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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민족문학의 결여, 리얼리즘의 결여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 ②1
김형중 金亨中
문학평론가.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이 있음. unabomber5@hanmail.net
화염의 강 메우기
보기에 따라, 소설 속의 ‘여담’(digression)은 그것이 작품의 중심서사를 제대로 방해할 때, 오히려 찬사를 받기도 한다. 가령 란다 싸브리(Randa Sabry)에게 여담은 “중성(中性)과 파편성(바르트), 컬렉션의 분기(分岐)와 기이한 부분집합(세르), 열린 작품과 가능성의 범주(움베르토 에코), 파레르공(데리다), 싱커페이션(장―뤽 낭시), 유토피아, 반전, 재개, 그림에서 프레임과 프레임의 증가(루이 마랭), 이야기/담화의 경계선들, 곁텍스트성과 메타텍스트성(쥬네트) 같은”2 개념들의 태반(胎盤)이 된다. 그에 따르면 굳이 ‘명품’의 유기성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여담은 텍스트의 다성적(多聲的) 풍요로움을 보장하는 중요한 보물창고다. 알다시피 이 개념들은 ‘중심에 대한 주변의 반란’이라고 하는 후기근대론의 주요 테마가 텍스트 차원에서 상징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문학 외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원군을 마련해두고 있기도 하다.
배수아(裵琇亞)가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2003) 작가 후기에서 “어느 순간에 달콤한 멜로디에 의존한 크리스마스 선물용 바이올린 음악의 선율이 참을 수 없게 여겨질 수 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는 글 속에 담긴 스토리 자체를, 혹은 그런 선명한 스토리에 의존해서 진행되는 글을 내게서 가능한 한 멀리 두고 그 사이를 뱀과 화염의 강물로 차단하고자 했다”(198면)라고 하며 반서사적 소설(아닌 소설)을 쓰겠다고 공표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도 아마 이런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백낙청(白樂晴)은 아주 많은 공을 들여가며 이 작품을 관통하는 “교활하다 싶을 정도로 치밀한 운산과 정교한 복선을 깔고 펼쳐지는 서사”3를 찾으려고 시도함으로써 작가의 의도에 반하는 작품읽기의 모범을 보여준다. 사실 ‘찾기’보다는 ‘꿰매기’에 더 가까울 정도인 그의 서사에 대한 집착은 다소 안쓰러워 보일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그가 꿰매기 작업에 앞서 스쳐지나가는 어투로 “다소 저급한 비평방법일지 모르나”라고 하며 자신의 서사요약 작업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낼 때,사실 그 말은 전혀 겸손이 아니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해서 그는 배수아 소설에서 정교한 서사를 찾아냈거나 꿰매어냈을지는 몰라도 배수아의 음악에 대한 조예와 감수성,M의 보편언어와 절대음악에 대한 비극적인 추구와 같은 여담적인 요소들(사실 이 소설의 대부분의 매혹은 여기서 비롯된다)은 체계적으로 삭제된다. 오로지 앙상한 연대기적 서사의 추출을 위해서 말이다. 그것은 마치 은하수로부터 별자리 하나를 추출하기 위해 나머지 무수한 별들의 빛을 무시하거나 사라지게 해버리는 행위와 같다.
그럼에도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서사가 있다는 사실, 그래서 배수아의 의도와는 달리 서사란 소설의 어쩔 수 없는 기본요소란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느냐고 강변한다면, 백낙청이 거론하지 않은 중·단편들, 가령 「훌」(『문학동네』 2002년 겨울호)에 대해, 「마짠 방향으로」(『문학과사회』 2003년 봄호)에 대해, 그리고 「회색 시時」(『현대문학』 2003년 10월호)에 대해서는 어찌할 것인가 반문해볼 수도 있겠다. 「훌」의 세 주인공(셋 모두 훌이어서 도대체 어떤 훌이 이 훌이고 저 훌인지 소설 중반에 와서야 가닥이 잡힌다)이 보낸 노동절 휴일 전후의 며칠은 어떠한 ‘극적 사건’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마짠 방향으로」의 서사는 『에세이스트의 책상』보다 더 파편적이다. 시간상 역순의 형식을 취하는 서사는 기본이고, 아예 역순의 서사에도 포함시킬 수 없는 어느날 어느 시간 어떤 건물에서 잠깐 일어난 익명의 사람들간 대화나 말다툼이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오로지 ‘고독’과 ‘쓸쓸함’의 분위기를 위해 제시될 뿐이다. 아무리 백낙청처럼 꿰매기 작업을 감행해도 일관된 시간의 연속을 형성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회색 시時」에는 소설적 서사가 시작되기 전에 시간에 대한 그리고 기억과 죄의식에 관한 무거운 수필 형식의 기나긴 여담이 소설의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다, 이어지는 서사마저 오로지 우리말에는 없는 ‘미래완료 시제’가 가능하겠는가를 탐구하는 실험에 바쳐지고 있을 뿐이다. 화자는 말한다. “미래의 일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지나간 것인 듯 과거시제를 사용해서 말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고 분명히 아직 겪은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것들을 전부 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현대문학』 2003년 10월호 107면) 그러고는 기억과 죄의식에 관한 긴 여담이 이어지고 나서, 등장인물 수미를 중심으로 한 서사가 진행된다. 그러나 그 서사는 미래에 일어났던 일을 과거처럼 이야기하기를 실험적으로 보여주는 ‘예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 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다.
이제 이 낱낱의 작품에도 여전히 ‘서사’가 건재함을 확인하기 위해 또다시 꿰매기 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인가? 사실 그런 식의 각개격파는 배수아가 써내는 소설의 수만큼 자주 반복되어야 할 것인데, 그런 작업은 ‘꼼꼼히 읽기’의 전범은 여러차례 보여줄 수 있을망정 앙상하고 고집스럽단 소릴 들어도 별로 할 말이 없는 비평태도가 아닌가 싶다.
M의 성별
성차(性差)에 관한 관습적인 이해방식은 문장 수준에서도 관철된다. 반성되지 않을 경우 관습은 여성적 문장과 남성적 문장, 그리고 여성을 지칭하는 문장과 남성을 지칭하는 문장의 구분을 자명한 것으로 만들어놓는다. 물론 문장을 읽는 시선들 또한 극도로 자성적이지 않을 경우 관습적 성차를 그대로 용인한다. 가령, 김명인(金明仁)처럼 일류에 속하는 비평가의 시선 속에서도 “처음 만난 M은 키가 컸고 중성적이고 아름다웠으나 엄격하게 보였다”(『에세이스트의 책상』 82면)와 같은 문장이 즉각 M의 성별을 감별해내는 지표가 되는 처지를 면하지 못한다.4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인물에게 주어진 ‘중성적이었다’나 ‘아름다웠다’라는 술어들이 남성 인물에게 사용되어서는 안될 이유란 전혀 없다. 심지어 “이것봐, 거기 아가씨들! 힘쓸 만한 남자들은 다 여기 모여 있는데 거기서 뭐 하는 거야?”(『에세이스트의 책상』 112면) 같은 문장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가씨들’(M과 나)의 성별에 대한 지표로 읽혀서는 곤란하다. 경우의 수는 많다. 아가씨들 중 하나가 생물학적으로만 여성일 경우, 혹은 둘 모두 생물학적으로만 여성일 경우, 아가씨들 중 하나가 젠더만 여성일 경우, 혹은 둘 모두 젠더만 여성일 경우, 발화자의 젠더만 남성일 경우 등등.
물론 M의 성별 추적을 계속해보면, 문맥상 M이 여성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사실이 최종적으로 확인되는 지점은 김명인이 관습에 따라 잘못 읽은 82면이 아니라 제대로 읽은 112면이다. 그렇다면 135~36면,M이 에리히라는 남성과의 육체관계를 고백하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그녀의 성별을 감별해낼 수 있다고 말한 백낙청도 틀린 셈이 된다.
그러나 도대체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도대체 M의 성별이 언제 확인되는가 하는 점이 왜 그다지도 중요하단 말인가? M의 성별을 그토록 공들여(백낙청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거의 두 페이지 전체를 할애하고 있다) 확인하는 작업은 사실 들인 노력에 비하면 별로 얻을 게 없는 투자인데, 왜냐하면 배수아의 주인공들은 오래전부터 감별 불가능한 성별, 혹은 젠더(gender)와 성(sex)이 다른 성 정체성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동물원 킨트』(이가서 2002)의 무성이거나 중성인 화자, 『이바나』(이마고 2002)의 젠더는 남성인 여성 K, 최근작 『독학자』(열림원 2004)에 등장하는 두 남성인 나와 S(비록 정신적인 형태의 사랑이긴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동성애적이다)를 보라. 이처럼 만약 어떤 작가가 자신의 주인공들로부터 관습적인 성별을 의도적으로, 모든 경우의 수를 다하여 삭제하거나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의도나 전략이 숨겨져 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그 의도는 작품에 의해 그다지 크게 배반당하지 않은 덕분에, 『동물원 킨트』의 경우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경우 최소한 소설이 112면이나(김명인의 경우) 아니면 135면(백낙청의 경우)이 경과할 때까지 일류의 비평가들에 의해서도 간파되지 않는다. 아마도 배수아는 맘만 먹었다면 『동물원 킨트』에서처럼 그들의 성별을 끝내 감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배수아의 문장들은 성공적으로 성적 표지를 삭제한다. 전략은 거의 작가의 의도대로 수행된다.
아니 이 말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백낙청 역시 배수아의 무성적 글쓰기가 일종의 전략임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의도에 반해서’ 이 소설을 읽기로 작정한 이상 백낙청은 머뭇거리지 않는다.M은 최종적으로 여성임이 확인되고, 그리하여 ‘보편언어’나 ‘절대음악’ 등과 같은 추상적 가치의 상징으로부터 해방된다.M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성징을 지닌 ‘개성적 인물’이 된다. 이를 통해 백낙청은 이 소설이, 작가 배수아의 반소설적 의도와는 달리 ‘개성적인 인물’(M에게 성별이 생겼으므로)이 엄연히 존재하는 ‘명품’(사실 명품에 집착하는 그는 19세기 리얼리즘 형식에만 집착한다고 브레히트에게 ‘형식주의자’란 소릴 들을 때의 루카치와 많이 닮았다)에 조금만 못 미치는 작품(소위 ‘나쁜 의미의 에쎄이적인 요소’ 때문에. 그러나 그 요소가 작품에 드러나기를 의도한 배수아에게 이 말은 칭찬일 것이다)이란 사실을 증명해내는 개가를 올린다. 전략을 간파하되 그 전략이 의도하는 것을 무시하기 위해서만 간파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명품’에 한층 가까운 상태를 보장받지만, 또한 바로 그 이유로 많은 것을 잃는다. 문장 단위에서 용인되는 관습적 성차의 해소 시도라고 하는, 한국문학사상 가장 급진적인 실험 중 하나는 홀대당하고 무시당한다. 배수아의 실험은 그저 단어가 풍기는 성적 뉘앙스의 교란을 통해 지적 유희나 즐기자는 의도로 채택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배수아는 문장에 각인된 성차의 관습을 드러내놓고 유린하고 싶어한다. 그럼으로써 소재(대개 불륜일 경우가 많은)나 주제(가부장제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아주 낯익고 식상한) 수준에서 주로 진행되었던 성별간 대립, ‘남/여’의 이분대당,제3,제4의 성을 용인하지 않는 그 이분대당마저 해소하고 싶어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배수아는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만약 배수아 소설의 급진적 성 정체성을 가진 주인공들, 그리고 배수아가 의도적으로 성별을 삭제해버린 그들의 언어가 현실에 어떤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우리 문학사에서는 전례가 없는 성적 소수자의 언어, 그러나 그 자체로는 성적 표지를 삭제당함으로써 최소한 성별에 관한 한 ‘보편언어’(M이 그토록 추구했던)인 그런 언어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백낙청의 방식처럼, 고래(古來)의 명품―가령 소설 장르의 시작부터 여담을 소설의 자양분으로 만들어놓은 스턴(L. Sterne)의 『트리스트럼 섄디』(Tristram Shandy) 같은―은 이후의 모든 소설에서 행해질 실험마저도 미리 예견하고 있는바,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는 법이라는 식의 ‘반역사적’ 비판을 배수아가 감당하기는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논법이란 마치 ‘해체시는 이미 사설시조에서도 실현된 바 있다’라는 식의 고집불통 논법과 무엇이 다른가? 어떻게 1767년에 씌어진 소설 속의 여담이 200년도 훨씬 지난 21세기에, 그것도 형식실험에 그토록 인색했던 한국에서 씌어지고 있는 반소설적 텍스트를 미리 선취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지 불가사의다.
이야기를 안(못)하는 작가들
사실 배수아 외에도 정연한 ‘서사’를 불편하게 여기는 작가는 여럿 있어 왔다. 가령 하성란의 현미경적 묘사는 자주 중심서사를 벗어난다. 김경욱에게 서사는 오로지 영화적 소재와 주제를 문학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만 ‘고안’된다. 정영문에게 서사는 오로지 언어의 무의미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 외에는 그 무의미성을 증명할 수단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언어가 발설되는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차용한 수단에 불과하다. 만약 ‘서사’를 ‘기억에 의한 체험의 재구성’으로 정의한다면 서사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작가의 목록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서사를 거북하게 여기는 작가가 많아지고, 작가들의 서사능력이 갈수록 약해지는 현상을 두고 취할 수 있는 태도에 반드시 백낙청의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황종연(黃鍾淵)의 방식도 있다. 그의 방식은 개별작품으로부터 ‘기어이’ 서사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방식, 혹은 서사가 사라지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다. 특정 싯점에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자주 서사를 침탈하는 여담들이 눈에 띈다면, 그것은 하나의 징후가 아니겠는가? 가령 그는 90년대 이후 여성작가들, 특히 윤성희, 천운영 등과 같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부터, 리얼리즘 소설의 덕목으로 칭송되곤 하는 ‘세부들의 지양 혹은 승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부분이 ‘조화’ 혹은 ‘유기적 전체성’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전체에 통합되기를 거부하는 현상, 말하자면 중심서사로의 통합을 거부하는 여담들이 차츰 우리 소설, 특히 여성 소설에서 늘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징후다. 그리고 그 징후의 연원을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세속화의 진전은 (…) 승화의 리얼리즘을 불안하게 만든다.삶의 특수한 경험들이 조화롭게 결합된 전체성의 상태는 세속화된, 근대적인 삶의 세계 바로 거기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5
이같은 주장은 그의 다른 글에서도 재확인된다. “서사성의 회복은 단순히 작가의 결심에 달린 문제는 아니다. 소설형식은 다른 예술형식이 그렇듯 사물을 지각하고 경험하는, 관념이나 신념보다 훨씬 근원적인 마음의 작용과 관련되어 있으며, 지각과 경험 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변동을 겪는다.”6 물론 이때의 지각과 경험 방식의 변화란 그가 ‘도상 애호증’이란 표현을 통해 지시하고자 했던 어떤 것을 말한다. 하성란의 작품을 포함해서,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파편화된 이미지 위주의 묘사, 세부의 탈승화 현상 등의 배후에는 “시각적 형식이 시각 정보 기술의 발전에 의해 상대적 우월성을 획득한”(같은 곳) 사회적 과정이 가로놓여 있다.‘이야기하기’와 ‘듣기’를 ‘보기’와 ‘묘사’가 압도한다. 그리고 확실히 그런 과정은 작가들의 의지, 가령 서사성을 고수하겠다는 의지와는 별개로 진행되는 거대한 역사과정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서사성의 회복은 단순히 작가의 결심에 달린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즈음 우리 젊은 작가들은 이야기를 안하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그들의 작품에서 서사성이 약화된다는 사실은 비판의 대상인가, 아니면 탐구의 대상인가? 만약 어떤 이가 스스로를 리얼리스트 비평가라고 주장하려면 약화일로에 있는 ‘서사 일병’을 구하기 위해 매번 소용없는 전투를 치러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현상 배후를 파고들어가, 징후의 연원을 밝히고 그럼으로써 현상 너머에는 항상 사회적 결정인자가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리얼리스트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인가?
복원될 수 없는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우리 시대 젊은 작가들의 서사능력 약화와 관련한 논의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품은 아무래도 김연수(金衍洙)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문학동네 2002)이다. “나는 이 소설만은 연필로 쓰기로 결심했다”라는 「뉴욕제과점」 첫 문장은 작가 김연수가 이 텍스트를 쓸 때 세운 일종의 전략이자 집필태도를 요약한다. 그러나 작가가 의도한 바와는 반대로,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작가가 의도한 척한 바와는 반대로,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전혀 연필로 씌어지지 않는(못한)다. 설사 연필로 씌어졌다 하더라도 그때의 연필은 나무에 흑연심 박힌 그런 고전적 연필은 아닐 터인데, 팬씨점에서 산 날렵한 샤프펜슬이라면 또 모르겠다.
이 책에 실린 김연수의 단편들은 일견, 한기욱(韓基煜)의 평 그대로 “‘세계’를 추방하고 순전한 허구의 언어적 구성물을 보여주겠다면서 출발한 그가 (‘객관적’이라는 형용사는 붙일 수 없을지는 몰라도) 하나의 ‘세계’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방향으로 선회한”7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한기욱의 평에서 더 흥미로운 점은 그 논지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괄호 속의 ‘여담’에 있다. “객관적이라는 형용사는 붙일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전체 논지와 무관하게 이 말은 이 작품에 대한 한기욱의 체계적 오독이 자의식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한데, 물론 김연수는 결코 세계를 ‘객관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끌어들인 적이 없다. 사실은 그럴 수도 없는데, 기억에 의해 유년기의 객관세계를 재현해내는 작업은 ‘도상 애호증’적 지각변화를 몸소 체험해온 김연수의 세대에게는 관심 밖의 일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체험적인 글쓰기, 육화된 기억의 글쓰기, 아날로그적 글쓰기의 은유로 사용된 듯한 ‘연필로 글쓰기’ 공언을 믿을 수 없는 사정도 이와 같다. 김연수 세대에게 연필로 글쓰기는 하나의 제스처다. 오히려 이 작품집의 탁월함은, 연필로 쓰기의 불가능성이 작가의 의도대로 관철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가령 198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에서 기억이 서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자. 일단 구성이 재미있다. 짧은 단편인데도 불구하고 16개의 장으로 다시 잘게 쪼개진다. 각 장은 아예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느슨한 인과관계에 의해서만 연결된다. 그중 가장 짧은 3장은 이렇다. “게이코가 유리창에 써놓고 간 ‘Merry X-mas & Happy’란 글자 옆에는 누군가의 손바닥 모양이 찍혀 있었다. 게이코의 손금이겠지. 김이 어렸지만 그 희끄무레한 손바닥 길은 그런 대로 내비쳤다. 그 길은 비뚤비뚤 선 모양으로 눈벌처럼 창을 가득 메운 하얀 김 사이에 그어져 있었다. 꼭 어디 길 같은 손금이었다. 그건 아마도 게이코가 가고 싶은 길이라기보다는 갈 수밖에 없는 길의 모양일 테다.”(『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13면) 이것이 차가운 유리창에 찍힌 게이코의 손바닥 모양과 성탄인사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로만 이루어진 3장의 전체다. 다소간 길이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김연수가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는 방식은 대개 이와 같다. 기억들은 분명 느슨하나마 연대기를 형성하지만, 이미지에의 매혹이 오히려 서사의 일관성을 넘어섬으로써 서사는 단절적인 이미지들의 조합에 의해서만 형성된다. 게다가 그 기억 속의 이미지들이란 게 믿을 수 있을 만큼 재현적인지조차 미지수다. 은하수, 거북선, 솔 등의 담배 이름, 보드카 하야비치, 펜팔, 월남전, 영화 ‘캐리’ ‘십계’ ‘쿼바디스’ ‘삼손과 데릴라’, 칼라 TV 등과 같은 80년대 초반의 풍물을 환기시킬 만한 기호들이 범람하지만, 이 기호들이 워낙에 표면으로 돌출해 있어서 작품 전체의 유기성을 위해 ‘지양’되지도 ‘승화’되지도 못한 형국이다. 차라리 이 기호들이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 향수적 분위기를 위해 서사는 조연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작품집 곳곳에서 이런 현상들이 돌출하는바, 그렇다면 김연수는 여전히 허구의 언어적 구성물로부터 세계로 귀환한 적이 없는 셈이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그러므로 어떻게든 ‘세계’를 김연수의 작품에서 찾아내, 그를 가급적 리얼리즘 쪽으로 견인하려는 의도로 행해진 한기욱의 체계적인 오독을 역설적으로 비웃는 텍스트다. 최근의 ‘반역사주의’ 역사소설 쓰기 작업(성석제, 김경욱, 김영하, 김훈 등이 동참하고 있는 작업!)에서도 두드러지거니와, 김연수는 예나 지금이나 한번도 세계와 허구를 구별해서 사고해본 적이 없는 작가다.
역사는 텍스트다
단편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김연수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그날 우리가 걸어간 길에 어떤 의미가 있었다면 희망길을 목전에 두고 다시 걸어온 길을 되짚어 돌아나간 일을 두고 그게 우리의 운명을 암시하는 은유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우연에 불과했다. 그날, 그녀가 나를 이끌고 다닌 행로 역시 우연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른 식으로 골목을 걸어다닐 수도 있었다.”(「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문학과사회』 2003년 가을호 1152면) 그들의 행로는 운명의 암시나 의미심장한 은유가 되지 못한다. 행로는 우연의 소산이고, 다른 방식의 행로 또한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김연수는 말한다.
그런데 ‘전처’와 ‘나’의 그날 행로를 역사로까지 확대하면 어떨까? 이렇게 되지 않을까?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인 것은 우연 중의 우연에 불과한 것이로군요.”(「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 『문학동네』 2004년 봄호 154면) 혹은 “몸소 역사를 겪어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넝쒀라고 말해도, 역사를 만드는 자들은 거기에다가 논리를 적용하고 앞뒤를 대충 짜맞추고는 한편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부넝쒀不能說」, 『현대문학』 2004년 5월호 71면) 요컨대 우연이 역사를 만들지만, 그 역사는 이후의 기록행위에 의해 막강한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사실,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은 한 민족 혹은 인류 전체가 나아갈 길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차 있다는 식의 선형적 대문자 역사에 대한 반감이 김연수가 쓰고 있는 역사소설, 혹은 역사소재 소설의 주제다.
‘우연사관’이라고 해도 좋고, 최원식(崔元植)의 어법을 따라 “역사의 사적 전유”8라고 불러도 좋을 이런 식의 역사관은 물론 사회적 징후이다. 기억마저 단락적인 이미지에 의해 2차 가공된 형태로만 서사화할 수 있는 세대에게 역사가 기존처럼 민족서사시이거나 거대서사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당연히 이즈음 젊은 작가들의 역사소재 소설에서 징후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의 사적 전유 이면에는 황종연이 거론한 예의 그 ‘시각 우위’ 지각방식의 변화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최원식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김탁환, 김훈, 이은성, 그리고 ‘다모’나 ‘허준’ 같은 하위문화 텍스트들까지 두루 넘나들면서 역사물에 있어 하위주체들의 반란이란 현상을 광범위하게 추출해낼 때, 최원식은 확실히 역사관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지각변동의 징후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각변동이 불러올 파장에 대해서도 자못 공평한 태도의 기대를 보내기도 한다. 가령 그가 김영하(金英夏)의 『검은 꽃』(문학동네 2003)이 기존의 역사소설들과 다른 점을, “민족서사시를 꿈꾸지 않는” 중도적 주인공을 축으로 한 루카치류 역사소설도 골드만류의 집단적 주인공 소설도 아닌, “도망자들”의 이야기인데다, 그 구성마저 “선형성이 곳곳에서 파열”하는 비대칭적 구성으로 이루어진 “휘우뚱한 바로끄적 구성”이라고 얘기할 때 그렇고, 또 “우리 시대의 이 흥미로운 역사전쟁에 대해 한편에서는 원본으로서의 역사 또는 대문자 역사가 한줌의 ‘얄푸른 연기’로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고, 또 한편에서는 그 역사로부터의 탈주에 환호한다. 과연 이 전쟁은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라고 말할 때도(같은 글 51면) 그러하다.
그러나 공평함은 잠시, 그는 즉각 그간 리얼리즘 비평이 취해온 전형적인 태도, 즉 “모더니즘 소설이 펼쳐놓는 전체 포석 중 한두 국면의 성과를 애써 끌어당기면서도 정작 그 진짜 패와는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9 태도로 돌아서고 만다. 그리하여 『검은 꽃』으로부터 역설적으로 “나라의 꿈을 강렬하게 환기하는” 정서를 읽어내기까지 하는데,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환원론적 독해방식에 대해서는 김영찬(金永贊)의 탁월한 반론 하나로도 족할 줄 안다. 다만 여기서는 『검은 꽃』에서 김영하가 보여준 반역사소설적 역사소설 쓰기의 시도가 그보다는 훨씬 광범위한 어떤 징후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만을 보여줄 참이다.
김연수의 여러 단편에 대해서는 이미 거론한 바 있거니와, 실제 사료와 상상의 사료 간 구별을 무화시키고 있는 장편 『꾿빠이, 이상』(문학동네 2001)이, 그리고 아직 연재가 끝나지 않았지만 고작 죽은 시신의 발가락을 화자로 내세워 대문자 역사를 뒤집는 『밤은 노래한다』(『파라 21』 2004년 봄호부터 연재)가 이 계열에 속할 만하다. 김영하도 그와 비슷한 문헌학적 역사소설 쓰기 시도를 『검은 꽃』 이전에 이미 『아랑은 왜』(문학과지성사 2001)에서 행한 바 있다. 성석제는 『인간의 힘』(문학과지성사 2003)에서 실존인물 ‘채동구’의 기행(奇行)적인 일대기를 오로지 몇구절의 실록에 의존해 재구성해낸 바 있으며, 최근의 단편 「잃어버린 인간」(『창작과비평』 2004년 가을호)에서 제2의 채동구이자 반영웅인 ‘이봉한’의 비루한, 그러나 오히려 인간적인 일대기를 다시 그려 보이기도 했다. 김경욱은 이보다 좀더 멀리 나아갔는데, 아예 무대를 한국에서 프랑스로 옮기고 시간은 그보다 더 전인 중세의 어느 싯점으로, 게다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역사적 사료들을 가짜 인용하면서 가상 역사소설 『황금사과』(문학동네 2002)를 썼다. 최근에 그는 『하멜 표류기』와 몇몇 사서(史書) 들의 몇구절을 안내자 삼아, 근대인 하멜이 전근대 한국을 떠나는 광경을 재구성해낸 단편 「나가사키여 안녕」(『문학과사회』 2003년 겨울호)을 선보이기도 했다. 필자가 조금만 덜 과문했다면 이보다 더 많은 목록들이 추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최원식이 맘만 먹는다면 그가 『검은 꽃』에서 찾아낸 것보다 더 많은 사실들의 부정확성을 이 작품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싯점에 우리 소설계에 느닷없이 역사(소재)소설의 붐이 형성되었고, 그중 상당수의 작품들이 역사를 사적으로 전유하고, 재구성 가능한 텍스트로 취급하고, 역사를 현재와 미래를 반추해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암시나 은유로 보기를 포기하고 있다면, 그때 리얼리스트 비평가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이다.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이 가능해진다.‘나라의 꿈을 강렬히 환기시키는’ 민족서사시를 찾아 ‘작가의 의도에 반해’ 소설읽기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현상 배후를 파고들어가, 징후의 연원을 밝히고 그럼으로써 현상 너머에는 항상 사회적 결정인자가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리얼리스트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인가?
가난에서 결핍으로
백낙청은 (그리고 오래전 신승엽도) 배수아로부터 한국의 가난이 읽혀진다고 말한다. “한국사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배수아의 솜씨가 근년에도 여전함은 『에세이스트의 책상』 직전의 장편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에도 드러난다.”10
물론 배수아의 글들 도처에 가난은 산재해 있다. 그러나 배수아가 가난을 ‘한국적’인 것으로 그리려고 하지 않았단 사실은 명확한데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의 마지막은 그 훌륭한 증거가 될 만하다. “왜 백두연은 공허한 웅변으로 결코 자랑스럽지도 않을 그를 자신과 같은 역사의 무리 안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일까. 운이 좋았다고? 무엇이 한국의 역사고 유산이란 말인가? 그들은 공통점이 없었다.그들은 한시도 같은 ‘역사’ 안에 머물렀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아와 고아 아닌 자, 사생아와 사생아 아닌 자, 일그러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그는 죽는 날까지 최후의 있는 힘을 다해서 냉소할 것이다. 그는 일생 동안 한국인도 뭣도 아니었다. 오직 무참히 짓밟힌 인간, 그것일 뿐.”(『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289~90면) 사실 이 구절은 배수아의 가난을 한국적 가난으로 견인하려는 시도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응답으로 읽히기도 하거니와 이 무국적의 가난은 ‘가난’이나 ‘궁핍’이란 표현보다는 ‘결핍’이란 표현에 더 적합해 보인다. 부자나 가난한 자, 지식인이나 무지렁이, 남편이나 아내나 다 가난하다면, 그리고 그 가난이 생산과 분배만 아니라 심리적 범주를 두루 아우르고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경제적 의미의 가난이 아니다. 그런 가난은 이미 존재론적인 성질의 것이고, 심리학적인 성질의 것일 텐데, 그런 상태를 지칭하기에는 아무래도 ‘결핍’이란 말이 더 적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결핍은 국적을 모른다.
그 훌륭한 예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의 「성 모녀」 에피소드이다. 이 에피소드의 두 인물, 표현정과 부혜린 모녀에게는 돈이 곧 신이다. 물론 축적한 돈의 양으로 치면 이들은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고 그저 숭배하고만 있으니 이들은 가난하기보다는 일종의 결핍감에 시달린다고 해야 맞다. 그런데 이들의 이와 같은 가난, 아니 결핍을 다루는 방식이 사뭇 흥미롭다. 배수아는 이 에피쏘드를 ‘씬데렐라 이야기’의 악의적인 패러디로 바꾸어놓는다. 둘의 대화는 현실의 한국어라기보다는 동화에 등장하는 표독한 악모와 가엾고 착한 양녀의 대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게다가 부혜린이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티에 나가면서 신은 구두(표현정의 오래된 쌀롱화, 요컨대 유리구두), 돌아오는 길에 구두가 벗겨지자 백마 대신 자가용을 타고 나타나는 백두연(백마 탄 왕자) 등의 모티프는 모두 씬데렐라 이야기에서 차용한 것들이다. 왜 그랬을까? 만약 배수아가 ‘한국의 가난’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를 원했다면 이처럼 엉뚱하게도 먼 나라의 동화를 패러디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동화가 흔히 취하는 알레고리는 국적을 모른다. 그러나 한국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편재해 있는 결핍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가난을 무국적화하려는 배수아의 시도가 반드시 옳은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답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현실의 고통에 어떤 방식으로든 (리얼리즘적이지 않은 방식을 포함해서)대응하지 않는 문학은 그 무책임함이 항상 고발당할 수밖에 없고 또한 고발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그러나 만약 이 역시 하나의 징후로 보일 만큼 자주 출몰하는 소설적 현상이라면 이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의 태도가 필요해질 것이다.가난이 배수아에게서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여러 작가에게서 즐겨 결핍으로 변화해가고 있다면 말이다.
천운영(千雲寧)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가난하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천운영의 더 큰 장기는 바로 그 가난을 「늑대가 왔다」(『명랑』, 문학과지성사 2004)에서처럼 원초적 결핍의 서사인 프로이트(Freud)의 ‘가족로망스’(family romance)와 결합시키는 능력, 혹은 「멍게 뒷맛」(같은 책)에서처럼 시선 욕망, 혹은 모방 욕망과 관련시키는 능력에 있다.11 「포옹」의 의식적 동성애, 「월경」이나 「바늘」 「숨」 「눈보라콘」(『바늘』, 창비 2001)의 (반)오이디푸스 서사도 역시 기존의 사회적 가난만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결핍의 서사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강영숙(姜英淑)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독법이 가능하다. 초현실화되어 있고 또 다국적화되어 있어서 국적불명의 도시를 연상케 하는 「씨티투어버스」나 「봄밤」(『날마다 축제』, 창비 2004), 「서쪽에로 흐르는 불투명한 바다」(『파라21』 2004년 여름호)의 무대는 그 자체로 이 작가가 즐겨 그리는 가난이 딱히 ‘한국적’은 아니란 사실을 짐작케 하거니와, 그 가난 또한 출생에서부터 훼손되어 있었던 ‘가족’ 찾기의 서사와 자주 겹친다. 「댐」 「날마다 축제」 「별빛은, 별빛은」(같은 책), 「검은 밤」 「밤의 수영장」(『흔들리다』, 문학동네 2002) 등이 모두 훼손된 가족의 복원에 대한 욕망,곧 가족로망스를 반복한다. 백민석(白旻石)과 윤성희(尹成姬)에게 가난은 아예 존재론적으로 선험화되어 있어서 그것을 가난으로 의식하기조차 힘들다. 존재론적으로 선험화된 가난은 결핍이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문학동네 2001)은 바로 그 결핍이 어떻게 모방 욕망을 낳고, 또한 그것을 매개로 글쓰기를 낳는가를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다시 한번 동일한 질문이 가능해진다. 이런 징후들 앞에서 한국적 가난을 ‘총체적으로’ 그리고 전망과 주체 형성과정을 염두에 두면서 ‘사실적으로’ 그려내기만을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징후의 연원을 밝히고 그럼으로써 현상 너머에는 항상 사회적 결정인자가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리얼리스트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인가?
환원론을 넘어서
따지고 보면, 모두가 ‘총체성’이라는 수상쩍은 범주 탓이다. 총체적인 견지에서 오늘날의 한국을 조망할 수 없으니 가난은 자주 국적을 상실하고, 이야기는 자꾸 파편화된다. 총체적인 견지에서 역사의 합법칙성을 신뢰할 수 없으니 역사는 자주 사적으로 전유된다. 문제의 핵심에는 아직도 총체성이란 범주가 작동 가능한 범주인가 하는 질문이 놓여 있다.그러나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도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조금 더 현명하게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효과를 위해서는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고(‘아르키메데스의 점’처럼)도 말하기 힘든 오늘의 싯점에, 다만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태도’일 것이다. 김영찬의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창비의 비평에 요구되는 것은 현재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한국사회 모더니티에 대한 응답으로 제출되는 이 모더니즘(들)의 문제의식과 현실적 맥락을 외면하기보다는 그 한가운데로 직핍해들어가 비판적으로 대화하고 응전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문학과 모더니티의 생생한 진실은, 아직 오지 않은 리얼리즘의 ‘물건’이 아니라 비록 비루해 보이고 마뜩지 않을지는 몰라도 ‘문학의 위기’가 이야기되는 이 후기근대의 현장을 힘겹게 포복하고 있는 바로 그 문학들 속에, 그 문학들이 안고 있는 결여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앞의 글 289~9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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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졸고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파라 21』 2004년 봄호)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밝혀둔다. 문체와 구성 또한 그 글과 가급적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 글의 내용에 있어서는 창비 올해 여름호 특집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에 실린 백낙청, 최원식, 한기욱, 김영희 들의 글과 이에 대한 논평이자 비판으로 창비 가을호에 실린 김명인 및 김영찬의 글로부터 촉발된 바 크다. 특히 김영찬의 글은 이 글의 제목을 정하는 데 중요한 참조가 되었다. 그의 논지에 대부분 동의한다. 본문에서 그의 글을 많이 언급하지 않은 이유도 이미 동의하는 논의를 다시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논평할 기회가 없을 듯하여 미리 몇마디 여름호 특집의 서론 격인 ‘편집자 대담’에 대한 인상을 말해두는 것도 괜찮을 듯한데, 우선 문예지에서 문학관련 특집을 마련하면서, 문학관련 편집진이 ‘총동원’(나는 위압적이고 과장된, 게다가 일사불란함마저 느끼게 하는 이 말의 뉘앙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된 일이 일종의 ‘이벤트’가 될 만큼 대단한 일인지 의아했다. 했어야 할 일을 미루어두었다가 나중에서야 처리하는 형국임을 감안했을 때, 비록 ‘대대적’인 동원이 이례적이었다곤 하더라도 그 일을 치러내는 주체 입장에서는 좀 겸허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나마 “직무 소홀”이라거나 “무리한 구상” 같은 진정석의 자성적 어휘들이 눈에 띄어 다행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거론한 대상 작가들을 선별하고, 작가론을 쓸 필자를 선정하는 방식 또한 용두사미 격이었음을 지적하고 싶다. 가령 “강영숙, 권지예, 김경욱, 김영하, 김연수, 김종광, 김종은, 민경현, 박민규, 배수아, 백민석, 윤성희, 이만교, 이명랑, 이응준, 이현수, 전성태, 정영문, 정이현, 조경란, 하성란, 한강, 한창훈 등”을 ‘가급적 많이’1차 거론대상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기획자측의 혜안을 높이 사야 할 줄 안다. 그러나 이후에 이들 중 여러 작가가 마치 심사에서 탈락하듯 떨어져나간 저간의 사정에 대한 마땅한 해명이 없고, 게다가 “강권” “강요” “게으른 탓” “필자가 영국에 있어서” 등의 이유로 “상대”가 결정되거나 어떤 경우 누락되는 과정에 대한 상술은 하지 않느니만 못했지 싶다.↩ - 란다 싸브리 『담화의 놀이들』(이충민 옮김), 새물결 2003,14~15면.↩
- 백낙청 「소설가의 책상, 에쎄이스트의 책상」,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34면.↩
- 김명인 「민족문학론과 90년대 이후의 한국소설」, 『창작과비평』 2004 가을호 264면.↩
- 황종연 「탈승화의 리얼리즘」, 『문학동네』 2001년 가을호 401면.↩
- 황종연 「대중사회의 도상학」, 『문학동네』 2002년 겨울호 283면.↩
- 한기욱 「형식실험의 역설」,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100~101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 대한 해석에서만 나는 한기욱과 의견을 달리한다. 한기욱의 전체 논지에 대해, 그리고 그가 다른 작품들을 해석하는 논리의 예리함에 대해서는 오로지 감탄과 동의를 보낼 뿐이다.↩
- 최원식 「남과 북의 새로운 역사감각들」,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49면.↩
- 김영찬 「한국문학의 증상들, 혹은 리얼리즘이라는 독법」, 『창작과비평』 2004년 가을호 289면.↩
- 그러고는 “그것이 단편적 인식을 넘어 어떤 역사적인 ‘주체 형성의 노력’으로까지 발전할 전망은 당시에도 밝지 않았고 지금도 거의 안 보인다고 해야 할 것 같다”(앞의 글 47면)라고 함으로써 그 전망없음을 탓한다. 아무래도 이때 백낙청이 염두에 둔 ‘주체’란 이제 의심스러운, 혹은 다소간의 수정과 보완이 필요한 범주가 되어버린 민중, 즉 집단적 주체를 상정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터이다. 그러나 배수아에게 주체 형성의 노력이라니! 그것도 집단적 주체라니! 그것을 배수아가 얼마나 싫어하는지에 대해서는 최근작 『독학자』의 1부만 읽는 수고를 들여도 족할 것이거니와, 읽고 쓰고 음악 듣는 행위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다른 생활세계의 일로부터도 고립되기를 갈망해 마지않는 작가에게 주체 형성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심하다. 유기성, 총체성, 그리고 전망과 같이 미리 정해놓은 리얼리즘적 잣대를 배수아 같은 가장 철저한 모더니스트에게마저 들이대는 식의 태도가 사뭇, 짜장면 요리책을 가져다 읽으면서 이 책엔 왜 짜장면 말고 우동 만드는 방법은 나와 있지 않느냐고 탓하는 형국이다. 어떤 작가가 취하는 태도가 맘에 들거나 안 들거나 간에 그 작가가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은 것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평한 비평태도는 아닐 것이다.↩
- 그런 점에서, 김영희가 「숨」과 같이 “구체적인 생활 현장의 묘사”가 “단순히 배경에 머물지 않는 영향력을 작품 전반에 행사”하고 있는 작품들을 주로 거론하면서, 이로부터 멀어지지 말기를 작가에게 당부할 때(「천운영을 읽는 한가지 방식」,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79면), 그는 다소 촛점을 잘못 짚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