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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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조경란 趙京蘭

1969년 서울 출생.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나의 자줏빛 소파』 『코끼리를 찾아서』 『국자 이야기』,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등이 있음.

 

 

 

형란의 첫번째 책

 

 

옛날 옛날에 오르배라는 커다란 섬이 하나 있었어요. 그 섬에는 지리학자들이 살았는데 그 사람들은 지도를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어떤 지리학자는 평생 동안 자신의 뜰에 사는 개미들의 세계만 갖고도 오백장이 넘는 지도를 만들었고 어떤 지리학자는 구름의 변화에 관한 지도를, 또다른 지리학자들은 나무나 생물의 생태, 혹은 전설이나 신화 같은 것도 지도에 담고 싶어했어요. 또 어떤 학자들은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 아주 오랫동안 떠돌아다니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그들은 산과 강, 호수와 숲,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닷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하나씩 이름을 붙여주고 불렀어요. 그 목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땅의 잠자던 모든 생명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대요. 오르배 섬은 이제 사라지고 없어요. 거기 가고 싶어도 우린 이제 갈 수가 없게 된 거죠. 그러나 그 지리학자들이 시도한 몇장의 지도는 아직 남아 있어요. 이따금 나는 오르배 섬에 가는 꿈을 꾸어요. 크고 작은 수천장의 지도들이 마치 흰 빨래처럼 널려 있는 그 섬에 말이에요. 내가 이 도시에 막 도착했을 때 내 손에 들린 것, 내가 무슨 밧줄처럼 꽉 움켜쥐고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지도 한장이었답니다, 쯔야끼 씨. 대도시에서 태어났고 한평생을 거기서 살았고 남은 날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나와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으로 찾게 되는 건 어쩌면 커다랗고 낯익은 광고판일지도 몰라요. 나는 주로 광고판을 보고 어디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어디서 머물러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사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결정하곤 했어요. 이 도시는 가도 가도 끝없는 옥수수밭뿐이었어요. 나를 유혹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도시처럼 느껴졌어요. 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최초의 두려움을 느꼈어요. 손에 움켜쥐고 있던 지도를 펼쳐서 이불처럼 온몸에 둘둘 감고 싶었어요. 낯선 언어로 씌어진 그 지도는 정말 신비해 보였어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지금부터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요.

……쯔야끼 씨 걸음은 너무나 빨라서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언제나처럼 엉덩이를 뒤로 쑥 내민 채 앞뒤로 크게 팔을 흔들며 안짱걸음으로 재빨리 걸어가고 있군요. 맨 처음에 나도 여기 왔을 땐 쯔야끼 씨처럼 그렇게 걷곤 했어요. 언제나 등을 펴고 조금 빠르게. 뒤쫓아가는 걸 단념하고 나는 다시 까페로 돌아와 창가에 앉았어요. 쯔야끼 씨 모습은 이제 여기서 더는 보이지 않는군요. 쯔야끼 씨가 지금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건 오가닉 슈퍼마켓으로 사과나 쌀을 사러 간다는 것이고 또하나는 도서관 근무시간이 끝났다는 걸 의미하겠지요.

이 창가 자리에 앉아서 우리 함께 차를 마신 적이 있었어요. 버스를 타고 가던 쯔야끼 씨가 창가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곤 경쾌하게 뛰어내려 함께 중국식당에 가거나 마트에 가서 접시나 포인세티아 화분을 산 적도 있어요. 이곳에 머무는 동안 구두 두 켤레를 버리고 새로 사야 할 정도로 내내 걸어다니곤 했는데도 나는 언제나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이렇게 창가에 한 시간만 앉아 있어도 지나가는 사람들 중 내가 아는 사람, 적어도 여섯 명쯤은 발견할 수 있어요. 지금 쯔야끼 씨를 본 것처럼 말이에요. 그들은 대개 이 다운타운 상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죠.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앨런, 브래드 가든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줄리,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아흐메드 등등 이름표를 달고 있던 사람들요. 그중에는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 밑으로 치렁치렁하게 기르고 다녔던 홈리스도 있었어요. 어쩌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나 또한 이 도시의 일부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네요, 쯔야끼 씨. 언제나처럼 내가 여기 앉아 있는 것도 모른 채.

 

쯔야끼 씨, 나는 오늘 작별인사를 하려고 합니다.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행성처럼 같은 평면에 있고 또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는 거야,라고 말이에요. 무겁고 오래된 종을 친 것처럼 그 목소리는 둥둥둥 내 귓가에 울려퍼졌어요. 나는 거의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어요. 나는 그게 사랑에 관한 거라고 이해했거든요. 그러나 남편은 바로 그 다음날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어요.

나는 행성처럼 빠르게, 빛의 속도로 여기 달려오고 싶었어요. 그러나 비좁고 건조한 비행기 안에서 열다섯 시간도 넘게 마른침을 삼키고 있어야 했어요. 나는 남편을 찾아야 했어요. 그러나 걱정할 건 없었어요. 나한텐 이 도시의 지도가 있었고 이제 그걸로 남편을 찾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거든요. 택시기사는 나를 M호텔로 데려다주었어요. 이 도시에 있는 유일한 호텔이라면서요. 트렁크를 던지듯 방에 팽개쳐두고는 곧장 로비로 내려갔어요. 소파에 앉아서 처음으로 지도를 펼쳐보았어요. 도서관의 위치를 알고 싶었으니까요. 몇겹으로 차곡차곡 접혀 있던 지도를 펼쳐본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내가 쥐고 있던 건 이 도시의 축적지도가 아니라 ‘푸드&레스또랑’ 지도였던 거였어요. 이방인들을 위한 레스또랑 가이드 같은 거였죠. 하! 나는 실소했어요. 그땐 긴장이 풀려 있던 거예요. 그 지도만으로도 당장 남편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호텔 정문 앞에서부터 갈라진 다섯 개의 길 중에서 세번째 길을 선택해 허리를 곧게 펴고 조금 빠르게 걷기 시작했어요. 다운타운을 지나면 그 길 끝에는 곧장 이 도시에서 가장 크고 긴 강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남편은 이 도시에 가을에나 오게 되어 있었어요. 만약 그의 여권이 그대로 있었다면 나는 여기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강으로 내려가는 길 언덕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외관 자체가 둥글고 휘어지고 기우뚱하게 왼쪽으로 늘어진 커다란 건축물 하나가 보였어요. 곡선의 수많은 면 때문인지 단지 건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적절하기도 했으며 그 안에 사각형의 공간이라고는 도무지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그런 건물이었어요. 그러나 나는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어요. 내가 그 도서관을 이해하는 데는 그후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아무튼 그때 그 붉은색 벽돌 건물은 다소 수용적이면서도 장엄한, 그리고 유혹적인 동시에 어떤 힘센 도구처럼 보였어요. 게다가, 여기가 바로 당신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입구입니다, 그 건물은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나는 성큼성큼 건물 쪽으로 걸어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저녁놀 속에서 의식을 일깨우듯 더 짙고 선연한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던 벽돌 건물은 창조성,이라고 다시 한번 말했어요. 나는 그 속을 꿰뚫고 들어갈 작정이었어요. 힘껏 문을 잡아당겼어요.

 

*

남편을 찾기 위해서 나는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해내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나는 지금부터 내가 남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럴 때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했을까. 나는 우체국에 갔어요. 거기서 벤이라는 우체국장을 만났어요. 그 다음에 이발소에 가서 크리스라는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남편은 초등학교 교사를 만났을지도 모르고 다운타운을 순회하는 버스 운전기사나 은행의 수위를 만나 시시한 잡담을 나누었을지도 몰라요. 그게 자신이 강연할 낯선 도시에 도착했을 때 맨 처음 그가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가 거기에 다녀갔다는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어요. 그리고 나에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특별한 단 한사람인 내 남편이 그토록 아무 특징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예요. 이 도시에 키가 175쎈티미터쯤 되는 어깨가 구부정한 사십대 초반의 안경 쓴 동양인은 셀 수도 없이 많았거든요. 내가 맨 마지막에 간 곳이 바로 도서관이었어요. 그래요, 쯔야끼 씨. 그날 나는 그 문을 힘껏 잡아당기고서도 거길 들어가지 못했죠. 문을 연 순간 깨달아버린 거예요. 거길 들어간다는 건 나에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요. 남편이 거기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거든요. 거긴 맨 마지막 장소가 되어야 했어요. 상점에 물건을 사러갈 일이 있거나 혹은 강가로 산책을 나갈 때도 애써 도서관 쪽은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러나 새의 목처럼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과 절제된 선들로 이루어진 건축물, 어느새 내 눈엔 그것이 탄생하기 이전의 초보적이고 기초적인 언어의 한 형태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나는 줄곧 도서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는 사이에 이 도시의 상점들을 한번씩은 다 다녀보았고 한꺼번에 여러 명의 친구들까지 생기게 되었어요. 그러나 해가 질 무렵이면 나는 늘 혼자 이 창가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보곤 했어요. 의기소침한 날에는 공원에 나가 웃통을 다 벗은 채 춤추고 있는 히피들을 구경하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도서관을 찾아가게 된 건 그후 보름이 더 지난 구월 첫째주 토요일 아침이었어요.

강가에 다녀온 날이었어요. 나는 풀숲 속에서 화려한 은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구렁이 허물을 발견했어요. 수면 위에서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던 카누 위에다 구렁이 허물을 씌웠어요. 카누에 깃든 구렁이의 정령이 무성한 갈대 사이를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요. 자, 이제 가자! 카누 위에 올라타서 나는 모험을 떠나는 바이칼 사람들처럼 호기롭게 외쳤어요. 나는 꿈에 의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꿈이 나에게 다시 도서관에 가서 남편을 찾을 수 있는 용기를 준 건 사실이랍니다.

쯔야끼 씨, 당신은 위풍당당한 책들 속에서 고개 숙인 채 앉아 있었어요. 그 도서관의 사서는 아마 그때 쯔야끼 씨뿐인 것 같았어요. 나는 안내 데스크를 지나 왼쪽으로 휘어진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가보았어요. 주말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었어요. 그중에는 아주 먼 곳에서 온, 내 남편 같은 사람들도 있을지 몰라요. 집중해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독서를 통해서 고독을 지탱하려는 사람들처럼 집요해 보였고 그리고 정말 고독해 보였어요. 그러나 남편은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는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니까요. 만약 남편을 찾게 된다면 나는 그에게 아무런 비난의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글쓰는 사람의 가장 큰 고통은 자신감의 상실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나에게는 남편을 위로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글쓰기란 바로 자신의 최고를 향해서 쓰는 행위가 아닌가요. 도서관은 오층까지 이어지고 있었어요.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남편이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을까요. 아니 그건 친근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라요. 도서관은 정말 근사했어요. 오층에서 일층으로 내려오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깨달았던 거예요. 도서관이란 데는 단순히 책이 쌓여 있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공간이라는 것을요. 책을 읽고 싶다는 의지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공간 말이에요. 천천히 다시 오층에서부터 걸어내려와 나는 곧장 쯔야끼 씨한테 갔어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쯔야끼 씨는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향해 미소지었어요.

부탁합니다, 내 남편을 좀 찾아주세요.

……!

내 남편은 동양인입니다. 그는 이곳에 자주 올 거예요. 내 남편은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나는 더듬거리며, 그러나 쯔야끼 씨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했어요. 그때 나는 눈을 치켜뜬 채 쯔야끼 씨를 보고 있지 않았어요.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그 표정은 내가 말을 하는 것, 남편을 떠올리는 것을 방해했거든요. 그건 매우 복잡한 생각이었으므로 나는 눈앞에 있는 대상을 잠시 차단해야 했어요. 글을 쓸 때, 때로 남편이 그러하듯 말이에요. 나중에 쯔야끼 씨는 그때 내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점점 더 깊숙이 남편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던 거예요. 남편이 쓴 책 한권을 쯔야끼 씨한테 내밀었어요. 남편이 쓴 책, 나는 그 책들을 빙하라고 부르곤 했어요. 희고 깨끗하고 투명한, 동시에 거대하면서도 연약한 빙하. 마침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쯔야끼 씨는 말했어요.

이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당신 남편처럼 말이에요.

남편에게 비난이라도 하듯 나는 쯔야끼 씨한테 쏘아붙였죠.

도대체 읽고 쓰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나는 돌아섰어요. 뒤에서 쯔야끼 씨 목소리가 들렸어요.

원하신다면, 도서관 카드를 만들어드릴 수 있어요.

나는 걸음을 멈추었어요. 그리고 다시 쯔야끼 씨한테 되돌아가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것 봐요, 혹시 당신 부엌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내가 머물고 있는 M호텔에는 나를 제외하고도 몇명의 장기투숙자가 있었어요. 투숙한 지 이주쯤 지났을 때 호텔 매니저 싸인이 든 종이 한장이 방문 밑으로 들어온 적이 있어요. 상수도 공사 때문에 저녁 일곱시부터 단수가 될 거라고 씌어 있었어요. 그날 저녁 빈 생수병을 들고 호텔 커피숍이 있는 일층으로 내려갔을 때 로비에서 웬 뚱뚱하고 키가 큰 백인여자와 키가 그녀의 어깨 높이도 안돼 보이는 까만 모자를 쓴 남자가 서로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어요. 대체 말을 몇번이나 해야 알겠어요. 여기 물은 식수가 아니라니까요. 세상에 못 먹을 물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지하에 슈퍼마켓이 있잖아요, 물값은 일달러도 안된다고요. 나는 지금 그 일달러도 없는 사람이야. 내 귀에는 그런 말들이 빳빳한 나뭇가지로 서로 후려치는 듯 들려왔어요. 구경꾼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싸움은 시시하게 끝났어요. 너희 같은 인간들 때문에 우리 호텔이 엉망이 되는 거야. 키큰 여자가 끝으로 그 말을 내뱉곤 곧바로 휙 돌아서서 가버렸거든요. 그 여자의 이름이 패트리샤라는 건 그 뒤에 알게 되었어요. 호텔 매니저라고 했어요. 이 호텔의 다른 장기투숙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건 바로 그날이 처음이었어요. 인도네시아에서 온 어말과 오만에서 온 아심, 칠레에서 온 쿠트, 볼리비아에서 온 조반나, 그리고 나는 각자 물통 하나씩을 든 채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았어요. 모두들 매니저와 싸움을 한 쿠트를 위로해주고 있었어요. 그들끼리는 전부터 꽤 친분이 있는 것 같아 보였어요. 그러다가 쿠트의 방으로 우르르 몰려들 가게 되었어요. 각자 먹을 것을 들고 말이에요. 방을 아무리 뒤져보았지만 먹을 만한 것은 전혀 보이질 않았어요. 나는 중국식당에 갈 때마다 얻어온, 한번도 뜯어본 적 없는 서너 개의 포춘 쿠키와 집을 떠날 때 챙겨온 쌍화탕 한병을 들고 갔어요. 누군가는 보드카 한병을 가져오고 또 누군가는 먹다 남은 딱딱한 바게뜨를, 쌘드위치와 사탕 따위를 가져오긴 했지만 다섯 사람이 저녁식사로 먹기에는 턱없이 빈약하고 초라한 음식이었어요. 그날 나는 그 네 사람 중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온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어말이라는 청년과 주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술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거든요.

너의 나라는 어떤 곳이니?

나는 어말에게 물어보았어요.

긴팔원숭이들이 다 사라졌어. 야자나무도 사라졌어. 땅에는 울타리가 생겼지. 게다가 비는 아무때나 내려.

어말은 한숨을 푹 내쉬었어요. 보드카를 마시고 있던 조반나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지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지금 우리 꼴을 봐. 어떻게 이런 걸 저녁식사라고 말할 수 있겠어. 아, 정말 허기지지 않니? 내가 지금 정말로 원하는 건 부엌이라고, 부엌.

조반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 침울해지고 말았어요. 그랬어요, 우리에게는 부엌이 없었거든요. 여기서는 쌀을 안칠 수도 없고 만두를 빚을 수도 없었어요. 그때 나는 호텔에 고작 이주 정도 머물고 있을 때였지만 볼리비아에서 가져온 옷과 장신구를 다 팔아치우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조반나 같은 경우에는 벌써 두달이 넘도록 투숙하는 중이었어요. 우리들 중 부엌에서 만든 따뜻한 음식, 그걸 꿈꾸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쯔야끼 씨. 내가 맨 처음 가졌던 이 도시의 지도는 식당을 소개한 지도였잖아요. 나는 하루에 두 번, 점심과 저녁에 그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식당들을 순례하기 시작했어요. 패스트푸드점을 제외하고 나면 이 다운타운에는 두 개의 중국식당과 세 개의 타이 음식점과 다섯 개의 지중해풍 식당, 그리고 일본식당 한 개가 있어요. 그 식당들에서도 남편을 발견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어요. 지도상에 나타난 걸 보면 이 도시에는 약 백오십개의 식당이 있어요. 나는 내가 한번 갔던 식당은 표시를 해두었어요. 그러다가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식당이 있었던 거예요. 한군데는 다운타운에서 재퍼슨가로 향하는 길 초입에 있는 아랍식당이고 다른 하나는 그랜드가에 있는 그리스식 식당이었어요. 처음에 나는 단순히 지도를 만든 사람의 실수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상세한 지도라고 해도 지도에는 그리는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되게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의도나 목적에 따라서 생략이 가능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과장도 필요한 거겠지요. 이 식당안내 지도는 누군가 틀림없이 실수를 한 걸 거예요. 하지만 내가 녹색 계단이 있는 매디슨가 57번지의 더럽고 오래된 건물을 발견했을 때, 그때는 더이상 실수라고만은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렸죠. 하지만 그건 시간이 더 지난 후의 일이었어요. 사람들은 왜 지도를 의심하지 않는 걸까요. 아무래도 여긴 뭔가 이상한 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심은 결국 내가 이 도시에 더 머물러 있어도 좋을 구실을 마련해준 셈이 되었어요.

이거 네가 가져온 거 맞지? 하나 열어보지 그러니?

다시 태어난다면 호랑이로 태어나 밀림을 누비고 싶다는 거리의 악사 쿠트가 문득 나에게 포춘 쿠키 하나를 건넸어요. 그러고 보니 그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쿠키를 반으로 쪼개 둘둘 말려 있는 종이를 끄집어냈어요.

뭐라고 씌어져 있는데?

아심이 심드렁하게 물었어요. 나는 그 쪽지를 소리내서 읽곤 얼른 쿠키를 와작, 깨물어 먹기 시작했어요.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몰랐고 어쩌면 이 도시에서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뜻밖의 일이 생길지도 몰랐어요. 그 쪽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어요, 쯔야끼 씨.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

다리가 짧고 뭉툭한 양의 모양을 닮은 이 도시의 지도는 내가 사는 나라의 한 위성도시처럼 생겼어요. 그 도시에는 여기보다 두 배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식수원으로 사용되는 댐이 하나 있고 국민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어요. 도시에도 기능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그 도시는 수도의 과밀한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졌을 거예요. 오십년 전만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도시였어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도시는 새로 생겨나고 어떤 도시는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있어요. 대륙은 이동하고 있어요. 남편은 이 지도 바깥에 있을지도 몰라요. 나는 이것보다 더 큰 지도를 원하게 되었어요. 서점에 가서 세계전도를 한장 샀어요. 지도 위에 나침반을 놓곤 북쪽을 향하게 했어요. 그때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어요, 쯔야끼 씨. 내가 사는 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더 큰 지도를 보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남편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것 말이에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 큰 지도를 손수건만하게 착착 접어 서랍 속에 넣고 말았어요. 나는 우리나라의 한 위성도시를 닮은 이 도시의 지도, 특히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는 다운타운의 지도에 다시 몰입하기 시작했어요.

계절이 바뀌고 있었고 남편의 모습은 이 소도시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점점 더 초조해지고 있었어요. ……쯔야끼 씨, 그때 만약 쯔야끼 씨가 그 행사를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끝내 남편을 찾아낼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10월 22일 금요일이었어요. 아침부터 흐리고 비가 왔어요. 어깨에 담이 결리고 종아리에 쥐가 났지만 아침 일찍 일어났어요. 도서관의 가장 큰 연중행사인 북 쎄일에는 이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몰려온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쯔야끼 씨가 신신당부했잖아요. 내가 도서관에 도착한 건 행사가 시작된 지 삼십여분이 지나서였어요. 나는 서두르지 않았어요. 남편은 아마 행사가 끝날 때까지 그 오래된 수만권 수천권의 책들 사이를 서성거리며 그것들을 만져보고 넘겨보고 킁킁 냄새를 맡고 있을 테니까요. 도서관엔 로비부터 발디딜 틈도 없이 책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어요. 나는 행사가 열리고 있는 삼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박스째 책을 사갖고 나가는 사람들, 사러 들어오는 사람들, 그리고 팔각형의 테이블과 의자들, 검은 서가들이 한눈에 보이는 이층 중앙홀에 우뚝 서 있었어요. 그 순간, 이 도시에 온 후 처음으로 나는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쯔야끼 씨, 그것은 아마 책의 위력이 아니었을까요? 지금껏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기로운 냄새가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주 오래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책을 만들러 갈 때면 깨끗한 푸른색 옷을 입은 소년 두 명이 앞장을 서고 악사 네 명이 음악을 연주하며 뒤따르고, 그 뒤를 한사람은 향수를 뿌리고 또 한사람은 꽃을 뿌리며 따라갔어요. 그중에 글씨를 쓰게 될 사람이 가장 앞장을 섰구요. 나는 깊은 숨을 쉬었어요. 탄성이 터질 것 같았어요. 여기 이 많은 책들 중에서 단 한권도 같은 책은 없을 거예요. 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창문을 통해서 비가 그치고 두꺼운 구름 사이로 햇빛이 사선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이대로라면 점심에는 남편과 함께 타이 레스또랑에 가서 튀긴 국수와 야채를 먹을 수 있을 거고 저녁에는 강으로 뻗은 길을 따라 산책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날 저녁, 나는 호텔 친구들과 함께 다운타운에 있는 인도식당에 있었어요. 나를 비롯해 아심과 쿠트, 어말,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바로 침묵이라고 생각하는 조반나조차 입을 꾹 다물고 각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어요. 우리 옆 테이블의 청년들이 소리를 치며 싸우고들 있었어요. 여름 내내 공원에서 상의를 벗고 휘파람을 불며 위협적이며 까맣고 큰 개들을 데리고 놀던 그 히피 청년들이었어요. 나는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한 청년이 접시를 들고 벽을 향해 집어던졌을 때조차 말이에요. 누군가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조심스럽게 두드리기도 했지만 그 소린 청년들의 언성에 맥없이 파묻히고 말 뿐이었어요. 나는 쿠트를 흘긋 쳐다보았어요. 너는 호랑이가 아니었니?

마침내 히피들이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식당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세 마리의 검고 큰 개들이 컹컹 짖으며 펄쩍펄쩍 뛰어오르고 있었어요.

아아, 살았다.

조반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일제히 메뉴판을 펼쳐들었어요.

성난 젊은애들은 정말 무서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쿠트가 말했어요. 우리는 세 종류의 커리와 빵을 주문했어요.

난?

하고, 아심이 한 이름을 불렀어요. 언제나처럼 나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어요. 이 도시에서는 누가 내 이름을 불러도 매번 듣지 못했어요. 사람들은 ‘형’이라는 발음을 하지 못해서 나를 ‘헝’이나 ‘엉’으로 불렀어요. 그래서 나는 그냥 ‘란’(ran)으로 불러달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그 이름도 언제나 ‘난’(lan)으로 불리곤 했어요. 쯔야끼 씨. 이 도시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형란’이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쯔야끼 씨만 제외하곤 말이에요.

네 이름은 그럼 빵이란 뜻이니?

아심은 다시 나에게 물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그는 메뉴판을 가리켰어요. 조반나는 킥킥거리고 있었구요. 나는 다시 메뉴판을 쳐다보았어요. 난이라는 인도식 빵 이름이 ‘lan’이라고 씌어 있었어요. 언젠가 한번 활자로 인쇄된 적 있었던 내 이름이 떠올랐어요. 남편의 책 속에서였을 거예요. 내 것이 아닌 양 생경했지만 그때 그 이름에서는 고유한 인격을 가진, 곧 책을 박차고 나올 것 같은 생명력이 느껴졌었어요.

……아니.

나는 완강하게 고개 저었어요.

아니, 내 이름은 꽃이라는 뜻이야.

커리가 나오고 빵이 나왔어요. 쿠트와 아심과 조반나가 두 손으로 얇은 빵을 찢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쯔야끼 씨, 남편은 아직도 나를 꽃이라고 기억하고 있을까요.

참, 너 오늘 도서관에 간다고 하지 않았니? 남편을 찾았니?

푸딩에 포크를 푹 찔러넣으면서 조반나가 나에게 물었어요. 그 포크가 물렁물렁한 내 이마를 푹 찔러대는 것 같았어요.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서라도 남편은 단박에 내 눈에 들어올 줄 알았어요. 나는 책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 속을 비집고 돌아다녔어요.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다 확인을 했어요. 남편은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게 아니라면 어디선가 숨어 나를 미행하고 있거나요. 영원히 내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요. 일격을 가하듯 순간적으로 나는 휙 뒤돌아봤어요. 두꺼운 낙타색 스웨터에 검은 코르덴 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끈으로 묶은 박스 두 상자를 양손에 든 채 삼층 계단을 막 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나는 행사장 문을 밀치고 후다닥 밖으로 나갔어요. 내가 일층으로 내려갔을 때 그는 바퀴가 달린 밀것에 책이 든 박스를 올려놓았어요. 나는 도서관 유리문 안으로 몸을 숨긴 채 그를 지켜보았 어요. 그는 밀대를 끌고 도서관 건물 뒤로 돌아갔어요. 그 길은 매디슨가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었어요. 그는 아주 천천히 걸었어요. 그가 걸을 때마다 달칵달칵, 밀대와 보도블럭의 마찰음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어요.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따라온다고는 전혀 짐작하지도 못하는 걸음걸이였어요.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이따금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으로 뭔가 그리는 시늉을 하기도 했어요. 걷는 게 아니라 그는 어떤 한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거예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적절한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요량이었어요. 나는 그가 마침표를 찍듯 문을 닫고 들어간 건물을 올려다보았어요. 낡고 초라한 삼층짜리 건물이었어요. 삼층으로 올라가는 녹색 계단은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어요. 매디슨가 57번지. 나는 주머니 속에 든 꾸깃꾸깃해진 지도를 꺼내보았어요. 내가 저녁마다 산책 나가던 길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었어요. 눈을 감고도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구요. 지도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어요. 그러나 지도엔 나타나 있지 않은 집이었어요.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뒤따라 들어갈 수도 없었어요. 남편은 이 도시에서 아주 지워져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계획에 나도 끼워주지 않을래?

나는 조반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어요.

무슨 소리야?

쿠트와 아심이 동시에 되물어왔어요. 어말은 고개를 푹 떨구었어요. 나는 커리를 듬뿍 묻힌 빵을 입속으로 밀어넣고 이렇게 말했어요.

둘러댈 생각 하지 마. 패트리샤를 습격하기로 했다는 걸 알고 있어.

 

*

남편을 찾고 나자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제 딱 두 가지뿐이었어요. 남편을 미행하거나 떠나거나. 결국 나는 그 두 가지를 다 하게 된 셈이지만 말이에요.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렸어요. 검은 박쥐우산을 쓴 채 매디슨가 57번지 앞에서 그를 기다렸어요. 그는 하루에 한번, 해가 질 무렵쯤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어요. 브래드 가든의 창가 자리에 앉아 수프를 먹거나 바게뜨를 사곤 했어요.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공원이나 강가로 산책을 나가기도 했어요. 나는 잠깐 혼란스러웠어요. 그는 마치 나의 항적을 뒤따르는 사람 같았거든요. 문득문득 나는 뒤를 돌아보기도 했어요. 내가 그를 뒤쫓고 있는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뒤쫓고 있는 게 아닐까. 비가 그치고 나자 갑자기 가을이 시작되었고 나는 강물에 휩쓸리는 빈병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어요. 남편의 이름을 크게 소리쳐 부르고 싶은 충동에 굴복하게 될까봐 말이에요. 남편을 불러세우지 않은 건 희박한 공기 속에서 하는 오체투지처럼 나에겐 절박하고 간절한 행위이기도 했어요. 남편의 의지를 내 의지로 돌려세우고 싶지 않았거든요. 나는 우리 사이에서 벌어질 마지막 사건을 상상하고 있었어요. 이를 딱딱 부딪치며 상점에 가서 두꺼운 외투와 바지를 샀어요. 겹겹이 껴입은 옷 속에 금을 품고 다니듯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그 가을을 지나고 있었어요. 이따금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어요. 그 위로 새가 날고 길게 뻗은 나뭇가지와 내가 길을 잃을 적이면 언제나 표적 삼아 향하곤 했던 올드 캐피털 몰의 첨탑이 보였어요. 때로 제트기가 지나간 하늘엔 하얗고 긴 사선이 그어져 있거나 때로 ㅅ자나 길게 늘여쓴 S자처럼 보이는 선명한 흔적들이 남아 있기도 했어요. 그것은 꼭, 아직 다 쓰지 못한 무슨 글자처럼 보였어요.

 

나는 검은색 화장펜으로 눈썹을 그리고 있었어요. 방엔 한기가 느껴졌어요. 브래드 가든에 갈 작정이었어요. 거기 가서 뜨거운 수프를 사먹을 생각이었어요. 남편이 거기 올 시간이기도 했어요. 오늘은 그 맞은편 자리에 가서 앉을지도 몰라요. 공들여 섬세하게 눈썹을 그리고 있다가 갑자기 천장과 벽들에서 뿜어져나오는 듯한 싸이렌 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귀를 틀어막을 새도 없이 소음은 무차별적으로 쏟아졌어요. 화장펜을 던지듯 떨어뜨리곤 귀를 틀어막았어요. 그 소리는 마치 전쟁을 알리는 경보처럼 들려왔어요. 누군가 복도를 돌아다니면서 방마다 문을 두드리고 있는 소리가 들렸어요. 불이야 불! 싸이렌 소리는 귀를 찢어대는 것 같았어요. 불이 났다니까요! 어서들 나와요, 밖으로 나오라구요, 호텔 밖으로 다 내려와요! 여자는 악을 쓰고 있었어요. 밖으로 나가야 할까? 나는 망설였어요. 그리고 문득 생각했어요. 불이 난 게 정말 사실일까? 하고 말이에요. 나는 이제 지도조차 믿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잖아요. 문 쪽으로 다가가 어안렌즈에 바싹 눈을 붙였어요. 복도를 돌아다니며 방문을 두드리고 있는 여자는 패트리샤였어요. 패트리샤는 그 거구의 몸을 흔들어대며 문이 부서져라 두드렸어요. 하나둘씩 방문을 열고 나온 투숙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어요. 나는 패트리샤가 내 방 앞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렸어요. 화재경보는 점점 더 빠르고 크게 들렸어요. 문을 두드리는 기세와는 다르게 패트리샤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릿느릿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어요. 그녀가 내 방문을 두드릴 때 나는 어안렌즈를 통해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말았어요. 방문을 두드리면서 그녀는 입을 쩍 벌리곤 하품을 하고 있었어요. 투숙자들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어요. 정말로 불이 난 거예요? 어디서 난 거예요? 투숙객들은 패트리샤를 붙잡고 물었어요. 그녀가 다부지게 말했어요. 불이 났다고 칩시다.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요. 내가 안 나가고 방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싸이렌 소리는 나를 밀어내듯 울리고 또 울렸어요.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걸터앉았어요. 싸이렌 소리는 화장실 천장 위에서도 쏟아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나의 투항을 기다리는 듯한 경고와 도전의 소리 같았어요. 한 남자가 혼자 길을 떠났어요, 쯔야끼 씨. 지도 한 장을 들고 있었어요. 가도 가도 정상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어요. 게다가 그 길로는 아직 가본 사람이 없었어요. 그가 그 길의 첫번째 등반가였던 거예요.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그 다음날 아침에 어떤 지도 하나가 잘못 그려졌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어요. 사람들은 세상에 참 이상한 기사도 다 있구나 생각했어요. 그걸 유심히 보는 사람도 없었어요. 바로 남자가 들고 간 지도였어요. 그 폭설 속에서도 남자는 안개 너머에 육지가 있다는 신념으로 걷고 또 걸었을 거예요. 낭떠러지로 가는 길이 산의 정상인 줄 알고 계속 올라갔을 거예요. 그런 일이 이 도시의 서쪽에 있는 한 나라에서 일어났어요. 일년 전에 말이에요. 남자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어요, 쯔야끼 씨. 나는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보았어요. 미처 다 그리지 못한 눈썹이 이마 쪽을 향해 사선으로 휙 그어져 있었어요. 성난 사람처럼 보였어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눈썹을 문질렀어요. 눈썹이 다 지워진 나는 엄격한 내성(內省)을 잃어버린 초라하고 무표정한, 누런 얼굴이 되어버렸어요. 패트리샤가 은행에서 칠만 달러를 현금으로 찾는 것을 그 뒤에 줄을 서 있던 쿠트와 조반나가 본 그날 밤에 그들은 그녀를 털기로 모의했던 거예요. 그 비밀을 나에게 털어놓은 사람은 어말이었고요. 패트리샤를 습격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거예요. 그녀는 이 호텔 일층에서 혼자 살고 있으니까요. 이십분 후, 싸이렌 소리는 나를 체념한 듯 서서히 작아지고 있었어요. 정말로 불이 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쯔야끼 씨.

밖으로 나가던 길이었어요. 엘리베이터 맞은편에 있는 어말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어요. 쿠트와 아심과 조반나가 그 방에 함께 모여 있었어요. 나는 노크도 없이 그 방으로 불쑥 들어가 말했어요.

오늘밤이 어떠니?

뭘 말이야?

패트리샤를 습격하기로 했잖아.

아니. 저, 그 대신 우린 타조를 타러 가기로 했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어말이 그렇게 말했어요. 글쎄, 타조를 타러 가겠다고 말이에요.

 

*

십일월 첫째주 목요일 오후에 나는 내가 여기를 떠나게 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어요. 그것은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였어요. 쯔야끼 씨도 잘 알겠지만 도서관 앞에는 수령 백년도 넘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잖아요. 이 다운타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예요. 이 도시에는 사람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게 나무 같았어요. 내가 맨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때 나무들은 햇빛을 최대한 많이 받기 위해서 가지와 잎을 높이 뻗어 마치 지붕을 이루려는 열대우림의 나무들처럼 무성하고 풍요로워 보였어요.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맨 꼭대기에 서 있으면 조감하듯, 차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맞은편 다운타운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요. 그 무성했던 나뭇잎은 어느새 다 떨어져 있었어요. 나뭇가지들은 빳빳한 선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 수많은 사선들 사이로 다운타운 일대가 빗금을 친 화면처럼 한눈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나는 이제 막 녹색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남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남편은 유독 천천히 걸었고 채 절반도 건너지 못했을 때 그만 신호가 바뀌고 말았어요. 남편은 엉거주춤한 채 횡단보도 한가운데 갇혀버렸어요. 자동차들이 남편 앞에 멈춰섰지만 남편은 신호가 도로 바뀔 때까지 기다릴 작정인 것 같았어요. 나는 횡단보도 위로 떨어진 짧고 뭉툭한 남편의 그림자를 보았어요. 그것은 짙은 회색과 검정이 섞인 녹색이었어요. 나는 계단 위에 철퍽 주저앉고 말았어요. 현기증이 쏟아졌어요. 아니에요, 쯔야끼 씨. 그것은 안도감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깨닫게 되었어요. 그동안 내가 그를 찾고 있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그에게서 줄곧 달아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남편이 사라진 걸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어요. 그가 사라지기 얼마 전의 일이었어요. 등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뼈를 삽으로 콱 찍었어요. 등이 반으로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순식간의 일이었어요. 그때 내 어깨뼈를 삽으로 찍어누른 사람이 귀청이 떨어져나가도록 큰 소리로 절규했어요. 너는 늙고 실패했다! 나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천천히, 등을 돌렸어요. 나를 삽으로 찍은 사람, 너는 늙고 실패했다!라고 절규한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나의 남편이었어요. 남편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어요. 꿈속에서의 일이었지만 나는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보다 남편의 절규처럼 정말로 내가 늙고 실패했다는 슬픔 때문에 고통스러웠어요. 나는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남편도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꿈에서 깨어났을 때도 나는 여전히 소리내서 울고 있었고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은 미간을 찌푸린 채 등을 돌렸어요. ……당신은, 왜 당신을 찌른 거예요? 나는 남편의 구부정한 등에 뺨을 대고 그렇게 묻고 있었어요. 신호가 바뀌자 남편은 어깨 높이만큼 한 손을 들어올렸어요.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곤 마저 횡단보도를 건너 다운타운의 골목으로 사라져버렸어요. 몸을 일으키다 말고 나는 계단 아래 떨어져 있는 내 구두 한짝을 내려다보았어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입을 벌리고 있는 구두, 억지를 쓴다고 해도 더이상은 벌어지지 않을 구두, 낡은 구두. 나는 내가 맨 처음 이 도서관을 발견했던 때를 떠올렸어요. 그 다소 수용적이면서도 유혹적인, 동시에 힘센 도구처럼 보였던 도서관을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내 구두는 지금 도서관을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여길 혼자 떠나기로 했어요. 용기를 내서 말이에요.

 

작별인사가 길어졌군요, 쯔야끼 씨.

쯔야끼 씨, 그날 부엌을 빌려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나는 부엌을 빌렸다는 소식을 호텔 친구들한테 전했어요. 우리는 슈퍼마켓으로 우르르 몰려갔어요. 육식을 좋아하는 아심은 소고기와 돼지고기와 양고기, 그리고 생닭 한마리를 골랐고 조반나는 생선과 훈제연어와 엔초비와 빵을, 그리고 쿠트는 맥주 네 박스와 샴페인 한 병을 카트에 집어넣었어요. 나는 호박과 고구마와 대파, 고수, 마늘과 밀가루를 골랐어요. 카트 하나로는 모자라서 하나를 더 가져와야 했어요. 어말은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어요. 돈을 내지 않는 대신 요리를 하겠다고 했거든요. 슈퍼마켓을 나가기 전에 우리는 쯔야끼 씨에게 줄 국화꽃 한다발을 마지막으로 샀어요. 쯔야끼 씨가 그려준 약도를 보고 우리는 집을 찾아가기로 했어요. 거리가 꽤 멀었지만 걷기로 했어요. 우리는 너무나 들떠 있어서 그깟 거리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거든요. 쯔야끼 씨 집에 가는 동안 재료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고, 그건 소고기와 양고기를 고른 네 탓이다, 아니다, 훈제연어와 엔초비를 겁도 없이 막 산 네 탓이다, 아니다, 맥주를 네 박스나 산 쿠트 탓이다 하며 아심과 조반나와 쿠트가 거리에서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어요. 쯔야끼 씨는 밥통 한가득 뜨거운 밥을 지어놓고, 부엌을 깨끗이 치워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쯔야끼 씨 부엌은 거실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부엌문을 밀고 나가면 바로 텃밭으로 연결되어서 언제든지 허브나 파, 깻잎 같은 걸 바로바로 뜯어서 사용할 수도 있었어요. 마치 나의 부엌처럼 말이에요. 나는 금방 그 부엌에 익숙해졌어요. 아심과 쿠트와 조반나가 빵을 썰어 훈제연어, 엔초비와 먹고 있는 동안 나와 어말은 각자 요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잘 씻은 닭에 통마늘과 쌀을 야무지게 채워넣곤 쯔야끼 씨 부엌에서 가장 큰 냄비를 골라 물을 붓고 안쳤어요. 메인 메뉴인 고기요리는 모두 어말이 하겠다고 해서 나는 전채로 고구마와 호박전을 부쳐내고 간장과 마요네즈를 섞은 오리엔탈 쏘스 쌜러드를 만들었어요. 혼자 사는 쯔야끼 씨 좁은 집은 금세 음식냄새로 가득 찼어요. 한쪽에서는 삼계탕이 끓고 있었고 쯔야끼 씨와 친구들은 빵과 쌜러드를 먹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어요. 어말이 고기를 굽는 동안 나는 통째로 도미를 찌고 참기름에 고수 이파리를 뜯어 넣고 쏘스를 만들었어요. 요리가 담긴 접시를 내갈 때마다 쯔야끼 씨와 친구들은 환호성을 질러댔죠. 접시가 모자라서 냄비뚜껑을 써야 하기도 했어요. 쿠트가 펑, 소리가 나게 샴페인을 땄어요. 각자의 잔마다 철철철 샴페인이 흘러넘쳤어요. 술은 달았고 음식은 맛있었어요. 빵은 넘쳐나도록 많았어요. 조반나는 울었어요.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각자 제 나라의 노래를 한곡씩 돌아가면서 부르고 있었어요. 나는 삼계탕이 다 익었다는 핑계를 대곤 얼른 부엌으로 갔어요. 조반나처럼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말이에요. 밤늦도록 우리는 먹고 또 먹고 마셨어요. 춤을 추기도 했어요. 그것은 우리들의 첫번째 파티였고 그리고 마지막 파티가 되었어요.

그 친구들은 정말로 타조를 타러 갔어요. 여기서 27킬로미터나 떨어진 농장으로 자전거를 타고 말이에요. 타조를 타러 갔다온 이틀 후에 얇은 여름옷을 겹겹이 껴입은 조반나는 짐을 꾸려 떠났어요. 그후에는 아심이 떠났고 쿠트와 어말이 차례대로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어요. 이별은 순식간에 시작되었다가 순식간에 끝났어요.

쯔야끼 씨.

나는 이 지도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지도에는 없지만 매디슨가 57번지에는 낡고 초라한 삼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어요. 거기에는 나의 남편이 살고 있고 또다른 이들이 살고 있어요. 그들은 여기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황금색의 가는 펜을 하나 샀어요. 그리고 매디슨가 57번지 그 삼층짜리 건물을 이 지도에 새로 그려넣었어요. 아주 작지만 눈에는 띌 만큼. 쌀 한톨만한 크기로 말이에요. 떠나기 전 이 새 지도를 당신께 드리고 가고 싶습니다, 쯔야끼 씨. 이 지도에 점을 하나 찍는 순간, 나는 어쩌면 지금 내가 책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어요. 없던 점 하나를 새로 찍은 것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동으로 만든, 내가 새로 발견한 그 무엇을 내려놓는 작업이었거든요. 글을 쓴다는 건 무엇인가요, 쯔야끼 씨. 쓴다는 건 종이 위에 나를, 나의 표상 하나를 거기에 내려놓는다는 게 아닐까요. 이것은 보잘것없는 지도 한장에 불과하지만 이 얇고 가벼운 한장 종이 위에 나는 나의 첫번째 표상을 내려놓았어요. 그러므로 이것은 나의 첫번째 책입니다. 오직 단 한사람만이 단 한권의 책과 조우할 수 있듯이 이 지도 또한 누군가와 일대일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서로 다른 곳에 있지만 1월의 편서풍과 7월의 무역풍 속에서 우리는 같은 바람과 같은 기후로 살고 있듯, 우리의 은밀한 의식은 이 한 페이지 위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나는 돌아가서 남편의 책상 앞에 앉을 생각이에요. 거기 앉아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어요. 시간이 흐른 후 나도 나의 삶을 살았다, 썼다, 그리고 사랑했다,라고 짧게 요약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아주 실패한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쯔야끼 씨, 혹시 그를 만난다면 이렇게 전해주시겠어요? 그가 맨 처음 글을 쓰기로 했을 때, 그것은 삶을 위해서였다는 걸 부디 잊지 말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