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건축가 김석철의 제안에 대해
『창작과비평』 2003년 가을호의 「새만금, 호남평야, 황해도시공동체」에서 건축가 김석철이 제안하고 있는 것은 머리말에서 필자가 밝히고 있듯이 새만금문제에 대해 ‘개발’과 ‘보존’이라는 양극단에 서 있는 대립이 서로 상생(相生)하는 “중용의 길, 창조적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즉 이미 축조된 방조제를 기반으로 한 ‘바다도시’를 건설함으로써, 바다와 갯벌도 살리면서 당초 목표인 전북의 획기적 발전도 더욱 확실하게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제안된 ‘바다도시’의 대상지는 방조제 안쪽의 바다와 갯벌 및 하구 일대(새만금 제1싸이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호남평야(새만금 제2싸이트) 그리고 새만금 바깥바다와 백두대간 사이 전북 일원을 포함하는 거대한 지역 전체(새만금 제3싸이트)로 크게 확대되어 있다. 조금 더 눈여겨보면 이 싸이트는 점점 확장되어 황해를 중심으로 동북아 전 권역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이 도시는 단순히 ‘새만금’의 대안이라기보다는 한반도 전체, 그리고 황해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전체의 공간전략이다. 따라서 이 제안은 작금의 논쟁과는 달리 ‘새만금’을 거대한 상위의 기획의 일부로 다루려는 새로운 도전이다.
‘황해도시공동체’라는 참으로 매력적인 동북아경제중심을 전제로 삼고, 호남평야 도시들을 연합하고 통합신도시를 집중개발하며, 이들 도시연합이 외부세계와 연계되는 서해안과 백두대간 사이의 어번 링크라는 거대한 체계를 이루며, 이를 근거로 방조제에 세 바다도시(복합항만, 장터도시, 해상공단)가 도출되는 제안으로, 한반도를 넘어 ‘황해도시공동체’라는 21세기 동북아의 꿈을 펼치고 있다. 이는 로마제국까지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마치 ‘지중해도시공동체’와도 많이 닮아 있다. 황해를 둘러싸고 있는 경제적 독립국가로서의 지방국가들이 ‘동북아경제중심’을 구성하는 큰 써클을 이루는 거대한 기획이다. 이쯤 되면 이는 이미 ‘새만금의 문제’가 아닌, ‘경제공동체’를 위한 동북아공간의 거대한 환경개조이며, 공간혁명이며, 이에 따른 인간생활개혁의 기획이랄 수 있다.
이는 스케일의 차이만 있을 뿐, 지난 세기 현대주의자들의 기획(modern project)을 강하게 상기시킨다. 현대는 신대륙의 발견, 종교개혁, 프랑스대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그리고 계몽주의 등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시작한 시대이며, 현대의 특성은 과거의 전통과 절연하고, 과학·도덕·예술이 서양의 고유한 합리화의 궤도 위에서 진보되어왔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종교의 세속화, 도덕과 예술의 자율화, 민주주의의 원리, 언론의 자유, 비판적 공론영역의 형성 등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성취이며 동시에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 자리잡았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이성을 최상의 가치로 받아들인 시대였다. “모더니티는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는 의식체계를 의미”했으며, “이제 사람은 자연 위에 군림하면서 자연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대체하는 가능성을 가졌”다(Aaron Betsky).
이 기획들이 세기말에 이르면서 극단화되어, 이성주의에서 유독 인간의 가장 강력하고 원초적인 욕망인 ‘경제’만을 주목하게 되고, 모든 인간생활 심지어 문화와 예술마저도 이 운용체계에 통합한 신자유주의에 의해 전지구가 재편될 수밖에 없음이 공론화되고 있다. 어떤 뜻으로 이 ‘황해도시공동체’는 여기에 대응한, 동북아가 살아남기 위하여 전지구적 체계에 종속하려는 지역적 생존전략일 수 있다.
따라서 제안된 황해도시공동체의 프로그램과 물리적 조직의 마스터플랜, 그에 의해 합리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새만금 바다도시’의 프로그램과 구조를 논하기 앞서, 정작 우리의 논의는 오히려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으며,여기에 더하여 우리가 미래에 선택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에 우리의 논의를 집중해야 한다.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미래를 합리적으로 예측하고, 이에 의해 수립된 마스터플랜에 의해 진행되어, 과정은 지극히 무시되거나 약화된 채, 지정된 미래의 어느 싯점에 일정 목적이 달성된 이후에야 작동이 가능한 신도시들의 실패를 우리는 지난 세기 수없이 경험하였다. 이럴 때, 지금 활발히 발의되고 있는 ‘다원적 민주주의’라는 담론을 바탕으로 이를 면밀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 “다원적 민주주의의 비전은 거대하고 집중적인 건물들이 표현하는 상징보다는, 뒤범벅되어 보이고 여러가지 언어가 적층된 구조를 선호하며, 도시 전반에 걸쳐 더욱 느슨한 성장의 방식을 추구한다. 궁극적으로 다원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양태는 전체로서의 도시조직을 철저히 부스러뜨리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R. Sennett)
또한 급속한 변화에 대응하는 유연적 체계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 이 시대는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고, 오히려 예측을 거부하는 시대에 이미 와 있어서 모든 것이 불확정적일 뿐 아니라, 한시적으로 다기능들이 공유될 수 있으며, 다양성을 수용하며, 다원주의의 개념을 유쾌하게 만들 수 있으며, 상상력을 깨우며, 무엇보다도 불확정성과 불확실함을 즐기는 것이 이 시대적 가치임을 적시할 필요가 있다. “만일 ‘새로운 도시관’이 창출된다면, 그것은 질서와 전능이라는 한쌍의 환상에 근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불확정성을 발판으로 전개될 것이며, 그것은 이제 더이상 다소간의 영구적인 오브젝트들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력이 있는 영역들의 흐트러놓음이 될 것이다. 그것은 더이상 안정적인 구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최종의 형태로 정형화되기를 거부하면서 과정들이 수용되는 가능성의 장을 창조할 뿐이다.”(R. Koolhaas and B. Mau)
이런 뜻으로, 이 짧은 논평의 의도는 ‘김석철의 제안’을 미래도시를 위한 진실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하나로 통합된 조직적 도시공동체로 공동의 선을 이루려는 현대적 프로젝트, 즉 지난 세기 동안 마스터플랜에 의해 만들어져온 도시들과 같이 시간성은 배제된 채, 합리적으로 연계된 기능의 분배에 관심을 집중하기를 바라는 대안과, 오히려 미리 계획되지 않은 도시로서 ‘도시의 한 조각’이 ‘전체 도시’보다 더 중요하며 그러한 조각들 사이의 ‘차이’가 전통적으로 도그마가 되어온 ‘통일성’보다 더 존중받는 도시의 대안을 대립적으로 상정한, 새로운 열린 논의의 장을 제의하는 데 있다.
건축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민현식 mhs1021@hotmail.com
특집 ‘평화체제와 평화운동’을 읽고
이번 특집호를 여성평화운동에 나름대로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활동가의 입장에서 읽었다.‘21세기의 한반도 구상’의 두번째 특집으로 포괄하고 있는 주제들은 깊은 숨을 쉬고 우리의 시야를 확장하여 멀리 바라볼 것을 주문하는 글들이었다.
평화활동가들은 대개 현재 긴급하게 제기되는 사안에 집중해서 그밖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것이 이라크파병 반대운동이든 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위기극복을 위한 활동이든, 남북민간교류이든 이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전지구적 차원의 세계화문제에 어떤 맥락에서 연관되어 있는지 파악할 정신적 여유, 지적 훈련, 혹은 평화감수성을 가지지 못한 채 그때그때의 사안에 대처하는 바쁜 현실이 ‘평화운동 지평의 세계화’랄까 그런 것을 놓치게 하는 요인이다.
국제연대를 담당하면서 그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한반도의 이슈를 국제적으로 효과적으로 알려낼 것인가에 더 몰려 있지, 필자들이 제시하는 이른바 한반도 평화운동의 ‘민족주의적’ 범주를 넘어선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구축이나 반지구화 연대의 흐름을 한국의 평화운동에 소개하고 연대망을 형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집 글들을 읽으면서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관계맺기의 방식 즉 소통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한반도의 이슈와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그리고 반지구화 운동 사이에 어떻게 관계를 설정할 것인지, 그 소통의 방식이 아직은 부족한 것이 아닌지…… 그 소통의 부재는 때로는 여성의 눈으로 볼 때 남성적 가치, 민족주의 담론에 근거한 운동의 폭력성으로 나타나 여성주의적 평화운동과 주류(?) 반전평화운동 그룹과의 관계부재를 낳기도 하고, 반전을 외치면서도 반핵에 대해서는 평화주의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한반도 비핵지대화 논의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반김·반핵’을 외치는 보수우익으로 넘겨주는 반쪽의 평화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때때로 ‘있는 그대로의 북한’보다는 우리가 바라는 북한에 대한 모습을 투사함으로 인해 남북교류에 있어서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일으킬 때도 있다. 또 활동가들이 모이면 늘 제기되는 국제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커다란 목소리와 요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역량, 아직은 이를 자체적으로 키워내지 못하는 평화운동의 열악한 현실…… 이번 글들은 통해서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우리 평화운동의 현실을 돌아볼 자기성찰의 기회를 갖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의미있었다.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국제협력위원장 김정수 kjeongsoo@yahoo.co.kr
‘평화’에 대한 다각적인 통찰의 글들
최근 전면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의 평화운동에 대한 적정한 평가와 의의를 짚어주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창비 가을호를 읽게 되었다. ‘평화체제와 평화운동’이라는 주제하에 묶인 특집 글들은 우리 사회에 대두되고 있는 ‘평화’의 적극적·소극적 의미에 대해 독자로 하여 다각적인 통찰을 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환경운동과 평화운동은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 뿌리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요즘에 이번 특집은 그동안 통념적으로 인식되어온 평화의 개념을 더욱 깊게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운동의 방향을 ‘안’으로 향할 것을 강조한 정욱식의 글과 ‘자본주의 자체의 역학에 대한 비판’으로 환경론을 이야기한 월든 벨로의 글이 특히 인상에 남는다. 국제정세의 역학관계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이루기 위한 길을 모색하는 데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리들 개개인이 생각하는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그 고민들이 사회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통로들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특집 글들이 그 통로를 여는 하나의 방향이 되었고,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평화’에 대한 창비의 관심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환경단체 ‘풀꽃세상’ 사무국장 김수진 www.fulssi.or.kr
나는 무엇으로 ‘행복’할까
나의 소망은 무엇일까? 평생을 두고,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만큼 기껍고 간절한 그런 소망 하나 내게도 있을까? 돈도 좀 많이 벌고 싶고, 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도 싶고, 사랑스런 자식들 구만리 같은 앞길 마냥 훤했으면 싶고, 이런저런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어찌 “배신과 실패마저 제 심장과 동맥으로 삼아 앞으로든 뒤로든 뛰든 기든 여하튼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유토피아를 향한 멈출 수 없는 마라톤 같은”(가을호 208면) 것일 수 있겠는가. 지금 나의 꿈은 너무나 작다. 너무나 현실적이다. 꿈이라고 이름붙일 수조차 없는 속된 욕망들로만 채워진 머릿속 어디에도 꿈은 없다.
살면서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행복이라 믿으며 발버둥치는 하루, 또 하루. 돈버는 재미 제아무리 쏠쏠하고, 별별 굴욕의 터널을 지나 남부럽지 않은 자리에 올라선다 한들 그게 무슨 ‘생의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쾌락은 있지만 정신적 긍지가 없고, 성취는 있지만 그것이 후회없는 보람으로까지 다가서지 못하는, 이 지겹도록 무의미하고 견고한 일상성의 벽을 어찌하면 좋을까.
다행히 시대를 잘 만나, 이념의 갈등에 잠 못 이룰 필요도 없고, 그래서 총탄이 빗발치는 죽음의 사선을 넘는 이야기, 보급로가 끊겨 산에서 보름을 굶었다는 이야기쯤 역사의 전설로나 치부하고 살아도 크게 흉될 것은 없지만, 정지아의 소설 「행복」을 통해 만나는 빨치산 세대의 집념과 회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핏빛 족적을 따라가노라면, 새삼 이땅의 역사가 곡절 많은 눈물의 역사임을 절감하기도 하고, 공존해야 마땅한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가치의 지향을 두고서 아직까지도 적대와 미움의 칼질 멈추지 않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지 한편으로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네 삶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의 길을 따라 스스로의 한 생애를 불사를 수 있는 꿈 하나 간직한 사람이라면 그 어떤 가난과 패배도 어쩌지 못하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아니겠는가 하는 평범한 진실의 깨달음이다.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사 전상훈 outsider21@hanmir.com
생각하게 만드는 글
문학과 시사평론에 관한 책들을 주로 사서 도서관에서 읽고 있던 나에게 선배가 한마디 던졌다. 이런 책들 읽을 시간 있으면 영어공부나 좀더 하라고. 지독한 취업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좀더 높은 학점으로 평가되기 위해 밤낮으로 치열한 그들의 눈에는 전공과 아무 관련이 없는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이 아주 한심해 보일 듯도 하다. 작년에 군대를 제대한 부산에 사는 평범한 대학생인 내가 어쩌다가 문학과 시사평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꾸준하게 책을 읽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몇자 적게 되었다. 창비의 가을호에서 가장 뜻있게 읽은 문학작품은 정지아의 「행복」이었다. 약간은 역설적인 제목과 잔잔하지만 처절한 듯한 글의 진행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현장통신’의 「상식을 위한 투쟁」도 알지 못했던 많은 부분을 일깨워줬다. 언제나 생각하게 만드는 글을 읽고 싶은 마음을 충족시켜주는 글이 많았던 것이 좋았다.
친구들과 선후배와의 대화 속에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것을 찾기 힘들다. 시사적인 논평은 면접 때 좋은 대답을 하기 위해, 시험 답안지를 멋지게 작성하기 위해 읽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NEIS 문제도 새만금문제도 논쟁거리가 아닌 그냥 신문기사일 뿐이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싶고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경험과 소신을 가지고 싶다는 내 생각을 말했을 때 주위의 매서운 눈초리를 난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토익점수가 취업공부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혼잣말처럼 스스로에게 던진다. 겨울호를 기다린다.
김재현 greyvampire@hanmail.net
언론정책에 관한 글도 바라며
참여정부를 평가하는 글을 접하고 싶다. 참여정부 6개월간의 국정운영을 각종 언론기관들이 평가한 것을 보면 자기네 언론들의 숨통 조이기로 폄훼하는 것이 눈에 띈다. 지난호의 내용 중에 전성인 교수의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비판을 접하면서 정책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향후 필자의 진단대로 되는지 지켜보아야겠다.
특히 대통령이 직접 자주 언급한 언론에 대한 정책에 대해서 전문가의 견해를 접하고 싶다. 참여정부와 관련된 언론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대통령이 조·중·동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조·중·동의 의도적인 참여정부 발목잡기인지 등의 평가와 향후 언론정책은 어떠해야 하며, 21세기 언론은 어떠한 중심점과 지향점이 있어야 하는지 전문가들의 심도있는 의견을 듣고 싶다.
최성진 tru06t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