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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Ⅰ.와트 『근대 개인주의 신화』, 문학동네 2004
근대 개인주의의 네 얼굴
설준규 薛俊圭
한신대 영문학과 교수 jksol@hanshin.ac.kr
갖가지 악재에도 불구하고 죠지 부시가 미국 대통령으로 다시 뽑힐 수 있었던 배경을 두고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백악관 정치고문 칼 로브(Karl Rove)의 노련한 선거전략이 주효한 것이라는 견해가 여기저기서 나오는가 하면, 실제로 부시가 대선승리 연설에서 그를 거명해서 치켜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부시와 로브의 관계가 네티즌들 사이에서 괴테의 작품에 나오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관계에 견주어진다는 사실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로브의 선거전략을 맑고 흐림을 가리지 않고 따른 덕분에 최고의 권력을 획득한 부시가, 자신의 영혼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내준 댓가로 초월적 지식과 능력을 얻게 되는 파우스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와 부시의 관계가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관계에 빗대어지기도 하는데,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악마이고 누가 마법사인가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고전적 문학작품에 나오는 허구적 인물이 실제인물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틀이 되는 경향은 우리 주변에서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가령, 실천보다는 생각과 고민이 앞서는 인물을 햄릿 같다고 하고, 그 반대로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깊은 생각 없이 나서는 인물은 돈 끼호떼에 견준다. 소설사 연구에서 필독서로 정평이 나 있는 『소설의 발생』(The Rise of the Novel, 1957)의 저자인 이언 와트(Ian Watt)의 마지막 저작 『근대 개인주의 신화』(Myths of Modern Individualism, 1996, 이시연·강유나 옮김, 이하 『신화』)의 주된 관심사도 바로 그와 같은 허구적 인물에 기초한 현실인식의 틀이 형성, 변화해온 과정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책의 목적은 파우스트, 돈 끼호떼, 돈 후안, 로빈슨 크루쏘우 등 네 유형의 개인주의 신화를 체현하는 작중인물들이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서구 문학작품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모해왔는가를 통사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서론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 책 제목의 ‘신화’라는 용어는 “진실이 아닌 거짓된 믿음”(16면)이란 흔히 사용되는 뜻이 아니라 “한 사회의 문화 전반을 통해 유난히 널리 알려져 있고, 역사적 또는 준(準)역사적인 이야기로 믿어지면서 그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들을 구현하거나 상징하는 전통적인 이야기”(17면)라는 뜻으로 쓰였다.
『신화』는 머리말과 짤막한 서론에 이은 제1부 ‘세 가지 르네상스 신화’, 제2부 ‘청교도 윤리에서 낭만주의적 신격화로’, 그리고 맺음말 ‘20세기에 대한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다.1부는 파우스트, 돈 끼호떼, 돈 후안 세 경우를 다루고 있는데, 이들 각각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이들을 통해 개인주의의 근대적 경향을 형상화해내는 한편 르네쌍스 시기 반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인해 그같은 경향을 징벌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그 결과 이 시기 여러 작품에 나오는 파우스트와 돈 후안은 비극적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고 돈 끼호떼 역시 자신의 기사도적 환상에서 깨어남으로써 개인주의적 일탈을 회개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2부에서 다루어지는 18세기에서 낭만주의에 이르는 기간에는 작중인물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더이상 징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부르주아적 개인을 최초로 신화화했다고 할 대니얼 디포우(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쏘우』(Robinson Crusoe)의 주인공이 궁극적인 징벌을 받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낭만주의 시기 작품에 등장하는 파우스트나 돈 후안, 돈 끼호떼 등은 징벌은커녕 때에 따라 신격화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맺음말에서는 토마스 만(Thomas Mann)의 『파우스투스 박사』(Doktor Faustus)를 살피고 있는데,만의 작품에서 파우스트에 해당하는 자기중심적인 인물 아드리안 레버퀸이 악마와 맺는 계약은 “독일 국민이 히틀러와 맺은 계약”(362면)을 환기하며, 그의 자기중심적 개인주의는 타인들의 개인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반개인주의적인 성격을 띠어 비판의 대상인 것으로 해석된다.
『신화』의 요지를 우격다짐 격으로 소개해놓고 보니 자칫 이 책이 일반 독자들의 처지에서는 좀 어렵고 딱딱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비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 스스로 책머리에서 밝혀두었듯이 전문적 학자들보다는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대중적 연구서에 가깝다. 다루어진 여러 작품은 경우에 따라 좀 장황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하게 줄거리가 요약되어 있거니와, 구체적인 분석과 서술의 상당부분은 비전문가들에게도 계몽적이면서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될 정도로 평이하다. 가령 파우스트 부분의 경우,16세기 초 독일에 실존했던 떠돌이 마술사 게오르크 파우스트의 삶이 반세기에 걸친 집단적 재해석을 거치고 “악마와 마술에 관한 루터적 편견에 따라서”(51면) 재구성되어가면서, 요한 슈피스(Johann Spies)의 『파우스트 서(書)』(Faustbuch), 크리스토퍼 말로우(Christopher Marlowe)의 『파우스투스 박사』(Doctor Faustus)와 같은 반종교개혁 시기에 개인주의를 다룬 문학적 성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거의 단숨에 읽힐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기술되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머지 부분도 대체로 수월하고 흥미롭게 읽히기는 마찬가지다.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책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자가 중병에 걸린 나머지 마무리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리라 짐작되지만, 책의 얼개가 허술한 부분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온다. 작품의 줄거리가 때로 불필요할 정도로 지나치게 세세하게 소개된 점은 차치하고라도, 논의의 큰 흐름에 긴밀히 맺어지지 않은 특정한 주제에 관한 해설투의 서술이 길게 이어져 연구노트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주는 대목도 더러 보인다. 예컨대 7장 ‘크루소, 이데올로기, 이론’에 나오는 신화에 관한 비꼬와 헤르더의 생각을 정리해놓은 부분이라든가,9장 ‘신화와 개인주의’의 내용 전체는 대폭 압축해서 서론으로 돌리는 것이 나았을 법하다. 주된 논지와 관련해서도 선뜻 동의할 수 없는 점이 더러 있지만, 특히 돈 끼호떼를 파우스트나 돈 후안과 함께 개인주의라는 범주로 묶는 것은 개인주의라는 개념을 너무 넓게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돈 끼호떼의 행위는 물적 토대가 사라진 기사도의 이상을 좇는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일탈이기는 하지만, 좇는 대상이 중세적 이상이라는 점에서 파우스트나 돈 후안의 근대적 개인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을 텐데 이 점이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다.
끝으로 번역에 관해 몇마디 하겠다. 학술서적 번역본 가운데는 원문을 짐작해가면서 읽어야 할 정도로 번역의 상태가 고르지 않은 사례들이 흔한데, 『신화』는 번역문만으로도 전체 흐름을 파악하는 데 큰 무리가 없는 비교적 깔끔한 번역이다. 하지만 원문을 일부 빠뜨린 곳이 더러 보이는가 하면, 원문내용을 잘못 파악한 데서 비롯된 부정확한 번역도 군데군데 발견된다. 명백하게 잘못된 대목 둘만 들어두자. 말로우의 파우스투스가 맞이하는 비극적 죽음이 지닌 의미를 해석하는 부분에 나오는 “낙관적이었던 전 세대가 그의 파멸을 한층 확대해놓았으나 그것은 역사가 무너뜨려버린 희망을 아예 파문(破門)해버리려는 반종교개혁 세력의 시도였다”(81면)라는 구절은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번역이다. ‘그의 파멸은 좀더 낙관적이었던 세대가 품었으나 역사가 꺾어버렸던 희망을 아예 파문해버리려는 반종교개혁세력의 시도였다’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돈 끼호떼가 마지막에 제정신을 차리고 “교회의 의식과 사회적 규율을 온전히 지키며 죽어가는 것”이 “개인주의적 독자들의 바람을 저버리는 것일지 모른다”라는 서술에 이어지는 “그 결말은 분명히 징벌적 세력이 펠리페 2세와 3세 치하 스페인의 반종교개혁 정신에 걸맞게 만들어냈음직한 것이다”(192~93면)라는 구절도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그 징벌적 힘 때문에 笘리뻬 2세와 3세 치하 스페인의 반종교개혁의 정신이 받아들일 만한 결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개선의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