한 주체가 제국대학 사학과이므로 여기에 집중해 살펴보겠다.
일본에서 19세기 독일의 대학제도인 신학부·법학부·의학부·철학부로 이뤄진 표준적인 학부 모델을 이식하면서도 ‘이과(理科)’를 첨가하는 등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 1886년 대학령(大學令)이었다. 이에 따라 제국대학에는 법과대학·의과대학·이과대학·공과대학과 더불어 문과대학이 설치되는데, 문과대학의 사학과는 1887년에 신설된다. 그리고 1889년 일본사 교육·연구를 목적으로 한 국사학과가 설치되고,1904년 문과대학이 개혁되면서 사학과 속에 국사학·지나(支那)사학·역사학(사실상 서양사학)의 세 분야가 있다가 1910년에 지나사학이 동양사학으로 개조되고 서양사학이 독립해 3분과제가 확립된다. 이로써 역사를 주자학적 ‘명교(名敎)도덕’에 종속시키기를 거부하고 서구 역사학의 방법론을 도입해 ‘지공지평(至公至平)’한 역사학을 확립하고자 한 아카데미즘 실증주의 역사학이 제도적으로 정착된 셈이다.
일본에서 창안한 독특한 학문제도인 3분과제는 일본 역사학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사를 세계사로부터 분리시킨 바탕이 이미 3분과제의 성립 싯점부터 있었던 것인데, 이것은 일본 중심적 역사인식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메이지 이래의 국가(근대천황제 국가)질서를 정통화하는 기능을 해왔다. 그 결과 외국사학은 사실상 국사학과의 써비스 기관과 같은 지위에 불과하다는 자조적 발언이 나올 정도였다. 이 점은 이 글의 주요 관심대상인 동양사학의 탄생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동양사가 서구의 학문에 비해 경쟁력을 갖는 ‘일본의 독자적인 학문’으로 형성되는 과정은 서구에서 이미 체계화된 것을 직수입한 다른 학과와는 달랐다.
청일전쟁이 시작된 1894년, 외국사를 동양사와 서양사로 나누고 동양사의 비중을 높이자는 주장이 중등교육계에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고등사범학교의 역사과목이 세 영역으로 분리되고, 곧 문부성도 이 의견을 채용해 전국 중등학교의 교과에 동양사를 첨가하도록 했다. 이것이 ‘동양사’라는 명칭이 역사교육에 등장하게 된 시초이다. 대학에서는 이보다 좀 늦어 1910년에야 지나사학이 동양사학으로 개조된다. 동양사라는 것이 독자적인 분과로 탄생한 데는 일본 특유의 사정이 작용했다. 즉 1890년대 중반부터 1910년 전후, 청일전쟁·러일전쟁·조선병합에 이르는 본격적인 대륙침략의 시기에 일본은 아시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지식을 생산·보급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토오꾜오제국대학에서 1910년에 지나사학과를 동양사학과로 개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시라또리 쿠라끼찌(白鳥庫吉,1865~1942)가 러일전쟁 직후 이 점을 아주 명료하게 밝힌 바 있다. 그는 “우리 국민에게 장래 발전할 아시아에 관한 지식을 증가시키고 흥미를 갖게 하는 것”이 승전의 효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전후 경영과제 가운데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했다.7 동양사학 개척자들이 처음에는 조선에 강한 관심을 보였고, 그후 만주·몽골 그리고 서역(西域)으로 관심을 넓혀나갔다.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을 흉내낸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사학이 제도화하는 과정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이는 동양사학의 ‘주춧돌(礎石)’을 깔았다고 평가받는 시라또리 쿠라끼찌가 요(堯)·순(舜)은 실재했던 인물이 아니라는 요순말살론을 제기하고 나온 것에서도 드러난다. 신흥 동양사학의 이러한 우상파괴는 중국사를 본격적인 실증연구로 끌어올린 혁신적 의의를 분명히 가졌으나, 중국 고대문명에 대한 불신감, 중국인에 대한 멸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일본의 우월감도 조성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깐 ‘주춧돌’이 사실은 ‘누름돌(重石)’로서 이후 동양사학에 부담을 주었다는 지적8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일본 동양사학계는 일본이 오래전부터 아시아대륙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사료 면에서 제약이 적었던데다 근대 역사학의 실증적 방법이 도입되어 세계 수준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으로 자평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성과는 “사료의 기술적인 비판에서 극히 치밀했기 때문이고, 동양사의 기반에 대한 무자각, 세계사적 인식의 결여에 따라 연구가 치밀하게 되면 될수록 통일적인 체계, 전체적인 역사상을 빠뜨리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서양사에도 미치지 못하는 셈인데, ‘동양사는 재미없다’는 정평은 이로부터 생긴 것이다”9는 식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1920~30년대 일본에서는 대학 밖의 사회풍조(중국혁명의 발전과 맑스주의 역사학의 영향) 속에서 동양사학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젊은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중국 사회사와 경제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3분과 체제의 틀을 깰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학과 출신자와 교류하면서 세계사적인 각도에서 동양사를 해석했는데, 그 구체적인 성과는 당시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동양사 발전단계론에서 볼 수 있다.10
이러한 경향은 민간학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11 물론 이런 흐름은 일본이 파시즘체제로 들어가면서 억압당하고 말지만, 종전 후 새로운 동아시아 연구의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3. 식민지 조선의 동양사학과 조선학운동
조선에서의 근대 역사학은 대한제국 시기 애국계몽운동의 형태로 속속 학회가 출현하는 가운데 역사 연구, 특히 한국사 연구가 ‘국학운동’의 일부로 착수된 데서 그 발단을 찾을 수 있다. 그 발단 단계에서 중국 전통학문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감과 근대에 대한 선망에서 조선의 근대 역사학은 주로 일본의 학문체계를 도입한다.‘국학운동’으로서의 한국사 연구는 학문의 전문성이나 독창성에서는 그 성과가 미흡한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제도 밖의 학문’이란 시각에서 보면 근대 역사학의 원류가 된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함에 따라 아쉽게도 제도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하지는 못한다.
조선총독부는 제1차 조선교육령(1911)을 발포해 식민지 교육체제를 보통교육과 실업교육 위주로 한다는 방침을 정했고, 그 뒤에 관립 전문학교의 설립을 허용하면서 본토의 대학과는 달리 단순 실기와 고급 과학교육의 중간수준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고등교육과 학문을 위한 제도적 공간은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 바깥에서 일본과 구미에서 돌아온 소수의 유학생이 주축이 된, 근대 지식인에 의한 학술운동은 1910년대에도 존재했다.1910년 12월 최남선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광문회(光文會)가 그 예이다. 이러한 학술운동은 1920년대초 학문의 독립을 추구하고 그것을 제도화하기 위한 ‘민립대학설립운동’으로 발전했으나 이 시도는 좌절된다. 일제는 이에 대응해 ‘조선학’의 학문적 생산이나 보급을 제도적으로 조직화하기에 나선다.1916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찬사업과 고적조사사업을 확대 개편하여 조선사편수회 등의 기구를 설립했다. 그 목적은, 조선사학회의 『조선사강좌』 간행사에 밝혀져 있듯이,“그 대부분은 아직 엄정한 학술적으로 정교해지지 않은, 소위 전통적인 형식”에 머문 조선인의 학술을 새로운 ‘엄정한 학술적’ 심사제도에 의해 통제·배제하기 위한 것13이었다. 이같은 ‘학술적 정교함’과 ‘전문학자’ 재생산을 위해서는 대학이란 교육기관의 권위를 빌려 새로운 학문의 제도화를 완결지을 필요가 있었고 이에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게 된다.
당시 조선의 유일한 대학이자 여섯번째 제국대학으로 1926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은 기본적으로 토오꾜오제국대학을 모델로 하면서도 다소 변형한 것이다. 이는 경성제대의 법문학부가 토오꾜오제대의 문학부·법학부 그리고 신설된 경제학부를 통합, 축소한 데서 드러난다.
더 나아가 경성제대에 부여된 사명에서도 그런 변형을 볼 수 있다. 초대총장 핫또리 우노끼찌(服部宇之吉,1867~1939)는 개교기념사에서 “한편으로는 지나와의 관계, 또다른 한편으로는 내지(內地)와의 관계로 널리 여러 방면에 걸쳐 조선 연구를 행하고 동양문화 연구의 권위로 되는 것이 우리 학교의 사명이라고 믿는다”고 했다.14 또한 개교식에 참석한 한 조선인 내빈도 축사에서 “내지와 지나의 중간에 개재해 3자의 상관적 문화관계를 연구”하는 것이 경성제대가 조선에 위치했기 때문에 맡아야 할 특수한 사명이라고 언급한다.15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경성제대의 개교목표는 일본 및 중국과의 문화관계에 의해 규정된 조선의 ‘동양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조선을 연구하되 민족단위로서의 가치보다는 ‘동양’이란 새로운 가치에 입각해 해석하는 것이었으니, 결국 조선의 ‘내지화〓제국화’ 이념을 충실히 실현하는 것이 경성제대의 존재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은 경성제대 사학과의 구성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학과 안에 국사학·조선사학·동양사학의 세 전공을 두었다. 기본적으로 내지의 제국대학 사학과의 3분과제의 틀 안에 있었지만,서양사 전공 대신에 조선사 전공이 하나의 분과로 들어간 것이다. 세계사적 시야가 결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화제국의 역사를 해체하여 어디까지나‘동양사학’의 학문적 범주 속에 ‘지나사(支那史)’와 ‘만선사(滿鮮史)’를 자리매김하게 됨은, 경성제대 사학과가 일본 식민주의가 조성한 동아시아의 국가간 위계질서를 역사학의 범주에서 실현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강좌제로 운영된 동양사 관련 주요 강좌는 역사는 물론이고 외교, 윤리학, 미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는데 이를 통해 ‘동양’을 새롭게 구성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16
경성제대를 ‘제도로서의 학문’을 위한 거점으로 삼아 조선인의 학문을 통제하는 데 활용한 무기는 일본학자들에 의한 ‘과학적 엄밀성’이었다. 제국대학의 시각에서 보면, 당시 제도 밖에서 이루어지는 학술활동은 “델리키트한 명령론, 히스테리컬한 독단론, 쎈티멘털한 희망론에 호소하는”17 과학적 엄밀성을 동반하지 못한 계몽적인 것에 불과했다. 일본학자들은 일본어로 교육하고 연구하는 제국대학이 아닌 그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조선어에 의한 학술세계를 배제하는 한편, 과학적 엄밀성을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학문적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했다.
과학을 앞세운 지식권력의 효과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학술운동을 주도하던 대표적 역사학자인 최남선(崔南善)은 한국사 연구가 과학성 즉 근대적 연구방법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학술활동에 대해 “과학적 연구의 합리적 해명을 가한 시기나 사건도 한번 없이 입으로만 남과 같은 역사적 자부를 명언(明言)함이 얼마나 양심에 미안한 일인가?”18라고 반성한다. 그가 말한 과학적 연구가 충분치 않다는 자기반성은 과학적 엄밀성을 동반하지 못했다는 제국대학측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그만큼 경성제대의 통제가 효과적이었다는 뜻이다.
제국대학의 지적(知的) 지배는 그곳에서 배출된 전문인력의 지지를 통해서도 확산되었다.1929년부터 조선인 졸업생이 배출되었는데 그들은 과학적 엄밀성을 국어 즉 일본어로 습득한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다. 그런 심리는 그들이 창간한 학술지 『신흥(新興)』의 창간호(1929년 7월호)‘편집후기’에서 기존의 학문을 “확고한 이론, 과학적 근거가 결여”된 것으로 비판하는 데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경성제대 학위제도의 수혜자로서 ‘제도적 학문’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 아카데미즘의 재생산이란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기존의 조선인에 의한 연구와 스스로를 구별하는 폐쇄성을 보였다.19 특히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쌓아올린 중국 고전에 대한 학문전통은 동양사학 전공자들에게 ‘중국사 연구의 원체험’이라 할 수 있겠는데, 새로운 학제에서는 토착적 학문이 의미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그들은 현실의 “‘국사학’(즉 일본사)이라는 권력과 잠재적 ‘국사학’(즉 조선사)에 대한 상상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방황하면서, 동양사를 국사의 외연이나 관계사의 일환으로 파악하여 (현재진행형이 아닌) 완결된 과거의 역사를 실증적(곧 과학적)으로 연구했을 따름이다.20
그런데 경성제대가 조선의 학술활동에 미친 영향을 일방적 통제로만 파악하는 것은 균형을 상실한 이해이다.1930년대초 학생들의 독서회를 기반으로 한 반제동맹사건이 불거져나온 데서 드러나듯이 제국대학 내부로부터의 저항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겠다. 더 나아가 경성제대가 조선 내 학술활동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데 역설적으로 기여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경성제대가 조성한 제도적·공식적 공간 바깥에서 학술활동을 전개하려는 노력이 활기를 띠었던 것이다. 그래서 1930년대에 들어서면 조선에 ‘학계’라 불릴 만한 공간이 형성되고, 그 역량은 자립적·주체적 근대 민족국가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전통의 재현에 집중되어, 조선문화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조선학운동’으로 결집된다.
우리 학문의 기원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다양한 분과학회들의 출현 속에, 국학 종합학회인 진단학회(震檀學會)가 1934년 5월 경성제대 출신자와 일본유학파 그리고 조선의 사립전문학교 출신자들의 폭넓은 참여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 기관지인 조선어학술지 『진단학보』가 “조선 및 근린(近隣)문화의 연구”를 목표로 창간되었다.1934년 6월에서 1941년 6월까지 이 학회는 일본인 중심의 제도적 학문에 대응하면서도, 일본 사학계의 실증적인 연구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역사연구의 객관성과 엄밀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진단학회는 그 활동영역이 경성제대의 밖에 있었지만, 학문방법론이나 구성원의 출신학교로 보아 ‘제도 안의 학문’과 ‘제도 밖의 학문’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진단학회의 연구자세는 역사의식이 빈곤한 ‘초보적 실증사학’으로서 해방직후 일차적인 극복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민족주의 사학과 대비되어 비판받을 때가 있다.
민족주의 사관을 표방한 학술활동은 1930년대에 흥기한 조선학운동의 중심을 이뤘는데, 이것은 유물사관 계열과 함께 ‘제도 밖의 학문’에 해당한다. 민족주의 계열의 학자들이 축적한 한국사 연구성과는 주로 언론·출판 영역에 영향을 미쳐, 잠재적 ‘국사학’을 구상하는 데 기여했다. 그들은 또한 동시대 중국 시사문제에 대한 보도와 평론형식의 글을 언론에 많이 발표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중국 현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산으로 간주된다.21 이러한 연구는 경성제대에서 일본의 대륙진출에 부응해 1931년에 창립한 ‘만몽(滿蒙)문화연구회’(1938년 이후 대륙문화연구회로 개칭)가 제국사의 시각에서 동양사를 연구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이같은 ‘제도 밖의 학문’은 언론은 물론 학술지와 학회를 통해 전문가집단의 지지는 얻었지만, 대학이란 제도 속에 자리잡지 못함으로써 재생산이 아주 힘들었다. 물론 1917년 개교한 기독교계 연희전문학교처럼 반관학적·민족주의적 학풍이 강했던 교육기관도 존재했다. 연희전문에서는 역사과목을 국사(일본사)·동양사·서양사로 분류했는데, 경성제대와 달리 서양사를 따로 구분해 그 비중을 높였다든가 동양사 과목에서 한동안 조선역사를 가르치는 등의 특징을 보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기관도 일본의 학문편제 속에 있었고, 역사학자를 독자적으로 양성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학이 분과화된 상태는 아니었다. 더욱이 1942년부터 연희전문이 총독부 직할로 강제 편입당하는 등 교육이 전시체제로 개편된다. 그리고 조선어 사용이 전면적으로 금지되고, 조선어 잡지가 강제 폐간되어 학회와 학술지의 활동마저 중지되기에 이른다. 이후 경성제대에서 생산되는 ‘제도 안의 학문’만 존속하여 일본제국의 요구에 적합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4. 중국 신(新)사학의 과학화·제도화
조선과 더불어 일본제국에 속했던 타이완(臺灣)에서는 1928년에 타이뻬이(臺北)제국대학이 설립된다. 여기에 설치된 문정학부(文政學部) 사학과에서는 국사·동양사·남양사(南洋史)로 전공을 분류했는데, 기본적으로 3분과제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서양사 대신 남양사를 개설한 변형을 보인다. 이것은 경성제대에서 조선사를 설치한 것과 비교되는데 일본제국 판도 안에서 수행한 역할이 역사학의 범주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22 그렇다면 중국 대륙에서 동양사학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필자가 훑어본 주요 대학 교과목 자료에 의하면, 역사학을 본국사·동양사·서양사 세 분야로 구분한 것은 꿔리즁양(國立中央)대학뿐이었고, 나머지 대학에서는 ‘서양사’란 과목명칭이 비교적 자주 보이는 데 비해 ‘동양사’ 과목은 아주 드물게 눈에 띈다. 대체로 교과목은 본국사와 외국사로 분류되었고, 외국사는 서양사 위주인데 일본사가 종종 개설되곤 했다. 중국에서 ‘동양사학’의 영향이 적었던 직접적 원인은 일본제국의 직접적인 지배권에 들어 있지 않았던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1902년부터 시작된 청조의 근대적 학제는 중국사, 아시아 각국사, 구미사의 3분과제를 채택한다. 이에 입각해 당시의 교과서가 (비록 아시아 부분은 소략히 다뤄졌지만) 제작되었고,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에도 그러한 특징이 이어지다가, 난징(南京) 국민당정부 시기(1928~1937)에는 3과 분립적 역사교과서 체제를 탈피해 동·서양사를 ‘외국사’란 명칭으로 통합한 2과체제로 전환하고, 심지어 중국사와 외국사를 통합하려는 시도까지 나타난다. 이것은 중국이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간접지배 아래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미완의 과제에 매달린 나머지 자국 중심으로 서구와 직접 대면하는 세계사 인식을 갖게 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여기에는 중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보던 전통적 사고도 가세했을 것이다. 중국은 자국 이외의 지역사에 대한 독자적인 지적 체계나 제도를 창안해내지 못했다. 오히려 자국 주변지역의 역사(즉 ‘동양사’)에 대해서는 소홀한 채 고작 각국사(또는 중국과 주변국가 간의 관계사)로만 접근했던 것으로 보인다.23
일반적으로 중국의 근대 역사학은 량 치챠오(梁啓超,1873~1929)의 ‘사계(史界)혁명’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중국 근대 역사학의 선언이라 할 그의 주장은 국민국가 건설에 역사학이 꼭 필요하므로 역사학의 개혁이 이뤄져야만 중국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과거의 시간을 (왕조의 가보家譜가 아닌) 국민국가의 시간, 곧 국사로 재구성하는 것을 신(新)사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와 같은 초창기의 신사학을 진정한 학술로서 자리매김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역사학을 좀더 넓은 범주로 본다면, 국민국가 형성에 기여하는 과학적 역사학을 표방한 점에서는 분명 새로운 사학이었다.
1919년 5·4신문화운동은 이같은 역사학의 과학성에 새로운 요소를 부여했다.1911년의 신해혁명 이후 실현될 것으로 기대된 공화제도가 굴절을 겪자 서구 문명의 정신·원리를 중시하여 신문화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주로 과학적 ‘정신’ ‘방법’의 측면에 집중하여 세계 학술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하는 학술활동이 중국 지식인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로부터 역사학 논의의 중심은 역사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하는 데로 옮겨졌다.
과학적 역사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국고정리운동(國故整理運動)이었다. 흔히 ‘사료학파’라 불리는 학자들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도입했으며, 당시 어문학파가 우세한 국제 한학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그와 경쟁하고자 하는 중국학술계의 요구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사학의 주류가 되었다.
이와 같은 과학적 역사학을 향한 진전은 방법론적으로 통제된 연구를 통해 객관적 지식에 도달하려는 전문화된 과학에 대한 믿음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역사해석에서 자연과학의 진화론적 관점을 과학으로 이해한 이전의 량 치챠오 등과는 분명 다르다.
그런데 국학은 1928년 쟝 졔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군대에 의해 북벌이 완료되고 중국이 통일되면서 퇴조하였다.1922년부터 국학 진흥을 위해 뻬이징대학 등 주요 대학에 연구기구가 설치되어 전문 연구인력 양성, 학술지 간행 등의 성과 위에서 중국학술단체협회(1927)와 중앙연구원(1928) 같은 전국적 기구가 생겨났지만, 결국 좌절하고 만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국학이 과학적 방법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자신의 학술 전범(典範)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국학이 근대적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제도화(‘학원화學院化’)가 불가피한데, 미분화된 학문이기에 당시 대학의 분과화된 학문체계 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역사학·문학 등으로 분산되었을 뿐이다.
난징 국민당정부는 북벌로 전국이 형식상으로나마 통일되자 교육계통을 표준화한다는 방침 아래 각 학교의 조직규정과 교과과정 편제의 규범화를 강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일환으로 1929년에 공포한 대학조직법에는 대학원 설치 규정에 국학에 대한 명문(明文)이 없다.
중국의 신사학이 과학화하는 또다른 길로서 대학에 의해 제도화된 사학과가 있다. 뻬이징대학의 사학과 설치가 그 시원이 되는데, 이로부터 ‘제도로서의 역사학’의 기본형이 제시된다.1917년에 국사편찬처가 뻬이징대학 안에 편입되면서 신설된 ‘중국사학과’는 국사편찬처의 일부 인사와 신문화운동에 불만을 품은 교수들로 구성되는데, 보수 성향이 짙어 신문화운동의 영향권에 있던 문과대에서 예외적 위치에 놓였다. 그러나 5·4운동을 거치면서 뻬이징대학 개혁이 추진력을 얻자 중국사학과는 서양사 과목을 증설하면서 미국 대학을 모델로 해서 ‘사학과’로 개편되는데, 그 방향은 한 국가의 사학을 세계의 사학으로, 문학적 전통의 사학을 과학적 사학, 특히 사회과학적 사학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사학회도 설립되어 뒤에 개설되는 각 대학 사학과의 전범이 되었다. 한편, 사학이 과학적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사학은 과학이면서 동시에 비과학의 특징도 있다고 보고, 역사학의 과학화를 주장하는 흐름에 반대하며 인문주의를 내세운 학형파(學衡派)도 있었으니 그 거점은 난징의 뚱난(東南)대학 사학과였다. 그러나 5·4운동 이래 추진된 역사학의 과학화는 30년대로 들어가면서 제도적으로 표준화·전업화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것은 대학·연구소와 더불어 학회와 학보가 제대로 기능하고 학술체제가 정착되어 학술공동체가 ‘도약단계’를 맞이한 학계 전반적 흐름의 일부였다.
이러한 표준화된 절차는 학술공동체의 성장 속에 1920~30년대에 걸쳐 역사학이 자체 역량을 키워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난징 국민당정부가 중앙집권화의 일환으로 학술·교육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한 결과이다.1940년 정식으로 교육부 학술심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전국 최고의 학술심의기관이 되었고, 교육부가 제정한 교원자격심사위원회 운영법으로 대학교수 자격에 일련의 평가표준이 마련된다. 요컨대 역사연구자를 전문연구자로 인증하는 표준과 학술평가의 객관적 절차는1930,40년대를 전후해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셈이다.1910~20년대는 뻬이징정부의 힘이 약해 오히려 학원의 자율과 학문의 자유가 주어진 활발한 실험의 시기였고 따라서 ‘제도 밖의 학문’이 활기를 띤 시기였다면,30년대는 난징 국민당정부의 당화(黨化)교육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학술의 자유가 훼손된 시기이다. 학문적 표준과 명확한 교과과정의 결여 및 학생의 잦은 정치참여로 20년대 이래 교육현장이 황폐화된 데 대한 우려가 있었기에 난징정부는 좀더 중앙집중적이고 표준화된 유럽대학 모델을 선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사학의 표준화·전업화는 ‘역설적 상황’에서 이뤄졌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전문적으로 훈련된 역사학자의 엄격한 학문, 즉 ‘제도 안의 학문’의 틀이 30년대에 짜인 것은 분명하다. 단, 항일전쟁과 혁명으로 이어진 시대상황 탓에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이와 달리 이 시기에 제도 밖에서 이뤄진 학술활동은 없었을까. 여기서 1920년대 후반 이후 왕성하게 활약한 맑스주의 역사학을 제도권의 학문과 대립적인 위치에 있던 학문이란 시각에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맑스주의 역사학자들은 그 개인의 신원이 대학이나 연구기관 같은 제도 안에 있든 그 바깥에 있든 유물사관이 제공하는 또다른 ‘과학적’ 시각에 힘입어 상당히 독창적 연구성과를 쌓아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30년대 중반에 제도권 역사연구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고증을 위주로 한 제도적 역사학이 갖지 못한 체계적·실천적 역사해석으로 넓은 독자층을 형성했다. 물론 정치에 대한 그들의 몰입은 다양한 역사해석의 상대적 장점을 고려할 수 없게 했지만, 중국사회성격 논쟁을 진행해 공산당의 노선수립과 관련한 쟁점을 공론에 붙이고 그 지지를 구하는 동시에 논쟁의 성과를 노선에 흡수케 한 실천적 성과는 인정해야 한다.“도식적 역사체계의 현혹스런 영향에는 무감각한 모택동 같은 혁명가들이 중국사회의 복잡성을 파악하는 데 더 유능했고, 역사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은 채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준 혁명전략을 그 복잡성에 근거해 수립할 수 있었”다는 평가24는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5. 결론: 동양사학을 넘어서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독자적 학문’으로 탄생한 동양사학은 태평양전쟁 패배를 계기로 세계사 속에 흡수됨으로써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물론 중등교육에서는 사회과의 도입을 계기로 세계사 개념이 정착된 데 비해 대학과 학계에서는 3과제의 관행이 여전히 유지된 채 변형이 병행되고 있지만,(팽창적) 지역주의가 일본 지식인에게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을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학문적 노력은 아주 적어졌다. 그러다가 1990대년 들어서 ‘동아시아’가 중요한 담론으로 부각되기 시작했고, ‘공생·협동·안정의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는 새로운 아시아학이나 동북아시아학을 창출하려는 움직임도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맑스주의 사학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제도권에 진입해 지배적 학문이 되었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지역사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은 20세기 전반기와 마찬가지여서, 이 지역을 다룰 독자적인 지적 체계나 제도를 창안한다는 것은 기대하기조차 힘들다. 중국에서는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된 이후, 특히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를 겪고 나서 자율적인 순수 학문을 세우기 위해 20세기 전반기의 중국학술사를 재조명하는 이른바 ‘국학열(國學熱)’이 나타났다. 또한 중국은 ‘동방’ 국가(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지역까지 포함) 사이의 문화 교류사를 복원함으로써 ‘동방’ 문화 형성에 기여한 중국의 역할을 부각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경향도 보였다.‘동방’의 새로운 상을 정립하려는 이 학술적 전략을 ‘동방학’이라 부를 수 있겠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동서회통의 사유를 통해 탈근대적인 문명가치를 찾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25
종전 후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을 접수한 국민당정권은 대학에서 일본 영향을 없애고 1930년대에 표준화한 학문체계를 적용했다. 그 결과 타이뻬이제국대학의 후신인 타이완대학 사학과에서는 3분과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고증학적인 중국사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주변 지역에 대한 관심은 적어졌다. 그런데 1990년대 이래 타이완 독립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제도 밖에서 이뤄지던 타이완 역사 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민진당(民進黨)이 정권을 잡은 지금은 제도 안에 진입해 주류가 되다시피 한 상태이다. 이와 더불어 타이완의 새로운 정체성을 (대륙이 아닌) 해양에서 찾기 위해 동아시아(동중국해 지역)와 동남아시아(남중국해 지역)의 연결점에 자리잡은 타이완의 중심적 위치를 강조하는 해양사관에 입각한 지역연구가 진행되고 있다.26
타이완과 달리, 해방 이후 경성제국대학이나 일본 사립대학 출신 학자들이 주류를 이룬 우리 사학계에서는 3분과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동양사학의 경우, 처음에는 실증적 연구방법에 입각해 동양사 속에서 한국사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대체로 한중관계사가 주된 연구영역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중국사의 내재적인 발전과정을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쪽으로 관심이 옮아갔다. 그 결과 중국사 연구는 양적으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방법의 다양화, 연구수준의 국제화 등을 이루어냈다고 내부적으로 평가될 정도이다. 그리고 그 일부는 중국·일본 등지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료나 기존 연구성과를 중시한 실증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자칫 ‘인용만능주의’로 흐르고 독창적인 가설이나 이론적 문제제기를 제약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왜 이런 발언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살펴보기 위해서는 동양사학계의 지식생산과 유통과정에 대한 좀더 깊이있는 분석이 요구되지만, 일단 그간의 연구테마가 너무 미세한 데 치우친 나머지 ‘통사적 접근’이랄까 ‘총체적 접근’이 결여된 탓이란 반성에 주목하고 싶다. 이것은 문제점의 핵심을 잘 짚어낸 진단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처방이 한국사(연구)와 연계된 중국사를 강조하는 데 그친 것27 같아 아쉽다. 올바른 처방은 제도적 학문분과의 하나인 한국사 연구의 성과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와 현실에서 부닥치면서 얻게 되는 문제의식을 적극 끌어들여 주체적으로 동아시아(사)를 재구성하는 것이지 않을까.
이는 경성제국대학이 남긴 3분과제의 극복과 통한다. 이미 우리 사학계에서도 “사학과가 3과로 분리된 것 자체는 비정상적”이었으며, 연구성과가 학계와 사회에서 소통되는 통로를 좁히고 큰 틀에서 역사를 전망하고 체계화하는 데 커다란 장애로 작용했다는 인식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28
이제 우리는 동아시아 역사학의 재구성이라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20세기 역사학의 논의 중심이 ‘어떻게 역사를 연구할 것인가’였다면 앞으로는 ‘왜 역사학인가’로 옮겨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지적 수익자’29인 대중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 지식과 일반대중이 분리된 역사학의 폐단을 극복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권력의 역사학에서 시민의 역사학 또는 공공의 역사학으로 전환하자는 제안은 충분히 검토해볼 가치가 있다.30 그런데 국민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공공의 역사학이란 구상에는 원칙적으로 공감하지만 국가권력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여 문제가 있다. 새로운 학문의 공간과 기회가 확대되기 위해서는 제도화가 필요하므로 국가권력을 배제하기보다는 그 억압성을 약화시키고 민중의 참여를 극대화하는 길을 모색하는 편이 옳다. 이것은 곧 역사학의 공공성 확대에 다름아닐 터인데 이 틀에서 시민운동과의 연대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 밖의 학술활동에만 주목하지 말고, 제도 안팎에서 이뤄지는 학술활동의 긴장과 협력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특히 동아시아의 제도영역 안에서 진행되는 변화의 징후를 세심히 읽어내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제도 밖의 역사학’을 부각하여 ‘제도 안의 역사학’과의 상호관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역사학의 역사성을 확인하는 작업은 역사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지식과 생활을 튼실하게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여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동아시아 전체에서 대학개혁이 거론되는 지금이야말로 제도 안팎의 경계를 넘나드는 학문을 새롭게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적기가 아닐까 한다.
그 다음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확산이란 상황에서 변화하는 국민국가의 역할을 파악하고 그와 연관해 역사학의 변화를 점검해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우리에게 절실한 전지구화에 대한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동시에 감당하기 위한 학문적 기초로 지구―지역학31을 수행할 것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것을 역사학에서 구체화한다면 ‘비판적·역사적 동아시아학’이 되지 않을까 한다. 현 싯점은 지구화의 추세와 맞물려 지역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특정지역의 문화적·역사적 맥락에 대한 감수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고 있다. 국가를 분석단위로 하는 냉전시대의 유물인 종래의 지역학을 지양하면서 역사학(그리고 문화학)의 강점을 결합한 새로운 학문이 학술운동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제도 안에서 수행되는 것은 한낱 공상만은 아닐 것이다.32 이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국사의 해체’가 아니라 국사와 화해하고 세계사와 소통하는 동아시아사의 가능성도 열리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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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명말 이래 싸이언스(science)의 번역어로 ‘격치(格致)’가 사용되었는데 1905년 과거제 폐지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의미로서의 ‘과학’이 그것을 대체했다. 이로부터 과학에 혼재하던 ‘과거의 분과(科擧之分科)’란 본래 의미는 사라지고 중국상황에서 다양한 내포를 갖는 현대 술어가 되었다.↩
- ‘제도로서의 학문’이 대응하지 못한 사회적 수요를 어느정도 충족시켜준 제도 밖의 학술활동을 잠정적으로 ‘운동으로서의 학문’이라고 이름붙여볼까 생각중이다. 다소 낯선 용어인 ‘운동으로서의 학문’이란 근대적인 제도학문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당한 동아시아의 지식―이것은 종종 ‘민간적·민속적 지식’이나 ‘저널리즘적 지식’으로 폄훼되었다―의 생산과 유통을 가리킨다. 그것의 중요한 특징은 지배적인 학문제도와 관행 및 (이것을 지탱해주는) 지배적 사회현실의 외부에서 그것의 폐쇄성을 비판하면서, 생활세계 내부에서 다수 민중을 향해 열린 학문을 수행하려는 지향을 갖는 것이다.↩
- 家永三郞 「日本近代史學の成立」, 『日本の近代史學』,東京:日本評論社 1957 참조.↩
- 카노는 민간학의 관점에서 일본 학술사를 재구성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각주 11 참조.↩
- 坪井九馬三 「史學に就て」,『史學雜誌』 제5편 제1호(1894년 1월호),9면,13면.↩
- 重野安繹 「史學に從事する者は其心至公至平ならざるべからず」, 『史學會雜誌』 1889년 창간호,1면.↩
- 白鳥庫吉 「普通敎育に於ける東洋史に就て」, 『敎育公報』(1905.10.15.)↩
- 小倉芳彦 「東洋史學·中國·私」,『近代日本における歷史學の發達』(下),靑木書店 1976,45면.↩
- 堀敏一 「東洋史」,硏究社編輯部 編 『大學における學問』(人文社會科學編),硏究社 1970,154~55면.↩
- 旗田巍 「東洋史學」, 『世界歷史事典』 제20권,平凡社1954,284면.↩
- 鹿野政直 『近代日本の民間學』,岩波書店 1983. 민간학의 특징은 카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국가를 주제로 하지 않고 ‘생활’을 주제로 한다. 둘째로 관학아카데미즘이 구미의 서적을 소재로 하고 그 방법론을 차용하는 데 비해 민중 속에서 학문재료의 주된 부분을 찾는다. 셋째로 제도로서가 아니라 운동으로서 작동한다. 넷째로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귀납법을 활용한다. 다섯째로 관료적 문체가 아니라 시민감각을 담는 문체를 사용한다.
맑스주의 학문이 민간학에 속하는가는 다소 논란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카노 자신은 맑스주의 학문이 민간학인가 국가학인가를 양자택일하라면 전자라고 답하겠다고 밝히면서, 맑스주의 학문이 “실천과 상승작용하여 민간학 역사에서 최량(最良)의 손꼽히는 성과를 낳았다”(鹿野政直 「『近代日本の民間學』を書いて」, 『思想の科學』 96호,1987,12면)고까지 말한다.↩ - 기존의 성균관 등 대한제국의 고등교육기구는 폐지당하거나 지위가 격하되었고, 이미 ‘대학부(大學部)’를 갖추고 있던 기독교계 학교인 이화학당, 세브란스 등은 ‘전문학교’란 이름조차 박탈당했다.↩
- 조선사학회 「총서(總序)」, 『조선사강좌: 일반사』, 조선사학회 1923,1면.↩
- 「總長訓辭」,『文敎の朝鮮』,朝鮮敎育會 1926,3~4면.↩
- 李軫鎬 「京城帝國大學の開學を祝す」, 같은 책 8면.↩
- 박광현 「경성제대의 동양사학이라는 제도」, 미간행초고. 이 원고를 미리 보여주고 인용을 허락해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 京城帝大法文學會 編 『朝鮮經濟の硏究』(刀江書院 1929)의 「後記」에 실린 조선경제연구소(朝鮮經濟硏究所)의 선언 참조.↩
- 최남선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朝鮮歷史通俗講話開題)」, 『육당 최남선 전집(六堂崔南善全集)』 2, 현암사 1975,410면.↩
- 박광현 「경성제대와 『신흥』」,『한국문학연구』 제26집,2003.↩
- 박광현, 앞의 미간행초고. 조선어문학 출신자들이 조선어문학회를 구성한 것과 달리 동양사 출신자들은 학문적 동질성을 갖지 못해 자신들만의 학술공간을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 현재 발굴·정리중인 자원이 많은데, 한 예를 들면 당시 동아일보 특파원이었던 신언준의 중국 관련 논설을 모은 『신언준 현대 중국 관계 논설선』(민두기 엮음, 문학과지성사 2000)이 있다.↩
- 두 대학의 역할 비교에 대해서는 졸고 「想像なかの差異,構造なかの同一:京城帝國大學と臺北帝國大學の比較からみる植民地近代性」,『現代思想』 2002년 2월호 참조.↩
- 예를 들면 일본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왕 퉁링(王桐齡)은 1929~31년에 뻬이징(北京)대학에서 동양사란 명칭의 강의를 드물게 개설한 인물인데, 그의 동양사 교과서에 따르면 “동양사란 중국사의 보조분야로서 중국이 주이고 중국과 관계있는 국가는 모두 편입시켜 국가간의 관계를 상세히 서술하는 것이다”(『東洋史』,商務印書館 1922,4면)라고 한다.↩
- 아리프 딜릭 「1930년대의 마르크스주의 사학과 혁명」, 민두기 엮음 『중국의 역사인식』 하권, 창작과비평사 1985, 특히 756면.그런데 딜릭의 이같은 평가는 마오 쩌뚱(毛澤東)의 신민주주의혁명론을 과도하게 높이 평가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따져볼 필요가 있다.↩
- 이 새로운 경향 속에 서구 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저항성’과 아울러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를 꿈꾸는 ‘중화성’의 두 얼굴이 감추어져 있다는 점을 적절히 지적한 글로 이종민의 「중국의 ‘동방학’적 시각의 흥기와 그 정치적 의미」(미간행초고)가 있다.↩
- 이런 지향은 일제시대의 식민지질서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고, 타이완의 동남아 진출 정책을 뒷받침하는 아(亞)제국주의적 욕망이 작동하고 있음을 비판한 쳔 꽝싱(陳光興) 『제국의 눈』, 창비 2003,35~110면 참조.↩
- 이성규 「한국 중국사 연구의 동향」, 한일역사가회의 조직위원회 『1945년 이후 한일양국에서의 역사연구 동향』, 국학자료원 2002,122면.↩
- 「집중토론: 한국역사학·역사교육의 쟁점」, 『역사비평』 2001년 가을호,142면,145면 참조.↩
- 19세기에서 20세기 후반기까지 대학의 기본적인 역할은 국가를 관리하는 엘리뜨를 양성하는 인프라였다. 그렇지만 현재는 점차 대학이 상업화된 정보를 생산하는 산업으로 바뀌고 있다. 단적인 예가 학생을 ‘소비자’(client)로 간주하는 풍조이다. 물론 이때 국가가 생각하는 정보는 대체로 자본을 위한 것이지만, 어느정도까지는 이 변화를 활용해 또하나의 길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일본 대학이 안고 있는 최대 문제가 학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과소평가하고 ‘지식의 수익자’로서의 시민의 이미지를 완전히 결하고 있어, 그 결과 시민에게 대학의 메씨지를 호소할 수 없었던 것이란 지적에 귀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春日匠 「大學と社會の再契約」, 『IMPACTION』138호, 2003년 10월호) 그는 아카데미즘이 사회와 계약을 다시 맺어 새로운 신뢰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비영리단체(NPO)를 그 매개체로 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 임지현 「권력의 역사학에서 시민의 역사학으로」, 『역사비평』 1999년 봄호 참조. 그는 공공의 역사학을 지향하는 전략으로서 대중의 역사화, 즉 역사학이 대중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침투하여 뿌리내릴 것과, 대중과 역사연구자가 공동 주체가 되어 함께 텍스트를 만들 것을 제시했다.↩
- 이 용어는 globalism에서 파생된 glocalogy에서 발상을 얻은 것이다.local이 national보다 작은 단위를 가리키는 것이 상례이나, 여기서는 regional의 뜻을 겸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새로운 동아시아학은 국민국가의 안과 밖을 복합적으로 다뤄야 하므로 local과 regional의 번역어로 쓰이는 ‘지역’이란 우리말이 적절하다고 하겠다.↩
- 여기서 새로운 학문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두 가지 자원을 소개하고 싶다. 하나는 문제의 설정, 연구과제 결정, 연구개발 과정, 결과의 적용과 보급 등 모든 면에서 의뢰자인 지역주민이나 지역시민사회단체가 직접 참여하여 조사·연구하는 지역기반연구의 생생한 사례인 과학상점(science shop)운동이다. 이것은 인턴십의 형태로 대학 교육과정에 편입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연구영역의 개발로도 이어진다. 또 하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란 유교적 학문관을 통해 근대적 과학관을 넘어설 가능성을 엿보는 것이다.1920년대 중국의 슝 스리(熊十力)는 당시 중국 대학이 ‘자잘한 고증을 익히는 무료한 작업’을 하는 풍조에 젖어 있는 것을 과학에 대한 피상적 이해의 소산이라고 비판했다. 역사연구가 단지 역사지식을 풍부히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람이 되어 사회를 이끌고 국가와 민족의 발전과 관련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