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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위기의 환경운동, 이제 변해야 한다
이필렬 李必烈
에너지대안센터 대표. 방송통신대학 문화교양학과 교수. 저서로 『에너지 대안을 찾아서』 『에너지 전환의 현장을 찾아서』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 『다시 태양의 시대로』 등이 있음. prlee@energyvision.org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사를 2년이 지난 지금 꼼꼼히 읽어보았다. 취임 당시 대충 읽었을 때 들었던 실망감이 더 크게 살아났다. 2년이나 묵은 취임사를 이제 와서 다시 찾아 읽은 이유는 작금의 각종 반환경적 사태를 보며 당시에 그가 환경문제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거기에는 온통 경제성장을 위해 진력하겠다는 다짐으로 수렴될 수 있는 말들이 가득 차 있었다. 단 한번, 생태위기에 관한 담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지속가능한’이라는 말이 등장하지만, 이 말은 그 뒤에 오는 성장을 수식하기 위해 차용되었을 뿐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취임사의 하일라이트가 바로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용어는 노무현 정권의 경제성장에 대한 깊은 소망을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방식으로 집약한 것이었다. 지속가능이란 말이 놓여야 할 자리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아무데나 갖다붙이면 환경문제에 대한 염려를 진정시킬 수 있다고 기대했던 걸까?
당시에 나는 취임사에 대한 실망감을 엉뚱하게도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탓함으로써 해소하려 했다. 환경운동이 10년 이상 매우 활발했음에도 개혁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탄생한 대통령의 입에서 환경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었다는 것은 바로 환경운동이 그동안 뭔가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지역의 환경현안을 둘러싼 싸움만이 아니라 국민에게 환경에 관한 담론을 심기 위해 힘을 쏟았다면 취임식에서 환경이 완전히 무시당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정치, 특히 한국의 정치는 표를 따라간다. 생태적 가치에 바탕을 둔 대전환에 동의하는 국민이 약간만 있어도 정치는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무현정권이 환경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경제를 강조한 것은 국민의 성향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국민은 자기가 사는 지역은 그런대로 환경이 지켜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국가 전체적으로는 자꾸 개발을 해서 경제성장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어찌됐든 국민 대다수는 성장만이 각종 문제해결의 묘책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용어는 바로 환경에 대한 약간의 부담감은 진정시키면서 이러한 믿음과 기대를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 2년 동안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노무현정권은 핵폐기장, 새만금, 천성산, 사패산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환경단체들은 주로 싸움에 집중했고, 정부와 마찬가지로 국민으로부터 서서히 외면당해왔다. 그리고 지금 환경을 둘러싸고 정부와 환경단체는 최악의 대결국면에 와 있다. 최근까지 정부는 천성산 터널공사를 막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벌이는 한 스님의 단식에 꿈쩍도 하지 않았고, 환경단체는 ‘환경비상시국회의’를 선언하고 정부와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환경비상시국회의’에는 전국의 100여개 환경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여론은 환경단체 쪽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전국의 환경단체와 환경운동 원로들이 비상시국임을 선언하고, 환경운동가들이 수십일간 농성을 벌이고, 게다가 ‘대표단’이 꽤 오랫동안 공동단식을 벌여도 여론의 주목은 거의 받지 못했다. ‘환경비상시국회의’가 현 상황이 비상시국임을 널리 알리고 정부정책을 규탄하기 위해 개최한 전국환경인대회에도 수백명밖에 모이지 않았고,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 1월 초부터 한달 가까이 전국을 돌며 환경파괴 현장을 고발했던 ‘초록행동단’의 활동도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 것 같다.
노무현정권의 반환경적 정책은 이미 취임 때부터 예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취임 후 2년 동안 환경운동은 무얼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비상시국이라고 외치는 것일까? 게다가 국민의 관심도 끌지 못하면서 왜 농성, 단식, 전국순회집회 등을 두달도 넘게 벌이는 걸까? 지금이 비상시국이라는 명목으로 환경단체가 벌이는 일들을 보면 어느 언론인이 진단했듯이 현 상황은 환경의 위기라는 것도 분명하지만 동시에 환경운동의 위기라는 생각도 든다. 환경운동가들은 지금에 와서야 운동 자체가 위기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지난 2년 동안, 아니 그전부터 환경운동은 조금씩 위기 징후를 보여왔다. 그것이 작년 말 결국 환경위기를 고발하는 외양을 지닌 ‘비상시국회의’의 형태로 터져나온 것이다.
참여정부는 두 가지 커다란 환경관련 과제를 짊어지고 출범했다. 그것은 김대중정권이 끝날 무렵에 발표된 핵폐기장 건설사업과 김대중정권 내내 심한 논란을 유발했던 새만금간척사업이었다. 둘 다 참여정부의 작품은 아니지만 참여정부로서도 쉽게 포기할 수 없고, 환경단체로서도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결국 정부와 환경운동진영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둘 사이의 틈은 벌어질 대로 벌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핵폐기장 건설과 새만금간척사업 모두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저항으로 정부 뜻이 관철되지 않았음에도 그 결과가 환경운동단체에 득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안 핵폐기장 건설계획은 백지화되고 새만금간척사업은 일시 중단되는 성과가 얻어졌지만, 부안 주민이나 일반시민의 신망을 얻은 인물은 문규현 신부나 김인경 교무 같은 종교인이었다. 환경운동단체는 지역주민으로부터 그다지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두 사안과 관련해서 가장 열심히 활동한 단체는 환경운동연합이었다. 그러나 부안의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음에도 2004년 한해 동안 환경운동연합의 회원수는 8천명에서 7천명으로 줄어들었다(『한겨레』 2004년 12월 21일자).
2003년과 2004년 굵직한 사안을 놓고 환경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했음에도 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오히려 회원이 떨어져나간 원인은 무엇일까? 회원의 감소에 대해서는 경기침체가 주요원인이라는 진단이 나오곤 한다. 여기에 부수적으로 시민과 함께하는 것도 별로 없고 ‘세상을 바꾸려는 꿈과 용기’도 없는 환경운동의 방향이나 활동방식의 문제가 곁들여진다(조홍섭 「환경의 위기, 환경운동의 위기」, 『한겨레』 2004년 12월 6일자). 나는 회원의 감소가 환경운동의 위기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지표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회원 감소의 원인이 경기침체에 있다는 진단은 너무도 안이한 것이다. 환경단체에서는 종종 회원수 감소를 재정의 어려움과 연결시킨다. 그런데 이는 회원이 단체의 주인이 아니라 단체 재정에 도움을 주는 후원금 납부자 정도로 인식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비를 내는 ‘진성’ 회원의 증감은 환경단체가 풀뿌리 단체를 지향하든 로비성 단체를 지향하든 그 단체의 힘·건전성·장래성 여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만일 이를 부정한다면 그 단체는 시민운동단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만다. 단체의 재정은 회비가 들어오지 않아도 충당할 수 있다. 수익사업을 벌이거나 기업체의 후원을 받거나 정부의 프로젝트를 수행해서 운영비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로비성, 캠페인성 운동은 얼마든지 벌여나갈 수 있다. 물론 한번 이러한 길로 들어서게 되면 회원은 점점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고, 회원이 늘어나는 것이 큰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다. 회원 몇명이 늘어나봐야 들어오는 돈은 얼마 안되지만, 기업체나 프로젝트는 한꺼번에 큰 돈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단체활동가 사이에서는 단체의 주인은 회원이 아니라 직업운동가라는 인식이 점차 퍼지게 된다.
한국의 환경단체 중에서 회원의 의미를 부정하는 단체는 없다. 대부분 ‘회원과 함께’를 강조한다. 그러나 회비라는 한계를 고려하면서 활동을 벌이는 단체는 거의 없고, 전체 운영비 중에서 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운영비의 상당부분이 기업체의 후원금, 정부나 공익재단의 프로젝트에서 마련된다. 물론 이에 대해서 변명할 여지는 있다. 활동분야는 점점 늘어나는데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활동분야를 넓히면 그만큼 활동가의 수가 늘어나고, 지급해야 할 급여와 활동비가 늘어난다. 이것을 회비로 충당하지 못하면 결국 기업의 후원금 같은 것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꾸준히 일정한 액수의 돈을 기업에서 후원받을 수는 없다. 기업은 후원금을 내는 것이 얼마나 유리할 것인지 주판알을 튕기거나 인간관계에 따라 지원하기 때문에 변동이 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후원금이 많이 들어올 때는 활동가를 늘릴 수 있지만 후원금이 적어지면 활동가의 급여를 주기도 어려운 상황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급여 수준도 상당히 낮은데 그것마저도 제때에 나오지 않는다면 정말 힘있는 활동을 벌일 수 있을까? 한국의 큰 환경단체 활동가들 중 상당수는 낮은 급여, 잦은 농성으로 인한 스트레스, 뚜렷한 비전의 부재라는 문제를 안고 있을 것이다. 2004년 가을 녹색병원에서 시행한 검진 결과 환경활동가는 일반직장인보다 건강이 7배나 더 나쁘게 나왔다는 사실은 이러한 문제가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님을 보여준다(「시민단체 활동가 건강 ‘빨간 신호등’」, 『시민의 신문』 2004년 9월 15일자).
한국의 환경운동가들이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한편으로 그들의 ‘권력접근성’은 계속 높아져왔다. 김대중정권 때부터 시작된 환경단체와 정부 간의 대화·협력은 참여정부 들어서는 더 활발해졌다고 할 수 있다. 부안에서 핵폐기장 반대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정부 일각에서는 계엄을 발동해야만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다고 인식하는 동안에도 공식·비공식 접촉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접촉의 ‘결실’과 그 문제점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2004년 4월 환경단체들과 산업자원부의 합의로 결성된 ‘에너지정책민관합동포럼’이었다. 준비회의에서 산자부가 제시한 내용은 이 기구에서 핵폐기장을 비롯하여 에너지정책 전반에 관한 정부정책을 심의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에너지정책을 입안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산자부의 제안은 준비회의에 참석한 환경단체 대부분에 의해 수용되었고, 이로써 겉보기에는 획기적인 ‘거버넌스’(governance, 協治) 기구가 출범하였다. 그런데 이 기구는 두달 후 10개의 시민단체들이 모두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아무 결실도 없이 좌초하고 말았다.
‘에너지정책민관합동포럼’에 대해 환경단체들은 꽤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반핵국민행동’이 탈퇴이유를 밝힌 성명서에서, 정부와 에너지 문제에 대해 대화하고 협력함으로써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에너지 정책을 적정하게 수립·추진하여 에너지정책 거버넌스를 실현코자 했다”고 이야기했듯이 환경단체들은 에너지정책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두달도 못 가서 환경단체가 정부를 극렬하게 비난하고 탈퇴함으로써 정부와 환경단체의 ‘거버넌스’ 시도는 무산되었다. 환경단체는 ‘에너지정책민관합동포럼’이 무산된 데는 전적으로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에서 핵폐기장 건설 추진일정을 중단하기로 합의했지만 이를 깨버렸고, 핵폐기물 정책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자는 환경단체들의 제안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에너지정책민관합동포럼’ 출범 당시의 합의사항들은 환경운동 방향에 대해 조금이나마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혼란을 줄 수 있었다. 공익을 위해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임의의 결사체에 불과한 환경단체가 어떤 형식으로든 국민의 위임을 받아서 국가를 책임지게 된 정부와 공동의 팀을 구성해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환경단체들은 당당하게 그러한 팀까지 만들어서 “에너지정책을 적정하게 수립”하려 했다지 않은가? 이제 환경단체는 정책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까지도 환경운동의 일부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김대중정권 전까지는 반대운동이 환경운동의 주류였고, 김대중정권 때는 약간의 자문역할을 했다. 참여정부에 들어와서는 자문을 넘어 ‘거버넌스’로 나아가자는 생각이 환경단체들 사이에 퍼진 것인가? 그렇다면 그 다음은 어딘지, 환경운동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혼란이 오는 것이다.
정부와 환경단체가 공동으로 정책수립팀까지 구성했다는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단히 ‘선진적’인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금방 깨져버렸다는 사실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정부나 환경단체 모두 환경운동에 대한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태스크포스팀’은 ‘에너지정책민관합동포럼’을 구성할 때 발표했듯이 정부가 환경단체를 정책수립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있고, 환경단체는 스스로 구체적인 정책수립에 참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공동의 정책수립팀까지 구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토록 ‘선진적’인 기구가 깨진 것은 바로 그러한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기구에의 참여는 환경운동의 본령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대표성이나 정당성이란 기준으로 접근할 때 끊임없는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란은 환경단체가 정부 위원회에 참여하는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정부 위원회는 자문기구의 성격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참고의견을 낸다는 의미에서 참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엄격하게 따지면 논란을 피해가기 어렵고, 환경단체가 정부의 장식용 들러리로 이용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에너지정책민관합동포럼’이 결성되었다가 금방 무산된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환경단체 내부에서도 이에 대해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 정부 상대의 대화기구가 하나 생겼다가 대화가 제대로 안되어서 환경단체에서 깨버렸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나 정부는 신뢰라는 측면에서 환경단체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정부는 이 기구를 통해서 핵폐기장 문제도 풀고, 더 나아가서는 원자력정책과 에너지정책에 대해 환경단체와 논의도 하고 이용도 하겠다는 절반의 진정성을 가지고 환경단체에 미끼를 던진 것이다. 환경단체는 이 미끼를 큰 고민없이 덥석 물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입맛에 맞지 않자 뱉어버렸다. 얼마든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면 환경단체가 어떻게 신뢰를 받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결과는 처음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올바른 태도였다. 정부가 절반의 진정성을 보인다고 해서 환경단체도 적당히 정부와 어울리려 한다면 손해보는 쪽은 환경단체일 수밖에 없다. 정부는 권력을 위임받아 그것을 행사하는 기구이지만, 환경단체는 임의단체로서 자기를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비상시국회의’는 참여정부의 거대한 환경파괴 계획에 맞서서 환경운동진영이 자기를 증명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여러가지 판단착오와 신뢰의 실추로 인해 야기된 운동의 위기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겠다는 몸부림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지만 ‘환경비상시국회의’가 정말 그러한 깊은 고민 끝에 나온 행동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시민들에게 호소하고 회원들의 마음을 다시 끌어오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나아가기 전에 다양한 형태의 논의를 통한 준비가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없이 갑자기 ‘비상시국’이 선포되어 농성이 시작되고, 갑자기 ‘대표단’이 단식을 시작하는 것으로 비친다면, 회원과 시민을 끌어당길 수는 없다. 급기야는 함께 단식을 하던 ‘대표단’의 일원이 대통령의 환경비서관으로 발탁되어 청와대로 들어가는 일까지 벌어진다면, 단식이나 농성이 조금도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없고 ‘시민 속으로 들어가서 시민과 함께’라는 구호가 거짓으로 비칠 것이다. 결국 ‘비상시국’이란 말을 붙이면서 농성이나 단식을 해도 그것은 하나의 이벤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경비상시국회의’를 벌이면서도 환경운동가들은 회원이 단체의 주인이고 시민이 운동의 지지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환경운동가들이 회원을 단체의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경향은 단체가 커지고 오래될수록 강화되는 것 같다. 회원들의 대표가 존재하고 집행위원회와 대의원대회가 있지만, 중요한 결정은 대부분 사무총장과 활동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회원이 급격히 줄어들어도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회원이 감소하고 회비수입이 줄어들면 활동방식에 대해 반성하고 조직을 과감하게 정비해야 할 터인데, 활동가 자신들만 단체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일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하지만 환경운동의 반성과 정비는 현재의 환경 위기와 환경운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회원이 주인이고 시민이 동반자라는 생각을 조직의 기본으로 삼고 정비를 해가야 하는 것이다.
회원과 시민은 결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물론 방관자이지만, 또다른 상당수는 관찰자이자 참여자이다. 환경운동을 4년 이상 해온 경험에 비추어보면 회원은 물론이고 관심있는 시민은 끊임없이 환경운동을 관찰한다. 관찰 결과 운동에 공감하고 자신이 회비를 통해서라도 지원하고 싶을 때 회원으로 가입한다. 갑자기 회원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회원들이 시간이 지나서 단체의 활동에 더욱 공감하게 되면 활동에 직접 참여하면서 단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그렇다면 회원 중심, ‘시민과 함께’를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들이 무엇을 바라는가를 항상 고민하면서 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 우선 이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환경단체가 순수하기를 바란다. 어떤 형태든 기업의 돈을 받는 것,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물론 후원금 받는 것을 이해하려고는 한다. 회비만으로는 운영이 안되고 할 일은 많으니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순수하기를 바라는 것은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시민운동에 참여하던 사람이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의 정책수립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좋게만 보지 않는다.
적극적인 관찰자로서의 회원과 시민은 환경단체가 가능하면 원칙을 지키길 바란다. 어떤 때는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극단적인 반대운동을 벌이면 이들은 혼란스럽다. 이들은 환경단체가 자기 비전을 갖고 목표를 향해 큰 흔들림 없이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환경운동가는 급여는 낮지만 권력에의 접근 가능성이란 면에서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들은 평간사 신분으로도 정부의 국장급과 대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하고, 국·처장급이면 장관과도 상대한다. 이에 비해서 민간기업체나 정부 산하의 공단에서는 부장급의 간부도 정부의 사무관이나 주무관이 상대한다. 중앙부처의 주무관 앞에서 공단의 부장이 기를 못 펴는 게 현실이지만, 환경운동가는 이들보다 훨씬 위의 책임자를 상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환경운동가들이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추구하고,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회원과 시민의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환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만, 실제는 종종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들만이 운동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정부와 협상하고 공동기구를 만들고 정책수립에도 참여하겠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각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정부와 대화하거나 협상할 필요도 있고 정책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도 원칙에 입각해 한계를 분명히 정한 상태에서 임해야 한다. 그리고 여러 논의를 통해 신중하게 결정한 것이면 쉽게 파기해서는 안된다. 그래야 신뢰를 잃지 않고, 회원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으면서 이들을 끌어올 수 있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기 원한다고 해서 회원과 시민이 대결이나 싸움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개혁을 원하고 더 나아가서 전환을 기다린다. 하지만 격렬한 싸움을 통해서 개혁이 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된 현 싯점에서 시민들은 싸움이 아니라 건설적인 논의의 확대와 대안제시를 통한 개혁을 원한다. 격렬한 싸움은 사실 민주화 수준이 낮은 상황에 맞는 것이다. 이들은 권력이 국가폭력을 남용하는 것도 비판하지만 환경단체의 극단적인 행동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각성한 시민은 개혁을 끊임없이 외치기만 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진정한 개혁은 고대한다. 정부나 환경단체가 모두 이러한 개혁을 하기 원하는 것이다. 지율스님의 단식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꽤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들은 단식이란 극단적인 형태로 문제를 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대안적인 논의를 통해서 문제가 풀리길 바란다. 터널이 천성산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우회노선의 문제, 고속철도와 교통정책의 문제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논의에 대해 언론이 관심을 안 보이고, 그 결과 시민의 관심을 촉발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고 단식이나 농성 같은 방식의 운동만 계속 벌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부안에서와 같이 정부가 주민의 뜻을 무시하고 폭력적으로 밀어붙이는 경우에는 강렬한 반대운동도 필요하다. 이는 부안에서의 반대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전국적인 지지여론이 형성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안에서의 운동이 전국적인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냈던 중요한 이유가 원자력정책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반대운동이 지역이기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200여일간 계속된 평화로운 촛불집회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차분한 논의는 처음에는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성을 가지고 꾸준히 계속하다보면 서서히 주목을 받게 된다. 시민의 관심이 모아지고 각성하는 시민이 늘어나면, 이는 결국 회원의 증가로 이어진다. 그리고 작은 것부터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다. 개혁은 바로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환경운동은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진정성과 설득력을 지닌 대안적 운동이 언젠가는 큰 변화를 이룩하리라는 믿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