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 목소리

 

 

학문의 주체성에 대해

창비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학문의 주체성과 오늘의 대학’만큼 창비에 마땅한 기획도 그렇게 많지는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아쉽고 모자라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대학이나 학문 평가, 사범대 문제도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굳이 학문의 주체성이란 문제에서 출발했다면 현재에 대한 진단이나 불평보다는 통렬한 자기비판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해방 60년 동안 우골탑이든 상아탑이든 대학은 사회의 자원이 가장 많이 투입된 곳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재원도 부족했고 독재에 의한 제약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교수의 사회적 위신뿐만 아니라 경제적 대우가 결코 낮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60년간 대학이 이룩해놓은 대학상은 무엇인가?

해방 직후는 식민지를 경과하면서 황폐해져 무에서 시작했다고 하자. 그래서 발전된 학문을 배워올 수밖에 없었다면 학문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영역은 이미 무엇인가 우리 것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대학은 어떠한가? 60년대 내지 70년대부터 대학은 선진문물을 배워온 사람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재생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가르칠 것이 없으니 나가 배워오라’고 한다. 그뿐인가 학문적 성과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나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학이나 SCI는 바로 대학의 재생산이 불가능한 이런 불임증과 무능을 웅변하는 것이 아닌가!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나보다는 훌륭한 선생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대승적 결단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더 잘 보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편협한 국수주의일 것이다. 세계와 교류하고 세계로부터 배우는 것은 당연하며 또 배워야만 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분과학문에서 대부분의 것을 여전히 외부로부터 배워와야 하고, 또 그것에 대한 평가와 판단 능력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글로 썼을 때는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같은 내용이 영어잡지에 실렸을 때 대단한 학자가 되고, 또 세계 학계에서 유행하는 이론이라면 평가하거나 판단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배워야 하는 것이 된 것은 왜인가?

그것이 보편주의자, 서구주의자, 혹은 친미사대주의자 때문인가? 그들의 책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들에게 주요한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인가? 우리나라에 대하여도 그럴듯한 설명의 틀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친미사대주의자의 음모인가? 대학에 그렇게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지만 여전히 도서관은 부실하고 또 책을 둘 공간조차 부족한 것도 친미사대주의자들의 음모인가? 학문의 주체성을 주장해왔지만 목소리만 있지 않았던가?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대안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는가? 그래서 무슨 성과가 있었는가?

일전에 성균관에 간 적이 있다. 과장(科場, 과거시험장)이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서울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다른 것을 지을 수 없는 것은 정말로 아까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빈 터를 그냥 내버려두느니 주차라도 시켜야지. 미국놈들이 덕수궁 터에 대사관을 짓는 것을 결사반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의 500년 전통을 매일 차로 깔아뭉개버리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항상 남의 잘못만 보고 남의 탓만 하고 스스로 이룩해놓은 성과가 없는 것은 전통을 차로 깔아뭉개듯 ‘학문의 주체성’을 스스로 짓밟아온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 능력이 없으니 나가서 배워오라’고 하는 것은 학자로서 과연 얼마나 가슴 아픈 자기반성이거나 학문의 보편성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실 ‘학문의 주체성’이라는 목소리는 이미 식상할 만큼 들었다. 이제 목소리가 아닌 성과와 결과로 이야기하자. 그것이 없다면 학문의 주체성 따위는 더이상 운운하지 말자. 차라리 ‘내가 능력이 없으니 나가서 배워오라’는 뼈 아픈 자기성찰을 본받거나 학문의 주체성이란 원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자.

한신대학술원 연구원 안치영 ahncy@netian.com

 

지난호 특집 좌담을 읽고

지난호 좌담은 ‘학문의 주체성과 오늘의 대학’이라는 특집 주제 아래, 특히 “학문생산의 문제, 이른바 연구의 문제를 가지고 얘기”가 진행되었다.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논의가 심도있게 이루어졌다. 특히 ‘대학개혁의 실태’와 현행 ‘학문평가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은, 대학에 몸담고 있지 않은 이들도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논의가 구체적이었다. 아마도 좌담에 참석했던 분들이 대학교수이고, 그렇기 때문에 몸소 체험한 내용을 논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개혁의 실태’와 관련해서 제기된 내용들은 대동소이한 것으로, 신정완 선생의 말처럼 “대학정원을 감축하는 총량적 차원의 구조조정, 대학 교육 내용의 실용화, 교수평가 강화를 통한 연구의 수월성(秀越性) 제고, 선택과 집중을 통한 전략적 대학지원 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좌담자들은 현행 ‘학문평가의 문제점’으로 “학진이 학문평가에서 권력기관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질보다는 양을 평가기준으로 삼는다고 비판한다.

이같은 지적엔 충분히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논의의 과정에선 다소 아쉬운 점들도 보인다. 우선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대학개혁의 바탕에는 (한기욱 선생이 ‘책머리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거센 압력”이 숨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좌담자들이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듯이, 학문영역에서까지 효율성과 실용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좌담내용에는 오늘날 대학 현장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그 본질적인 원인인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관련하여 대학개혁의 실태를 논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없다. 설마 좌담에 참석한 이들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인정’하고, 그것을 전제로 하고 논의를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좌담 서두에서 논의의 폭을 “학문생산의 문제, 이른바 연구의 문제”만으로 국한시켰기 때문에 야기된 문제 같다.

그리고 현행 ‘학문평가의 문제점’에 대해선 학진의 평가방식을 두고 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학진의 평가방식에 대한 좌담자들의 논의는 충실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역시 평가방식에 대한 논의만 있을 뿐, 여러 학문이 과연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생략되었다. 왜 그렇게들 대학은 대학대로, 학회는 학회대로, 또 교수는 교수대로 (학진의 평가방식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등재 학술지’ 혹은 ‘등재 후보지’에 목매는가? 왜 학진(혹은 그밖의 기관)으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안 받으면 안되는가? 이런 기본적인 논의는 생략된 채, 평가받는 것 자체를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그렇다면 그 평가방식을 어떻게 제대로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만 진행된 것이다. 대학에 있으면서 본 바로는, ‘평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가 좋은 평가를 받아서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 혹은 대학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이는 대학과 학문영역이 자본의 논리에 놀아나는 것이고, 또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서열화’ 구조에서 남들보다 앞서기 위함일 뿐이다. 이렇듯 학문평가에 대한 문제점은 단순히 학문영역에서 논의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좌담에선 이 점을 간과한 것 같다.

끝으로 ‘창비’의 기획의도와 실제 좌담에서 논의된 내용 간에는 괴리감이 있는 듯하다. ‘창비’가 지난호 좌담을 기획한 의도는, “한반도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짜는 문제를 학문의 외도가 아니라 고유과제로 생각”한다는 말 속에서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좌담에서의 논의는 “이른바 연구의 문제”에만 국한시킴으로써 사회와는 유리된 아카데믹한 상아탑의 모습만을 연출시켰다. 아울러 “이른바 연구의 문제”가 “한반도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짜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논의되고 있지 않을뿐더러, 논의가 대세는 거스를 수 없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창비’의 분발을 기원한다.

성균관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 이상동 lacademy@hanmail.net

 

마음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

송진권의 시편을 읽고 있으면 그가 불러들인 혼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허허 웃음을 지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절골」에서는 눈도 못 뜨게 함박눈이 퍼붓는 날, 눈이 무릎꺼정 차는 줄도 모르고 술이 얼근이 오른 기분으로 그와 함께 산속을 헤매게 된다. 시인이 옮겨놓은 무대 위로 혼들을 조용히 불러 앉히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 지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가진 힘이 아닐까. 송진권은 내면의 세계와 삶의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줄 안다. 아주 능청스런 충청도 사투리로 독자를 자신의 그림 속으로 유인하고 호랭이 거튼 눈을 부릅뜬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주고 또 의뭉스럽게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다. 뿐만 아니라 물 마른 봇도랑에서 일을 벌이는 그 와중에 전깃줄에 나리비로 앉은 제비년들의 입방정까지 포착해내는 「무수」에서는 치열한 삶의 섬세함과 유쾌함까지 드러난다.

그의 시는 삶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리듬을 타고 있으며 구수한 사투리는 익숙한 음악처럼 그 맛을 더해 이야기를 더욱 유쾌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처음에는 신인답지 않는 익숙한 손놀림과 구수한 입담에 놀랐다. 그러나 뒤의 시편을 읽어갈수록 너무도 익숙한 소재와 풍경에서 오는 언어는 자칫 식상함으로 연장될 만큼 시력(詩力)을 분산시켰다. 앞의 시편에서 너무 힘을 준 탓일까, 아니면 그 입담에 벌써 익숙해져버린 탓일까. 「돌담 너머」에 그려지는 이미지와 「배부른 봄밤」의 이미지는 낯익은데다 행간의 긴장감이 떨어지고 익숙한 시상의 전개로 혹여나 시인만이 볼 수 있는 것을 놓쳐버린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옛 소재를 끌어당겨 쓰는 데 있어서 백지 위에 흘러나오기도 전에 시인의 손끝에서 익숙해져버린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고향이라는 소재는 어느 누구에게도 가슴 짠한 추억이 있게 마련, 송진권만의 호흡과 눈빛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장점인 유쾌함과 강하고 섬세한 터치를 바탕으로 부디 뻔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시인, 날카로운 칼날 위에서도 신명나게 자신만의 댄스를 선보일 시인이 되길 기대한다.

정호승의 「산사로 가는 길」은 풍경소리를 따라 한걸음 한걸음 옮겨놓으면 욕심으로 가득 찼던 이글거리는 눈빛도, 꽉 쥔 주먹도 잠시 힘을 풀게 되고 물소리를 듣게 된다. 사람들은 삶의 과정 속에 많은 것을 얻어가면서도 수만가지 욕심과 욕망으로 내 손과 내 품에 다 넣을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산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세상을 밟고 부수었을까. 그러면서도 자신이 닳아가는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탐한다. 자연 속에서 눈부신 햇살과 바람과 나무의 향기를 얼마나 얻고 사는지 모른다. 피를 흘리면서도 주먹 가득 움켜쥔 욕심을 풀지 않고 뛰어가다 결국 소나무 뿌리에 걸려 나동그라진 시인 앞에 죽비소리처럼 청명한 산사의 울림이 있다. 스스로가 존재의 핵심을 잃고 움켜쥐고 있을 때 그것은 찬란할 수 없음을 산사의 종소리가 전해준다. 속세의 인간이여! 움켜쥔 모든 것을 놓고 자유롭게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라고 물속에서 풍경소리가 울린다. 물소리를 따라가다보면 빗소리가 들리는 유쾌한 시 한편을 만날 수 있다.

최하림의 「마음의 그림자」에는 욕심없이 주위를 돌아보며 삶을 살아온 자의 섬세한 관찰이 드러난다. 그는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줄 것 같은 시인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시인은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일년 사이에 변하지 않은 듯하나 변한 것, 늙지 않은 듯하나 늙은 것, 생이 안 지나간 듯하나 지나가버린 것, 가을날 오래된 램프 앞에 앉은 시인의 눈을 통해 시간의 흔적들이 조용히 그려진다. 이렇게 잔잔히 일렁이는 삶속에서 헛간에 물이 새고 울타리 싸리들이 더 붉어 보이는 것을 포착하는 시인의 눈이 예사롭지 않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은 듯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아주 사소한 주변의 것들로부터 그 존재와 세월의 흐름을 간파해내는 힘은 섬세한 삶을 살아온 시인에게서 전해오는 빛이라 할 수 있겠다.

부산시 진구 가야2동 136-17 장경하

 

사범대 문제에 대한 글을 읽고

우선 귀한 지면을 사범대 문제를 위해 할애해준 『창작과비평』과 좋은 글을 써주신 곽차섭 선생께 감사드린다. 그동안 입시제도와 다른 교육사안이 발표될 때마다 그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겁고 관심도 컸던 반면에, 사범대 문제, 혹은 교사의 양성 문제의 경우 정부의 정책발표 이후 여론에서 심도있게 논의되거나 사회적인 이슈가 된 적은 없다. 현장에서 배우는 아이들의 교육수준은 결국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고, 따라서 교사의 위치와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교사를 양성하는 과정에 대한 고민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범대에 관한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단기적인 처방에만 급급했던 교육당국의 처사는 결국 사범대의 존폐마저 걱정해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문제에서 사범대 역시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사범대측이 사범대의 존속을 전제로 제기했던 그동안의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사범대가 바뀌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곽차섭 선생의 의견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면서 몇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우선 교과교육전공 교수가 확충되어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이 교과교육전공 교수가 학교현장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많은 교과교육과정 교수가 현장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이 석사학위를 얻기 전 1~3년간의 경험이 고작이며 정작 교수가 되어서는 현장과의 교류가 전혀 없는 실정이다. 끊임없는 현장과의 교류가 없다면 몇년간의 현직 경험이 무슨 소용일까? 교과교육과정 교수를 하면서도 꾸준히 현장과의 끈을 이어갈 수 있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범대의 대안으로 제안한 4+2제의 경우에도 전반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입학 요건과 방식을 어떻게 하느냐는 다루어지지 않아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만약 성적이나 다른 시험의 방식으로 교육전문대학원생을 선발하게 될 경우 치열한 임용고사를 좀더 빠르게 치룬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으면서 결국 입학을 위해서 학생들은 다시 학원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학부과정에서의 일반 교양과목과 대학원에서의 심화과정에서의 연계를 어떤 방식으로 할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좀더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외에도 교원단체 및 전교조가 현직 교원에 대한 권리, 복지 향상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예비교사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총에는 예비교원국이 명목상으로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각종 연수나 프로그램을 기획해 예비교사와의 대화,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비단 교원단체의 노력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노력도 필요한 대목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범대 학생들은 임용시험을 통해서 교직에 진출하지만 그 문이 너무 좁아서 두 번 이상 임용시험을 치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그중에는 다섯 번 이상 응시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임용시험에서 ‘어떻게 하면 좋은 교사가 될까?’에 대한 고민은 학생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이제 더이상 사범대를 이렇게 방치할 순 없다. 정부와 교육주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여 좋은 교사를 양성할 수 있는 사범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려대 국어교육과 3학년 이광영 lms9714@hanmail.net

 

대학개혁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아쉬움

한 십년 전만 해도 전문대를 제외하고는 대학에서 일선 고교에 학교홍보를 나오는 일은 퍽 드물었다. 그런데 요즘은 각종 입시설명회다 캠퍼스 투어다 해서 각 대학들이 신입생 확보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격세지감의 일이다. 국감자료에 의하면 입학정원 대비 등록률이 80% 이하인 대학이 전체 대학의 1/4 수준에 달한다고 한다.

문제는 학생수가 급감하면서 학생이 수요자로서 중요하게 인식되며 교육의 객체에서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이전에 비해 자신들의 요구하는 권리나 주장이 많아졌다. 이에 발맞춰서 각 대학들도 수요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대학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쇄신하고 있는데, 교육부에서도 이 기회에 대학의 경쟁력과 질을 높일 수 있는 강도높은 프로그램을 각 대학당국에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대학의 개혁과 문제점은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대학입시설명회에 참석해 각 대학들이 자신의 학교를 소개하는 것을 들어보면 교육부 평가 우수대학이라는 점을 매우 강조한다. 대학을 외부에 소개하는 객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겠지만 정작 그 평가기준이라든가 평가의 적절성 등은 감춰져 있다. 대학평가에 홍덕률 교수가 지적했던 실적위주의 양적 평가의 문제점이 간과된 것이다.

오늘날 대학과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질적 평가의 도입이 절실히 요구되며, 평가요소 중 하나인 학제간 연구의 중요성에 대한 좌담 토론자들의 말에 공감하는 바가 크다. 얼마 전에 정수일 선생이 역주한 『왕오천축국전』이란 책을 227행에 달하는 원문을 해석과 일일이 대조하면서 읽은 적이 있는데,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정수일 선생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의 학제간 연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학제간 연구 활성화를 위해서는 임형택 선생이 말한 종합적인 성격의 학문수행을 위한 연구소 제도도 적절하다고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서경희 선생이 지적했듯이 우리 고전이나 서양의 참고서적을 훌륭하게 번역하는 일이다. 훌륭한 번역서는 연구논문을 쓰는 것 못지않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번역을 학자들의 중요한 연구실적으로 인정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대학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선하려는 노력들이 이번 토론으로서 끝나버릴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 속에 실천을 담아낼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이, 학생, 학부모 등 교육공동체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가 있어야 한다.

아울러 창비측에도 바란다면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학제간 연구를 도울 수 있도록 계간지에 관련 필자의 참여를 더욱 개방시켜달라는 것이다. 작가나 교수 중심의 기존 필자보다는 여러 시민단체 종사자나 재야 학자들에게 문호를 더 개방함으로써 종합문예지를 넘어 명실공히 학문 발전을 위한 토론의 장이 될 수 있는 ‘창비’가 되었으면 한다.

이정훈 arbre@intizen.com

 

한일FTA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는 글

자동차 조립공장 현장노동자로 근무하는 사람으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일FTA에 대해 관심은 있었으나 왜 반대를 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송주명 교수의 글을 보고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단순히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경제와 민중의 삶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송교수는 여러 자료를 통해 제시했다고 본다. 또한 우리 정부의 협상태도나 협상내용의 비공개 등 여러 문제점을 적절히 지적하여 향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태용 caos6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