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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학문의 주체성과 오늘의 대학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추세 속의 학술생산

 

 

쳔 꽝싱 陳光興

타이완 칭화대학 아시아태평양문화연구실 연구원. 현재 싱가포르국립대학 아시아연구쎈터(ARI) 경력방문연구원.

쳰 융샹 錢永祥

중앙연구원 인문사회과학연구쎈터 부연구원.

ⓒ 陳光興·錢永祥 / 한국어판 ⓒ (주)창비

*이 글은 2004년 9월 25,26일 ‘타이완의 (인문사회)고교학술평가에 관한 토론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필자들이 한국 독자를 위해서 다듬고 보완한 것이다.

 

 

1. 서언

 

근년에 들어 정부 및 학계의 지도층에서는 전체 학술계에 대해 각종 규정조항을 만들어 학술평가제도를 적극적으로 강화하고 있다(여기에는 승진 및 초빙 제도, 학술간행물의 심사평 제도, 대학평가제도 등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평가제도는 연구자에게 국제화, 영어화를 요구하며 그것을 연구자금의 분배, 개인의 포상과 징계, ‘퇴임제도’와 직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제도의 설계가 편견, 선입견, 천견(淺見)으로 인해 종종 학문간에 있게 마련인 차이점을 무시하고 국내 학술생태의 구체적 상황을 홀시하며 더 나아가 학술발전 자체의 내재적 요구와 외재적 조건을 무시하기 때문에, 평가제도는 벌써부터 학계에서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신진학자들은 이러한 평량(評量)방식을 수용할 수 있을 뿐 그 제정과정에 참여할 수 없으며 또한 늘상 임용이라는 생존문제로 압력을 받고 있다. 또한 이공계가 우위를 점한 기관이나 대학에서 인문사회학과는 늘 이공계의 평량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초빙을 받았으면 게임의 법칙에 따라야 하며, 불공정한 대우를 받더라도 울분을 참고 삭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경력이 적은 교수나 연구원 사이에서는 점차로 건강하지 못한 심리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국내 학술의 정상적 발전을 위해 그리고 학술주체들의 공평하고 건강한 작업 환경과 조건의 쟁취를 위해, 학계는 반드시 한발 앞서 학술평가의 문제를 공공의 토론장으로 끌고 나와, 학술주체들이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고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번 토론회를 개최하게 된 기본목적이다.1 우리는 이번 회의에서 얻은 성과를 토대로 한층 심도있는 토론을 진행하여 학계에 치열한 공론을 형성하고자 한다. 타이완 사회는 이미 민주시대에 진입했다고 성명(聲明)한 바이므로, 학계는 더욱 큰 책임감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현실화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이상 소수의 학술행정관료가 학술평가기제를 제멋대로 결정하도록 용납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학술사회의 여론을 수용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학술연구자로서 우리는 시야를 법령규칙 등 행정적 차원에만 제한해서는 안된다. 학술평가는 학술행정이나 학술규범만이 아니라 지식생산의 정치경제학에 관한 문제이다. 학술행정체계가 추동하는 평가체제의 방향 및 정책 속에 숨겨진 미래의 거시도(巨視圖)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눈앞의 학술생산방식을 움직이는 동력의 소재를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공공토론이 결여된 상황에서, 만약 쉼없이 바뀌는 자잘한 규칙조항 뒤에 숨어 있는 총체적 그림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에 대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총괄적인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전지구화라는 추세 속에서 인문사회학의 학술생산은 도대체 어떤 새로운 관문에 부딪히게 될 것인가? 학술연구자로서 책임감있게 문제를 역사화하고 시야의 폭을 확장할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이 문제에 대답할 자격을 가진다. 학술평가의 문제는 마땅히 신자유주의의 전지구화라는 추세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2. 변화의 동력과 변화의 방향

 

2차대전 후 냉전체제는 전지구적으로 빠르게 형성되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북한, 중국, 북베트남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확장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자본주의 세계의 반공 방위선을 연장하여 각지와 군사적 협력관계를 맺고, 일본, 남한, 오끼나와, 타이완 등지를 권역성(regional) 군사부서 안으로 편입시켰다. 잊어서는 안될 것은 냉전질서가 장기화됨에 따라 그것의 작용범위가 군사나 국제정치의 층위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친미반공의 기운은 사람들의 정서 속에 깊이 침투하여 우리의 정치·사회·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의 사고와 신체 그리고 욕망 속에서 유동해왔다. 문화적 차원에서 타이완 지역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전전(戰前)에는 미국과 그다지 큰 관련이 없었다.그러나 전후 냉전구조와 양안(兩岸,타이완과 중국대륙)의 긴장, 거기에 타이완 국민당정권의 친미반일 콤플렉스에 한국전쟁 후 남북한 분단상황이 가세하자, 미국은 서둘러 타이완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교육부가 공포한 통계에 의하면,1990년대 이전 타이완 유학생의 80~90%가 미국으로 향했다. 타이완은 당시 미국 최대의 유학생 군단을 이루었던 것이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타이완 유학생의 절반이 미국으로 가고 있다. 따라서 전후 지식인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정치적으로 미국식 민주주의는 타이완의 중요한 상상의 대상이 되었다. 대중문화의 시장이 할리우드에 의해 잠식된 것은 물론이며, 대안적 대항문화조차도 본능적으로 미국식을 따랐다. 요약하면, 전후 타이완의 미국화는 미국에 대한 총체적·전면적 의존이라 할 수 있다. 타이완의 학술생산은 이러한 구조를 통해 미국의 계통 속으로 편입되었다.2 하루아침에 우리는 구석구석까지 미국을 본으로 삼아 제도 및 학과분계까지 모두 미국을 따랐다. 심지어는 교과서나 번역물 역시 모두 미국에서(정확하게 말하면 냉전체제 하의 미국 학계)에서 들여왔다. 미국유학생들이 지식 차원에서 냉전체제의 세례를 흠뻑 받았기 때문에, 친미반공이 타이완의 대학과 지식생산의 기본구조가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80년대말, 소련이 와해되고 동유럽 사회주의정권들이 차례로 무너지자, 근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세계냉전체제는 구미지역에서 종결을 고하게 되었다. 그러자 미국 주도의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의 동력이 빠른 속도로 패권을 형성했다. 그것은 자본을 최전방에 앞세우고 자유시장을 수단으로 삼아 냉전시기에는 침범할 수 없었던 영토를 향해 진격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과 대립하는 사회주의 방해세력을 소탕한 후 자본주의는 전지구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전지구화란 냉전의 해빙3과 함께 출현한 것으로, 전지구화를 통해 냉전시기에 서로 동떨어져 있던 지역간에 관계가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학술생산방식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냉전시기 미국대학과 학술생산이 국가이데올로기로부터 통제를 받았다고 한다면,1990년대 이후 지배적 힘은 전지구적 경쟁 속의 시장주도성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대학의 원로교수인 미요시 마사오(三好將夫)는 2000년에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전지구적 기업화가 가져온 효과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데는 학술생산력의 외관과 그 정책에서이다. 과정에 등록한 사람 수, 학위취득의 수, 박사취업률은 모두 고도의 관리와 감시 대상이며, 마치 공업생산단위에서처럼 정확하고 합리적인 통계를 가진다. 학술의 등급은 출판량과 인용문 수로 계산된다. 더 중요한 것은 연구경비를 처리하거나 연구지원금을 받는 것이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4 말하자면 90년대 이후 미국 대학에는 전대미문의 전문화 현상이 생겨났다. 그 배후에 있는 기본적 논리는 사유화와 시장화를 향한 신속한 방향전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객관적 수량화를 가장한 평량표(評量表)가 나와 학술을 계량화했다. 대학의 양상과 사회적 위상 역시 빠르게 변화했다. 예를 들면, 과거 대학총장은 학술, 견식, 사회적 명망 등에 기반해 선출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총장은 대기업의 CEO로 바뀌었다. 총장은 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내야 하며 경영능력을 겸비하여 대학에 이윤창출 씨스템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유화와 시장화의 논리가 극도에 이르러 전지구적으로 거침없이 확산되는 상황이 오게 되면, 교육기구 역시 오로지 유명 브랜드의 대학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하바드대학이 맥도널드처럼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어 도시 곳곳을 침공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이미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각지의 대학이 생존하기 위해 명문학교들과 연합해 이익을 챙기는 경우도 늘어갈 것이다. 싱가포르 국립대학과 미국 MIT의 원거리 합작이 그런 예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시장화 추세는 부단히 후진국을 견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후진국의 모방과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타이완이나 싱가포르, 남한 및 중국대륙 각지에서도 상호경쟁이라는 압력하에서 학술생산은 수량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 경쟁력의 수치로 환원되어 다소간의 포상과 징계의 준거가 되고 있다. 각각의 학교가 받게 되는 예산지원금의 액수는 물론, 심지어는 시장에서의 퇴출 여부조차 이러한 수량화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또한 국제 무대에서도 각 대학은 국제대학평가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앞다투어 경쟁을 벌이고 있다.5 어떤 경우에는 몇개의 대학이 연합해 규모를 증가시켜서 국제 평가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기도 한다.6 개별 연구교수의 경우에도 극도로 단순화되고 수량화된 평가방식이 적용된다. SSCI(Social Sciences Citation Index,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 A&HCI(Arts& Humanities Citation Index, 예술·인문과학논문인용색인), TSSCI(Taiwan Social Science Citation Index, 타이완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 등이 모두 그런 것으로서, 단일한 수량화 방식으로 모든 인문사회학의 성과가 측량되고 있다. 인문사회 영역은 최근 이른바 포스트식민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 및 내부적으로는 타이완 본토화 운동으로부터 충격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타이완 학계에서 타이완의 지식생산과 미국 신식민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토론이나 반성은 전혀 전개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술의 국제화가 유행하자 미국화가 자연스레 국제화와 동일시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학술생산 변동의 주요동력이 타이완 외부, 특히 미국 학계의 변화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된다. 거리낌없이 말하자면,90년대 이후 양안(兩岸)이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중국대륙은 대량의 자본을 투자하여 중점 연구대학들을 세웠다.7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경쟁의 압력은 일파만파의 파장을 가져왔다. 따라서 한발 앞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전지구적 신자유화의 운용논리가 어떻게 학술생산, 특히 인문사회학 관련 분야의 학술생산을 재위치짓는가 등이다. 과거에는 국립대학의 경비가 인민의 세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연구 및 교과과정은 상당정도 자주성을 지닐 수 있었으며,반드시 시장원리를 기준으로 삼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대학이 사유화됨에 따라, 학생들이 어느 과정을 많이 선택하며 어느 학과나 어떤 개인이 대학에 돈을 벌게 하는가가 곧 학술발전의 주도적 힘이 되었다. 기업의 후원을 얻기 위해 학술생산은 새로운 방식으로 재정의되었는데, 그것은 R&D(연구개발)와 같이 산업계 소속의 연구부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문사회학과가 연출할 수 있는 역할이란 공적·사적 지식뱅크나 연구쎈터로서, 시장잠재력을 가진 사회문화를 분석하여 상품화하는 것이다. 원래 인문사회학의 역할이란 반성적 사회진보의 동력이었는데 이것이 이제 몰락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이 앞으로의 추세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인문적 반성정신을 마땅히 갖춰야 할 대학의 주체가 정부 및 산업에 종속된 연구객체로 바뀌었으니,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반성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눈앞의 상황을 보면 대세에 부합하는 학과(혹은 학과 내부의 어떤 지류)는 이미 선뜻 그것을 수락했고, 즉각 궤도에 편입할 능력이 없는 학과는 죽을힘을 다해 연결고리를 모색하고 있다. 지식의 국가화와 지식의 산업화에 대한 반성의 공간이나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어 보인다. 따라서 정밀한 분석이 결여된 상황에서 정부와 학술계의 소수 지도자층이 경비 분배를 중심으로 하여 (학술연구자 대신) 연구와 교육방향을 조정하고 있으며, 전체 학술사회의 성격 및 미래를 결정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전지구화라는 추세 속에서 사회자본을 통합하는 국가는 학술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앞에서 서술한 정황 속에서 국가는 어떻게 총체적인 기본정책을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지식생산을 재정립할 수 있는가, 정책의 내용은 어떠할 것인가, 그것을 학술연구자에게 어떻게 공지할 것인가, 이러한 정책형성의 과정은 광대한 학술사회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들에 대해 답안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눈이 아찔할 정도로 요란한 조항들이 부단히 속출하는 상황에서 그 방향이 어디인지에 대해 아무도 속시원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교과개정도 마찬가지이다. 학계에 광범위한 토론의 장이 없기 때문에 현직교사들은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면서 과중한 부담과 책임만 떠맡았다. 더 중요한 것은,이러한 정책이 형성된 후 수많은 행정 제도가 도대체 어떤 효과를 낳았는가 하는 점이다.여기에는 즉각적 반응이 있었다. 즉 국가경제발전이라는 명목하에 산업계·관계·학계가 서로 담합하여 대량의 자본을 투여했고,정부는 각종의 지원제도를 통해 특정 연구방향으로 유도했다.그 결과 국민국가라는 틀 속에서 정부는 대학 및 연구기관의 지식생산의 방향으로 통합적으로 틀어쥘 수 있게 되었고, 산업계·관계·학계가 규정한 생산력을 갖추지 못한 지식영역은 곧 주변부의 지위로 비참하게 배척되었다.

그러나 지식생산이 국민국가화하거나 국가가 ‘산업경쟁력’을 위해 학술생산을 주도하는 경향은, 또다른 방향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대학의 시장화·국제화와 애매한 경쟁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정부정책에 장기적·총체적인 사고가 결락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결과는 연구 및 교육이라는 두 개의 측면에서 드러났다. 교육 방면에서, 국제적 경쟁을 위해 대학교수는 어떻게 외국학생을 그러모을 것인가, 어떻게 학생의 영어능력을 향상시킬 것인가에 치중하게 되었다. 인문사회학과는 외부 학생의 수요에 맞게 교과과정을 조정하고 특히 영어교육을 강화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국의 언어와 문자를 중시하는 국민국가의 기본정신에 위배된다. 현재 가장 영향력있는 타이완 문학과 타이완 역사를 예로 들어보자. 이들 학과의 수업을 영어로 진행한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지겠는가? 영어로 번역된 교재는 얼마나 되며, 교수들 중 몇이나 영어로 수업을 할 수 있는가? 국가는 연구활동이 산·관·학 복합체가 제기한 타이완 고유의 현안 수요에 복무할 것을 요구하지만, 학술이 국제화되면서 학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기성 국제학술의 ‘장’(champs,프랑스 철학자 부르디외의 개념으로 사회·문화적 생산영역 안의 행위자들과 조직들의 총체이자 그것들간의 역동적 관계–옮긴이) 속에서 조직되며 구미의 인문사회학자가 직면한 문제들이 타이완 사회에는 그다지 절박하지 않다는 점이 연구 방면의 문제이다. 국제 학술시장에 내놓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구미의 수요에 부합하는 분석틀이나 문제의식을 도입하지만, 이것은 도리어 산·관·학 복합체가 기대한 것과 크게 어긋난다. 또한 국제화라는 운용방식은 바로 국제적 연구팀을 형성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문제의식의 공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는 보통 비교연구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타이완 문제에 대한 연구팀을 주도하려면 엄청난 경비를 들여 외국학자들을 팀 안으로 끌어와야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역시 국민국가의 틀에서 벗어나며 연구는 산·관·학 체제 안으로 편입될 수 없게 된다.

산·관·학 복합체의 형성은 인문사회학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는데, 이것이 확대되어 인문사회학의 자주적 발전을 가로막고 나아가 전체 학술생산의 주체성을 박탈할지 어떨지, 우리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먹구름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전지구화된 학술생산이 인문사회과학이 자청하는 비판성과 반성성이라는 중요한 두 방향을 재단할 수 있겠는가?

 

 

3. 현행 평가체제의 효과

 

학술평가체제는 신자유주의의 전지구화 흐름 속에서 학술생산의 경쟁력을 자극하고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기제이다. 타이완의 현실 속에서 평가는 대체로 ① 각 대학의 전체평가 및 거기에 소속된 각 단위의 연구소, 과의 평가 ② 각 학과 및 학문의 평가 ③ 개별학자 연구성과에 대한 평가 ④ 학술간행물에 대한 평가 등 몇개의 층위로 나뉜다. 우리의 토론은 뒤의 두 개, 특히 근래 SSCI와 TSSCI 체제가 야기한 논쟁에 집중될 것이다.

전지구적 신자유주의화라는 대세 속에서 학술서의 출판은 시장화라는 질곡으로 인해 나날이 위축되고 있다. 이러한 신질서 속에서 책의 출판은 학술적 가치가 아닌 시장의 유무에 의해 판단된다. 상대적으로 정기간행물이 중요해진 이유도 바로 대부분의 도서관이 정기간행물을 구입해주기 때문이다. 그 경우 대금은 선불로 지급되므로 출판사에서는 자본투자의 모험을 할 필요도 없고 이윤 역시 단행본 출판보다 높다. 따라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정기간행물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단행본 저술보다 높게 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장의 논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볼 때 눈앞의 광대한 전지구적 학술발전의 맥락에서 학술저서의 가치는 결코 저하되지 않았다. 학자들은 여전히 저술활동을 학술성과의 체계적 패턴으로 간주하며 저서를 비교적 완성된 단위로 생각한다. 학술계에서도 저서의 가치를 폄훼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예를 들어 세계 각지의 메이저 대학 인문학과에서 저서 실적은 여전히 승진의 관건이다. 한권의 학술저서가 학술적 가치를 갖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학술계 내부에 자체적 공인이 있다. 예를 들면, 민국(1912년 중화민국의 설립을 가리킴–옮긴이) 이래 사학 관련 저작은 수없이 많다. 모두 다 특정한 심사기제를 통과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학계에서 그 수준의 고하에 대해 공론이 없다 할 수 있는가? 물론 지금의 타이완 학계에는 비교적 완비되고 객관적인 수량화 분류표준이 없다. 그러나 그 점에 관해 우리가 도출할 결론은 이러한 표준을 세우자는 것이 아니라 저서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쪽의 논리가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이다.

간행물 인용색인에 관한 설계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서는 그 운용기제의 내재성보다는 그것의 외부효과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먼저 미국의 톰슨사가 제공하는 톰슨ISI 써비스는 영문출판물을 겨냥한 것으로 세계의 다른 주요 국제언어를 전혀 포괄하지 못한다. 독일어, 일본어, 한국어와 같은 언어는 고사하고 스페인어, 중국어, 말레이시아어, 아랍어, 프랑스어도 다루고 있지 않다. 후진국의 경우 학술행정체계상 더 나은 통계지표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SSCI 및 A&HCI를 참고로 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학계는 이처럼 부분으로 전체를 가리는 행동의 후과(後果)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톰슨ISI의 인용씨스템은 본래 써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특정한 간행물을 포괄하거나 배제하는 근거는 학술적 권위와 무관하다. 그렇기 때문에 ISI의 생산지인 미국의 학술계조차 SSCI나 A&HCI가 인정하는 간행물에 논문을 게재한 횟수를 연구원 평가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있으며, 기껏해야 인용 횟수를 통해 그 논문의 중요도를 간접적으로 평가할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인용색인 씨스템이 영문간행물에 제한되어 있어, 비영어계 저작들간의 상호인용횟수와 국가간 영향관계에 대해서는 검색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많은 인문사회학 분과에서는 소속 연구원이 비영어권의 주요 간행물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중시한다. 예를 들어 중국사상연구자들이 중국어로 중국대륙이나 타이완 간행물에 논문을 발표하면 그것은 국제적 학술활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러한 기제가 타이완 학술행정기획 속에서는 도무지 발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타이완에는 일본에 체재하면서 일본어로 저작을 발표할 능력을 가진 학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들은 응당 받아야 할 장려를 받기는커녕, 국제적 학술활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신발에 발을 맞추는 격으로 SSCI에 등록된 영문간행물에 영어로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

대체로 SSCI 결정론은 원하지 않는 곳에서 아래와 같은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첫째, 영문저작 출판이 중국어나 기타 언어 저작의 출판보다 더 중요해졌다. 영문저작 출판이 승진의 보증수표가 된 마당에 (신진) 연구자들이 영어로 발표하지 않을 방도는 없다. 그들은 중국어로 타이완 잡지에 발표하려 하지 않으며8 기타 비영어권 주요 잡지에도 발표하려 하지 않는다.ISI 간행물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곧 국력을 강화한다는 이러한 시각은 학술의 자주적 발전을 심각하게 왜곡하며 나아가 다원적 국제화를 가로막는다. 타이완의 (국비)유학생 중 일정비율은 비영어권 국가에서 공부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국가가 다원적 문화자원을 섭취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이다. 그러나 학술의 영어화라는 제도적 배치는 이러한 학자들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을뿐더러, 비영어권 지역으로의 유학 욕구를 좌절시키고 결과적으로 타이완 학계의 다원적 생기를 갉아먹는다.

둘째, 영어간행물에 발표하기 위해서는 지역(local) 문제를 중심의제로 삼는 연구가 어렵게 된다. 인문사회연구의 문제의식 속에는 역사적 맥락화에 대한 분명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맥락화가 탈각되거나 약화되었다. 또한 연구자가 영어권에 익숙한 이론틀과 언어로 출판의 가능성을 획득해야 한다면, 장기적으로 사회·정치·문화·역사적 맥락에 대한 관심은 점차 사라질 것이며 인문사회과학 출판물은 자연과학과 같이 일원화될 것이다. 그럴 경우 최근 세계학술조류에서 강조하는 다원성·이질성의 방향과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셋째,SSCI와 A&HCI의 기제는 학술사회의 비학술성이라는 새로운 등급(等級)관계9를 구성했다. 영어로 논문을 써서 ISI 간행물에 발표하는 학자들은 본토어로 글을 쓰는 학자보다 수준이 높은 것으로 간주된다.(그러나 그것이 학술 및 논문과의 관련선상에서 어떤 면에서 높다는 말인지 아무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기제는 본토에서 훈련받은 학자들, 특히 문사철(文史哲) 인문과학 학도를 좌절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만약 정말로 영어가 다른 어떤 요소보다 중요하다는 점이 공인되었다면, 그에 걸맞은 시행기제들이 생겨야 한다. 이를테면 중문과의 경우 예비교수들이 영어로 논문을 지도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국가는 모든 중문과의 교재가 양질의 영문으로 번역되도록 충분한 경비를 지원해야 한다. 가장 빠른 방법으로는 인문사회과학 영역의 국내 석박사반을 폐지하고, 고학위 취득 희망자들이 국내에서 어정거리지 않고 전부 영어권 세계로 나가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황당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이 제도를 기획한 사람들에게 이 제도의 운행논리가 원래 이렇게 황당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조성한 광범위한 역효과는 학계가 장기간 쌓아온 성과를 파괴할 것이다. 영어독존의 효과 중 하나는 전후 타이완이 한발한발 건설해온 고등연구소의 교육을 부정하는 것이다. 타이완 스스로가 중문으로 고급 연구인력들을 훈련시켰으면서 이제 와서 그들에게 영어로 논문을 쓰라고 하거나 영미(혹은 영미 유학생)와 경쟁을 붙이고 있으니, 이것이 자기부정이 아니면 무엇인가?

넷째,영어화 쎄팅(setting)작업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특별히 TSSCI라는 보완장치가 설계되었지만,그것은 처음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중문’중심의 색인으로 제안된TSSCI는 중국대륙의 SSCI(Chinese Social Science Citation Index)를 배제하고 범위를 타이완으로 축소시켰다. 가장 괴상한 점은 TSSCI의 실제 작동방식이 SSCI 본래의 취지였던 인용색인(citation index)으로서의 기능을 저버렸다는 점이다. 타이완에서 그것은 간행물 평가기제로 변해버렸다. 즉 TSSCI에 등재된 간행물에 논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점수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간행물을 평가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기술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저서와 마찬가지로 간행물에 대해서도 학계에는 각각의 학문 및 전공분야 자체의 공인과정이 있다. 학술행정체제에 맞추어 행정상의 편의만 따지는 형식적인 계산방식으로 점수를 매기게 되면, 학계에 악성 분쟁만 조성할 뿐이다. 평가위원회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모두 학술체제 속에서 권력을 장악한 간판스타들이다. 그들은 주류적 관점에 근거하여 비주류 학술 경향을 배격하고 기타 학제간(trans–disciplinary) 간행물을 가로막으며 한창 창조적 역량을 키워가는 신생 간행물들을 억누른다. 우리는 이러한 신생 간행물이 종종 학술 패러다임 전환의 전위(前衛)가 되어 학제간의 대화와 경계넘기의 계기를 열어젖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상의 문제는 학술계에서 자주 들어오던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TSSCI 집행단위로부터 어떤 해명이나 반박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학계의 질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학술사회의 민주주의에 봉사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학술지도자의 행정독단을 보장하고 학술사회 기층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면 학술의 자주성은 어떻게 되는가? 이는 민주적 소양, 학술적 시야 및 언술능력상의 지도력 결핍을 보여주는 것이니, 그들이 어찌 학계로부터 존중을 얻을 수 있겠는가?

색인체제의 이같은 문제에 관해 논의의 촛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즉, 우리는 도대체 단일한 영어식민세계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문화의 다원성·이질성을 인정하는 포스트식민세계에 살고 있는가, 지구화란 오로지 미국화를 의미하는가, 모든 비영어권 문화가 뿌리뽑힌 뒤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문제들은 그저 토론거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 정립 및 분석에 관한 현실적 문제이다. 중국어는 사실상 일종의 국제언어다. 그것은 중국, 홍콩, 타이완, 꽝뚱에서뿐 아니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및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각지에 방대하게 퍼져 있는 화교사회에서도 사용된다. 미국의 일개 회사인 ISI의 인용씨스템에서 중국어를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중국어가 국제언어가 아니라면, 중국어권 사회간의 상호관계는 국제화의 범주에 들지 않는단 말인가? 영어권 세계에 사는 많은 화교학자들, 특히 인문·역사학자들은 지금도 모두 중국어로 글을 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관점과 견해가 중국어권 세계 속에서 비로소 방대한 독자층과 만날 수 있으며 살아 있는 문제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점을 그들 스스로가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영어로 쓸 경우 도리어 독자는 소수의 전문가로 한정될 것이다.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현행 타이완 학술체제의 영어독존 상황이 국제언어로서의 중국어에 대한 자기폄훼 의식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구화 추세 속에서 중국어가 소멸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중요해질 것이라 믿는다. 학자들이 자신이 선호하는 외국어로 글을 쓰는 것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다만 현재 학술계가 체제상의 권력을 휘둘러 중국어를 억압하는 방식에 대해서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출한다.

첫째,ISI는 사실 상업기제일 뿐 학술권위기제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타이완의 현행 학술체제 속에 들어와 마치 유일한 학술권위인 양 학자들의 학술성과를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기만적인 현상의 원인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학술관료씨스템이 대부분 이공계 학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술의제나 학술논리가 보편적으로 일원화되어 있어 어떤 문제도 간단한 영문으로 도식화될 수 있고 모든 논문은 영어로 발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ISI 인용체계에 학술적 권위를 부여하고 ISI의 평가표준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나아가면 비영어권 학술계는 공전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며 지구화 질서가 강조하는 이른바 문화의 이질성·다원성은 머잖아 소멸하게 될 것이다.

둘째, 우리는 평가기제를 통해 학술성과를 감정하여 학술진보를 촉진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나 각각의 학술영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어온 학술 평가과정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학문분야의 경우 정기간행물에 실린 논문보다 저서를 더 중시하거나, 취지와 성격이 다른 정기간행물들에 대한 다양한 기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SSCI나 TSSCI와 같이 단일한 표준 안에 이들을 단순명료하게 포괄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단일한 기제를 사용하여 모든 학문의 몸체를 덮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학술발전의 가능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지식체계가 마땅히 갖춰야 할 다양성을 손상시킨다. 우리는 TSSCI의 목적이 학술사회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학술적 가치를 지닌 간행물을 최대한 포괄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간행물 평가기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동시에 간행물 평가는 마땅히 제도권 바깥의 창조성을 띤 간행물의 독립적 출판을 장려하고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타이완의 학계는 훨씬 더 활력을 띠게 될 것이다.

셋째, 신자유주의의 전지구화 시대에 미국의 학술제도와 실천이 모든 지역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타이완은 그들의 방대한 규모와 자원을 따라갈 수 없다. 미국의 학술제체를 타이완 학술사회에 적용하려면, 반드시 미국식의 객관적 조건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 또한 영어권 세계 외의 많은 언어와 지식의 전통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 오직 영어라는 하나의 언어, 하나의 학술전통만이 있다면 그보다 더 앙상한 세계는 없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어가 역사적 전통을 가진 중요한 국제언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4. 지구화 속의 학술국제화에 대한 또다른 시야

 

만약 타이완에서 지식생산을 추동하는 객관적 동력이 신자유주의적 전지구화라 한다면 그러한 추세 속에서 발전해온 학술평가제도는 학술의 전지구화 및 국제화를 향한 타이완의 주관적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존의 추동방향이 지구화 및 국제화에 대한 협소한 이해에 기반한 것은 아닌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타이완 학술계가 국제화되어야 하며 이를 계기로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학술공간을 개방하자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제화는 반드시 타이완 자신의 객관적 처지에 대한 기본인식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제2차대전 이래 총체적 ‘탈아입미(脫亞入美)’ 경향은 타이완 사회에 오랫동안 강력한 정치·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지식생산 측면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반적 미국화는 우리의 역사적 기반을 공소화(空疎化)하는 위험을 낳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심도있는 반성적 토론은 시종 결핍되어 있다. 마침내 타이완의 ‘탈아입미’ 추세는 고착되었고 그것은 비판적 반성정신의 결핍, 주체의식의 결핍, 자기전통에 대한 믿음의 결핍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역사적 숙명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타이완의 탈식민·탈냉전·탈제국화 과정이 완성되지 못한 결과이다. 앞을 향해 끝까지 전진한다면 형세를 바꿀 수 있다.

타이완에서 비판의식을 지닌 주체성의 구축은 단순히 미국화를 제거하거나 아시아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십년 동안의 미국화가 모두 그릇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산으로 전화될 수 있다. 관건은 비판적 주체의식을 가지고 과도하게 단순화된 미국중심의 좌표를 되돌려놓는 것이다. 아시아로 되돌아와 타이완 주체성의 객관적 위치를 새로 인식하고 역사과정 중 미결된 은원(恩怨)관계를 청산하려면, 역시 고도의 자각을 가지고 이러한 역사적 자원과 대면해야 한다.

타이완 학술생산의 지구화 및 국제화 상상을 제기하기 전에 반드시 타이완이 처한 역사적 맥락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타이완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토론하는 일반적인 타이완 중심론과 달리,10 우리는 타이완의 주체위치를 하나의 결절점(nodal point)으로 보고, 그것을 ① 타이완 지역(local) ② 양안관계 ③ 화문세계(중국·타이완 및 국제화교사회를 포함하는 중국어권–옮긴이) ④ 아시아 권역(region) ⑤ 전지구 ‘장’(champs)이라는 몇개의 상호 중첩되고 상호 작용하는 생활네트워크 안에 둘 것을 제안한다. 이는 하나의 지리·역사·공간적 실체로서의 타이완을 서로 다른 네트워크의 교차선상에 두는 것으로, 역사·지리·전지구 구조의 현실에 좀더 근접한 것이다.

 

① 타이완 지역: 사실 타이완은 위의 네트워크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복합체이다. 근대사의 어떤 특정한 시기에 어느 하나의 네트워크가 다른 네트워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작용을 한 적은 있어도 어느 하나도 완전히 단절된 적은 없다. 이러한 누적된 상호교차로 인한 다원성이 타이완 주체의 현대성을 구성했다. 다원적·이질적 차이를 인식하고 타이완에 대한 폐쇄된 이해방식을 거부하는 태도가 주체성 수립의 근본전제가 되어야 한다.

② 양안관계: 1895년 타이완은 일본제국에 할양되어 중국에서는 유일한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정부가 타이완을 점령했는데, 이러한 양안 단절의 역사는 지금까지 100년에 이르고 있다. 만약 친미반공이라는 냉전의 잔재가 척결되지 않는다면, 양안관계는 정상적으로 전개될 수 없다. 큰 틀에서 볼 때, 개혁개방 후 중국대륙은 마치 거대한 자기장(磁氣場)처럼 세계 각 지역과 관계를 형성해왔고 타이완 학계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화문세계는 정치경제적 틀로부터 독립해야만 비로소 자주적이고 광활한 학술공간을 열어갈 수 있다.

③ 화문세계: 타이완의 주체의식 속에는 화문(華文)이 일종의 국제언어라는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화문세계의 관계망은 타이완해협 양안 혹은 양안삼지(兩岸三地,중국·타이완·홍콩을 가리키는 말―옮긴이)의 정치적 상상보다 훨씬 크며, 국민국가라는 경계선 및 종족집단의 정체성을 넘어선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화문은 화인(華人)11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부분의 관계는 이 언어의 축선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객관적 존재이다. 그것은 또한 ‘대중화(大中華)’라는 경제권적 지리 상상을 크게 넘어선다.

④ 아시아 권역: 역사적·지정학적 관계에서 볼 때 타이완이 아시아 바깥에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 그렇기는커녕 타이완은 아시아에서 상당히 중요한 결절점 위에 놓여 동북아와 동남아를 연결해왔다.90년대 이후 아시아는 더더욱 운명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른바 국제결혼, 외국인 노동자·간호사 들은 이미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 지구화와 동시에 강력한 권역화 경향이 조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지구화의 추세 속에서12 권역화는 상당히 중대한 매개고리가 되고 있다. 유럽연합,ASEAN+3, 라틴아메리카 협정, 아프리카회의 등 모두 다 지구화의 산물이다. 타이완은 이러한 대세에 직면해야 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아시아 통합과정에 가담해야 한다.

⑤ 전지구 장: 여기서 말하는 전지구란 물론 미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북미대륙이 눈앞의 신자유주의 전지구화의 핵심적 추진자이긴 하지만 현실 정황을 보면 화문세계 및 아시아 권역 역시 모두 지구화의 장이다. 타이완은 역사적으로 미국과의 일방적 관계만을 지향하고 기타 지역과 다방적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구화의 추세 속에서 미국 학술의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주와 창신(創新)을 열어젖힐 가능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지구화 추세하의 권역화 경향을 틈타 타이완이 채택할 수 있는 노선은 화문세계와 아시아권역을 소통시키는 것이다.

 

각각의 네트워크는 상호지시적이며 그 움직임 역시 서로 밀고 당기는 다층위·다방향성을 띤다. 역사운동의 실제로 돌아가보면 어느 하나도 독립적으로 운행하는 것은 없다. 타이완의 주체성이 이러한 객관적 존재의 네트워크 속에 들어 있다고 한다면, 타이완 학술의 국제화 및 지구화 방향은 학술평가 및 지식생산의 제도를 설계할 때에도 마땅히 이러한 시각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양안관계, 화문세계 및 아시아 권역, 이것이야말로 지구화의 준거틀이자 형성경로이다.

타이완의 주체성이 이러한 객관적 존재의 네트워크 속에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이러한 인식이 타이완 학술의 국제화·전지구화에 어떤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가?

첫째, 타이완 학계는 반드시 자신을 화문세계 내부에 배치하여 각각의 화인사회의 존재와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그 속에 참가해야 한다. 운 좋게도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어는 국제언어이며 중국어를 통해서 우리는 국제화 및 지구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중국어 글쓰기를 통해 학계의 인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만도 충분한 행복이다. 중국어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화문세계의 네트워크 안으로 적극적으로 그리고 편리하게 진입할 수 있다. 사회과학계에서 만약 TSSCI가 학술발전에 도움을 준다는 입장을 견지하려면, 방문을 닫아걸 것이 아니라 자신있게 CSSCI를 향해 문을 열고 동지들이 타이완의 경계를 넘도록 독려해야 한다. 또한 지구적 화문 저술자에게 타이완 학계의 간행물을 개방하고 주요 화문 국제간행물을 만드는 데 뜻을 합해야 한다.

둘째, 타이완은 반드시 의식적으로 자신을 아시아에 배치하고 자신을 아시아의 일원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의식은 한국, 일본, 싱가포르 등 소국에서 상당부분 명확하다.13 타이완은 더더욱 예외가 되어선 안된다. 이들 지역은 오직 아시아로 돌아갈 때 비로소 전지구의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 사실 타이완 주체성의 출로와 잠재성 역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쥬 윈한(朱雲漢)교수가 1999년 전국인문사회학과회의에서 제출한 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타이완은 동아시아 역사발전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동아시아 국가의 경우, 세기전환기 사회발전의 최대 관건은 어떻게 지구화라는 충격에 맞서 자기 사회의 발전 주도권을 유지하고 장악하는가에 있기 때문이다.”14 타이완은 반드시 동아시아 학계와의 교류와 합작을 강화하고 양안 학계와 상호 추동함으로써만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타이완과 중국대륙은 동아시아 세계 속에 배치되어야 한다.

셋째, 지구화는 영어화나 미국화를 의미할 수 없으며,SSCI나 A&HCI로 단순화되어서는 더더욱 안된다. 타이완의 학계는 마땅히 동지들을 격려하여, 안심하고 중국어나 그밖의 다른 외국어로 주요간행물에 논문을 발표하거나 저서를 내도록 해야 한다. 제도적 측면에서 학계는 서로 다른 언어로 훈련을 받은 동료들이 적극성을 십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중국어에 뿌리를 두어야 할 뿐 아니라 많은 학자들을 전지구적으로 배치하고 고무하여 세계 각지에서 그들의 학술성과가 출판되도록 해야 한다.

 

 

5. 국제적·비판적 학계와의 대화 및 반성에 대한 전망

 

이 글은 문화적 평등 및 다원성, 학계의 자주성, 그리고 학술정책의 민주성이라는 세 가지 기본입장에서 출발해,신자유주의적 전지구화라는 압력 속에서 타이완의 학술생산과정이 노정할 수 있는 문제에 관해 초보적 분석과 대안적 상상을 제시한 것이다. 체제의 행정권을 가동하여 중문을 억압하고 영어를 독존화하며 나아가 학술연구 본연의 의제인 문화와 역사의 맥락을 좌절시키는 행위는, 중문 생활세계에 대한 억압일뿐더러 학술의 자유라는 기본 상식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우리가 제안하는 대안은, 지구화라는 대세 속에서 국제화의 다원적 상상을 유지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실천가능한 구체적인 국제화 방안을 마련하여 행정체제의 전횡에 대항하자는 것이며, 민주와 자주의 원칙을 통해 학술계 성원들이 충분히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학자들은 타이완, 양안, 화문세계, 아시아, 나아가 전지구 각계각층에서 국제화·지구화의 기본원칙을 충분히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코 ‘타이완 중심론’이라는 허무맹랑한 탁상공론이 아니며 패권주의로의 편입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비판적 주체의식에 기초한 고도의 주체성을 갖춘 제안이다.

오늘날 전지구적 신자유주의는 타이완에서만 강세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본을 동력·방패로 삼고 각지의 국가기구들과의 유기적 결맹관계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세계 곳곳의 다원적 문화생산 공간을 변질시키고 있다. 미국 독존의 현상은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 특히 북유럽에서도 주도적 논리가 되고 있다. 타이완, 중국, 남한, 싱가포르와 같은 후진발전국가뿐 아니라 유럽 특히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에서조차 미국 주도의 SSCI와 A&HCI가 전폭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광란의 물결을 좌시해선 안된다. 따라서 타이완의 비판적 실천은 결코 집안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전지구적인 다중적 맥락 속에서 파악될 문제이며, 각 지역 연결고리간의 상호작용과 국제사회의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한 공동의 토론장 위에 올려져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신자유주의의 전지구화가 타이완 학술생산에 영향을 미치게 된 데에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이 있다. 유사한 상황이 화문세계,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양태와 세부적 사안에는 차이가 있으며, 각 비판학계의 반응방식 역시 서로 다르다.

첫째로 양안 및 국제화문사회라는 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싱가포르는 덩치가 작아서인지 상대적으로 훨씬 국제화되어 있지만 적어도 학계에서만큼은 중국어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말레이시아의 화문 대학교육 역시 한창 발전중이다. 때마침 화문 학술의 출판이 시작되고 있으므로 각지의 화문 학계가 마땅히 힘을 합해 그들의 발전을 도와야 한다.1997년 이후 상대적으로 다소 혼란스런 위상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홍콩도, 학술자원의 분배구조에 관한 대폭적인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졸속으로 전환하는 사례도 있어, 해당 영역의 중문출판물이 학술평가의 승인을 얻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난국 속에서 화문세계 학술생산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정기간행물을 포함한 기타 저작을 엄격히 평가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시급한 과제이다. 지금 중국대륙에서는 대학개혁에 관해 집중적인 토론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것은 중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가장 많고 미국화가 상대적으로 덜 된 중국에서, 대학개혁의 참고좌표와 축으로 미국의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CSSCI는 타이완 버전인 TSSCI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CSSCI는 수용대상이 비교적 광대하여 자료창고로서의 기본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대륙의 학계가 화문학술문화 생산의 자주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미국어 학술출판 속에 동화될 경우 미국어 단일 세계패권의 추세가 형성될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특히 화문세계는 자신을 비하해선 안된다. 세계문화의 다원성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서로 고무하고 연합하여 각지에서 닫힌 문을 열고 나와 화문 학술생산을 한층 더 국제화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중국대륙 학계가 타이완 학계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미국식 학술생산 ‘일변도’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중국어가 국제언어라는 객관적 사실을 인식하고 대륙 지식계가 갖추어야 할 역사적 책임을 다하기를 바란다. 지식생산의 다원화에 기여할 때만 중국은 아시아 및 제3세계의 존중을 받을 수 있다.

둘째로 아시아(특히 동아시아) 권역 역시 층을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본학계의 주요한 관심사와 운동의 촛점이 대학자율화에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학원 진보세력의 규모가 이른바 아시아 제일이라 할 수 있는 일본학계 역시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15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진보세력이 비교적 강한 남한 학계에서조차 SSCI가 검토를 거치지 않은 채 학술평가의 기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화문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 학계에 역시 지역·역사·문화가 사라질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후진사회의 주체성이 아직 발달하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빠른 속도로 변동하는 세계 추세에 동아시아 사회가 거세게 저항하지 않는다고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은 남한 학계가 이러한 시기에 상대적으로 강한 운동의 힘을 발휘하여 SSCI의 침투를 막는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이다.‘SSCI’체제를 진지하게 반성하는 것은 아시아학계의 주체성을 건설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행동과 운동의 배후에 깔린 중대한 의제는 바로 아시아 사회에 내재한 미국성을 반성하고, 미국 학술에 종속된 하위식민지적 열등감에서 벗어나 아시아를 주체로 삼는 국제학술의 연대를 새로이 건설하자는 것이다. 현재 아시아 각지에서 진행되는 토론은 기본적으로는 국민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대부분 자기방어 수준에 머물러 있다. 상호참조나 상호지원을 통해 대안적 학술실천을 위한 공동방안을 제기할 단계는 아직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시아 지역의 비판적 연대를 추동하여 국제주의의 정신을 발휘하고 구체적 분석 및 상호비교를 통해 각지의 객관적 상황과 장점을 인식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아시아의 대안적 실천을 위한 공동의 시야를 마련해야 한다. 아시아를 통해 전지구적 학술생산에 새롭게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운동을 통해 우리는 지구화라는 상상이 단순한 미국화가 아닌, 지역의 경험과 다원적 참조성(參照性)에 뿌리내린 풍요롭고 열린 민주주의의 실천임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白池雲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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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타이완의 (인문사회)고교학술평가에 관한 토론회’가 2004년 9월 25,26 양일간 타이뻬이 국가도서관에서 열렸다. 이 토론회에서 발표된 논문이 지금 수정·출판중이다. 이 토론회의 의도는 학술행정권력으로부터 학술의 자주권을 되찾고 학술적 반성을 촉구하자는 데 있다. 그 성과는 마땅히 지식사(知識史) 속에서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2. 그런데 전후 미국대학의 학술생산은 냉전구조 속에서 주조되어 국가이데올로기에 복무하고 있었다. Noam Chomsky et al., The Cold War and the University: Toward an Intellectual History of the Postwar Years(New York: New Press 1997) 참조.
  3. ‘종결’이 아닌 ‘해빙’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냉전의 종결이라는 용어가 구미지역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동아시아의 상황을 묘사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북한 그리고 양안 사이에는 여전히 냉전시기의 군사위기가 동결된 채 남아 있으며 그 충돌의 정도는 냉전시기보다 더 크다. 이것이 구미지역의 관점을 맹목적으로 가져올 수 없는 이유이다.
  4. Masao Miyoshi, “Ivory Tower in Escrow,” Boundary 2, 2000년 봄호.
  5. 타이완 국립 칭화대학(淸華大學)이 제출한 ‘20·20’이 그런 예이다. 즉 20년 안에 세계 대학순위 20위권에 들겠다는 계획.
  6. 타이완연합계통대학(양밍陽明, 즁양中央, 칭화淸華, 쟈오따交大)의 구상이 그런 경우이다.현재 교육부는 칭화대학과 쟈오퉁(交通)대학의 합병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7. 중국대륙에서도 대학개혁에 관한 토론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경악스러운 일은 개혁방안에 대한 학계의 논쟁과정에서 미국 대학이 유일한 참고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설마 대륙학계가 타이완이 걸어온 ‘탈아입미(脫亞入美)’의 노선을 밟겠다는 것인가? 역사적으로 중미관계와 대미(臺美)관계는 매우 판이한 길을 걸어왔다. 그렇다면 지금의 유사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8. 이는 논리적인 추론이 아니라 젊은 동료들 사이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SSCI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한 어느 젊은 학자는, 어느 학술회의 석상에서 승진의 압력으로 인해 오랫동안 중국어로 글을 쓰지 못했다며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9. 여기서 말하는 ‘등급’이란 ‘학술질서’와 같은 말이다. 지금 어떤 학문분야에서는 학술주체들이 아예 동료의 연구성과를 비평해야 하는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평가는 권리이기도 하지만, 상호간의 실질적―행정적·형식적 평가가 아닌―평가야말로 학술주체의 의무이다.)논문의 내용이나 학술적 의의를 묻기보다는, 그저 TSSCI 논문 두 편은 SSCI 한 편에 해당한다느니,SSCI에 한 편 실으면 ‘자동으로’80점을 얻는다느니 하고 있을 뿐이다.
  10. 최근 타이완을 세계의 중심에 두는 다양한 동심원 이론이 속출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타이완에 발을 두고 중국을 품에 안고 세계를 바라보라”(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통상 미국이다)는 식의 구태의연한 구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1. 일본과 한국에서는 보통 중국어를 한어(漢語)라 부른다. 반면 동남아에서는 중국어를 화어(華語)라 부르며 인종을 지칭할 때는 화인(華人) 혹은 화족(華族)이라 한다.
  12. 우리는 신자유주의 전지구화라는 의제에는 반대해야 하나, 지구화 그 자체를 근본적·전면적으로 부정해서는 안된다.
  13. 싱가포르 국립대학 사회학자인 추아 벙후아트(蔡明發)의 유명한 발언을 인용한다. “아시아는 어쩌면 싱가포르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아시아를 원한다.” Chua Beng-huat, “Culture, multiracialism, and national identity in Singapore,” in Kuan-Hsing Chen (ed.), Trajectories: Inter-Asia Cultural Studies, London: Routledge 1998, 198면.
  14. 朱雲漢 「如何加强基証社會科學對本國社會之貢獻」, 『全國人文社會科學會議手冊』(國科會 1999),56면.
  15. 우리는 일본 학계가 관련의제에 직면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홀시하지 않기를 바란다. 남한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전국적 진보교수연합조직인 대학교수노조에서도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추세에 대해 이미 적극적인 대응을 보이고 있다. 타이완에서 학술평가에 대한 도전은 아직 초보단계에 있지만, 젊은 교수층에 의해 대학교수촉진회가 구성중이다. 홍콩에서는 대체로 진후이(浸會)대학 교수회를 중심으로 보호기제가 작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