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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유종인 劉鍾仁
1968년 인천 출생. 1996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아껴 먹는 슬픔』이 있음. jongin-yu@hanmail.net
어떤 피
오래된 욕실 천장 모서리의
합판에 박혀 있는 작은 못 한개,
못대가리가 흐려지듯
녹물을 지리고 있다
합판 속에 박힌 못의 아랫도리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못대가리는 벗을 수 없는 모자, 언제도
들어낼 수 없는 맨홀 뚜껑 같았다
피 흘리는 입을 싹 씻고
씨익 웃을 수 있을 때는
바다도 억만년쯤 넘실대는 파도 심한 합판이라고
섬들은 그 푸른 못대가리를 낮추며
뱃길을 열었을까만
천장에 박혀 있는 작은 못 하나!
끝내 떨어지지 않게 떨어져서는 안되는
합판이, 천장이 아닌 바닥이 되게
못은 헐거워지는 제 아랫도리로 자꾸
쓰린 녹물을 흘려넣었던 게 아닐까
양팔을 내려 박힌 십자가 끝이
자꾸 흐려 보인다
저수지에 빠진 의자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의자가
저수지 푸른 물속에 빠져 있었다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을
살얼음 끼는 물속에 헹궈버리고 싶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온몸을 물속에 던졌던 것이다
물속에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
의자가 물속에 든 날부터
물들도 제 가만한 흐름으로
등을 기대며 앉기 시작했다
물은 누워서 흐른 게 아니라
제 깊이만큼의 침묵으로 출렁이며
서서 흐르고 있었다
허리 아픈 물줄기가 등받이에 기대자
물수제비를 뜨던 하늘이
슬몃 건너편 산을 데려와 앉히기 시작했다
제 울음에 기댈 수밖에 없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둥지인 양 물고기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갈기를 세우다
낯선 들판이다 경마장을 떠난
퇴마(頹馬) 두엇이
허옇게 말라버린 겨울 풀들을 뜯고 있다
목덜미가 서늘하다 어디서
눈 몇송이 묻어오는지 허공이
찡그린 눈매마냥 푸른 기운이 남은
버들잎을 팔자(八字)로 붙여온다
박차고 달리던 땅인데
앞만 보고 달려야 살던 흙길인데
지금은 가만히 서 있어야
고개를 숙이고 마른풀들의 눈치를 살펴야
늘어난 위장의 시장기를 속일 수 있다
바람이 분다 풀들은 죽어서도
더 낮게 몸을 낮춘다 낮춰진 풀들의
높이만큼 말들은 묵묵히 더 고개를 숙인다
코를 간질이며 일어서는 풀이 있다는 걸
오래 전 잘게 부서지던 건초더미에선
보지 못했다 죽어서도 뿌리박힌 것들은
바람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는구나
고개를 더 숙인 말의 목덜미에서
바람이 갈기를 세운다 달리던 말을 밟고
달리는 바람이 있다 말뚝처럼 박혀 있던
네 개의 다리가 가끔 풍치(風齒)처럼
조금 허공으로 들렸다 내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