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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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李晟馥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1977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남해금산』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등이 있음. ysb@kmu.ac.kr

 

 

 

안식년 1

 

 

내 발이 내 손톱이 내 머리칼이

내 그림자가 꼴보기 싫을 때가 있다.

–빠블로 네루다 「산책」

 

 

동네 할매들과 아침 테니스 한판 붙으려고, 이천동 뒷산 시멘트 계단을 사뿐히 오른다. 헤드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야지, 무의식적으로 불끈 쥔 주먹 천천히 휘두르며, 이(李)생(生)우(雨), 정(鄭)사(士)현(顯), 최(崔)명(命)돌(乭), 이런 상징적인 문패들을 해독하다가, 아직 불 켜진 가로등 아래 기어코 나는 찾아낸다, ‘깊은 밤 깊은 그곳에 1 대 1로 하자’는 전화데이트 광고. 내 마음 일편단심, 난 철갑을 두른 중세 기사가 아니지만, 내게는 오직 한분, 내 가난한 테니스를 번번이 좌절시키는 일흔일곱살 회장 할머니가 있다.

 

 

 

안식년 2

 

 

허나 사랑이란 피곤해지면 잠자야 하는 것

또 굶주리면 먹어야 하는 것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죽은 이도 거의 소생시킬 수 있는 것」

 

 

내가 담장 너머로 ‘복분식 아줌마, 잔치국수 하나 해주세요’ 그러면 ‘삼십분 있다가 와요’ 하기도 하고 ‘오늘 바빠서 안돼요’ 하기도 하고, 그러면 나는 할매집 도시락을 시켜 먹거나,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 불교회관 옆 밀밭식당에 아구탕 먹으러 간다. 내 식욕과 복분식 아줌마의 일손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재빨리 내 식욕을 바꾸는 것이다. 아니 식욕을 바꾼다기보다, 벌써 다른 식욕이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알았던 여자들도 대개는 그렇게 왔다. 하루 이틀 지나면 그때는, 무얼 먹고 싶었는지 생각도 안 나는 세월에서.

 

 

 

달밤

 

 

달에는 물로 된 돌이 있는가?

금으로 된 물이 있는가?

–빠블로 네루다 「유성(遊星)」

 

 

불 끄고 자리에 누우면 달은 머리맡에 있다. 깊은 밤 하늘 호수에는 물이 없고, 엎드려 자다가 고개 든 아이처럼 달의 이마엔 물결무늬 자국. 노를 저을 수 없는 달은 水深 없는 호수를 미끄러져 가고, 불러세울 수 없는 달의 배를 탈 것도 아닌데 나는 잠들기가 무섭다.

유난히 달 밝은 밤이면 내 딸은 나를 달복이라고 한다. 내 이름이 성복이니까, 별 성(星)자 별복이라고 고쳐부르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애보고 메뚜기라 한다. 기름한 얼굴에 뿔테안경을 걸치면, 영락없이 아파트 12층에 날아든 눈 큰 메뚜기다. 그러면 호호부인은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다. 벼랑의 붉은 꽃 꺾어달라던 水路夫人보다 내 아내 못할 것도 없지만, 내게는 고삐 놓아줄 암소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오를 수 없는 벼랑의 붉은 꽃처럼, 絶海孤島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 絶海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