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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마종기 馬鍾基
1939년 일본 토오꾜오 출생. 195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조용한 개선』 『그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냄새가 난다』 등이 있음.
가을, 아득한
야 정말, 잎 다 날린 연한 가지들
주인 없는 감나무에 등불 만 개 밝히고
대낮부터 취해서 빈 하늘로 피어오르는
화가 마띠스의 감빛 누드, 선정의 살결이
그 옆에서 얼뜬 미소로 진언을 외우는
관촉사 은진미륵, 많이 늙으신 형님.
야 정말, 잠시 은근히 만져보기도 전에
다리 힘 다 빠져 곱게 눕는 작은 꽃,
꽃잎과 씨도 못 가린 채 날아가버리지만
죽은 풀, 시든 꽃가지, 잡초 씨까지 모두 모아
뜨거운 다비(茶毘)에 부쳐 사리나 찾아보고
연기냄새 가볍게 껴안고 꽃을 떠날밖에.
저 산에 흥청이는 짙은 단풍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일상은 너무 흐리다.
산 너머 저 쪽빛 바다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쪽배는 너무나 작다.
그러니 살아온 평생은 운명일밖에,
눈을 뜬 육신의 마주침도 팔자일밖에.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가늠되지 않는
야 정말, 아득한 것만 살아남는 이 가을,
어렵게 살아온 천지간의 이 가을.
잡담 길들이기 7
월드컵 4강 진출은 참 거창했었지. 미국에서도 오대호 근처의 작은 도시에 살아서, 혼자 새벽 두시나 네시에 일어나 대한민국을 외치며 흥분했었던 한판의 역사. 월드컵 다 끝난 날, 오래 같은 촌에 모여사는 한국 친구들 몇 축하주를 나눌 때, 자동차공장 노동자로 30년째 일하는 대졸 미스터 김의 눈, 술잔 부딪치며 언뜻 보인 붉은 눈시울의 눈물은 무슨 뜻이었을까. 기쁨이었겠지, 슬픔이었을까, 충만감이었을까 아니면 외로움의 한이었을까.
너무 아름답고 빛나서
보이지 않는 詩,
의미가 없어진 詩,
너무 순하고 깨끗해서
이해할 수 없는 詩,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詩,
혈혈단신의 몸이 다시 되어
그 詩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
그 詩의 눈물에 빠져
익사하고 싶다.
파도의 말
뻘밭 넓은 서해안에서도
남해안에서도, 또 동해안에서도
파도들은 너나없이 모국어만 하대.
처음 만난 파도는 두 손 내밀면서
반갑다, 반갑다며 몰려오더니
한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잘가라, 잘가라 중얼거리며
나를 자꾸 멀리 밀어버리대.
모두 함께 모였던 한낮의 춤은
언제 어느 세월로 돌아갔을까.
기진한 몸 일으켜 찾아온 경계
어두운 밤 파도만 의심하듯
여기 있다고 저기 있다고
박자도 안 맞추고 나를 놀리대.
서해안에서도, 남해안에서도
또 목소리 큰 동해안에서도
젊었던 내가 흘려보낸 바람들
아직 바다에 떠서 몸 뒤척이고
그 시절의 부드러운 젖가슴 닫은 채
떨리는 무늬 고운 한숨만으로
한줄씩 긴 수평선 되어
말없이 나를 꾸짖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