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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정요

1956년 전남 해남 출생. 1989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장편 『어른도 길을 잃는다』가 있음. buruhana@hanmail.net

 

 

 

 

 

5호선 전철을 타고 그녀가 광화문역에 도착했을 때 약속시간은 이미 십분이나 지나 있었다. 앞으로 십분 안에 약속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때까지 남편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남편은 성질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아마도 지금부터 이삼초 간격으로 시계를 보다가 그녀가 도착할 즈음엔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거나, 벌써 일어나 자리를 뜨고 없을지도 모른다. 행여 기다려준다 하더라도 약속시간 하나도 못 지킨다고 잔소리를 해댈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뭔가를 변명하고 쩔쩔매는 시늉을 해야만 한다.

그녀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뛰고 계단에서도 뛰었다. 간편한 화장도구와 수첩과 지갑과 집 열쇠와 핸드폰이 들어 있는 가방은 짐짝처럼 무거웠다. 더구나 그녀는 바지 길이에 맞추느라 통굽 신발을 신고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쿵쿵 지축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구멍에선 용가리처럼 화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일이십분만 더 일찍 서둘렀어도 이런 걱정이나 초조감, 그리고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매번 후회하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자기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그녀는 지금 회사에서 월차까지 받아 남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운명을 결정할지도 모를 중대한 고백을 하러 가는 것이다. 고백할 장소로는 남편의 회사 앞에 있는 까페가 적당할 것 같았다. 선을 보고 결혼하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 자주 만나던 장소였다.

그러나 오늘은 불임 상담을 받기 위해 병원예약이 되어 있는 날이기도 했다. 결혼하고 3년이 지났는데도 아기가 없는 것이다. 남편과 함께 정밀검사를 받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치료방법이 필요한지 등등을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 전에 이미 임신을 경험한 적이 있다. 철부지 시절 부모님 몰래 저지른 무모한 사고였다. 스물한살 너무 어린 나이인데다 상대방에 대한 확신도 없어서 아기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자 그녀는 인생을 다시 살듯 용기를 내어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기대하는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서 병원에 찾아가보았다. 의사가 뜻밖에도 낙태경험이 있느냐고 물었다. 인공유산 후유증으로 골반 염증성 질환을 심하게 앓았고 그래서 나팔관이 유착되었다는 것이다. 골반 초음파검사와 나팔관 조영술까지 거쳐서 샅샅이 알아보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염증성 질환을 심하게 앓았다는데도 그녀 자신은 별 기억이 없었다. 온몸이 항상 무거웠고 언제나 우울했으며 뭔가가 늘 죽을 만큼 괴로웠다는 것밖에, 특정 부위의 특별한 고통은 기억에 없었다. 그것은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몸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남편과 시부모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친정 부모에게도 굉장한 충격이 될 것이었다.

그녀는 가족들 몰래 수술을 받기로 했다. 유착된 나팔관을 뚫어주는 수술이었다. 혼자서 돈을 마련하고 날을 잡아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단순한 막힘이 아니라 관 자체가 손상을 입은 거여서 회복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차일피일 세월만 보냈다.

시어머니가 기어이 들고 나섰다. 그동안 기다리다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어도 자손은 꼭 봐야 하며, 한살이라도 젊을 때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시부모와 따로 살고 있긴 하지만 남편은 외아들이었다.

시어머니는 모닝콜하듯 아침마다 전화해서 병원에 가보라고 한동안 조르더니 집에까지 쫓아와 다그치기도 했다. 평소엔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어머니가 하는 말이면 귓등으로 듣는 척도 않던 남편도 아기 이야기만큼은 숨소리가 유난히 조용해지면서 새겨듣는 눈치였다. 아기를 원하는 만큼의 반응이었다.

병원예약은 그녀가 끼어들 새 없이 급속도로 이뤄졌다. 시아버지 생신에 모인 가족들이 먹고 마시고 대홧거리가 바닥나자 그녀의 불임문제를 집중 토로했다. 그 자리에서 시어머니의 다짐을 받은 큰시누이가 다음날 바로 산부인과 간호사인 자기 시누이를 통해서 상담예약을 해버린 것이다. 그사이에 남편은 지방출장을 다녀왔다.

웬일인지 밖은 지하도보다 더 어두웠다. 삼십여분 전 그녀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갈 때만 해도 밖은 화창한 날씨였다. 그새 어디서 먹구름이 몰려왔는지 한바탕 소나기라도 퍼부을 기세였다.

약속장소는 종로에 있었다. 그녀는 평지에서도 행인들 사이를 헤치며 달음질했다. 그렇게 비각 옆을 돌아 종로로 향할 때였다. 갑작스런 빗줄기가 기어이 땅을 치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바께쓰로 퍼붓는 듯한 사나운 소나기였다. 그러자,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길을 가득 메우며 걸어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팔을 치켜들고 자동우산을 펼쳤다. 연습을 많이 한 매스게임처럼 똑같은 동작들이었다. 교보 옆 돌벤치에 앉아 있던 연인들도 앞으로 총! 하듯 팔을 쳐들더니 팡팡 하고 우산들을 펼쳤다. 길은 금세 방실방실한 우산꽃으로 물결을 이루었다. 쌕쌕거리면서 비를 맞고 가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오늘 낮에 소나기가 올 거라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접한 적이 없었다. TV나 신문의 정보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몸이 알아서 일기예보를 하기도 했다. 뿐 아니라 집을 나설 때면 무심한 가운데서도 수상한 날씨는 금방 감지가 되고, 우산을 준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늘의 기미를 살피며 결정을 내리게 됐다.

오늘 집을 나설 때 하늘은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전철이 여의도를 지나 한강 위를 달릴 때는 반짝거리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햇빛이 강물 위로 미끄럼을 타는구나 중얼거리며 정말 예쁘고 평화스럽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소나기는 갑자기 어디에서 몰려온 것이며, 저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길래 저렇게 정확하게 팡팡 우산을 펼쳐들고 방실방실한 매스게임을 벌이며 가는 걸까.

드라이기를 치켜들고 팔이 빠져라 공들인 머리는 뺨으로 목덜미로 달라붙었다. 얼굴을 씻어내린 빗줄기가 가슴의 고랑을 타고 배까지 흘러내렸다. 그녀는 달리느라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몰골을 훑어보았다. 이런 몰골로는 남편과 마주앉아 있기도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빗줄기는 아랑곳없다는 듯 그녀의 몸뚱이를 줄줄 타고 잘도 흘러내렸다. 아주 신이 난 것처럼 툭툭 투두두둑 하면서 그녀의 머리통을 두들겨댔다. 감기며 산성비 같은 말에 겁을 먹기 시작한 이후 정말 이렇게 흠뻑 비를 맞아본 지가 언제인지 몰랐다.

그런데 그녀는 감기며 산성비 같은 말이 떠오른 순간 갑자기 달리던 발길을 멈추었다. 언젠가 바로 이와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느낌,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눈을 뜰 수 없도록 세찬 장대비 속으로 달려가면서 감기며 산성비 같은 말에 겁을 먹기 시작한 이후 이렇게 비를 흠뻑 맞아본 지가 언제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 겹쳐서 어떤 무더기진 상념들이 한꺼번에 섬광처럼 지나갔다. 달리느라 저절로 벌어진 입속으로 빗방울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데도 목구멍은 화염을 토한 듯 칼칼했고 발바닥이 불에 덴 듯 뜨겁던 상황까지 똑같다.

그녀는 그제야 이왕 늦은 걸 어쩌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남편과 자신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다. 약속시간이니 지각 같은 사소한 것으로 헉헉거릴 계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할 때도 아니었다. 이왕에 벌어진 일들은 제 무게만큼의 비중과 속도로 진행될 거였다. 그 무게는 남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녀가 아니라 남편의 문제였다.

비가 오거나 말거나 그녀는 다시 평소의 보폭대로 걸어갔다. 철철 내리는 빗속으로 느긋하게 걸어가자 걷잡을 수 없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건물 이층에 있는 까페의 이름은 ‘비’였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모양을 낸 창유리며 문짝에 매달려서 딸랑거리는 구리종이며 어둑신한 분위기까지 옛날 그대로였다. 공간 가득 차 있는 커피향내며 이곳 특유의 잡내까지도 그대로였다. 남편과 그녀가 좋아하던 창가 기둥 옆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다른 자리는 머리를 번개 모양처럼 곤두세웠거나, 락스로 빨아버린 듯 탈색시킨 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창가 자리만 비어 있다는 것은 금방까지 그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젖은 채로 들어가려 하자 카운터에 서 있던 굵은 금목걸이에 착 달라붙은 쫄티를 입은 지배인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남편의 인상착의를 말하며 그가 다녀갔는지를 물어보려다가 포기하고 지척지척 창가로 다가가 앉았다. 자리엔 아직 약간의 훈기가 남아 있었다.

창밖에는 플라타너스의 넓적한 잎사귀들이 빗물에 젖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역시 꽃송이처럼 방실방실 벌어진 우산의 물결을 이루며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성질 급한 남편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그녀는 창밖 길거리를 열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솔직히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다. 아니, 남편이 돌아올까봐 되레 겁을 먹고 있었다. 남편이 돌아온다면 무슨 말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는 것이다.

커피를 시킨 다음 손수건을 꺼내서 머리카락을 일일이 닦아내고 메뉴통에 가득 꽂혀 있는 냅킨으로 열심히 옷의 물기를 빨아내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남편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뛰고 호흡이 빨라졌다.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은 이는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다.

“비를 맞으셨네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남편 또래처럼 보이는 그 역시 무스를 발라 짧은 머리카락을 잔디싹처럼 하늘로 치켜세우고 있었다. 비를 맞지 않았는지 젖은 데가 없어 보였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그에게 집에서 나올 때 우산을 들고 나왔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비를 맞으셨네요 하고 그녀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며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의 정체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일 것 같았다. 그녀는 냅킨을 한줌 쥐고 있던 손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저를 아세요?”

갑자기 시끄럽게 들려온 음악소리 때문에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도를 아느냐구요?”

그도 오른쪽 귀를 그녀 쪽으로 돌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이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생뚱맞게 도를 아느냐니, 길거리에서 붙잡고 그렇게 묻는 사람들한테 어지간히 시달렸거나 조금 엉뚱한 사람 같았다.

“누구시냐고 물었는데요?”

그녀는 말을 바꾸었다.

“아니 전 그런 것에 관심없습니다.”

그가 손까지 저으며 말했다. 누구냐니까 그런 것에 관심없다니, 정신병원에서 도망친 사람인가 해서 그녀는 재빨리 살펴보았다. 폭도 좁고 길이도 짧은 편인 그의 눈에서 별 이상한 증세는 감지되지 않았다. 그는 친숙한 사람처럼 붙임성있게 말을 건넨다.

“추우신 것 같은데, 따뜻한 우유 같은 걸 시킬까요?”

흠뻑 젖은 그녀가 측은해 보인 것일까. 넉살 좋은 붙임성에 그녀는 아무래도 그가 보험 아니면 자동차 외판원이거나, 모처럼의 휴일에 늦잠을 자는데 요란한 전화벨 소리로 깨워가지고 ‘사모님 좋은 땅 있는데 관심있으십니까?’ 하고 묻는 투자 자문위원 같은 사람은 아닌가 하고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는 한눈에도 너무나 예민하고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날카롭게 일어선 코끝이며 깊게 파인 미간의 주름 같은 데서 만만찮은 성정이 느껴졌다. 더구나 마맛자국처럼 살점이 파인 왼쪽 뺨의 조그만 상처자국 하나가 아주 강퍅한 느낌을 갖게 했다. 외판원으론 합당치 않은, 별로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남편의 표현방식을 빌린다면 ‘억울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군대시절 동료 하나가 늘 불평불만인 것 같은 얼굴생김새 때문에 이유없이 매를 많이 맞았다는 것이다.

“벌써 시켰는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그 역시 따뜻하고 붙임성있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겉모습 때문에 늘 억울한 오해를 받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사람을 만나면 긴장부터 하게 되고, 그래서 저를 아느냐고 묻는데 생뚱맞게 도가 어쩐다느니 한 것 같았다. 어차피 빈자리도 없고 이미 합석한 마당이었다. 그녀는 마땅한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아서 날씨 얘기를 꺼냈다.

“5호선 전철을 타고 오는데 햇빛에 반짝이는 한강 물빛이 정말 예쁘더군요.”

그녀는 소나기 얘기를 하고 싶었다. 집에서 나올 때 날씨가 화창했고 한강을 지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햇빛이 밝은만큼 물빛이 예뻤는데, 마포를 지나고 공덕동과 애오개와 충정로와 서대문 정류장을 지나는 불과 십여분 사이에 어느새 새카만 먹구름이 몰려왔는지 세찬 장대비가 쏟아지더라는, 그때의 놀라움을 상대가 누구건 어서 털어놓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듣고 있던 그가 갑자기 눈빛을 확 내쏘듯 하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5호선은 강 아래 하저터널로 다니니까 혹시 1호선을 타신 거 아닙니까? 1호선은 철교 위로 달리니까 강물을 볼 수 있었을 거예요.”

“아뇨, 난 분명히 광화문역에서 내린걸요. 계단을 타고 올라와서 비각 옆을 달렸으니까요. 광화문엔 1호선 역이 없잖아요.”

더구나 우리 동네는 1호선이 다니지도 않는다고 덧붙이려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5호선이 하저터널로 다닌다는 사실은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 5호선이 생기기 전부터 하저터널을 뚫게 될 굴착기술이 큰 화젯거리였다. 그러면 그녀가 바라본 그 물빛은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엄습한 한기가 등줄기를 싸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젖은 손수건을 펼쳐들고 괜히 킁킁거리며 코를 풀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어떤 혼란 속에 빠졌던 게 분명했다. 그 때문에 언젠가 보았던 물빛을 방금 본 것처럼 착각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그녀는 계속 어떤 착각이나 환상 속에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기이한 매스게임을 본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수많은 불특정한 행인들이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일시에 팡팡 우산을 펼쳐들다니.

“기억 속의 물빛을 지금 봤다고 착각했나봐요.”

그녀는 찝찝한 기분 때문에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아까 소나기가 갑자기 막 쏟아졌잖아요. 그때 매스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일제히 우산을 펼쳐들더라구요. 그러고 보니까 그 사람들  은 환상 속 허깨비들이었던가봐요. 일부러 나한테 보여주려고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어쩌면 그렇게 총을 쏘듯 팡! 팡! 하고 우산을 펼쳐들죠?”

“그래서 왕따 당하고 억울해서 우는 사람처럼 철철 비를 맞으며 걸어오셨군요. 난 또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분인 줄 알았네요. 하지만 소나기는 환상이 아니겠죠. 그렇게 흠뻑 젖으셨으니까요.”

“그러게요.”

그녀가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그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녀가 빗속으로 걸어오는 것을 창으로 내다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동정하는 마음으로 따뜻한 우유를 시키겠다는 둥 친절을 베풀기까지 한 것 같았다. 그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말한다.

“혹시 혼자서만 불행하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오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자신에게만 없는 우산을 다른 사람들은 신나게 팡팡 펼쳐든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그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그만 망연해져버렸다. 정확한 해석인 것 같았다. 환한 대낮에 환상을 봤다는 것보다는 훨씬 설득력있는 말이었다. 그녀는 정말 극심한 불행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부터 단 한순간도 행복해본 적이 없다.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언젠가는 더 나쁜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남편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오만가지 해석이 뒤따르고 조금만 짜증을 내도 온 신경이 곤두서서 펄럭거렸다. 단 하루도 번민 없이 지나간 날이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대학 2학년 때부터 고시공부를 해왔지만 번번이 낙방만 했죠. 근래에 마음을 고쳐먹고 다른 직업을 가졌는데, 그마저 그만두게 된걸요.”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지 않아도 좁은 미간이 더욱 옹색하게 찌그러지고 뺨을 가로지른 주름살이 마맛자국을 더욱 파여 보이게 했다. 굳이 꼽으라면 영혼의 결핍감이랄까, 처음 느낌대로 강퍅한 성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 표정이었다. 하지만 서른을 넘기도록 낙방만 하는 고시공부를 하다가 겨우 갖게 된 직장마저 잃게 되었다지 않는가. 그녀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채워지지 않은 갈증으로 오랜 세월을 견디다보면 누구나 강퍅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급속도로 몰입되는 자신을 느꼈다.

“어떤 직업이었는데 왜 그만두게 되셨어요?”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들어보셨죠?”

그녀는 얼른 감이 오지 않았다. 날만 새면 몇개씩 새 직종이 생기는 세상이니까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인 모양이다.

“일정한 금액의 물건을 산 사람이 또 그렇게 물건을 살 세 사람을 확보하면, 또 그 세 사람이 각자 세 사람씩 확보하는 식으로 계속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아랫단계 사람들의 판매수입금 중에 몇 프로씩을 챙기는 사업이죠.”

“아, 다단계 사업, 바로 어젯밤에도 테레비 프로에서 다뤘잖아요.”

바로 어젯밤 다단계 사업의 폐해를 심도있게 다룬 내용이 방영되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시사프로였다.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한 채 시청하던 남편은 ‘저런 멍청이들! 황당하네, 황당해!’ 하다가 ‘자기가 허황해서 저렇게 빤한 그물에 걸려든 거지, 누굴 탓해?’ 하면서 한 시간 내내 출연한 피해자들을 욕하고 나무랐다.

“예, 바로 그 피라미드 사업이라는 거요.”

그가 또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로 인한 상처가 아주 깊은 모양이었다.

“피해가 많았나봐요.”

“아시다시피 뻔한 레퍼토리죠. 몇단계 하부구조만 제대로 만들어놓으면 앉아서도 큰돈이 들어온다는 데 넘어갔죠. 그 단계만 되면 들어오는 돈만 세면서 부모님 도움 없이 맘놓고 들어앉아 공부해도 될 것 같더라구요. 매형 매제 고모 이모 같은 친척들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다 끌어들였죠.”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더이상 말하기가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어젯밤 방영 결론은 사기성 다단계 사업의 피해가 단순한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인간관계까지 파괴한다는 거였다. 충격인 것은 그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다는 거였다. 그가 어떤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 것 같았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만든 덫을 가지게 마련인가봐요.”

“네. 평생 동안 기억될 덫이죠.”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빨려들어갈 만큼이나 큰 숨이었다.

“전……”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전…… 불임선고를 받은 여자죠. 결혼 전에 낙태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후유증 때문이래요.”

한번 꺼낸 말은 술술 저절로 이어졌다.

“방법이 없답니까?”

그녀가 일급비밀을 생전 처음으로 꺼내자 그도 곧 관심을 드러냈다.

“네. 수술도 해보고 여러가지 방법도 찾아봤지만 허사네요.”

“아니, 자식이 꼭 있어야 합니까? 요즘 사람들 인생 즐기는 데 방해된다고 자식을 일부러 안 낳기도 하잖아요. 국가적 문제가 될 만큼 출산율이 떨어졌다고 하던데.”

그가 성급하게 위로의 말을 했다.

“남편이 외아들인데다 시부모님이 손주 보기를 학수고대하시니까요.”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빨아들일 만큼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남편이나 시부모님은 그 사실을 모르시는군요.”

“네. 기억도 가물가물한 시절의 일이었는데 이렇게 큰 업보가 되었네요. 함께 일을 저지른 그 사람 얼굴은커녕 이름도 생각이 안 날 정도예요. 헛것처럼 기억조차 안 나는 사람인데 저는 이렇게 큰 수렁에 빠져 있어요.”

난감한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을 많이 사랑하시는 모양이죠?”

“네, 사랑해요. 남편은 성질이 안 순한 편이죠. 한번 어긋나면 부모님한테도 무섭게 덤비니까요. 그런데 저한테만큼은 항상 관대해요.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매사 힘들게 만들긴 하지만 풀어지면 다 보상해주는 편이죠. 전 그런 남편을 이해하고 좋아해요.”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그녀도 어긋난 사람이 될 것이다. 남편이 어떤 모습으로 돌변할지 불을 보듯 빤했다. 그런데도 생전 처음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녀는 뭔가 짐 하나를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일급비밀을 말할 때도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언젠가도 이와 똑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였을까, 바쁘게 머릿속을 헤집느라 그녀가 잠시 이맛살을 모으고 있는데, 줄무늬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아르바이트생이 커피를 가져왔다. 시켜놓고 잊어버릴 만큼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것이었다. 시킬 때 그녀 혼자였기 때문에 커피는 한잔뿐이었다. 그녀는 빈 쟁반을 안고 돌아서는 아르바이트생을 불렀다.

“한잔 더 가져오세요. 아까는 저 혼자라서요.”

그녀는 앞자리를 가리키며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거품이 구름처럼 일어난 카푸치노에서 달콤한 향내가 피어올라왔다. 바닐라향이 첨가된 것이었다. 지금은 취향이 달라졌지만, 결혼 전에 남편이 만날 때마다 시켜주던 거였다.

“아니 아니에요. 저는 됐습니다.”

그가 그녀와 아르바이트생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드세요. 이렇게 합석하게 된 것도 다 인연인데 그깟 차 한잔이 대수겠어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커피향으로 떠올린 남편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처음 보는 낯선 남자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온 남편이 어느 구석에서 다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비로소 남편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꺼내려고 다급하게 백을 여는데 그가 손까지 저으면서 말했다.

“아니 정말입니다. 저는 아침부터 계속 이 자리에 앉아 벌써 두 잔이나 마셨고, 아까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이었으니까요.”

마음이 다급해진 그녀는 그에게 대꾸할 여유 없이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쿵쿵쿵 하고 뛰었다. 그녀의 지각 버릇 때문에 남편이 전화 한번 해주지 않고 일어나 가버린 줄 알았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꺼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급하게 연결버튼을 누르며 여러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떠올렸다. ‘이 사람이 아침부터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거라면 남편은 어느 자리에 앉아 기다리다 돌아간 것일까. 혹시 무슨 사정이라도 생겨서 회사에서 아직 나오지도 못한 건 아닐까. 그래서 전화를 했는데도 연락이 안된 건 아닐까.’

핸드폰에 불이 들어오고 연결신호음이 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벨소리가 터져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크고 그악스런 소리였다. 남편은 집 전화건 핸드폰이건 받을 때까지 계속 버튼을 눌러대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는지 꼬치꼬치 이유를 캐물었다. 그녀는 어딘가 비밀스런 곳에 다녀온 흔적을 재빨리 지우듯 커피를 한모금 훌쩍 마신 다음, 통화버튼을 누르고 흔연스럽게 물었다.

“어디야?”

“핸드폰은 왜 꺼놨는데? 당신이야말로 거기가 어딘데?”

남편은 천불이라도 난 듯 크게 소리질렀다. 너무 큰 소리 때문에 그녀가 핸드폰을 귀에서 잠깐 떼어내자 건너편의 그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걱정 말라는 뜻으로 조금 웃어주면서 여전히 천연스럽게 말했다.

“나? 여기 비. 근데 무슨 일 생겼어? 왜 안 오는데?”

“비? 까페 비? 거긴 왜 갔는데?”

“병원에 가기 전에 여기서 만나기로 했잖아.”

“아이고 두야.”

남편이 버릇대로 자기 머리통을 싸쥐는 모양이었다.

“오늘 일정이 빡빡하니까 회의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바로 달려가겠다고 아침에 내가 그랬어, 안 그랬어? 진료실로 바로 찾아갈 테니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냐구.”

아뿔싸, 남편이 다그치자 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싸쥐었다.

병원은 강남에 있었다. 새벽같이 전화를 걸어온 시어머니에게 그녀는 남편과 만나서 함께 병원으로 갈 거라고 했다. 어차피 병원엔 갈 필요가 없지만 우선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침 준비를 서두르느라 잠시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숟갈을 들기도 전에 찬물부터 벌컥벌컥 들이켜며 오늘 일정이 빡빡해서 병원에 예약된 시간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직접 차를 운전할 경우와 전철을 이용할 경우의 시간차를 계산하면서 그녀라도 미리 가서 대기해줄 것을 부탁했다.

오늘이 오기까지 시간을 다투듯 너무나 많은 것을 너무나 열심히 생각했던 그녀는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병원에 가기 전에 남편과 대화할 기회가 없다면 굳이 집을 나설 이유도 없는 것이다.

집 안을 치운 둥 만 둥 하고 소파에 엎드려 있던 그녀는 머리가 그만 빠개질 것 같은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서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까지 디데이를 하루하루 미루는 동안 그녀는 지옥 속에 있었다. 이 모든 시간을 더이상 연장했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회사 앞으로 가겠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 말한 적이 없다는 그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옷을 골라서 갈아입고 집을 나와 십여분을 걸어서 전철역에 도착하기까지 그녀는 더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고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다가 전철 속에서 언뜻 한강의 물빛을 보았고, 너무나 평화롭고 예쁜 강물 때문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아침에 어머니랑 통화하면서 일단 당신하고 만나서 함께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어요. 그 말을 당신한테 했다고 착각했나봐요.”

그녀가 더듬거리며 변명하자 남편은 의외로 선선하게 알았다며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벌써 병원으로 출발했는지 아직 회사 안에 있는 것인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남편이신가요?”

그녀가 멍한 얼굴로 핸드폰을 닫자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가 물었다.

“네. 약속장소가 어긋났나 봐요.”

“그럴 수 있죠.”

생각보다 별일 아니라는 듯 그가 말했다. 내막을 모르니까 하는 말이겠지만 그 말은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약속장소를 깜박 까먹을 수도 있고, 난데없는 소나기에 흠뻑 젖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독거렸다.

그녀는 핸드백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다. 남편이 병원에 갔었다면 다시 회사로 돌아갈 것이고,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느날처럼 일을 마치고 오밤중에나 집에 돌아올 거였다. 남편과 마주할 기회는 어차피 물 건너간 셈이었다. 그녀는 맞은편의 그를 새삼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단 한번도 입밖에 뱉어본 적 없는 말을 처음 만난  그한테 불쑥 털어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만나서 좋은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서로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그녀는 새삼 정색하며 말했다.

“그렇네요. 그런데 저는 왜 제 이름을 말할 때마다 그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거죠? 원래 내 이름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낯설다니까요.”

그가 또다른 속내를 드러내는 투로 말하자 그녀도 자신의 이름을 떠올려보았다. 영미, 이영미. 너무 흔한 이름이어서 그녀 개인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공동명의로 함께 소유한 것 같은 이름이었다. 그녀도 이름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낯설게 느껴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자기 이름이 특별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라도 있는 모양이죠?”

“이영미씨는 남들에게 알려진 자기 이름하고 자신이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세요?”

“네?”

말의 내용보다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나온 것 때문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제 이름을 제가 가르쳐드렸나요?”

“방금 전에 이영미씨께서 영미, 이영미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도 깜짝 놀랐는지 순간 눈동자가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 이름을 소리내어 발음한 적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영미, 이영미 하고 떠올려보았을 뿐이었다. 갑자기 이상한 한기가 등줄기를 훑고 내려갔다. 그녀는 괜히 고개를 돌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역시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거나 곤두세운 젊은이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머리를 그냥 단정하게 빗어넘긴 남자 하나가 스테인드글라스로 모양을 낸 유리문을 열고 막 들어서는 것도 보였다.

“저는 제 이름을 소리내서 발음한 적이 없는데요.”

통성명을 하자고 먼저 말한 사람은 그녀였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그녀는 그만 불쾌감을 드러내고 말았다.

“발음하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겠어요?”

그 역시 불쾌감을 드러내는 바람에 그녀는 어리둥절해졌다. 소리내어 발음하지 않은 이름을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갑자기 그가 조금 전까지 친절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마주 앉아 함께 나눈 말들이 우수수 바람소리를 내면서 흩어져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할 말을 잃고 다시 고개를 돌리자, 유리문을 들어서면서 두리번두리번 하던 남자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왔다. 앞자리의 그도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했는지 윗몸을 살짝 일으켰다.

“아는 분이야?”

다가온 남자가 앞자리의 그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첫마디부터 반말인데다 처음 보는 여자에 대한 조심스러움이라든가 예의 같은 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태도였다.

“남편 되십니까? 보시다시피 빈자리가 없어서 잠깐 합석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구요. 그럼 저는 이만.”

그가 그녀와 남자를 번갈아보며 말해놓고 일어서더니 남자가 걸어오던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남자가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눈여겨보고는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흘겨보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렇게 맨날 꺼놓을 거면서 핸드폰은 왜 가지고 다니는데?”

그녀더러 핸드폰을 꺼놨다고 늘 화를 내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앞사람을 새삼스레 살펴보았다. 황달기가 있어 보이는 눈자위며 미간으로 몰린 짙은 눈썹과 왼쪽 뺨에 파인 조그만 마맛자국이 남편인 것 같았다. 유난히 작은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는 것도 똑같았다. 삼년이 넘도록 함께 산 남편을 못 알아보다니, 그녀는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종일토록 비몽사몽이다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드는 듯도 했다.

“의사가 갑자기 일본 갈 일 생겼으니 상담을 미루자고 전화했더라고. 집에서는 벌써 나갔고 핸드폰은 꺼져 있고, 도대체 연락할 방법이 있어얄 거 아냐.”

그녀의 상황을 알 리 없는 남편이 계속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괜한 심통을 부리느라 자신을 못 알아본 척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애써 아무 일 없다는 듯 흔연스런 얼굴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남편을 만나 해야 할 말들을 이미 차례차례 다 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랬으면 아까 전화로 그냥 말하지 뭣하러 건너왔어요. 회사일도 바쁘다면서.”

“어쨌건 여기까지 왕림하셨다는데 안 와볼 수 있어?”

그녀가 부드럽게 말하자 남편도 조금은 누그러진 눈치였다. 남편의 회사는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지만 횡단보도 쪽으로 돌아오려면 꽤 되는 거리였다.

“비 때문에 그러죠. 장대비라서 우산을 써도 신발이랑 바짓자락이 다 젖잖아.”

“비? 무슨 비?”

남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물었다. 순간 그녀는 속으로 아차 했다. 그녀가 맞은 비는 오늘 내린 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남편의 손엔 우산이 들려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비 한방울 맞은 흔적이 없었다.

“아니, 여기 까페 이름이 비잖아.”

그녀는 썰렁한 농담인 것처럼 얼른 말하고 소리내어 웃으면서 창밖을 슬쩍 내다보았다. 창밖은 눈부시게 밝고 투명한 햇빛으로 전형적인 가을날씨였다. 아무리 여우비라 하더라도 소나기가 다녀간 흔적은 없어 보였다.

“여기 까페 이름이 벌써 몇번이나 바뀌었는데 아직도 비 타령이야.”

남편이 아무 생각 없는 말끔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 비밀이나 의혹 같은 것이 전혀 섞여 있지 않은 편안한 낯빛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또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가 알고 있는 남편과 실제 남편이 서로 다른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이 알고 있는 그녀와 실제의 그녀도 조금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새삼 남편의 이름이 뭐였더라 하고 생각해보았다.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까 그 사람도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가 아직도 까페 안에 남아 있는지 알아보려고 그녀는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밖으로 나가버린 것인지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머리카락을 하늘로 곤두세운 젊은이들도 어느새 한꺼번에 나가버린 것인지 여기저기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