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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구효서 具孝書
1957년 강화 출생.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도라지꽃 누님』, 장편 『늪을 건너는 법』 등이 있음. avocado105@hanmail.net
소금가마니
『恐怖と戰慄』, キルケゴ-ル 著, 飯島宗享 譯, 白水社.
어머니가 읽던 책이라고 했다. 정말 어머니가 읽던 책이 맞느냐고 나는 외종형에게 되묻지 못했다. 외종형의 책장에서 그 책을 찾아냈을 때 그는 이미 사흘 전에 고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유품인 셈이었다. 사흘만 일찍 찾아냈더라면 외종형에게 물을 수 있었을까. 정말 어머니의 책이었느냐고.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외종형으로부터 직접 전해받았다 하더라도, 그 책을 처음 그의 책장에서 발견했을 때처럼, 나는 말을 잃은 채 표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어떤 대답을 들었더라도 그 책을 들고 있던 내 복잡한 소회가 석연해질 수는 없었으리라. 무학인 어머니가 키에르케고르를, 그것도 일서로 읽었다니.
세상을 떠나기 직전 외종형은 어머니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내게 들려주었지만 어머니가 키에르케고르를 읽은 까닭에 대해서까진 말하지 않았다.
그 책 말고도 어머니의 책은 몇권 더 있었다. 『금산사 몽유록』과 『강명화의 애사』, 그리고 『김인향전』 『동정추월』 『금옥연』…… 그런 것들이라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소설이었고, 한글이었으니까. 다닐 학교도 없었고, 그래서 글을 배운 적도 없지만 어머니는 글을 읽고 쓰는 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2,30년대에 익힌 글이라 맞춤법과 띄어쓰기엔 미숙했다. 추풍령 부대에 근무하던 나에게 어머니는, 인호야 바다 보아라,라는 식으로 편지를 썼다. 소대장이 그 편지를 보고, 충청북도 영동에 무슨 바다가 있다는 거지?라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의 철자에 익숙해서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예상 밖이었다. 『공포와 전율』이라면 나도 스물두어 살에 읽은 기억이 있다. 아직도 내 책장 한 귀퉁이에 꽂혀 있지만 읽을 당시 그걸 이해했다는 기억은 없다.
어째서 키에르케고르였을까. 어머니는 과연 키에르케고르를 얼마나 이해했을까. 군데군데 밑줄쳐진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밑줄은 연필로 그어져 있었다. 가끔 짧은 메모도 보였다. 분명 어머니의 필체였다. 하지만 나에겐 일본어 해독능력이 없다. 내 오래된 번역본과 대조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어머니가 밑줄을 그어놓은 부분과 내가 밑줄 그어놓은 부분이 심심찮게 일치했다.
어떤 자는 힘에 의해서 위대했으며, 어떤 자는 지혜로 말미암아 위대했고, 어떤 자는 희망으로 인해 위대했으며, 사랑을 통하여 위대했다. 그러나 ‘그’는 무력(無力)이라고 하는 힘에 의해 더욱 위대했고, 어리석음이라는 지혜로 더욱 위대했으며, 미친 희망과, 자기를 증오하는 방식의 사랑을 통해 더욱 위대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어머니가 45세에 낳은 막내둥이였다. 신기하게도 나 또한 어머니 나이 45세에 태어난 막내였다. 어머니가 키에르케고르에 친화감을 느낄 대목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자녀가 모두 6남매였다는 것, 그리고 그중 몇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냈다는 점도 비슷했다. 아버지의 반대로 딸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도 같았고, 나처럼 키에르케고르도 허릿병을 앓았다는 것까지 같았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읽은 거라면, 적어도 나와 관련된 유사점은 어머니가 그 책을 읽은 동기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밖의 다른 유사점들만으로도 어머니가 키에르케고르에 관심을 갖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당시 대중소설들 속에 끼여 있던 키에르케고르의 저작물이 내겐 여전히 낯설고 의아했다.
결국 내 석연찮은 의구심은, 그 책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 있는 이름 석자를 발견함으로써 어느정도 해소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고, 다른 차원의 의혹으로 발전했다. 실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은 아니었다. 덮어둔 채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실제로 잊고 살아왔던, 오래된 의혹이었다.
‘冊主 朴成顯.’ 그 이름은 출판년도와 발행인 따위가 인쇄된 판권란 여백에 적혀 있었다. 세련된 펜글씨였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잉크의 푸른빛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글씨. 은은히 배어나는 푸른빛은, 무언가를 애써 외면하려는 내 의중을 지그시 끌어당겼다.
당초부터 어머니의 책은 아니었던 것이다. 책주가 어머니에게 빌려주었거나 아주 줘버려 결국 어머니 것이 되었다 할지라도, 당초부터 어머니의 책이었던 것과는 사정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책주 사이의 실질적 관계가 증빙되는 순간이었다. 풍문으로만 듣던. 나는 풍문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무학자가 대중소설을 탐독하고, 카따까나와 히라가나를 익히고, 종당엔 키에르케고르마저 읽게 된 데는, 마을의 유일한 기독인이며 일본유학파였던, 풍문의 아버지 박성현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느꼈던 것보다, 어머니의 지적 수준은 훨씬 높았을 것이다. 거기엔 책주의 지속적인, 세심한 배려와 은밀한 지도가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교양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곧 책주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는 것과도 같았다. 내겐 낯설고 의아했던 『공포와 전율』이 정작 두 사람에겐 낯설 것도 의아할 것도 없었는지 모른다.
글을 읽고 해득하는 어머니의 솜씨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나는 어려서부터 드물게나마 경험하긴 했다. 비록 『토정비결』―난 이 오래된 책을 아직 갖고 있다―이긴 했지만 그나마도 그걸 읽고 의미를 풀어낼 수 있는 부녀자는 마을에서 어머니가 유일했다. 육십갑자를 생년월일의 기수(基數)로 계산하여 괘상(卦象)을 찾아내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을뿐더러, 비유와 상징으로 얽힌 묘문(妙文)들을 막힘없이 읽어내려간다는 건 어지간한 독서편력이 아니고는 가능치 않은 일이었다.
정초마다 마을 아낙들은 우리집으로 몰려들었다. 토정비결 보는 일을 그들은 일년 신수를 본다고 했다. 한꺼번에 우리집으로 몰려들었던 까닭은, 마을에 한권밖에 없는 『토정비결』이 우리집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걸 읽어줄 사람이 어머니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바깥양반이 없다는 것도 아낙들을 우리집으로 쉽게 모여들게 한 이유였다.
쑥잎이며 나팔꽃잎으로 문양을 낸 창호지문에 겨울 햇살이 들이비치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책을 펼치고 돋보기를 걸쳤다.
기택이네 엄니는 기묘년 팔월생이라고 했던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든 적은 사람에게든 토정비결을 볼 때만큼은 어머니의 말투가 슬그머니 달라졌다. 반말이었다.
아, 네, 저기…… 팔월 스무아흐레……예요.
반면 나이가 적은 사람이든 많은 사람이든 토정비결을 보는 동안엔 어머니에게 말을 높였다. 명운 감별자와 의뢰인 사이에는 이처럼 권위에 대한 은밀한 촉탁과 암묵적 수락의 전단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삼월을보아하니낙시대를강호에던져서금린을낙것도다. 떼를타고바다를건느니구름이허터지고날이밝도다……
그해 한달 한달의 운세를 차례로 읽어내려가기 시작하면 의뢰인은 긴장하게 마련이었다. 황국과단풍이목단보다낫도다(黃菊丹楓勝於牧丹)라거나, 바람이갈대를치니기러기떼가허터지도다(風打蘆荻雁陣失散) 따위의 말은 아무리 들어도 도무지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다는 말인지 나쁘다는 말인지, 한해의 운세를 몽땅 비결에 걸고 있자니 애가 탈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그러나 쉽게 그 뜻을 누설하지 않았다.
의뢰자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고개는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둔다면 숨이라도 넘어갈 지경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볼은 굳고 누당(淚當)은 늘어졌다.
정초의 겨울 방안은 궁금증과, 무학의 참담함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한마디 귀띔이라도 해주지 않는다면 아낙들은 앉은 채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방안이 터져나갈 듯한 긴장으로 가득 차면 어머니는 그제서야, 좋군, 하고 살짝 입을 열었다. 너무 주눅이 든 나머지 의뢰자는 그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가까운 데 앉아 있던 누군가가 어머니의 말을 받아, 좋대,하며 의뢰자의 옆구리를 찌른 다음에야 기사회생, 마침내 크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딱딱하게 굳었던 방안 공기가 일시에 풀어지며 아낙들의 낯은 창호지에 비쳐드는 햇살처럼 해실거렸다.
『토정비결』에 적힌 구체적인 내용들과는 상관없이, 다만 어머니의, 좋군,이라는 말 한마디가 의뢰자의 꺼져가는 숨통을 틔웠다. 좋군, 혹은, 안 좋아……라는 말 한마디로 아낙들의 생사를 희롱하던 어머니의 무한무상했던 권위. 그 범상치 않았던 모습 한켠에도 진작 키에르케고르의 책주 박성현의 존재가 잠닉해 있었던 것이다.
이 무한의 체념은, 옛날의 설화에 나오는 그 속옷과 같은 것이다. 실〔絲〕은 눈물로 짜여지고, 눈물로 바래지며, 샤쓰는 눈물로 꿰매진다. 그러나 그러기에 또한 이 샤쓰는 철이나 강철보다도 더 몸을 잘 보호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모습 뒤에 잠닉해 있던 박성현의 존재. 그것이 아버지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일까. 유복자인 나는 생전의 어머니, 그리고 누님들과 최근의 외종형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를 느낄 뿐이었다.
아버지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내겐 아버지보다 언제나 어머니가 더 이상해지곤 했다. 어쩌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도 안되게 당하고 살았으면서도 단 한번 아버지에게 대들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실체조차 짚이지 않는 당신의 가문을 내세우며 어머니를 폭력으로 학대했다. 어머니를 때릴 때마다 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호군을 무찌르다 옥쇄(玉碎)해 병조참판으로 추서됐다는, 뜬소문과도 같은 장군조상을 내세웠다. 장군이든 조상이든, 어머니에겐 사람을 괴롭히는 두억시니거나 망령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맞은 어머니의 얼굴은 매번 구시월 호박처럼 부풀어올랐다. 마을 만신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그 댁 주인냥반의 눈구녁에는 여편네가 호로군사로 뵈는갑네,라며 혀를 찼다.
딸을 해산한 지 사흘도 안된 어머니의 허리춤을 끌어다 마당에 내다꽂으면서, 일손도 부족한데 천하태평으로 구들장이나 지고 있다며 아버지는 욕설을 퍼부었다. 어떻게 생겨난 딸자식이었던가. 찬바람 부는 동짓달 수수밭에서 술취한 아버지는 어머니의 몸을 타고 앉아 목을 조르고 있었다. 숨이 막힌 어머니의 낯이 청동빛으로 변해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수숫대의 붉은 자국들은 어머니의 몸이 뿜어낸 혈흔 같았다. 터질 듯한 분노로 아버지는 어머니를 겁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갓 스무살 된 내 앞에서 내 두살 위 누나의 탄생내력을 말하던 큰누님의 표정엔 넋이 없었다. 여러 자식들의 탄생이 하나같이 증오와 원망과 분노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 못하는 내가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느닷없이 엉덩이를 걷어차여 어머니는 두부가 끓고 있던 가마솥으로 여러 차례 곤두박질쳤고, 밤새워 만든 두부모판에 얼굴을 처박히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두부 판 돈을 빼앗아 마을의 마지막 들병이였던 여자에게 몽땅 갖다바쳤다. 내놓고, 보란 듯이 오입을 하는 상대였다. 들병이가 빨래터의 어머니에게 다가와 여러 사람 듣는 앞에서 형님이라 부르며 능멸을 주어도 어머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병조참판의 자손은 다 자기 여편네 때리고 들병이 밑구녁이나 채워주는가보다고 다른 아낙들이 혀를 내둘렀지만 어머닌 묵묵히 빨래를 했다. 그 초연함이 아버지에겐 또 참을 수 없는 구타의 빌미가 되곤 했다.
아버지는 장가를 가려 했으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던 산 너머 처가의 소작일을 일년간 해주고 어머니와 혼인을 했다. 일하러 처가를 오갈 때 박성현의 존재를 알았다. 일본에까지 가서 공부를 하고 온, 잘생긴 면내 최고 부농의 자제. 어머니를 내심 사모하고 있었으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있었다. 그뿐이었다. 어머니는 박씨네 쪽으로는 고개조차 함부로 돌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혼인 뒤에야 어머니가 한글을 읽고 쓰며 일본어까지 잘 익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의 성적 학대와 방탕은 자식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엄한 박씨네로 향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나약한 분노는 어머니에 대한 비겁한 폭력으로 나타났다.
아버지의 분노가 어째서 그토록 길고도 한결같을 수 있었을까를 떠올리면, 몹시 뒤틀려 있기는 해도 어머니에 대한 체념할 수 없는 애정 때문은 혹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머니나 누님들이나 외종형의 거친 기억에선 좀처럼 감지해낼 수 없는.
하여간 석연치 않기는 해도, 아버지의 별난 성격을 감안한다면 폭력의 원인을 전혀 짐작 못할 바는 아니었다. 전혀 짐작조차 못할 것은 오히려, 그런 아버지와 함께 살며 그런 아버지에 무능하게 대처해온 어머니의 방식과 태도의 이면이었다.
방문을 걸어잠근 채 몇시간에 걸쳐 계속되는 구타는 문밖의 자식들을 숨막히게 했다. 아버지의 고함과 욕설은 집을 무너뜨릴 것 같았다. 주먹과 발길질이 어머니의 몸에 퍽퍽 소리를 내며 꽂힐 때마다 어린 자식들은 기함을 했다. 이상했던 것은 그토록 얻어맞으면서도 어머니의 비명이나 울음은 단 한차례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침내 방문이 열리고 밖으로 내던져지는 어머니의 몰골은 언제나, 탈곡기에 휘말려들어갔다 나온 짚단처럼 처참했다. 구시월의 늙은 호박처럼 붉게 부푼 얼굴로 어머니가 황급히 찾았던 것은 문밖의 어린 자식들.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두 팔을 아주 넓게넓게 벌려 아이들을 당신의 품안으로 불러들였다. 어머니에게선 흐느낌도 신음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자식들이 얼마 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고르게 뛰는 어머니의 심장박동 소리와, 정수리에 떨어지는 밤알만한 뜨거운 눈물이었다.
어머니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푸념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많은 콩을 불리고 하염없이 맷돌을 갈았다. 가마솥 아궁이에 종일 불을 지폈다. 다 되면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뜻한 두부 한모를 가장 먼저 아버지에게 대령했다. 아버지는 막걸리와 함께 두부 한모를 다 먹으면 오줌을 누러 갔다. 나이를 먹게 되면 그렇게 사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큰누님은 끝내 그런 어머니를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살았으니 어머니의 속은 썩을 대로 썩었겠으나, 여전히 알 수 없었던 것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큰 병치레 한번 없었으며, 아흔일곱수를 살았다는 점이다. 운명할 때의 낯빛도 밝고 온화했다. 평생 고생이라곤 모르고 산 황후의 임종이 그랬을까.
어떤 사람은 가능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했다. 또다른 사람은 영원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했다. 그러나 가장 위대했던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체념어린 표정과 평온한 얼굴로 일관했던 건 아니다. 둘째누이가 대추나무에서 떨어져 죽어갈 때 어머니는 미쳤다.
계집아이가 겁도 없이 대추나무에 올랐다. 새집의 알을 꺼내려 올랐다가 비에 젖은 가지에 미끄러져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떨어지자마자 아이는 사지를 뻗었고 숨이 오락가락했다.
때까치가 대추나무 가지 위에다 검불을 물어다 쌓을 때부터 아이의 눈은 빛나기 시작했다. 대파 속에다가 새알을 까넣고 불에 구우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 난다는 이웃집 사내아이의 설레발 때문이었다. 익은 대파를 칼로 송송 써는 시늉이 먹음직스러워서라기보다는, 불에 익은 고기에 환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두 마리의 암탉이 낳는 계란은 어머니에 의해 철저히 관리됐고, 단 한개의 예외도 없이 짚꾸러미에 엮여 오일장에 내다팔렸다. 어쩌다 닭이 산란을 건너뛰기라도 하면 온 식구들은 혹독한 절도의 혐의를 받았다. 명절에도 고기란 것은 인정머리없고 야박한 아버지의 밥상에서 절단나버렸다. 아이들에게 돌아올 몫은 없었고, 고기란 그저 냄새로나 호강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런 아이들에겐 공중을 나는 임자 없는 때까치가 갈겨놓은 새알 정도라야 만만히 여길 수 있었다.
어머니가 대추나무 밑에 당도했을 때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미리 도착해 있던 마을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맏아들을 병으로 잃은 뒤였고, 두살 아래 딸아이까지 우물 두레박에 빨려들어가 죽어버렸던 터여서 아이의 죽음은 불운의 연속쯤으로 여겨질 만했다.
어머니는 아이를 들쳐업었다. 이미 글렀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핏발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분노와 증오의 찌꺼기로 태어난 아이라서 하나쯤 더 죽어 없어지는 걸 대수롭잖게 여기는 거냐고 소리를 질렀다. 이미 늦었다고, 쓸데없는 짓이라며 말리는 아버지를 떠다밀었다. 어찌나 세게 밀었던지 덩치 큰 아버지는 밭이랑을 열 개나 넘어 나자빠졌다.
걸핏하면 밑동에 떼뱀이나 꼬이는 대추나무를 잘라버리자고 했건만, 아버지는 그 잘난 조상 제사에 필요하다며 고집을 피웠다. 대추 몇알 얻으려다 자식을 죽인 꼴이었다. 도끼로 찍어내든지 불을 확 싸질러버리겠다고 외치는 어머니의 입에 허연 거품이 일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마을사람들도 모두 가망없다고 했다. 날도 저물었고, 읍내 병원까지는 너무 멀었다. 삼십리 길을 뛰어가다 어미마저 죽느니, 닭 한마리 잡고 계란이나 푸지게 삶아 진혼굿을 해주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향해 쌍욕을 내뱉었다. 입에서 거품이 튀었다. 아이를 들쳐업고 추적추적 비 내리는 어둠속을 쏜살같이 내닫는 어머니의 모습엔 귀기마저 서렸다.
가망이 없다고 한 것은 아이의 상태에 비해 길이 너무 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작은 장마 끝에 물이 불어난 용내천 때문이었다. 징검다리가 잠긴 지도 이미 오래었고, 사나운 물길은 황소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했다. 십리도 못 가 발이 묶일 거라는 걸 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은 다 알았다. 미친 어머니만 모르고 있었다.
날이 새도록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용내천에 빠져죽은 거라고 믿었다. 마을의 몇몇 사람들과 아버지는 어머니와 아이를 찾아 이른 새벽길을 나섰다. 한밤중에 용내천 가에서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이 있었다. 바람소리에 묻어오는 그 소리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고, 이태 전 용내천에 빠져죽은 이의 혼령인 것 같다고 했다.
그날 마을사람들과 아버지는, 용내천을 가로질러 쓰러져 있는 커다란 용수버드나무를 발견했다. 금방 잘린 듯한 나무 밑동 곁에는, 손잡이에 핏물이 밴 낡은 톱 한자루가 버려져 있었다.
그날을 회상할 때마다 어머니는 깊이 파인 손바닥의 상처를 들여다보곤 했다. 용수버드나무를 타넘어 용내천을 건넌 어머니는 밤길을 내달렸다. 질척이는 시골길을 정신없이 달리던 어머니는 어둠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엄니…… 업힌 아이의 신음 섞인, 겁먹은 울음이었다. 미친 듯 겅둥거리던 어머니의 몸이 아이의 여린 횡격막을 자극했던 것이다. 아이는 꿀럭꿀럭 기침을 토하며 소생했다. 어머니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진창에 주저앉아 이년아, 이년아, 하고 울었다.
자, 이제 죽더라도 실컷 먹고나 죽어라. 닭이 알을 낳는 족족, 어머니는 퇴원한 아이에게 삶아 먹였다. 너무 많이 먹어서, 삶은 계란은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되었다. 지금도 닭똥냄새가 난다고 누님은 계란을 먹지 않는다.
집어삼킬 듯한 광기와 무모한 기대가 죽은 아이를 살렸다. 그렇게 어머니는 때로 사납고 무섭고, 아버지 따위는 상대도 안될 만큼 모질었다.
그런가 하면 말 한마디 없이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고 상대를 제압해 야코를 죽여놓는 솜씨도 있었다.
나를 박성현의 자식이라며 뒷구멍에서 시시덕거렸던 순덕어멈은 백주대낮에 어머니에 의해 납치되었다. 들판 한가운데 상엿집으로 순덕어멈을 끌고 들어간 어머니는 담배 한대참 만에 손을 툭툭 털고 나왔다. 잠깐 소피라도 보고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날 순덕어멈은 귀신에 홀려 혼쭐을 뺀 사람처럼 다리에 힘을 잃고 집까지 기어왔다. 그곳 상엿집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머니도 순덕어멈도 죽을 때까지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이후로 순덕어멈은 어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살아 있는 오방신장이라도 보는 듯 오줌을 지렸다. 그리고 마을 여자들은 아버지의 사망 싯점과 내가 태어난 날짜를 계산하며 히죽거리던 짓을 멈추었다.
‘그’는 침묵을 지킨다. ‘그’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여기에 고난과 불안이 있다. 즉, 내가 말을 하면서도 내 의사를 타인에게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밤낮으로 내가 계속 지껄인다 하여도, 그것은 내가 말을 하고 있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집에는 세 개의 소금가마니가 있었다. 언제나 세 가마니였다. 부엌 뒤쪽 어두운 헛간에, 그것은 반걸음의 간격을 두고, 신방돌 모양의 단 위에 나란히 모셔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뱃구레가 꺼지는 그것은, 높이로 보나 좌대 위에 놓여 있는 모습으로 보나 영락없는 삼존불이었다. 그래서 모셔져 있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있던 것이었다. 때로 새로운 소금가마니로 바뀌긴 했지만 내 눈엔 그것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각각의 소금가마니 밑에는 흰 사기보시기가 놓여 있었다. 사기보시기 안으로 누런 간수가 뚝뚝 떨어져내렸다.
헛간은 늘 어두웠다. 장독대 밑을 흐르는 수맥이 헛간을 관통하고 있어서 습기로 가득했다. 장마철이 아니어도 소금가마니는 잘 녹아내렸다. 눈물처럼 간수를 흘렸다.
쌀가마니와는 달리 소금가마니는 묵은 짚으로 성글게 짠 것이었다. 간수는 어둠과 습기를 한껏 빨아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거였다. 간수는 누구나 좋아하는 맛있는 두부를 만들어냈다. 특히 어머니가 만든 두부는 근동에 유명했다. 가족을 먹여살린 것은 어머니의 두부였다.
서늘한 어둠과 츱츱한 습기, 그리고 적막. 어쩌다 헛간에 들어가면 그 수꿀한 기운이 목덜미를 기분 나쁘게 핥았다. 한동안 어둠과 습기에 꼼짝없이 붙잡혀 오스스 떨다 온힘을 다하여 냅다 뛰쳐나왔다. 짜고 쓰디쓴 간수는 그런 헛간에서 나오는 거였다. 그런 간수가 매번 따뜻하고 고소하고 말랑거리며 하얗고 맛있는 두부를 만든다는 사실이 내겐 신기했고 요상했다.
염천에도 소름이 돋는 헛간. 찌는 더위를 피해 들어갈 법도 했지만 식구들은 좀처럼 그곳을 드나들지 않았다. 어머니만의 피서장소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헛간에서 걸어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둠과 습기와 적막을 한껏 머금은 소금가마니였다. 아버지에게 맞아 온몸에 멍이 들었을 때도 어머니는 그곳 헛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면 아닌게아니라 어머니의 몸은 치유되는 것 같았다.
인민의 군대가 내려왔다.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했다. 집에는 이미 만들어놓은 두부가 있었고, 콩이 쌓여 있었다. 어머니는 밤새워 그 많은 콩을 전부 두부로 만들었다. 때아닌 잔치가 벌어졌다. 아버지는 이미 몸을 피한 뒤였다. 어머니는 부역자가 되었다. 어머니뿐만 아니었다. 당시 배를 부리던 어머니의 남동생, 외숙도 부역자가 되었다. 인민군의 보급물자를 용내천 건너편까지 실어다준 것이었다.
국군이 밀고 올라왔을 때, 외숙은 자신의 홀어머니와 두살 난 아들―어머니의 책을 내게 전해준 외종형―과 아내를 남겨둔 채 도망을 쳐버렸다. 배와 살림이 압수되었고 집은 파괴되었다. 우익청년단에 의해 외숙모는 마을 복숭아밭에서 조선낫으로 처형당했다.
어머니도 복숭아나무에 묶였다. 외숙모는 피를 토하면서도 인민군이 총부리를 들이대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며 외숙의 부역을 발명했지만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옷이 찢기고, 맨살이 터져나가도록 복숭아나무가지로 얻어맞으면서도 어머니는 침묵했다.
인민위원회의 징발을 피하여 몸을 숨겼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고모네 변소간 토굴에서 나온 뒤로 우익청년단 행동대의 일원이 되었다. 작대기 하나를 들고 건성으로 행동대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는 식이었지만, 그나마 어머니가 복숭아밭으로 끌려갈 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해 사전에 열외가 된 거였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복숭아나무 사이로 바라보고 있던 이는 박성현이었다.
박성현은 아버지와 같은 건성 행동대원은 아니었다. 면내 최고 부농의 아들인데다 인민위원회 치하에서 위협을 느낀 기독인이었던만큼, 그의 행동동기는 아버지 같은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위원회에 의해 모조리 접수당했던 재산이 이미 그의 집안으로 되돌려지긴 했지만, 혹독하게 신앙을 위협받았던 그로서는 결코 건성으로 난시(亂時)를 보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모하는 여인을 가해해야만 하는 역설의 상황이 그의 앞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역설이 오히려 어머니에게만큼은 행운이었다. 그에게 부여된 얼마간의 권한이 어머니를 살렸다. 청년단도 배가 고프기는 마찬가지란 걸 박성현은 잘 알았다. 인민의 군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어머니에게 두부를 만들어내라고 했다. 콩이 없다면 자신의 집 광에 있는 것을 가져다 써도 좋다고 했다. 복숭아밭에서 풀려난 어머니는 또 밤낮없이 두부를 끓였다. 안방과 건넌방은 부상당한 정규군들의 임시 대피소였다. 군인들은 어머니가 만든 두부로 연명하며 후송을 기다렸다.
사지에서 살아난 어머니에겐 소금가마니가 은인인 셈이었다. 두부가, 박성현이, 분명 은인이었다. 그 일로 인해 어머니는 박성현의 여전한 속내를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사람들과 아버지의 석연찮던 짐작들이 확연해지는 계기이기도 했다. 희생자 유족들은 부역자 중에 죽지 않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머니를 화냥년 보듯 했다.
어머니는 두부만 만들었다. 복숭아나무에 묶여서도 아무 말 없었듯, 마을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부쩍 심해진 아버지의 폭력을 묵언과 무기력으로 받아냈다. 목숨을 살려준 박성현에게도, 사례의 말은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피바람의 소용돌이가 마을을 한바탕 휘젓고 지나갔으나, 난리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는 난리 뒤에도 두부만 만들었다. 나무 함지에 콩을 불리고, 밤새워 맷돌을 돌리고, 간수를 부어 가마솥에 끓였다. 삼발이 위에 널판을 얹고, 숨두부 가득 든 마대자루를 눕혔다. 겉모양을 내기 위해 스무 개의 연꽃무늬 와당을 마대자루 위에 나란히 엎고, 다른 널판을 덮은 뒤 맷돌로 눌렀다. 어머니는 잠자고 일어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두부를 만드는 게 일이었다. 숨쉬는 일처럼 묵묵히.
박성현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국청년단의 단장이 되었다. 국가가 아니면 자신의 신앙이 보호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그는, 앞장서 대한민국에 충성하는 국민이 되었다. 어머니의 남동생은 행방불명되었고 올케는 처참하게 처형당했다. 친정어머니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어머니의 어린 조카는 고아나 다름없게 되었다. 재산은 일찌감치 몰수당했다. 그렇게 친정은 분해되고 말았다. 그런 어머니의 수중에 박성현의 책자가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봉제사(奉祭祀)가 기꺼웠던 것은 분명 아니겠으나 그렇다고 어머니가 기독인 쪽에 관심을 보였던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어머니에겐 터럭만한 의심에도 주먹질과 발길질을 함부로 해대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이름자마저 선명한 박성현의 책이라니. 어째서, 어떻게? 그리고 어머니는 언제 읽을 수 있었단 말인가……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침묵하는 것이다.
자기의 소원을 포기한다는 것은 위대한 행위이다. 그러나 자기의 소원을 버린 다음에도 그 소원을 간직한다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 한시적인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포착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한시적인 것을 버리고 난 후에도 계속 이것을 간직한다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
외할머니는 무너진 집 위에 갈짚 움막을 짓고 어린 손자와 살았다. 외숙모는 일흔세 명의 다른 부역자들의 시신과 함께 땅구덩이에 묻혔다. 외숙이 돌아올 가망은 없어 보였다. 땅 한뼘 없어 푸성귀조차 심을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비빈 돌피와 쇠뜨기로 풀죽을 쑤었다. 겨울엔 그나마도 없었다. 여름 가뭄과, 가을과 겨울로 이어지는 기나긴 곤궁은 난리보다 더 무서웠다.
북어처럼 말라가는 친정어머니와 배만 복어처럼 튀어나온 조카를 지척에 두고도 어머니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머니에게도 먹여살려야 할 입이 아홉이었다. 더 무서웠던 것은 혹여 양식이라도 새어나가지 않을까 감시하는 아버지의 눈빛이었다. 어쩌다 친정에라도 갈라치면 어머니는 뒤꼭지에 달라붙는 아버지의 매서운 눈초리를 의식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마당가에 선 채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뒤태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죽을 끓일 때 몰래 한됫박의 물을 더 넣었다. 간신히 한 대접의 죽을 더 얻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빈 물동이 속에 넣었다. 큰누님은 샘물을 뜨러 갈 때 그걸 이고 갔다. 샘이 외가 곁에 있었던 것은 천행이었다. 물을 뜨러 가면서 큰누님은 물동이 속의 죽그릇을 외가에 전했다. 매일 물을 길어야 했던 것도 천행이었다. 외할머니와 외종형은 그리하여 아사를 면할 수 있었다.
물동이를 이고 샘에 갈 때마다 큰누님의 다리는 몹시 후들거렸다. 사방에서 아버지가 노려보는 것 같았다. 묽은 죽에 언제나 배가 고팠던 열다섯살의 큰누님은 물동이 속의 죽그릇이 떠오를 때마다 군침을 삼켰다. 도중에 죽그릇에 입을 대지나 않을까 어머니도 그게 늘 걱정이었다. 그러나 큰누님은 한번도 죽그릇에 입을 대지 않았다. 기특한 큰누님을 어머니는 착한 딸이라고 불렀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는 그렇게 불렀다. 어머니의 영전에서 흐느끼던 큰누님을 나는 기억한다. 착한 딸이라고 자꾸 불러서 내가 평생 얼마나 배고프고 힘들게 살았는지 아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외할머니가 기어코 세상을 떠나자 당시 다섯살이던 외종형은 우리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입이 하나 더 는 것이었다. 갈데없는 고아신세란 걸 마을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아버지도 겉으로는 외종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는 그러지 아니하였다. 내 팔자에 무슨 처갓집 떨거지까지 먹여살려야 하느냐며 화를 냈다.
외종형은 밥상머리에 제대로 앉지 못하고 반쯤 몸을 튼 채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의 숟가락 내려놓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그런 외종형을 감싸지 못했다. 문밖에 놓아먹이는 개와 같은 신세였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잤는지, 아버지의 퍼런 서슬 때문에 누구 하나 그에게 관심을 갖지 못했다. 어머니조차 무심한 듯 보였다. 주린 배를 채우려 수수깡을 씹는 그를 못 본 척했고, 메뚜기를 잡아먹느라 입술과 손끝에 온통 장칠을 해도 모른 척했다. 있는 듯 없는 듯 내버려두는 것만이 그나마 곁에 머물게 하는 유일한 방책이었음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형과 함께 입학한 국민학교에서 외종형은 일찌감치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다. 배우지도 않은 한문을 알았고, 나이 아홉살에 실제로 강호포수참전비(江湖砲手參戰碑)의 명문(銘文)을 쓸 만큼 탁월한 서예솜씨를 발휘했다. 군수와 면장이 신동의 출현을 놀라워하며 아버지의 은공(隱功)을 치하하던 날 아버지는 치욕을 당한 사람처럼 화를 냈다.
우리집에 붙어 있으려고 외종형은 바보 행세를 했다. 간단한 셈조차 나의 형에게 일일이 물었다. 가족들 앞에서 책 같은 건 결코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가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쓸 수 있었던 건, 어쩌다 집 안에 어머니하고만 있을 때였다. 종이와 벼루가 없어 모래 위에다 감나무 가지로 글씨를 썼다. 어머니가 책을 숨겨놓고 읽었다는, 자식들도 모르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외종형이 집을 나간 것은 열네살 때였다. 형은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외종형은 국민학교를 마치자마자 아버지에 의해 들로 끌려나갔다. 한해를 논과 밭에서 빌려온 소처럼 일해야 했던 외종형은, 어머니가 싸준 책보따리를 들고 어느 겨울밤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외종형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무엇이든 읽고 써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책보따리 속에는 어머니가 읽던 낡은 책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외종형으로선 깜짝 놀랄 만큼의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돈이라면 철저히 아버지 관리하에 있었다는 걸 외종형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한푼 두푼 모았다기엔 너무 많은 액수였다.
아무려나 조금만 더 견뎠어도 외종형은 아버지의 멸시와 박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떠나고 난 반년 뒤에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떠나버린 뒤였다. 실로 오랫동안 아무도 외종형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서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그가 신문에 실렸을 때는 어머니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 지방대학의 교수가 돼 있었다. 어머니는 외종형의 소식을 듣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내가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아버지가 일찌감치 돌아가셨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도 그는 그다지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한동안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뒤 나에게 물었다. 어머니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아느냐고. 어머니에게도 소망이 있었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버지와 혼인하던 순간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나의 소망이며, 너의 소망이 그것이라고. 형님의 소망이 무엇이냐고 내가 물었다. 외종형은 멋쩍게 웃은 뒤 말했다. 나나 너나 원없이 읽고 썼으니 다 이룬 셈이다. 굳이 내게 남은 게 있다면 일흔세 명의 원혼의 무덤, 그 복숭아밭터에 위령비를 쓰는 일이다. 내가 못하면 네가 해주련?
결국 그는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눈물이 필요없다. 경탄도 필요없다. 그는 사랑 속에서 고뇌를 잊어버린다. 아니, 그는 신 스스로가 그것을 상기시키지 않는 한, 조금도 고뇌의 흔적을 뒤에 남기지 않으리만큼 완전히 잊는다. 왜냐하면, 신은 숨겨진 것을 보고, 고뇌를 알며, 눈물을 헤아리고 또 어떤 것도 잊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듯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열달 뒤에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음력이 아니라 양력으로 그러했다니까. 정말 그랬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를 일이다. 어머니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어머니 앞에서 어떻게 누구의 자식이냐고 묻는단 말인가. 나 자신에게 물을 일일망정 어머니에게 물을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열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나이 마흔일곱이었다. 족보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족보가 새로 나왔다. 삼십년 만에 증보된 족보에는 최근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까지 고스란히 올라 있었다. 족보라면 종가에도 없는 것이었다. 그동안 족보를 한번 열람하려면 순절공파 파조(派祖)의 십대손이 살고 있는 영흥면까지 걷고 버스를 타고 물을 건너야 했다. 새로 증보된 족보의 표지는 두꺼운데다 윤기마저 흐르는 검은색이었다. 그 이름도 족보가 아닌 세보(世譜)였고, 번쩍거리는 금색으로 씌어 있었다. 열권짜리 한질이 종가에 처음으로 배당되었다. 영흥면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는 그 세보를 탐냈다. 종가가 아닌 우리집에다 굳이 그걸 갖다놓고 싶어했다. 어머니를 때릴 때도 병조참판이라는 조상을 끌어다대고, 조상 제사 모셔야 한다며 떼뱀이 들끓는 대추나무를 끝까지 베지 않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기회만 엿보았다. 아버지와 재종간인 종손도 아버지의 속셈을 잘 꿰뚫고 있었다. 세보를 빼앗아올 기회도 명분도 없다는 걸 안 아버지는 결국 양탈(攘奪)을 감행했다. 세보가 없어진 걸 안 종손은 아버지를 뒤쫓았다. 다리 위에서 실랑이가 벌어졌고, 아버지는 세보와 함께 다리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건천(乾川)의 돌멩이에 머리를 부딪힌 아버지는 사흘을 앓다가 소생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종손은 두어 차례 경찰에 불려갔지만 집안 어른들의 끈질긴 탄원으로 아버지의 죽음은 실족사로 처리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숨을 놓을 때까지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평생 맞고만 살았으면서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나갈 때까지 당신의 손을 빼지 않았다. 감긴 눈가로 흐르던 아버지의 한줄기 눈물이 무얼 뜻하는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죽음마저도 농담 같았다.
나의 생부로 오해받았던 박성현.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는 대조되는 삶을 살았고, 애국청년단장을 거쳐 한때는 도의원까지 출마했던 그마저도 마지막은 아버지와 다를 바 없이 허망했다. 그는 엽총을 들고 노루사냥을 하다가 멧돼지 덫에 걸려 심장이 뚫렸다.
덫을 놓은 사람은 길 아랫말에 사는 천씨 성을 가진 곰보였다. 난리통에 나의 외숙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가 어느날 팔 하나가 없어진 채로 마을에 다시 나타난 그는 사냥과 도축일로 연명했다. 얼금뱅이에 곰배팔이라는 별명이 하나 더 붙었다. 그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두 팔이 멀쩡한 사람보다 더 잘해내곤 했다.
복숭아밭터에 묻힌 일흔세 명의 원혼 중 하나가 그의 아버지였다. 멧돼지 덫이 보복의 살인 예비음모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무 차례가 넘는 조사를 받은 끝에, 그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음모가 있었든 없었든, 덫을 잘못 밟아 즉사한 박성현의 죽음만큼은 허망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천수를 누리고 편안히 눈감은 사람은, 평생 고달프고 불행했던 어머니뿐이었다. 아흔일곱의 나이라고 하기엔 놀랍도록 피부가 희고 고왔다. 딸들은 아유 곱다, 아유 예뻐라,라며 자리에 누운 어머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의식이 오락가락하자 자식들은 눈물을 질금거리며 어머니에게 달라붙었다. 가시면 안돼요. 천년만년도 더 살아야 돼요. 어머닌 그럴 자격이 있어요.
어머니는 들릴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너, 희, 들, 이, 살, 아, 있, 잖, 니…… 그러곤 죽은 지 육십년도 더 된 아들과 딸의 이름을 부르며, 잠시 참척의 아픔을 되새기는 듯 입술 끝을 일그러뜨렸다. 형제들마저 잊고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들이었다. 그래요, 이제 그 아들딸 보러 가세요. 큰누님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알아듣겠다는 듯 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음지었다. 그리고 곧장 이승의 아흔일곱해의 생애를 놓았다.
나는 내가 누구의 자식인지 끝내 어머니에게 묻지 못했다. 묻지 않았다. 분홍 진달래가 산야를 뒤덮던 봄에 어머니는 상여에 실려 아버지 곁으로 갔다. 앙장(仰帳)의 네 귀퉁이를 장식한 흰 지화(紙花)가 바람에 흔들렸다. 평생, 자기를 증오하듯 어둠과 습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식을 사랑으로 지켜온 어머니의 시신이 간수를 빼낸 새하얀 소금처럼 정화되어 꽃상여 안에 누워 있었다. 무명 상복을 입은 서른 명의 자식과 손주 들이 숨두부처럼 몽글몽글 상여 뒤를 따랐다. 그 무성하고 엄숙하게 연속되는 생명들을 바라보며 나는 마침내 혼자 울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생은 위대했습니다.
그때 쏟았던 많은 눈물은 간수처럼 짜고 썼으나, 또한 어머니의 두부처럼 달고 고소했다. 그리고 두 책의 밑줄친 부분을 대조하고 있는 지금,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내가 밑줄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었던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