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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배수아 裵琇亞
1965년 서울 출생. 1993년 『소설과사상』으로 등단. 소설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바람 인형』 『그 사람의 첫사랑』, 장편 『붉은손 클럽』 『에세이스트의 책상』 『독학자』 등이 있음.
양의 첫눈
살아오면서 양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비난의 말을 들어왔는데, 대개는 그의 존재를 저주하는 것으로 끝나기 일쑤였으므로, 마침내 양이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그들이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여전히 불행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물론 그 불행의 이유는 그 이전이나 마찬가지로 양의 존재나 혹은 부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그러한 무관함이야말로 어쩌면 애초부터 양과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사실이었는지도 모르는 거지만, 양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소심한 마음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그런 사람들 중의 한명인 미라는 어느날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자신의 생활이―그녀의 전생애와 조금도 다름없이―폐허와 같다고 한탄하면서 며칠 동안 그가 살고 있는 도시를 방문할 예정인데 그때 그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던 것이다. 나의 전생애와 조금도 다름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써내려간 이 표현이 양에게는 마치 밑줄로 강조되어 그에게 일부러 큰 소리로 들려주고자 하는 미라의 자존심 강한 최후의 욕망처럼 느껴졌고, 그러자 그것이 노골적으로 암시하는 바를 그가 알아차리도록 명령하는 미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미라의 목소리라니, 그는 이미 그것을 잊은 지 오래되었으며 사실은 그녀의 모습마저도 희미하고, 과연 그녀의 어머니와 구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모호한 정도로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라라는 존재 자체를 완전히 잊은 것은 물론 아니지만, 지금 그 기억이라는 것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이고 상투적인 표현 정도만큼의 가치만 있을 뿐이었다.
전생애와 조금도 다름없이. 이것은 양에게, 그가 미라의 전생애에 대해서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당위를 부과하고 있는 것과 같았고, 설사 모른다 할지라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함에 어떤 의문이 있어서도 안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진데다가, 더 나아가서 그는 그 안에서 일종의 은근한 비난과 조롱마저도 읽을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녀의 전생애라고 할 만한 것에 대해서 사실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으며 게다가 그녀의 생애가 폐허라는, 좀 멜랑꼴리한 전(前)세기적 서정의 풍경으로 명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갔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가 유효성을 잃었고―그들은 이미 지난 팔년 동안 한번도 만난 적이 없고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간접적인 소식을 우연히 전해들을 수 있는 공동의 친구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녀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잊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가 그들은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서로의 생애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이 부분에 대해서 양은 자신의 기억에 자신이 있었다―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이 서로가 상대편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단지 이전의 미라는 양에게 ‘전생애’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양은 미라에게 있어―그 누구에게도 마찬가지리라고 생각하지만―그런 표현이 요구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미라는 이전에 ‘내 일생’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았고 삶이 어떠어떠하다는 경구식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인간과 시간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는 표현은 무수한 다원(多元)의 현재를 살고 있는 그녀라는 개인에게는 결단코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전혀―이 점이 특히 용서될 수 없었는데―창의적이지도 못함이 분명했다. 양은 미라의 길지 않은 그 편지를 여러번 읽었는데 의례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오만하고 초조하게 고개를 내미는 그 과시적 표현―나의 전생애, 그리고 여전한 폐허―이 양에게 자신의 전생애에 관해 들려줄 준비작업이 드디어 모두 끝났으며, 그러므로 그가 그녀와 관련해서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미라가 창조해낸 세계인 돌연한 그 폐허의 풍경 안으로 뛰어들어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뿐이라는 식으로 해석되어 마치 강압적이고 무신경한 표현에 의해서 수갑이 채워진 듯 거북함과 부자연스러운 어색함에 사로잡혀 승낙도 거절도 아닌 어정쩡한 답장을 쓸 수밖에 없었다.
양은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호숫가에 누워 있었다. 바람은 찼으나 물은 의외로 따뜻했고, 사실은 비릿할 정도로 뜨끈뜨끈했으며 익숙하지 않은 기묘하게 미끌미끌한 상한 풀 냄새가 났다. 구름 사이에서 해가 잠시잠시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에 타월로 몸을 감싸고 있으면 춥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서늘한 여름이었기 때문인지 그해는 호수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 야생오리 몇마리가 양의 근처에서 꼼짝 않고 몸을 웅크리고 있어서 양은 시험삼아 점심으로 먹다 남은 빵조각을 던져보았으나 그들은 그깟 빵조각 때문에 움직이기는 몹시 귀찮다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간혹 제법 강한 바람이 불었고 그럴 때마다 그들 몸통의 깃털이 더욱 둥그렇게 부풀어오르고 짧게 웅크린 목덜미의 솜털이 회색 담요처럼 반짝거리면서 한 방향을 향했다. 양은 가능하면 이곳에 오래 있고 싶었다. 그의 피부와 건강이 그 소망을 최대한 지탱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리칼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오리의 목덜미 솜털처럼 가벼워져서 바람에 날리는 기분, 그렇다 마치 꿈속에서처럼―지상을 낮고 미지근하게 날면서 오랫동안 그윽하게 평평한 들판과 납작한 집들과 장난감처럼 다정해 보이는 사람과 자전거들로 이루어진 아래를 낮은 한숨을 쉬면서 내려다보는 꿈 말이다―그런 기분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그는 자신의 한숨의 강도를 조심스럽게 조절해서 갑자기 지상으로 추락하거나 아니면 방망이에 맞은 야구공처럼 궤도를 잃고 원심력의 허공으로 날아가버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었다. 그는 날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에 그는 어느정도 겁먹고 정체 모를 슬픔에 잠겼는데, 그것은 기분 좋을 정도로 미미하고도 막연한 네거티브였으므로 정말로 눈물을 흘리고자 하는 충동이 일기도 했다. 가을날 저녁의 가벼운 열과 같이 그렇게 따뜻한 눈물을, 11월의 허공에 고요히 떠도는 거미줄같이 무해한 그런 눈물을. 그는 어떤 구체적인 슬픈 일을 떠올림으로써 눈물을 흘려보려고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는 몇개의 시구를 떠올렸다. “오늘, 단지 오늘만 나는 아름다우리/내일이면 모두 사라지고/죽음, 죽음이 온다.” 그는 항상 이 시구를 아름답고도 슬프다고 느꼈으나 그렇다고 해서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쉬운 중에도 계속해서 슬프고도 평온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알고 있는 슬픔 중에는, 이른 아침 막 깨어났을 때의, 준비되지 않았으면서 아무런 방어도 없이 만나게 되는 그런 슬픔이 가장 시적이었다. 창밖에는 새가 울고 입 안에는 비린내 나는 눈물이 가득 찼으며 아주 멀리서 자동차의 소음이 이제 막 시작했다는 듯이 그렇게 들려오고 창 아래로 난 길에는 이른 시간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의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 부엌에서는 개가 신음하고 나뭇잎과 햇빛과 바람, 발코니의 꽃들은 어제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그는 침대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마치 그가 바로 어제 심장이 쨍 하고 깨어질 만큼 치유되지 못할 슬픔을 가졌는데 오랜 잠 때문에 그 일을 잊어버리고, 마치 종이가 물속에서 녹아버리듯이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리고, 망각의 강을 따라 먼 곳으로, 더 먼 곳으로 흘러 여기에 있게 된 듯한 그런 슬픔을 느끼곤 했다. 눈을 뜬 순간 이미 그가 잊어버린 꿈속에서 그는 슬픔에 대한 암시를 받았으나, 하지만 그것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기억의 윤곽으로도 다가가지 못할 가설(假設)의 슬픔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속하며 자신에게 무관심한 슬픔과 평온. 양은 그렇게 의도적인 이완의 상태에서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양이 문득 눈을 떴을 때 그의 곁에는 젊은 두 남녀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들은 누운 채 몸을 쭉 뻗고 있었는데 둘 다 키가 몹시 컸다. 사실은, 깜짝 놀랄 만큼이나 큰 키였다. 아마도 백구십 센티미터에 가깝거나 혹은 그 이상일 것이라고 양은 짐작했다. 일광욕을 하면서도 그들은 둘 다 테가 굵고 검은 근시용 안경을 벗지 않고 있었고 그들 몸의 수영복으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은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광택 있고 희고 크면서도 단단해 보였는데 여자는 다리에 면도를 하지 않아서 흰 피부에 찰싹 달라붙은 물에 젖은 갈색의 털이 허벅지에 조그맣게 올라온 소름과 함께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양은 언제나 키가 큰 사람들을 좋아했다. 물론 그들 쪽에서 양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양은, 언제나 그렇듯이 키큰 그들이 마음에 들어서 가능하면 실례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다. 키가 크다는 점 외에도 그들은 양이 실제로는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아마도 문학적인 독특함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요소를 그들의 육체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나란히 누운 두 육체가 마치 미지의 언어로 이루어진 것처럼 양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걸어온다고 느껴진 때문이다. 사투리로 부르는 방심한 노래, 말없는 질문, 웃는 당나귀처럼. 그러나 동시에 눈을 감고 누운 그들의 표정과 자세에는, 표면적으로는 특별한 경계의 몸짓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테두리를 강하게 의식하고 배설물로 그것을 지키려는 원시적인 동물다운 신호 또한 드러나 있어서, 아마도 예를 들자면 그들이 파티장에 손을 잡고 나타난다면 문지방을 넘는 순간 아무도 그들 주변으로는 다가오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육체는 확실하고도 배타적인 어떤 별개의 영역을 스스로 말하고 있기도 했다. 그들은 말랐다고는 할 수 없으나, 분명히 매우 금욕적이고 검소한 몸매를 가진 것은 맞았다. 남자의 경우는 숨을 쉴 때마다 갈빗대가 선명히 드러날 정도였고 그들의 길고 튼튼한 뼈대는 몹시 우아하기는 했으나 어쩔 수 없이 기묘하게 보이게 되는 운명을 타고난 듯했다. 그들은 남매처럼 닮아 있었는데 실제로 이목구비가 비슷하다기보다는 그들의 태도나 표정, 움직임과 스스로 만들어놓은 정신적인 차림새에서 닮아 있었다. 그러한 후천적인 육체의 언어는 그들을 남매 정도를 넘어서서 마치 쌍둥이처럼 느껴지게 했다. 익숙함과 동질성과 공통된 배타성과 극도의 수줍음의 육체. 호숫가의 투명한 검은 테 안경, 희미하게 반짝이는 물방울무늬가 있는 검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여자의 수영복, 마치 오리의 깃털처럼 짧게 자른 머리칼과 단정하게 두 손으로 감추어진 배꼽, 작고 뾰족한 턱과 장갑이라도 낀 듯이 크고 밋밋한 손, 그리고 의지와 수줍음이 복잡하게 뒤엉켜 꽉 붙어 있는 긴 발가락 사이들. 예민함으로 치자면 남자 쪽이 더욱 월등했다. 그는 안경 아래의 두 눈을 감고 빛이 일렁일 때마다 그 일렁임의 정도와 바로 비례하는 속도로 눈꺼풀을 일정하게 떨었다. 눈을 감고 옷을 벗고 누워 있는 상태였으나 그의 모습은 ‘잠자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불안을 생각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는 습관적으로 아주 약간씩 턱을 당기면서 눈을 감은 채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눈을 감은 상태에서만이 발견할 수 있는 추상적인 놀라움을 마주쳤다는 은밀한 표시처럼 보였다. 여자 쪽은 가끔 눈을 뜨고 햇빛의 상태와 자신의 몸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쭉 펴고 그러면서도 가능하면 발이 모래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일정하게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그들이 가지고 온 해변타월은 양이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아주 큰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은 이미 모래에 닿아 있는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커다란 개 두 마리가 주인의 재촉에 신이 나서 헐떡거리면서 물속으로 뛰어들어가고 놀란 오리들이 건너편 언덕으로 헤엄쳐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뜨고 그 짧은 소요를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양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충분히 느꼈을 테지만, 그녀는 양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때 양은 그들을 언젠가 한번 만난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생각은 처음에는 마치 꿈속에서 가깝고도 희미한 지상을 내려다보듯이 그렇게 막연하게 상상과 기대가 뒤엉키며 시작되었으나 점차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메아리치는 의심에 침범당했다. 양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어느해 겨울 지붕 밑 방에 사는 사람의 생일파티에 초대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벽에 나란히 붙어 서 있다가 음악이 나오자 둘이서 손을 잡고 폴카를 좀 추다가 그리고 자정이 막 지나서 돌아간 그 키큰 기묘한 커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키가 큰 이들을 흔히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니까 서서히 양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확신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그들은 스웨터 차림이었고 여자는 그 위에 소매 없는 조끼를 겹쳐입었으며 검은 스타킹에 주름이 진 무릎 길이의 회색 스커트 차림이었다. 비록 그들은 다른 손님들과 모르는 사이였고 그래서 그들이 돌아간 다음에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지만, 양은 그들이 집주인과 인사를 주고받는 것을 옆에서 들었기 때문에, 여자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보조 사서이고 남자는 대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밖에는 막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의 첫눈이었다. 파티가 열리는 집은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열어놓은 베란다 문 사이로 예민한 어둠의 광선으로 이루어진 밤과 그 속에서 어둠과 더한 어둠의 농담(濃淡)만으로 이루어졌으며 낮에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천박한 햇빛 속에서 시치미를 떼고 있다가 밤이 되면 이윽고 아주 다른 존재가 되어 모습을 드러내는 굴뚝과 지붕들의 씰루엣으로 이루어진 도시 하늘의 풍경이 빤히 방 안을 보고 있었다. 엄숙하고 아름다운 각도로 기울어진 지붕들은 밤의 바다 위에서 침몰하고 있는, 지나치게 공들여 만들었으나 이미 백년도 더 지나 절망적으로 낡은 철제 군함들을 연상시켰다. 양은 겨울밤의 그런 지붕 그림자를 매우 좋아하여, 언제나 그렇듯이 좋아하는 일을 만나게 되면 그 희열에 비례하여 추상적이고도 동시에 육체적 감각을 동반하는 희미한 공포가 엄습하는 것을 느끼게 되므로, 아니 사실은 언제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은 어느정도 공포스러운 경험과 함께 오게 되므로―이 경우에는 사람들로 가득 찬 방과 겨울의 지붕이 내다보이는 베란다―그럴수록 가능하면 몸을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서 푸르스름해진 자신의 살갗이 남들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했다. 남자는 그해 겨울, 대학 사무실에서 눈치우기 아르바이트에 등록해놓았기 때문에 지금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양의 기억은 뒤엉킨 무의식의 먼지 속에서 곰팡이처럼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떠나기 전 여자는 자신의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냈다. 양은 방 귀퉁이의 그늘에서 벽에 등을 붙이고 선 채 꼼짝 않고 그것을 보았다. 그들을 관찰하기 위해서 거기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그들은 바로 양이 기대서 있던 벽과 열린 베란다 문 사이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양은 그때 음악소리에 섞여 들리는, 단단하고 뾰족한 발톱으로 문의 금속 손잡이를 긁는 기분 나쁜 소리에 홀로 진저리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음악이 커지면 따라서 커지고 음악이 잦아들면 저절로 사라지고는 했다. 양은 몇번이나 남몰래 방문을 열고 어떤 짐승이 문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했으나 그럴 때마다 짐승은 날쌔게 달아나버려서 오래된 복도의 묵은 냄새만이 축축한 찬 공기와 함께 양의 얼굴을 소름끼치게 커다란 혓바닥으로 핥고는 했다.
여자가 꺼낸 책은 그녀가 일하는 도서관에서 직접 대출한 것이고 도서관의 분류코드가 모서리에 붙어 있었다. 그녀가 누르스름한 책장을 넘기자 도서관 이름의 푸른 스탬프가 찍힌 첫 페이지가 나왔다. 그때는 책 제목이 무엇인지는 보지 못했다. 그들 남녀는 둘 다 매우 수줍어하는 편이어서 파티장 같은 장소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미소 속에 스며들어 눈에 띄지 않는 소극적인 미소를 가진 표정을 만들었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시선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양은 설탕이 들어간 음료수로 끈적거리는 손가락을 몰래 벽에다 대고 문질렀다. 그러자 서걱거리는 소리가 비명처럼 크게 들려와 양은 소스라치듯이 놀랐다. 음료수를 많이 마신 자신의 뱃속에서 불현듯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사람들이 동시에 자신을 쳐다볼까봐 미리 두려워진 양은 무언가, 예를 들자면 캐스터네츠 같은 도구로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척하면서 그 소리를 감추어볼 작정으로 집 주인 아들의 장난감통을 눈치채지 않게 뒤져보았으나 캐스터네츠는 보이지 않고 누르면 삑 소리가 나는 노란 고무오리와 장난감화살만 보였다. 시간이 지나고 밤이 깊어갈수록 양은 점점 불안해졌고 점점 더 정체 모를 공포에 사로잡혔는데, 그런 비밀스러운 불안과 공포의 와중에서 베란다와 그 너머로 마치 그 한사람에게만 보이는 듯이 존재하며 눈에 덮여가는 지붕들의 풍경에 압도당한 채, 심장이 장난감화살에 의해서 날카롭게 관통되듯이 기분 좋게 얼얼하면서 축축해지는 이율배반적인 쾌락 속으로 더욱 빠져들기 위해서 양은 의도적으로 더욱 자신을 불안의 한가운데로 밀어넣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혹시 양이 지붕 쳐다보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베란다 문을 닫아버려서 자신이 누리는 이 비밀스러운 쾌락이 종말을 고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책을 집주인에게 건넸고 주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들은 모자를 쓰고 코트를 걸쳤다. 그들은 주인과 뺨을 맞대고 감사와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문을 나섰고 그리고 최대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양은 부르르 몸을 떨면서도 시선을 베란다 쪽에서 거두지 않았다. 조금 진정이 된 후에 그는 담배를 피우는 척하고 베란다로 나갔다. 거리에는 눈이 쌓이고 있었고 양이 서 있던 지붕 없는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그들의 그림자는 놀라울 정도로 키가 컸다.
양을 파티에 초대한 사람은 얼마 후 갑작스러운 이사를 떠나기 전에 자신이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대신 반납해줄 것을 양에게 부탁했다. 이미 대출기한을 넘긴 책이었으나 중간에 도서관 직원을 통해서 한번에 한달씩 두번 연장신청을 했으니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래도 혹시 만일 중간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겨 연체료를 물어야 한다면 자신이 나중에 갚겠다고 했다. 그는 급하게 이사를 서둘러야 하는 사정이 생겼기 때문에 도서관으로 갈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고 양은 그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도서관은 집에서 양이 일하는 호스텔로 가는 중간에 있었고 책을 반납하는 데도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므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양이 도서관에 간 것은 며칠 뒤 어느날 아침이었다. 그는 그 전날밤 당번이어서 호스텔의 접수대에서 새벽까지 일을 했고 전차 안에서 아침을 만났다. 도서관에 도착하자 아직 문이 열리려면 반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날 반납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다음날은 시간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가 잊어버릴 수도 있으며 도서관이 문을 여는 시간과 그가 퇴근하는 시간이 맞지 않으면―그가 일하는 호스텔의 임시직원들은 근무시간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달라졌으므로―집으로 돌아갔다가 일부러 다시 나와야 하는 문제도 있기 때문에 그는 그냥 근처의 까페로 가서 밥을 먹으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까페는 좀 거리가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배도 고프고 게다가 너무 추워서 그냥 문앞에서 기다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 없는 까페 안은 바깥 날씨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추웠는데 인색한 주인이 난방을 틀지 않아서일 것이다. 커피와 빵을 주문하고 책을 꺼내든 다음 제목을 읽고 그리고 책장을 펼치니―그는 그때까지 그 책을 펼쳐본 일이 없었다―도서관 이름의 푸른 스탬프가 나왔는데, 그때 양은 이미 파티에서 그들을 만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다음이라서 도서관의 이름과 푸른 스탬프는 그에게 아무 기억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양은 빵에 버터를 바르면서 처음의 몇 페이지를 읽다가 커피를 마셨고 다시 책의 중간쯤을 펼쳐 아무 구절이나 읽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가방에서 펜과 수첩을 꺼내 즉흥적으로 구절들을 옮겨적었다. 특별히 인상적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양이 그런 식으로 문장 수집하는 것을 좋아해서 눈에 띄는 것들은 가능하면 무엇이든지 적어놓으려고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리정돈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적어놓은 문장들을 잘 쌓아두는 일에는 서툴렀다. 그는 이곳저곳 노트와 수첩에 출처가 불분명한 문장들을 적어두었으나 그것들이 일정하게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므로 그후 한번이라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거의 없었고 그냥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흐른 다음 양은 자신의 소지품에서 이미 오래전에 자신이 적어놓았던, 그러나 이미 그 내용이나 원래 그것이 속해 있던 책은커녕 자신이 그런 문장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그런 문장들을 간혹 만나곤 했다. 기록하는 순간부터 이미 마음에 담거나 새기지 않고 잊혀져버릴 운명인 그런 문장들을 수집하는 일은 단지 습관 때문에 계속 되풀이되는 단순하고 무익한 노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런 식으로 비록 자신의 필체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나 너무나 의외인 문장들을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발견하는 일을 내심으로 남몰래 신비스럽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양은 그 일을 굳이 중단하지 않았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지도의 뒤편, 잘 모르는 사람들의 명함, 해가 지난 비망록의 귀퉁이, 방랑에 가까운 산책중에 우연히 들렀기 때문에 이름도 생소하고 위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식당 영수증의 여백, 자주 보는 잡지의 이곳저곳, 신문, 버스에서 집어온 광고지나 팸플릿에, 그리고 그가 결코 보내지 않을, 구체적인 대상도 없는 엽서들 위에 그가 메모하는 문장들은 그러나 특별하고 큰 의미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단지 그가 그런 식으로 메모하기 자체를 즐겼으므로, 또한 우연하고도 즉흥적인 행위 자체에 더 중점을 두었으므로, 일상적이고 평이했고 간혹 너무나 평범하고 간결해서 도리어 더욱 의미있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경우조차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때 그가 그 책의 몇몇 문장들을 메모한 수첩을 양은 지금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책에 대해서는 지금 기억해낼 수 있다. 그것은 볼떼르와 프리드리히 대왕 간의 서간교환집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양은 그 책의 내용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는데,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이 옮겨적은 것은 제대로 된 완전한 문장이라기보다는 미사여구와 영웅의 이름을 빌려온 단편적인 외마디 칭송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은 그가 알고 있는 단어―예를 들자면 구체적인 어떤 이름―가 포함된 문장의 단편들을 별 의미 없이 옮겨적었던 것이다. “젊은 솔로몬이여…… 소크라테스가 여기 있다고 한들 나에게 그가 무엇일까, 내가 프리드리히를 사랑하는데.” 물론 양이 이해한 내용은 솔로몬과 소크라테스, 사랑, 그것이 전부였을 테지만.
이른 아침의 도서관은 생각보다 분주했다. 방문객들이 얼마 없는 소규모의 자그마한, 지방 관청에서 운영하는 프랑스 문화교류도서관이었으나 두서넛 있는 직원들은 뭔가에 매우 바쁜 듯이 서류를 정리하느라 양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양이 서서 기다리는 동안 사각사각하고 기분 좋게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났고 열람실과 접수대가 분리되지 않은 소규모의 도서관이 흔히 그렇듯이 짙은 책냄새가 풍겼다. 양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양이 책을 반납하고 싶다고 말하자 접수대의 직원은 옆창구를 가리키며 그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양이 파티에서 보았던, 말이 없던 그 키가 큰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워낙 소규모라서 그런지 사용자를 위한 안내 팻말은 없었고 직원이 가리킨 곳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양은 특별히 바쁜 일도 없으므로 누군가 그곳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창구를 통과하면 바로 서가였고 그곳에는 책들을 분류하고 제자리에 다시 꽂는 일을 하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양은 그야말로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그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매우 젊어 보였고 그래서 도서관의 정식 직원이라기보다는 견습생 정도로 보였다. 사실 그 젊은이는 서툴게 일하고 있었고, 책의 위치나 간편하게 일하는 기술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고 그러면서 뭔가 사소한 실수를 할 때마다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몹시 당황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자 얼굴이 드러났는데 양은 그가 열여덟살을 넘기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양은 그런 인상을 주는 얼굴을 예전에 지하철에서 만난 적이 있다. 초등학생이 몇명이 지하철에 올라타고 곧 숨쉴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컴퓨터게임과 만화영화에 대해서 재잘대기 시작했다. 아니 재잘댄다기보다는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어린아이 특유의 맹목적인 공격성으로 있는 힘껏 상대편을 향해서 소리를 지른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양이 서 있던 곳에서 대각선으로 마주 보이는 구석에는 유난히 인상적인 소년이 친구들과 함께 뒤엉켜 있었는데, 양은 곧 그 소년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소년은 빛으로 가득한 동화의 나라에서 태어나 이 지하철의 세계로 막 추방당한 요정과 같았다. 소년의 모습은 살과 뼈와 피와 같은 물질이 아니라 오직 빛남과 먼 곳에서 오는 광선과 울림으로 이루어진 듯이 보였다. 소년이 그만큼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그가 간직한 아름다움이 자의식 제로상태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려서이기도 하겠지만 소년은 특별히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뽐냄이 무엇인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년은 아직 아무것으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은 존재였고 무지하고 어리석었으며 신의 저울 위에서 경망스럽게 까불었으며 가치를 판단할 줄도 몰랐고 사색의 고뇌는 알 바 아니었고,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자신이 세상의 다른 사물들과 아직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바로 그 순간을 살고 있는 단지 가슴 아플 정도로 무심하게 아름다운 한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자의식의 진공상태는 길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양은 가슴이 조여들 정도로 안타까운 감정의 홍수에 북받쳤다. 그 소년이 내려서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깔깔 웃으면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양은 줄곧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양은 어깨를 움츠리고 숨을 죽였다. 만일 그때의 그 지하철의 소년이 순식간에 나이를 먹어 양의 앞에 선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아무런 무게나 내용도 없이 어떤 효과나 침투도 없이 시간이 인간의 표면 위를 지나서 그대로 흘러갈 수 있다면 말이다. 혹은 시간이 오직 무심함만으로 이루어진 어느 한 형상을, 그야말로 비밀스러운 빛의 반사에 의한 형상으로 만들어놓고 마치 장난치듯이 금가루를 뿌려놓은 다음 깔깔 웃으면서 멀어져간다면, 그런 다음엔 이런 형상이 공기중에 남으리라. 어떤 사람도 그 형상에 손댈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형상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빛남과 울림과 광선으로 이루어진, 망각된 기억과 가설의 슬픔과 대상이 없는 미련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어떤 작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양을 발견하자마자 얼굴이 귀밑까지 붉어지면서, 겨우 몇걸음에 불과한 거리인데도 거의 달리다시피 해서 양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서고에 있느라 창구를 비우고 양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사과했다. 그의 사과는 사실 매우 드문 태도로, 그 정도의 일은 직원이나 손님이나 서로 개의치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므로 양은 도리어 자신이 말없이 창구 앞에 서 있음으로 해서 젊은이에게 쓸데없는 심리적 부담을 준 것에 미안함을 느꼈다. 양이 볼떼르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서간교환집을 반납하고 나자 젊은이는 양에게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싹싹하게 물었다. 양은 볼떼르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서간교환에 관한 다른 자료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자 젊은이는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면서, 그런 종류라면 프랑스어 자료들이 이곳에 많고, 또 정기구독하는 잡지들도 많으므로 문학이나 역사 간행물을 뒤져보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곳은 프랑스문학 관련해서는 대학도서관을 제외한다면 가장 실속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서 간행물에 대해서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자료를 원하신다면 대학도서관쯤은 이미 다 살펴보셨겠죠?”
하고 젊은이는 물었다. 그의 뺨에는 아직 홍조가 완전히 다 가시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도 그 홍조는 번져 있어서, 마치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을 파란 유리구슬 안에 담아 눈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양은 그의 소개대로 정기간행물실로 가서 그가 산더미처럼 안아서 가져다주는 잡지들을 껴안고 읽기 시작했다. 사실 양은 프랑스어를 해독하지 못했는데 그 젊은이가 가져다준 자료는 전부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림이 있는 페이지를 펼치고 오래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젊은이는 원래 성격이 상냥한 편인 듯했다. 방문객들은 대개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그에게서 예외없이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 그것은 원래 그의 천성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기업체에서든지 정식 직원이 아닌, 연수를 하는 직업학교 학생들의 일관된 태도일지도 몰랐다. 그곳에 머물면서 양은 처음의 짐작대로 젊은이가 정식 직원이 아니라 졸업을 앞둔 직업학교 학생으로 그 도서관에서 견습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에드문트인 것도 알게 되었다. 그날 양은 자신에게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몇장의 사진이 든 자료를 복사했고 볼떼르의 전기를 대출했다. 대출카드를 작성해서 에드문트에게 내밀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양? 특이한 이름이군요, 하고 말했다.
양은 사흘 동안 계속해서 그 도서관으로 가서 가능한 한 오래 머물렀다. 사흘 동안 에드문트는 양에게 이것저것 자료를 열심히 날라다주었고 양은 이해하는 척하면서 그것들을 읽었다. 자신이 날라다준 자료에 양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에드문트는 좀 실망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정말로 열성적인 견습생이었다. 어떤 일이든지 하려고 했으며 책이나 자료에 관해서는 누구의 어떤 부탁이든지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법 없이 들어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가 양에게 날라다주는 잡지나 소논문들이 실린 책들 자체가 실제로 그의 관심을 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에드문트는 볼떼르나 프랑스문학이란 단어에 대해서 전혀 열광하지 않고 평범하고도 직업적인 미소를 보낼 뿐이었다. 랭보나 아라공, 초현실주의, ‘빠리에서의 릴케’에 대해서 말할 때조차 죠지 부시나 루치아노 빠바로띠를 발음할 때와 아무런 차이가 없이 무심하고 냉담했다. 그러나 “그…… 잡지 1986년도 10월판이 필요한데……”라는 요청에는 진심으로 기쁨을 가지고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서고 꼭대기로 금방 기어올라갈 듯했다. 사흘째 되는 날, 양은 도서관 직원이 지나가면서 에드문트에게 “생일 축하해!” 하고 인사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오늘이 생일인가요?”
양도 역시 지나치듯이 에드문트에게 물었다. 이미 그들은 손님과 직원으로서의 의례적인 인사말 외에도 조금 더 다른 것을 물을 수 있을 정도로, 물론 도서관 안에서만의 이야기지만, 친근해져 있었다.
“아니, 사실은 내일인데, 헬라 부인은 휴가로 내일 나오지 않기 때문에 미리 인사를 하는 거지요.”
“아, 그렇다면 나도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군요. 몇살이 되는 건가요?”
“열아홉살. 고맙습니다.”
“그런데 뭔가 생일선물을 주고 싶은데요. 그동안 나를 많이 도와주었으니까.”
에드문트는 진심으로 깜짝 놀라면서, 그러나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그럴 필요가 없고 자신은 단지 자신의 일을 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래도 혹시 괜찮다면 주소를 가르쳐주겠습니까? 선물을 보내드리고 싶은데요.”
에드문트는 잠시 망설이더니 “정 원한다면” 하고 양이 내민 수첩에 주소를 적어주었다. 양은 수첩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에드문트는 미소도 없이 조금 멍한 얼굴로 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쳐서 양이 “그럼 안녕” 하고 인사하자 매우 당황하면서 “안녕” 하고 조금 손을 들어 인사했다. 양은 뒤돌아보지 않고 뚜벅뚜벅 걸었다.
그 선물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양의 눈길은 도자기 인형들을 향했다. 양은 그런 물건들을 일생 동안 한번도 가져본 일이 없고, 자신이 가지기 위해서 사게 되리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선물상점이 있는 거리는 서쪽을 향한 커다란 길이었다. 그 반들반들한 우윳빛 이마 위로 저녁해가 지면 그것은 마치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당황하고 수줍은 그러나 열성적이고 따뜻하며 놀랍게도 친근하기까지 한 어떤 존재로 느껴졌다. 양은 자신이 항상 소심하고 어느정도는 겁에 질려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 다니던 어린시절부터 항상 그래왔는데, 정작 그 자신은 익숙해서 왜 자신의 그런 상태가 남들에게 불편함이나 거북함 더 나아가서는 적대감마저 불러일으키는지 잘 알지 못했다. 양은 자기 마음의 그런 방어상태를 어느정도는 아름답게 느끼기까지 했다. 그것은 자신만이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또 하나의 감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상점에서 파는 도자기 인형들을 처음 보았을 때 양은 까다로운 의붓자식처럼 다루기 힘들고 신경쓰이지만 또한 희고 연약하며 겁먹고 아름다운 하나의 인격의 형상을 본 듯했다. 양에게 그것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동유럽산 채색 유리인형의 현란한 교태보다도 그 도자기 인형들의 어느정도 염세적으로 주저하는 포즈가 더욱 그의 마음을 끌었다. 양은 자신이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을 몽땅 털어 마이쎈의 잠자는 비너스 인형을 샀다. 그토록 아름다우나 그토록 아름다웠던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접근과 소유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던, 그 잠든 비너스를 양은 잠시 아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다. 점원이 비너스를 상자에 넣고 선물용으로 포장하여 붉은 리본을 달았다. 리본에는 “에드문트, 진심으로 생일 축하해”라고 써넣었다. 다음날 그는 열아홉 송이의 노란 장미를 샀고, 천천히 걸었고 그리고 주소를 들고 에드문트의 집으로 찾아갔다.
저녁이 가까워오고, 햇빛은 거의 온기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창백하게 희미할 뿐이고 오리들도 어딘가로 모두 사라지고 바람이 더욱 싸늘해지자 사람들도 담요를 걷고 호숫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 키큰 남녀는 양과 함께 가장 늦게 호숫가를 떠나는 사람들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나란히 몸을 일으키고 아직 남아 있는 물기를 닦고 안경을 고쳐쓴 다음 수영복 위에 티셔츠와 바지를 겹쳐입고 일어나서 신발을 신은 다음 타월을 걷고 그것을 어깨에 걸쳤다. 양은 그들에게 간단히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고 그녀는 더이상 도서관에서 일하지 않는 건지, 궁금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막상 생각이 떠오르고 나니 그것을 실천에 옮겨 입을 여는 것이 힘들고 귀찮은 마음이 든데다가 또 그들이 무시할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시계를 보니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가까워지기는 했다. 미라가 여덟시에 찾아오기로 했으니 그 시간까지만 집에 도착하면 되는 것이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전혀 서둘 이유가 없었다. 양은 그동안 시간을 질질 끌면서 가능하면 미라가 스스로 지쳐서 양을 만나기로 한 결심을 변경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것은 결국 허사로 끝났다. 초조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어느새 양은 미라가 정작 자신을 다른 사람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터무니없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팔년 동안이나 만나지 않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양으로서는 미라가 굳이 자신을 만나러 이 먼 곳까지 온다는 것이, 미라는 단지 지나가는 길의 방문이라고 했으나 결국 그를 만나기 위해서 온다는 점은 분명했기에,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양이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라 또한 양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들은 서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목소리도 듣지 못했으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양은 시험삼아 자신이 팔년 전과 외모가 어느 정도나 달라졌는지 거울 앞에서 점검해보기도 했으나 정작 그 자신이 팔년 전에 어떠한 외모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미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양은 미라가 하나의 구체적인 인간, 여자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상기시켰는데, 어느 순간에는 그것이 당황스럽고 낯설다가 어느 순간에는 비웃고 싶을 정도로 서툰 농담으로 생각되었고 한번은 허리가 비틀릴 정도로 웃음이 나기도 했다. 팔년 전에 양은 그녀를 두려워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라는 의지가 강하고 외모가 뛰어났으며 자기주장이 드물게 선명했고 고집이 대단했다. 하지만 양이 그녀를 두려워한 것은 그녀의 지배욕이나 강렬한 에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두려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예상만으로도 가슴이 폭발해버릴 듯한 공포였고 또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미라가 자신이 창조한 극적인 장면 속에 양을 버려두고 떠났을 때는 도리어 차라리 덜 고통스러웠을 정도였다.) 그러면 미라는 상냥하게 양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대고 지그시 누른 채 속삭이고는 했다. 우리는 서로 첫눈에 사랑에 빠졌어, 그 누구도 이전에 그러지 않았던 방법으로 말이야. 그런데도 넌 두려워하고 있군,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지?…… 여덟시에 찾아오기로 한 미라는 아홉시가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다. 양은 단칸방의 침대에 앉아서 시계를 바라보면서 기다렸다. 양은 그녀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는 것을 궁금해하면서도,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변해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이 도시를 그냥 지나쳐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양은 라디오도 틀지 않았고 전등을 밝히지도 않았고 촛불을 켜거나 커피를 끓이지도 않았다. 양은 단지 기다릴 뿐이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막연한 대상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자신의 수줍은 영혼의 세계에 침략자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는 어느 순간에 잠이 깼는데, 자신이 잠든 사실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시 동안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자신이 왜 옷을 입은 채 신발까지 신고 침대에 쓰러져 있으며 그리고 무엇 때문에 도중에 잠에서 깨었는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지친 상태에서 신발을 질질 끄는 소리,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괴로울 정도로 오래 들렸다. 동전이 양철그릇 속으로 떨어지듯이 터무니없이 크고 못된 기억을 되살리면서 신경을 거스르는 무례하고 불쾌한 소리들이었다. 그리고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지. 미라가 도착했다. 그녀는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와 그가 잠들어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마실 것을 스스로 만들어 부엌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그것은 그가 마음속으로 숨막혀하면서 여러번 상상하고 또 상상한 순간이었으나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보니 현실은 역시 별것 아니며 고작 모든 예상된 상상의 평범한 아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서둘러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사실은 움직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마치 열병에 걸렸을 때 흔히 꿈속에서 그러는 것처럼 공기에 결박당한 듯 고개조차도 돌릴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누운 채 미라가 찬장에서 빵을 꺼내 칼로 자르고 마가린을 바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보이는 미라의 몸은 바람이 빠져나간 것처럼 더욱 홀쭉해졌고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채 등뒤로 평범하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에 벨트가 있는 연한 색 울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이는 옷인데도 허리 부분이 그녀의 몸 위에서 헐렁헐렁하게 느껴졌다. 마치 허기지고 나이든 여인처럼 그녀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양에게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배가 몹시 고팠는지 불도 켜지 않고 창으로 비쳐드는 달빛에 의지해서 서둘러 빵을 베어먹었다. 꿀꺽 하고 음식물이 그녀의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꽤 긴 시간 동안 기침을 했다. 오래전 그들은 기차표를 사는 열 안에서 서로 마주쳤고 그리고 첫눈에 이끌림을 경험했는데, 그들은 서로 각자의 행선지가 적힌 문 뒤에 주저하면서 서 있었고, 서로 상대방을 듣기 위해서 귀를 문에 가까이 가져다대고 있었는데, 기차의 출발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고, 장례식에 참석한 듯 예절바른 사람들이 조용히 왔다가 사라졌으며 거기에 호응하듯 초청받은 피아니스트가 쇼팽의 ‘장례식의 행렬’을 연주했다. (음악이 양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 음악이 없다면 슬픔은 오직 슬픔이었을 뿐인, 그런 음악이다.) 방구석에 놓인 촛불에 비친 천장에 닿을 듯이 키큰 남녀의 그림자가 반대편 벽에서 서성이고 있었고 열린 베란다로 들어온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양은 그렇게 불현듯 나타난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인,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문장들을 그림자들이 일렁이는 벽에 연필로 옮겨적었다. 지붕 위로 눈이 쌓이고 있는데, 신비하게도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허공에서 고독하게 솟아오른 굴뚝 곁에는 빗자루를 손에 든 마르고 검은 사람이 하나 앉아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가 정작 양 혼자뿐이라는 사실에 양은 놀라고 감탄했다.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릴 것처럼 보였다. “나는 슬픔의 굴뚝 청소부지요, 나는 울어요, 울어요, 울어요……” 연필을 든 양의 손이 벽을 머뭇거리며 스쳐갔다. “나는 울어요, 울어요, 울어요……” 양은 철자를 틀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반복해서 썼다. “울어요, 울어요, 울어요……” “눈 치우기 아르바이트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고 키큰 남자의 그림자가 양의 뒤에서 방문을 스쳐지나가는 말투로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고 미안한 마음에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가 촛불 빛에 타들어가듯이 사라지면서 멀어져갔다. 그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함께 문지방을 넘어갔다. 양은 그림자처럼 벽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자신이 적은 문장들을 찾아 작은 소리로 읽었다.
“이십년 동안 나는 어떤 장소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그 누구도 나와 가까운 곳에 살지 않는 그런 장소를. 바라보이는 풍경은 아득히 멀고 아름다우며 풀밭과 늪지, 숲과 고독이 있는 곳. 마을이 아니라 교회조차 없는 하나의 외딴집, 그런 장소를―보도 슈트라우스.”
미라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양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양은 마침내 자신이 눈물을 흘릴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