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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베일 속의 한일자유무역협정
한국의 산업, 노동, 그리고 ‘동아시아 비전’
송주명 宋柱明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 정치학. 공저로 『세계화와 일본의 구조전환』 『21세기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와 한반도』 등이 있음. jmsong@hs.ac.kr
1. FTA의 마법
세계적 무역자유화의 선도체인 WTO에서 자유화협상이 지지부진해진 것을 배경으로 전세계는 양국간 혹은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의 마법에 빠지고 있다. 지역주의가 전세계적 자유화를 방해할 것이라는 전통적 논의는 거품처럼 사라지고, 지역주의야말로 세계적 자유화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주류가 되고 있다.1 이른바 ‘WTO 플러스’의 지역주의 인식이 그것이다. 지역적·양국적 무역협정에 둔감하던 한국과 일본마저도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이하 FTA)만이 살길임을 이제야 ‘터득’한 듯하다. 특히 양국의 외교 및 산업정책당국의 일부 부서들은 FTA의 ‘배제’ 위험성을 내걸면서 경쟁적으로 협정의 대상을 찾아나서고 있다. 양국은 남미 몇몇 국가,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FTA를 모색하고 있다.2 새로운 시장(emerging market)인 ‘동아시아’는 양국의 FTA 정책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들어 양국간 협상논의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지만, 한일간의 FTA는 이미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일 FTA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1998년 경제위기 직후에 주한 일본대사 오구라 카즈오(小倉和夫)가 전경련에서 이를 제안한 것이 최초의 논의였다.3 당시 일본으로서는 미국 및 WTO 중심의 대외경제정책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경제공동화와 더불어 진행된 지루한 경제침체에서 탈피하려는 중요한 전략으로 FTA 정책을 본격적으로 채택하기 시작했다.4 한편 이러한 논의과정에 공식성을 부여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김대중정권이었다. 당시 IMF 경제관리체제 하에서 경제정책의 기조를 신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한 김대중정권은 FTA 또한 경제 전반의 자유화를 촉진하는 유효한 정책수단이라고 판단했고, 일본은 획기적으로 일본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보이던 김대중정권 시기를 놓치지 않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서둘렀던 것이다.5 이리하여 1998년부터 2000년에 걸쳐서 한국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일본의 아시아경제연구소(JETRO IDE)를 통해 정부연구소간 공동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이를 이어받아 2000년부터 2002년 사이에는 양국 재계간의 ‘한일 비즈니스 포럼’이 진행되었고, 정부관료를 포함한 초기협상으로서 2002년부터 2003년에 걸쳐 ‘한일 산관학(産官學) 공동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정권이 바뀐 2003년은 한일 FTA 논의가 정부간 실질협상을 기정사실로 남겨둔 상황이었다. 결국 2003년 12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정부간 본협상이 5차까지 진행되고, 양국이 작성한 가협정문과 관세양허안을 기준으로 절충과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일 FTA에 대한 공식적 협의과정은 명확한 국민적 합의와는 무관하게 외무 및 일부 산업관료, 재계상층부, 개방경제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마치 ‘꼬리말잇기’식의 정당화를 통해 현재의 본협상에 이르고 있다. 더구나 문제인 것은 협상의 대항목 외에 대다수 중요한 내용들이 철저히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국 협상에서 쟁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FTA가 실현되었을 때 국민경제와 국민의 삶은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될지에 대해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다.6 밀실 속의 우리 관료가 철저한 민관협조의 기반 위에서 전략적으로 행동할 일본 관료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대단히 궁금한 일이다.
사실 한국으로서도 중장기적으로 동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발전전망을 만들고, 그 위에서 적극적으로 국가·국민의 미래를 개척해가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남북통일의 과제 및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동아시아의 핵심적 행위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든 불리한 것이든 지역 내부의 여러 정치적·경제적 상호작용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 특히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지역적으로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국제질서의 기층이 변화하고 있는 오늘날 수동적으로 변화의 압력을 수용하는 자세를 넘어서, 동아시아의 공존과 발전,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도록 애쓰는 것은 우리의 책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한일 FTA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글은 현재 협상이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는만큼,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친 양국간의 공동연구 자료를 중심으로 한일 FTA가 한국의 국민경제와 국민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분석하고, 이것이 바람직한 ‘동아시아 비전’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2. 공식 언사와 이해관계
2003년10월에 공표된 산관학 공동연구회 보고서에 따르자면,한일 FTA의 기본원칙은 포괄성, 유의미하고 실질적인 자유화, 상호이익의 확대,WTO 규칙과의 정합성, 지역통합의 모델로 요약된다.7이는 한일 FTA가 범위와 속도 면에서 포괄성과 비장기적 이행의 특징을 갖는‘선진국형 FTA’ 즉 WTO를 앞서 나가는 ‘WTO 플러스’로서의 특징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재 전체회의와 총 일곱 개의 협상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본협상의 범위(scope)는 ‘자유화 및 원활화’에 해당되는 14개 항목(관세, 비관세조치, 원산지규칙, 세관절차, 전자상거래, 무역구제조치, 무역의 기술적 장벽, 위생식물검역, 써비스무역, 투자, 인적이동, 지적재산권, 정부조달, 경쟁정책)과 ‘협력’에 해당되는 10개 항목(정보통신기술, 중소기업, 무역투자촉진, 과학기술, 운수, 방송, 관광, 환경, 금융, 인재육성)등 지극히 포괄적이다.8 그만큼 한일 FTA는 협의의 FTA와는 달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래 써비스무역과 투자자유화, 나아가 원활화와 경제협력 요소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유형의 포괄적 FTA이다.9 그렇다고 해서 한일 FTA가 FTA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WTO 플러스’라는 표현에서도 분명해지듯이 더욱 강화된 요소를 갖고 있다. 그런만큼 한일 FTA에서 여전히 중요한 문제는 ‘무역’, 특히 ‘상품무역’이며, 그중에서도 ‘관세철폐’의 문제이다. 따라서 관세철폐에 따르는 손익이 양국간·산업간에 어떻게 발생할 것이며, 관세철폐의 손익을 다른 항목들(가령 비관세장벽 철폐, 투자 유인, 원활화의 이득)이 얼마나, 그리고 어떠한 방향으로 ‘보완’할 것인가가 한일 FTA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일 FTA에 대해 ‘꼬리말잇기’식으로 정당화해온 기본논리에 대해 살펴보자. 양국간 공동연구에 따르면, 한일 FTA로 인해 일본은 단기·장기 모두에 걸쳐 이득을 보지만, 한국은 단기적으로 손해이나 장기적으로는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현재 양국간에는 산업구조가 경합적이면서 산업경쟁력 및 관세구조가 지극히 비대칭적이다. 따라서 일본은 관세철폐에 의한 단기적 이득을 크게 향유할 것이며, 시장규모확대·표준통일·경제효율화 등과 같은 중장기적 이득 또한 클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단기적으로는 관세철폐로 대일무역수지가 더욱 악화될 것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일본의 비관세장벽의 철폐, 경쟁도입으로 인한 경제효율화 효과, 일본자본 등의 해외투자유입으로 단기적 손해를 넘어서는 ‘이득’을 향유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10 사실 양국간의 관세철폐가 얼마나 큰 충격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서 양국 정부연구소 보고서나 산관학 연구보고서는 지극히 소략하게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11 특히 한국측 보고서는 단기적 타격을 미래 어느 순간의 장기적 이득이 압도하여 결국에는 ‘윈―윈’게임이 될 것임을 수식으로 ‘증명’하기에 여념이 없다.12
일본으로서는 관세문제가 가급적 쟁점이 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 왜냐하면 일본이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한국의 관세철폐이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은 1990년대 이래 기업의 해외활동 증가와 더불어 산업공동화(空洞化)의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다.13 특히 ‘중국변수’에 의해 산업공동화가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14 따라서 일본정부로서는 동아시아의 주요 무역상대국의 관세철폐를 통해 일본 국내산업의 수출조건을 현저히 개선함과 동시에, 일본기업의 국제적 활동조건을 정책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한일 FTA와 일―ASEAN FTA 추진의 경제적 이유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이 한일 FTA에 대해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반면 한일 FTA로 인해 한국은 경제적 이득보다는 손실이 훨씬 앞설 것으로 보인다. 그런만큼 한국에서 FTA 추진의 경제적 동력은 그리 크지 않으며, 산업전반에 걸친 반대론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국의 협상당국은 관세인하가 가져올 파장을 축소하면서, 장기적인 ‘이득’이 생길 가능성을 애써 과장하려는 궁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5
과연 단기적으로는 약간 손해인데 장기적으로는 이를 훨씬 뛰어넘는 이득이 가능할까?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측의 정당화 논리가 갖고 있는 두 가지 핵심쟁점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째, 관세철폐의 효과가 한국산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가령 대일적자 즉 무역수지불균형은 약간 심화되지만 적정한 경쟁의 도입으로 주력산업이 효율성과 경쟁력을 회복할 것인가? 둘째, 장기적 이득의 ‘원천’으로 여기는 일본의 비관세장벽의 철폐와 일본기업의 해외투자유입이 기대대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3. 무역자유화와 한국산업
한국과 일본의 관세율은 양국간 산업경쟁력의 격차를 반영하여 선명한 비대칭성을 보여준다. 즉 양국간 무역에서 무관세의 비율은 한국이 28%라면, 일본은 57%이며, 관세율 10% 미만의 경우 한국이 70%, 일본이 25%에 해당된다. 특히 일본의 경우 주력산업의 대다수가 무관세이거나 0%에 가까운 저관세임에 비해, 한국은 약 8%대의 고관세를 주력산업에 부과하고 있다. 결국 관세철폐의 충격은 한국의 주력산업에 상당한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부문에서 어떠한 효과가 나타날지 살펴보자.
먼저 한일 FTA로 약간의 득이 예상되는 부문을 들어보자. 그것은 농림수산품의 일부 품목과 섬유(특히 의류), 그리고 피혁과 고무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일부 농림수산품의 관세율을 보면, 증류주(소주,16%), 채소(김치 등,9.0%),밤(9.6%), 생선·명란(9.6%),굴(7.0%), 냉동참치(3.5%) 등의 경우는 수출증가가 예상된다. 반면 한일간의 무역에서 농산물무역의 유세(有稅)품목은 8.8% 정도에 불과하며, 평균관세율은 일본이 12%임에 비해 한국은 62%이다. 따라서 농림수산 분야 전반에 걸친 이득이 발생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16 의류산업의 경우, 전통적 중소기업·경공업 분야에 해당되지만 일본의 관세가 16%이므로 수출은 증대될 것이다.
반면 기계조립산업, 중화학공업 등 현재 한국의 주력산업에서는 관세철폐의 부정적 효과가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일본의 대한수출 상위 50품목에서 한국의 수입관세는 기계류·전자부품·자동차부품·화학제품·전지·특수비철금속 등이 8%, 정밀특수기계는 5%인데, 관세철폐의 경우 수입증대는 극명할 것이다. 나아가 현재는 주요한 대일수입품목이 아니지만, 가전산업의 경우 PDP TV,LCD TV, 디지털 TV, 디지털 카메라 등 고부가가치 제품에서, 그리고 자동차(완성차) 산업의 경우 최근 한국판매에 성공하고 있는 중대형 승용차 부문에서 대일수입이 급증할 것이다(『스탁데일리』 2004년 5월 24일자). 나아가 석유화학산업과 철강산업에서도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철강 및 석유화학 산업의 경우 일부 품목의 가격경쟁력은 존재하나, 고부가가치 제품이나 특수제품을 중심으로 하는 수입이 급증할 것이며 해외시장을 둘러싼 양국간·기업간의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매일경제』 2004년 5월 4일자; 『스탁데일리』 2004년 5월 24일자). 특히 2002년 현재 한일간 무역에서 한국의 유세품목은 71.7%에 이르는데 그 안에는 기계 및 전기기기(22.9%), 금속(14.3%), 광학기기·사진용기기(6.4%), 플라스틱 및 고무류(5.0%), 차량·항공기·선박(3.0%), 석유제품(2.1%)등 주력산업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반면 일본에서 이들 산업제품들은 대다수 무세(無稅)이거나 지극히 저관세이므로,한국의 산업들은 수입증가로 인한 타격을 대일수출의 확대로 만회할 수도 없다(『朝日新聞』 2003년 12월 20일자 조간).
한편 정작 중요한 점은 한일간 관세철폐 역효과가 누적됨에 따라 한국경제는 무역적자와 같은 일시적 ‘양적 피해’에 그치지 않고, 양국간에 비대칭적 특화와 산업구조의 파행화에 따르는 ‘구조적·질적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첫째,현행 관세가 유지되는 상황에서도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는2003년 기준 190억 달러에 이르는데, 그중 약 80%가 자본재·부품·소재류 등에서 발생한다(『日本經濟新聞』 2004년 3월 1일자 조간). 이 분야는 한국의 고부가가치 부품생산 부문과 중첩되는데, 관세를 철폐할 경우 대일편중 수입구조는 고착될 것이며, 한국은 산업구조 고도화의 전략적 영역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는 관세요인과 가격경쟁력요인으로 수입되지 않던 고부가가치 제품의 수입 또한 대폭 확대될 것이며, 가전이나 완성차 부문에서 고부가가치·고기술 제품의 생산이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점에서 한일간 관세철폐는 부품·완제품을 가리지 않고, 한국의 주력산업에서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고부가치화를 이끌 첨단·고기술 분야를 무력화함으로써 산업발전의 전망을 어둡게 할 것이다. 셋째, 일부 중부가가치 부품산업의 경우에도 일본 수입부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에 대기업이 부품조달선을 변경함으로써 연쇄적인 타격을 받을 것임은 분명하다(『연합뉴스』 2004년 7월 9일자).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한일 FTA는 산업구조 고도화를 이끌 새로운 프론티어를 박탈할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의 대대적인 사업 축소와 정리를 불가피하게 만들어 산업공동화를 심화시킬 것이다. 한편 대일수출을 중심으로 볼 때, 한국은 수출이 증대할 일부 농수산품·섬유제품을 중심으로 하는 1960년대식의 경공업 특화구조로 퇴행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과 일본 간에는 저부가가치(저기술)생산/고부가가치(고기술)생산, 조립생산/부품공급기지, 경공업/핵심적 기계산업 등과 같은 종속적 수직분업구조가 고착될 것이다.
4. 비관세장벽과 대한투자, 경제협력
한일 FTA의 논리적 검토를 위한 두번째 쟁점으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우선 한국측이 관세철폐로 인한 손해를 ‘만회’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일본의 비관세조치(Non-Tariff Measures,NTMs)이다. 비관세조치란 일반적으로 정부 및 비정부 차원에서 외국기업을 차별하는 반경쟁적 제도나 관행을 가리킨다.17 여기에는 수량제한, 무역의 기술장벽, 위생식물검역, 유통장벽 등 제도적 차원의 문제도 포함되나, 안전지향, 소비관행, 제품 및 기업 선호 등과 같은 문화적 차원의 문제 또한 중요한 저변을 형성한다. 비관세조치에는 정부차원에서 조정가능한 것도 일부 있으나, 대다수는 기술·제도·문화가 사회적으로 복잡하게 조직된 일본시장의 여러 측면으로 나타난다. 한국측은 “일본의 관세율이 지극히 낮지만 대일수출이 확대되지 않는 이유는 일본시장이 비관세조치에 의해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비관세조치를 철폐한다면 한국의 대일수출이 늘어날 것이다”18라고 생각한다. 국제무역에서 비관세조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양국간 협상을 통해 일본의 비관세조치를 광범위하게 철폐할 수 있으며, 더구나 그렇게 함으로써 관세철폐로 인한 손해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사고이다.
실제로 외국상품의 일본시장 진입을 가로막는 대다수의 사례는 기술·유통구조·소비관행·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사적 비관세조치인 경우들이 많으며, 정책적 비관세조치의 경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가령 1990년 미일구조협의(SII)가 종결될 때까지 약 10여년에 걸쳐 미일 마찰의 주요논점은 다름아닌 이 비관세조치였다. 그러나 미국의 집요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시장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19 만일 이 사적 비관세조치를 없앨 수 있다면, 한국이 관세철폐로 입을 손해를 만회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일구조협의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양국간 협상을 통해 일본의 조직된 시장이 개방되리라고 상상하기는 힘든 일이다. 더구나 2년도 못되는 협상을 통해 일본의 비관세조치를 없애겠다는 주장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한국측이 관세철폐의 손해를 만회할 대안으로 찾은 것은 일본의 제조업 해외투자의 국내 유입이다. 현재 한일간에는 양국간 투자협정(Bilateral Investment Treaty,BIT)이 체결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협정은 약간의 논의와 손질을 거쳐 한일 FTA의 투자자유화 항목에 포괄될 예정인데, 한일 BIT는 최혜국대우나 내국민대우 중 유리한 방향을 적용하기로 함으로써 최대의 정책 인쎈티브를 부여하고, 이행요구를 금지함으로써 수입국의 투자통제 가능성을 최소화하며, 자유화의 예외조치를 최소한으로 규정하고, 수용·국유화의 경우나 국가별 위험성에 대처하여 투자가의 재산을 최대로 보장하며, 완전한 송금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되어 있다.20 이러한 점에서 현재 BIT만으로도 해외투자에 대해 거의 완전한 자유화와 보호조치를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으로서는 한일 FTA와 투자자유화의 효과가 발휘되어 일본 제조업의 대규모 대한투자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다국적기업의 행태를 누적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는 유치희망국의 투자자유화와 정책적 인쎈티브가 투자를 실현시키는 데 필요조건일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21 현실적으로 투자가 이루어지느냐 여부는 본국에서의 상대적 자본의 양, 경영상태와 기업전략, 본국정부의 산업 및 투자정책 등에 의해 일차적으로 규정되며, 그 위에서 투자유치국의 시장규모, 산업상황 및 기술, 노동력의 질, 시장의 전략적 가치, 지경학적 위치 등 투자기업측에서의 잇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이러한 조건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소 투자유치국의 자유화나 정책인쎈티브가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일 BIT 체결 이후에 일본의 대한투자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잘 확인된다.22
흔히 FTA는 해외투자의 확대요인이 되기도 하고 동결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미 국내생산에서 경쟁력을 잃은 산업이 상대적으로 과잉이라면,FTA로 인해 낮은 비용구조를 갖고 있는 상대국으로의 자본유입이 촉진될 것이다. 반면 자본이 과소상황에 있거나 국내생산에 경쟁력이 있는 부분만이 잔존해 있다면, 이 경우 관세철폐는 본국에서의 수출조건의 개선을 가져와 해외투자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자본의 양이 상대적으로 과잉상황에 있었으며, 이를 반영하여 정부와 기업은 적극적으로 해외투자전략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이때의 해외투자는 국내생산에서 경쟁력있는 부분까지도 포함돼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일본 국내의 제조업 공동화로 직결되고 있다.23 이 상황에서 일본정부의 산업정책이나 투자정책의 방향은 해외투자를 억제하고 수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멀리에서 찾을 필요도 없이 현재의 FTA 정책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24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게 한국측은 산업협력이나 정책적 해외투자를 유도해줄 것을 일본에 강하게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수미일관하게 투자의 문제는 민간의 문제이므로 개입하기 힘들다는 태도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이 없는데, 형식적 가능성, 그것도 잘못된 억측에 입각해 FTA가 투자유입을 촉진해 관세철폐의 손해를 만회해줄 것이라는 주장은 허무한 것이다.
5. 한일 FTA와 노동
한일 FTA는 한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줄 것인가? 그 답은 단연코 ‘아니다’이다. 여기에는 국가간 자본게임과 노동을 향한 자본의 공세가 중첩되기 때문이다. 앞의 논의에서도 분명하지만, 한일간 관세철폐의 결과 한국산업의 첨단부문이 상실됨과 동시에 현재 대다수의 주력산업들은 사활적 경쟁압력에 내밀리게 될 것이다. 자유화로 인한 경쟁압력은 상대적으로 비교우위에 있는 일본의 주력산업들에게는 기업의 건강성을 보강해주는 ‘보약’이 될 것이다.25 반면 극소수 기업들을 제외하면, 비교열위에 있는 한국기업들에게는 생사를 가름하는 ‘극약처방’이 될 것이다. 결국 대규모 산업공동화와 더불어, 이미 ‘한국기업’이라고 말하기 힘든 상층부 몇몇 기업, ‘극약처방’에서 살아남은 잔존기업, 경공업품 중심의 전통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형적 산업구조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며, 결과적으로 노동자에게는 실업과 고용불안이라는 뼈저린 시련을 가져다줄 것이다. 인구 1억7000만, 총 5조 달러 규모에 이르는 ‘통합시장의 창출’이라는 장밋빛 환상의 이면에서 한국은 국민경제와 국민의 삶이 파괴되는 유쾌하지 못한 현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의 노동자는 50%를 상회하는 비정규직, 청년실업 등 고용불안에 허덕이고 있다. 한일 FTA는 현재 한국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면 시켰지 호전시키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러한 상황을 예감하여 일본측은 한국 노동운동의 저항을 억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가령 산관학 공동연구회 산하의 ‘비관세조치 협의회’에서 일본측이 개혁을 요구한 한국의 비관세조치 열세 개 항목 중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여섯 개 항목이 노동운동을 억제하는 조항이다. 가령 종업원지주제에 대한 우선적 신주할당의 폐지 혹은 외국기업 예외화, 노동쟁의의 억제, 무노동무임금의 철저한 관철, 노동자 미사용노동 급료지급 의무화 폐지, 퇴직금계산의 유연화, 불법노동행위에 대한 엄정·신속한 조치 등이 그것이다.26 만약 일본측의 요구가 그대로 수용된다면, 우리는 전국이 마치 6,70년대 일본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근대적’ 수출가공구로 변질될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6. 한일 FTA는 한중일, 동아시아 FTA의 디딤돌인가?
한편 한일 FTA를 정당화하는 또다른 논리는 한일 FTA를 디딤돌로 한중일 FTA로 나아가고, 궁극적으로 동아시아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27 필자도 한일간의 건강한 관계가 한국의 동아시아전략에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명확히 해두어야 할 점은 일본의 FTA 정책은 한국이 생각하는 동아시아전략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초반 중국위협론이 대두된 이래 일본은 중국을 염두에 둔 내셔널리즘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중후반 이래의 대규모 대중국투자로 인해 확대되는 부메랑효과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것이 경제적으로도 중국을 위협으로 바라보는 배경이 되고 있다. 최근 일본정부는 중국을 ‘기회’와 ‘위협’의 양면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 결과 중국을 배제하는 동아시아 FTA 정책이 대두하고 있다.28 이는 중국과의 FTA가 일본기업의 대중국투자 러시를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이 새로운 투자흐름은 확대되는 부메랑효과와 더불어 일본산업에 치명적 공동화를 야기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29 결과적으로 일본의 동아시아 FTA 구상은 명확한 손익계산 위에서 한국, 대만, 싱가포르(기체결), 말레이시아, 타이, 인도네시아, 필리핀,ASEAN 10(다자적 접근) 등 중국을 포위·견제하는 해양벨트 중심의 쌍무적·다자적 네트워크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본의 네트워크형 FTA 정책은 안보전략상의 의미 또한 크다. 요컨대 대상국 선별에서 정치적 친화력(가치공유)이나 실질적 동맹의 강화가능성 등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질적인’ 중국과의 경쟁관계라는 변수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특히 한일 FTA는 중국을 견제하는 해양중심의 FTA 네트워크를 형성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맹축 즉 중심축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30 이것이야말로 한일 FTA가 한중일 FTA로 확대되기 어려운 핵심적인 장애이며, 한일 FTA를 중국 나름의 정치적 시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가장 커다란 요인이 된다.
7. 한일 FTA를 넘어선 ‘동아시아 비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일 FTA는 관세철폐의 효과만으로 대규모의 산업공동화, 산업구조전환의 첨두부분 상실, 대량 실업 및 고용불안 등의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산업구조면에서도 심각한 파행을 불러와 극소수 고기술산업을 제외하고는 전통적 경공업을 중심으로 특화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일본은 현재 자국내 제조업기반의 공동화를 최소화하면서 새로운 산업을 창조하고 산업구조를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부여받을 것이다. 양국간 산업구조의 경합성과 경쟁력 구조의 비대칭 상황에서 ‘자유화’는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나아가 한일 FTA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결과보다는 해양과 대륙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결국 한일 FTA는 한국이 동아시아의 대통합을 추구하기보다는, 정치·경제적으로 ‘해양진영’(미국·일본)에 더욱 속박되도록 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미중간·중일간의 동아시아 갈등 속에 한국이 더욱 깊숙이 편입됨을 의미한다.
사실 동아시아에서 발생되는 최근의 FTA 경쟁은 시장을 둘러싼 신중상주의적 경쟁, 즉 자유화란 이름의 중상주의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자유화를 통해 동아시아 시장을 지역적으로 통합해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로 보인다. 특히 동아시아의 중규모 국가로서 통일과 민주주의의 공고화, 그리고 산업발전의 새로운 계기 확보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는 우리로서는 평화·공존·발전 등의 가치가 조화롭게 실현될 수 있는 지역통합대안을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지역대국인 중국과 일본 간의 경쟁과 갈등이 더욱 구조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고, 청산되고 있지 못한 과거사를 둘러싼 반목과 기나긴 냉전의 왜곡된 그늘 속에서 부단히 내셔널리즘의 충동이 일어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단기간 내에 실현될 수 있는 통합대안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특히 국가간, 사회계급·계층 간 손익구분선이 분명한 무역·금융 자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단기적 지역통합 논의는 더욱 성공하기 어렵다. 최근 중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한중일 FTA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화와 지역협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힘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폭발적’ 성장 그 자체가 갖고 있는 국제질서 및 주변국에의 파급력, 그리고 일본에서 비등하고 있는 ‘중국위협론’ 및 내셔널리즘은 지역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가시키고 있으며, 동아시아의 핵심인 한중일 3국간의 협력론을 추상적인 것으로 머물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패권질서의 변화국면에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한국의 새로운 발전, 나아가 우리사회의 점진적 진보에 적합한 국제환경을 창출하기 위해서 한국은 동아시아 전반을 하나의 수렴지향을 갖는 협력단위로 묶어가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갈등요인이 심각하게 내재되어 있지만, 우선 한중일 3국을 핵으로 하는 동북아의 명시적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동북아의 통합지향성을 갖는 이러한 협력은 그만큼 잘 준비된 체계적인 전략을 필요로 한다. 한국의 객관적 ‘국력’조건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한국은 중일간의 균형 위에서 그 지정학적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전략적 외교를 통해 허약한 ‘국력’조건을 보완하고 이를 국제정치적 ‘비교우위’로 활용해가야 할 것이다. 한일 FTA가 수식(數式) 중심의 경제논리나 단견적 동맹논리의 무반성적 귀결이며, 한국이 추구해야 할 ‘동아시아 비전’과는 무관한 것임을 애써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중일 3국간의 협력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협력전략은 국내정책, 가능한 협력분야와 협력방식, 시간대를 고려한 협력의 단계설정 등 다면적 측면을 가져야 한다.
우선 동아시아전략은 국내정책의 차원에서 한국의 산업구조 고도화와 고부가가치화, 나아가서는 개방적이면서도 건전한 국민경제를 재구축할 산업·경제정책, 기존 한미동맹관계의 유연화 속에서 전방위적 국제협력을 가능케 하는 외교전략 개념의 도입 등 새로운 정책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미중일 3개국의 상호작용을 고려한 동아시아의 미래상에 대한 과학적 씨나리오를 구축할 능력 또한 결여되어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동아시아전략이 고려해야 할 차원은 가능한 협력분야와 협력방식을 획정하는 일이다. 한·중·일간의 FTA는 정치적이거나 선언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언정, 단기적으로 실현가능한 협력대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경제적으로 중국의 성장이 갖고 있는 폭발력과 심도, 광범위함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불확실성 및 위험 인식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특히 일본에서 ‘경제적 중국위협론’으로까지 진척되어 있다. 나아가 중국의 발전도상적 성격 그 자체가 이른바 ‘선진국형의 FTA’ 논의를 가로막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치적 내셔널리즘은 최근 친미적 전략을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에 ‘내재화된’ 미국변수가 이 지역의 3개국이 결합되는 데 중대한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중일 FTA는 동아시아 지역통합의 출발점이라기보다는 단계적 ‘목표지점’일지도 모른다.
한편 동아시아 협력은 궁극적으로 공동체 지향의 통합을 꾀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영역, 즉 협력의 차원은 낮을 수 있으나 필수적인 생존영역을 상호의존·공유하는 영역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 경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중국의 성장’ 자체이다. 성장시장 중국에 대한 동아시아 각국의 의존도는 더욱 증대하고 있으며, 이는 한편으로 ‘기회’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의 성장은 그 규모로 인해 이른바 ‘지속가능한 성장’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와 같은 중국의 고성장이 미래에도 유지되려면, 현존의 국제경제질서가 심대하게 변화되어야 할 것이며, 이는 필수적으로 국가간의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지속성장과 이른바 ‘소강(小康)’사회로의 연착륙은 국제사회의 협력을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한다. 한편 현재와 같은 상호의존 구조 하에서 중국의 지속성장과 연착륙의 문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생존문제와 직결되는 공통의 과제를 제기한다. 가령 중국의 지속성장을 위한 전제조건인 식량, 에너지, 환경문제와 내륙개발을 위한 인프라 투자 등의 문제는 동아시아 각국의 생존조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국제협력을 통해서만 해결가능한 문제들이다.이러한 점에서 동아시아가 ‘통합된 동아시아’로서의 비전을 갖기 위한 출발점은 식량, 에너지, 물류, 환경, 개발(투자)협력 등 상호배제가 불가능하고 문제영역을 공유해야만 하는 다원적 이슈의 중층적 협력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협력관계는 중국의 성장과정에 대한 동아시아의 강화된 관여(engagement)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성장을 ‘동아시아’라는 지역 속에 포용·포섭해들이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협력은 ‘동아시아’라는 공동운명체에 대한 인식, 즉 지역정체성의 형성과정일 것이므로 일본과 중국 내부의 내셔널리즘을 이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제분업, 무역구조, 각국간 산업구조의 질서있는 조정을 위한 한차원 높은 협력의 기초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동아시아 비전’은 상당히 장기간에 걸치는 집요한 노력을 필요로 하며, 가능한 (경제)‘협력’의 차원에서 진전된 ‘생존영역’의 공유, 나아가서는 궁극적인 지역공동체 인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중간적 단계들이 개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현재 국민경제와 노동 등 시민사회의 존립조건을 왜곡하는 단견적 한일 FTA의 구상은 ‘통합적 동아시아 비전’과 국민적 합의 속에서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 밀실 속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한일 FTA 협상은 그 내용이 공개되어야 하고, 국민적 토론과 바람직한 ‘동아시아 비전’ 전략의 형성과 관련하여 그 방향이 원점에서부터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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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입장의 초기 논쟁에 대한 소개는 Jagdish Bhagwati, “Regionalism vs. Multilateralism,” World Economy, 15(5), 1992; Robert A. Pastor, Integration with Mexico: Options for U.S. Policy, The 20th Century Fund Press 1993 참조.↩
- 물론 일본은 2001년 말에 일본·싱가포르 경제제휴협정, 한국은 2003년 말에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등 실험적 의미를 갖는 협정을 이미 체결한 바 있다.↩
- 『外交フォ―ラム』 1998년 6월호.↩
- 與謝野馨 「21世紀に向けた日本の挑戰」, 『通産ジャ―ナル』 1999년 2월호,13~14면.↩
- 이러한 경과에 대해서는 磠山襄 「自由貿易協定と日本」, 『貿易と關稅』 1999년 8월호 참조.↩
- 현재까지 한일 FTA 본협상의 개요에 대해서는 한국 외교통상부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소략하게만 소개되어 있다.↩
- 산관학 공동연구회 「日韓自由貿易協定共同硏究會報告書」, 日本外務省 2003, 18~20면. 한편 한일 FTA가 지역통합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한국측에서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령 한일 FTA를 한중일 FTA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 FTA로 확대해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원칙이 본협상의 원칙에서는 배제되고 있으며, 나중에 구체적으로 논의하겠지만 이것은 한일 FTA의 발전방향에 대해 양국간의 인식 차이가 큼을 시사해준다.↩
- 산관학 공동연구회에서 제시한 한일 FTA의 범위와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산관학 공동연구회,앞의 글 21~49면 참조. 본협상에서 일곱 개의 협상반은 ① 총칙, 분쟁해결, 최종규정 ② 상품무역(관세, 무역구제조치 등) ③ 비관세조치(NTMs), 위생식물검역(SPS), 무역의 기술장벽(TBT) ④ 써비스무역과 투자(금융·전기통신 등 써비스무역, 인적이동, 투자) ⑤ 기타 무역관련사항(정부조달, 지적 소유권, 경쟁정책) ⑥ 협력(무역투자촉진, 중소기업 등) ⑦ 상호승인협정(MRA) 등이다.↩
- 이러한 포괄적 FTA를 일본에서는 전통적 무역정책으로서의 FTA와 구별해 경제제휴협정(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EPA)이라고도 한다.↩
- IDE(日本貿易振興會アジア經濟硏究所) 「21世紀日韓經濟關係硏究會報告書:21世紀の日韓經濟關係はいかにあるべきか」,2000,14~22면;KIEP(대외경제정책연구원)·IDE 공동선언문 「보다 긴밀한 한일경제관계의 모색:21세기 파트너십 구축을 위한 제안」,2000년 5월 24일.↩
- 산관학 공동연구회, 앞의 글 15~16면 및 21~24면.↩
- KIEP 보도자료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의 구상: 평가와 전망」,2000년 5월.↩
- 中小企業金融公庫調査部 「わが國の産業の空洞化を巡る諸問題について:産業の空洞化を考えるQ&A」,No.41(調査レポ―トNO. 14-2),2002년 8월.↩
- 土逸勉男 「一段と向上する中國の國際競爭力;二輪車,トラック市場でもユニクロ化が進む」, 『MRI Today』 2001년 9월 19일; 「中國との國際分業を再考する(その一)」, 『MRI Today』 2001년 10월 17일; 「中國との國際分業を再考する(その二)」, 『MRI Today』 2001년 11월 14일.↩
- 이 지점에서 한국정부가 FTA를 추진하려는 ‘진의’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국내의 지지기반이 약화되고 도리어 반대론이 점점 커져가는 현 상황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장기적 ‘경제이득’, 동아시아 FTA로의 발전가능성 등 구태의연한 정당화 논리만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논리적으로 부정되는 상황에서는, ‘정부간 약속’의 신뢰성을 위해 FTA는 꿋꿋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궁색한 말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일 FTA를 추진하는 관료의 입장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준비되고 책임성이 뒷받침되어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 『日本農業新聞』 2003년 6월 10일자. 이와 더불어 고급과일, 녹차, 담배 등의 분야에서는 일본의 대한수출력이 강화될 것으로 평가된다(『日本農業新聞』 2003년 10월 29일자).↩
- 산관학 공동연구회, 앞의 글 24~26면.↩
- KIEP(대외경제정책연구원), 앞의 글. 한일 FTA 산관학 공동연구에서 한국측이 요구한 일본의 개혁대상 비관세조치는 다음 28가지에 이른다. 해양수산물의 수입할당 확대, 가전 재활용요금제도 개선, 디지털영상기록장치(DVR) 검사면제, 외국인 주주의 이동방송 합작투자시 투표권보유 임원 인정, 활어 운반 등 특수차량 일본도로 주행허가, 항만사용료 인하, 일본자치단체 공공 공사 입찰시 보험증권요건 개정, 외국기업에 독자적 공공 공사 입찰자격 부여, 주재원의 주재기간 갱신절차 개선, 비자취득 및 체제기간 갱신절차 개선, 법원 경매물건 감정평가서 공개, 법원 공탁제도의 개선, 세관검사시 밀가루조정품 정의기준 개선, 식재 수입업자에게 세관검사 분석방법, 검사결과 통지예정일을 서면통지, 법원인정 이전 미회수 이자 비과세, 주류소매업 면허 개선, 한국산 자동차 카펫·시트에 대한 별도의 관세분류, 은행계좌 개설시 여권 신분증명, 신규수입차 검사의 수입차 특별취급신고(PHP) 방식, 한국산 조개·굴에 대한 검역제도 개선, 화물 선적·하역시 일본항운협회와 선박회사 간의 의무적 협의 폐지, 수입 생선·야채에 대한 검역건수 상한의 폐지, 한국산 증제피혁분(蒸製皮革粉) 수입해금, 식품수입의 사전검사시 한국수입업자가 제출한 쌤플의 인정, 일본 폴리오레핀 등 위생협의회의 규제개선,IT 입찰불공정 관행의 개선.↩
- 長岡豊 『日米經濟摩擦』, 中央經濟社 1987,52~54면;三橋規宏 外 『昭和經濟史(下)』,日本經濟新聞社 1994,235~37면.↩
- BIT 『投資の自由化, 促進及び保護に關する日本政府と大韓民國政府との間の協定』,2002.↩
- UNCTC(유엔다국적기업위원회), Government Policies and Foreign Direct Investment, UN 1991.↩
- 한국정부, 즉 산업자원부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이러한 투자유입 결여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일본기업의 대한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필사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004년 6월에는 일본의 부품, 소재업체 등 8개 기업으로부터 총 4억85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한 사실이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국정브리핑」,2004년 6월 9일).↩
- 中小企業金融公庫調査部, 앞의 글.↩
- 日本機械輸出組合 「わが國FTAと東アジア經濟圈形成に關する提言:‘わが國FTAと東アジア經濟圈形成に關するアンケ―ト調査’の分析と提言」,2003년 8월,20~27면;MOFA(外務省經濟局) 「日本のFTA戰略」,2003년 10월.↩
- 田中均 「日本經濟外交の新展開:自由貿易協定に向けて」, 『中央公論』 2000년 11월호.↩
- 산관학 공동연구회, 앞의 글 79~80면.↩
- 같은 글 19면.↩
- 外交關係タスクフォ―ス 「21世紀日本外交の基本戰略:新たな時代, 新たなビジョン, 新たな外交」,2002년 11월.↩
- METI(經濟産業省) 「東アジア企業戰略を考える硏究會中間取まとめ」,2003년 9월.↩
- MOFA(外務省經濟局), 앞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