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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이라크, 그참상

 

 

다르 자마일 Dahr Jamail

알래스카 앵커리지 출신의 독립 언론인. 그의 기사들은 썬데이 헤럴드(Sunday Herald), 인터 프레스 써비스(Inter Press Service), 네이션(The Nation)의 웹싸이트, 또한 그가 이라크 통신원으로 있던 뉴 스탠더드(New Standard) 인터넷뉴스 싸이트에 실려 있다. 그는 플래시포인츠(Flashpoints) 라디오의 이라크 특별통신원인데 BBC, 디마크러씨 나우!(Democracy Now!), 프리 스피치 뉴스(Free Speech News), 라디오 싸우스 아프리카(Radio South Africa)에도 등장한 바 있다. website@dahrjamailiraq.com

ⓒ Dahr Jamail 2005 / 한국어판 ⓒ (주)창비 2005 website@dahrjamailiraq.com

 

 

 

편집자 주

미국의 침공부터 지난 1월 30일 선거에 이르기까지 이라크 현장에 대한 서방 언론의 보도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대다수 기자들은 미국의 언론통제방침에 따라 미군에 ‘배속되어’(embedded) 취재했으며, 저항세력의 폭탄테러 및 납치·살해가 잇따르자 바그다드의 안전한 호텔에 앉아 미군측의 보도자료를 적당히 엮어서 기사를 작성하는 이른바 ‘호텔 저널리즘’까지 성행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독자적으로 현장을 답사하여 그 진상을 생생하게 보도하는 전선기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데, 다르 자마일이야말로 이런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기자이다. 여기 실린 그의 글은 1월 7일 Tomdispatch.com에 기고한 글로서 원제는 “Iraq: The Devastation”이며 말미에 한국 독자를 위해 짤막한 말을 덧붙였다. 이 글 이후에도 그는 미군의 공중폭격이 야기한 참상을 고발하는 「폭격 아래에서의 삶」(Living Under the Bombs)을 비롯해 생생한 현장취재 기사를 여러편 썼는데, 그의 기사는 웹싸이트(http://dahrjamailiraq.com)에서 찾아 읽을 수 있다.

 

 

이라크의 참상?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 지난 열두달 중 일곱달을 이라크에서 일한 후에 그 참상을 묘사해보겠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른다.

불법적인 이라크 전쟁과 점령은 부시행정부에 따르면 세 가지 이유로 수행되었다. 첫째는 대량살상무기인데 아직껏 발견되지 않았다. 둘째는 사담 후쎄인 정권이 알카에다와 연계돼 있다는 것이나 이것이 입증되지 않았음을 부시도 개인적으로 인정했다. 셋째는 ‘이라크 자유 작전’이라는 바로 그 이름에 각인되어 있듯이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이라크는 해방된 나라이다.

간간이 떠나 있기는 했지만 나는 열두달 동안 해방된 바그다드와 그 근교에 있었고, 4월의 팔루자 포위공격 동안 그 안에 있으면서 머리 위로 병사들의 경고사격을 두 번 이상 받기도 했다. 나는 남부와 북부 이라크를 여행했고, 중부 이라크 주변을 광범위하게 돌아다녔다. 그러나 외국인 기자가 이 나라를 여행하기가 훨씬 쉬웠던 2004년의 첫 몇달에 내가 목격한 것이 그해의 나머지 기간에(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2005년에도) 벌어질 참사를 강력하게–심지어 예시(豫示)적으로–맛보게 해주었다. 지금은 잊혀진 작년 상반기로 돌아가, 우리가 이 나라를 점령한 비교적 초기였던 그때조차 실로 이라크인에게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기억해둘 만하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이라크인에게 우리의 침략과 점령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에 해당되었다. 예컨대, 인권으로부터의 해방(아부 그라이브Abu Ghraib에서 자행되었고, 아직도 그곳과 다른 곳에서 매일 일어나는 잔혹행위를 생각해보라),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기반시설로부터의 해방(기능 불량이 된 전기체계와 수마일 길이의 가스라인, 거리에 방치된 하수오물을 생각해보라), 거주할 도시 전체로부터의 해방(지금쯤 공중폭격과 여타의 수단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지역이 초토화되어버린 팔루자를 생각해보라) 말이다.

이라크인들은 그때 이미 비참했고 혼란스러웠으며 부시행정부가 깨뜨린 무수한 약속으로 말미암아 황량함 한가운데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 내가 초기에 알게 된 해방된 이라크인들은 모두가 정말 문자 그대로 가족이나 친구가 미군에 의해서 또는 전쟁·점령의 결과로 살해당하는 일을 겪었다. 전쟁·점령의 결과에는 대량실업과 치솟는 에너지가격 때문에 식량이나 연료를 구할 충분한 돈이 없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의 현실들이나 그밖에 앞서 언급한 제반 상황으로 야기된 무수한 참사도 포함된다. 깨어진 약속들, 파괴된 사회기반시설, 파괴된 이라크 도시들이 2004년 초기의 그 몇달에 벌써 명백히 드러났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그때 목격한 참상이 그후로 악화되기만 했다는 것이다. 이라크인의 일년 전 삶은 비록 끔찍하기는 했으되 미국 점령하에 장차 벌어질 것에 비하면 서곡에 불과했다. 경고의 징후는 박살난 사회기반시설에서부터, 그 모든 고문행위에, 자라나는 폭력저항에 이르기까지 분명했다.

 

 

깨어진 약속들

 

우리가 이라크에 가져다준 해방의 진정한 본질을 이라크인이 벌써 알고 있었음이 지난해 그 첫 몇달을 겪은 신출내기 기자에게조차 금방 명백해졌다. 미국 언론이 아부 그라이브 감옥 안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행위들을 보도할 때가 되었다고 결정하기 훨씬 전에 대다수 이라크인은 자기 나라의 ‘해방자들’이 자기 동포들을 고문하고 능욕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예컨대, 2003년 12월 바그다드의 한 남성은 내게 아부 그라이브의 잔혹행위를 거론하면서 “그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사담 후쎄인조차 이런 짓은 하지 않았소! 이건 선행이 아니잖소. 그들은 이라크를 해방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그때쯤 이미 고초를 겪은 사람들에 대한 황량한 농담들이 나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최근에 아부 그라이브에서 풀려나와 인터뷰한 한 억류자는 요즘 바그다드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황당한 유머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은 전기를 내 집에 넣기 전에 내 똥구멍에 넣었던 거요!”

사디크 조만(Sadiq Zoman)은 내가 목격한 상황의 아주 전형적인 예이다. 2003년 7월 키르쿠크(Kirkuk)의 집에서 붙잡힌 그는 티크리트(Tikrit) 근처의 군 수감시설에 억류되어 있다가 한달 뒤 미군에 의해 혼수상태로 살라하딘(Salahadin) 종합병원에 실려왔다. 그를 따라온 마이클 호지스 중령(Lt. Col. Michael Hodges)이 서명한 진료보고서에는 조만이 열사병으로 인한 심장마비 때문에 혼수상태가 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그의 머리가 곤봉에 맞았다는 것이 언급되지도 않았고 성기와 양 발바닥을 전기로 지진 흔적이나 몸 위아래의 멍과 채찍자국이 기록되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아내 하시미야(Hashmiya)와 여덟 딸들을 찾아갔는데 바그다드 그의 집에는 남아 있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가진 것을 대부분 암시장에 팔아버렸다. 조만이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 있을 때 침대 위에서는 선풍기가 느릿느릿 돌고 있었다. 이 동네는 바그다드 대부분의 지역이 그렇듯 하루에 평균 6시간 정도만 전기가 들어오기 때문에 바깥에서는 작은 보조발전기가 윙윙거리고 있었다.

대학생인 그의 딸 레엠(Rheem)의 말은 가족 전체의 심정을 대변했다. “이런 짓을 하는 미국인을 증오해요. 그들이 아버지를 잡아갔을 때 우리의 삶을 빼앗아간 거죠. 우리 아버지, 내 나라, 내 삶을 파괴한 미국인에게 복수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그들의 집을 방문한 2004년 5월, 아부 그라이브에서 광범하게 자행된 이라크인 고문에 가담한 병사들 중 한명에 대해서는 군사재판이 이미 진행된 상태였다. 그는 얼마간의 수감형을 판결받았으나 이라크인들은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억류된 이라크인에 대한 처우와 관련해 자신의 행동을 정화하겠다던 부시행정부의 약속이 안전하고 번영된 이라크의 건설을 돕겠다던 약속만큼이나 공허하다는 것을 그들은 또 한번 확신했을 뿐이다.

지난해, 감옥에 갇힌 사랑하는 가족을 보려고 옥문 근처에서 심란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부 그라이브의 감옥을 좀더 투명하고 접근가능한 곳으로 만들겠으며 그런 가증스런 행위에 연루된 이들을 사법처리하겠다는 공허한 약속을 받았다. 이글거리는 5월의 태양 아래, 나는 아부 그라이브 바깥에 있는, 먼지투성이에 황량하고 삼엄한 경비와 날카로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대기장소’를 찾아갔다. 거기서 나는 이 메마른 땅덩이로 끈질기게 모여들어 무서운 수용소 안에 갇힌 가족에 대한 면회 허락의 요행을 바라는 침울한 사람들로부터 끔찍한 이야기를 연거푸 듣게 되었다.

메마르고 뜨거운 바람에 두건은 맥없이 펄럭이는데 흰 디시다샤(아랍 회교도의 남자 옷–옮긴이)를 입고 딱딱하게 굳은 땅 위에 홀로 앉은 릴루 함메드(Lilu Hammed)는 근처의 감옥 담벼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서른두살의 아들 압바스(Abbas)를 콘크리트 벽을 관통해 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내 통역 아부 탈라트(Abu Talat)가 우리와 대화를 나누겠느냐고 물었을 때 꽤 시간이 지나서야 릴루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신의 도움을 기다리며 이렇게 땅바닥에 앉아 있지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미군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아무 무기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후 그의 아들은 그때까지 기소되지도 않은 채 여섯달 동안이나 아부 그라이브에 갇혀 있었다. 릴루는 이제 막 구한 구겨진 방문허가증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들과의 면회날짜가 아직 세달이나 남은 8월 18일로 잡혀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인터뷰한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릴루는 최근의 군사재판에도 수감자 이삼백 명의 석방조치에도 아무런 위안을 얻지 못했다. “이 군사재판은 허튼 수작이요. 그들은 이라크인이 재판에 참석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럴 수 없었어요. 거짓 재판이었으니까요.”

그 순간, 병사를 가득 싣고 작은 차창 바깥으로 총구를 겨눈 군용차량 호위대가 수감시설의 정문을 통해 우루루 지나가면서 엄청난 먼지구름을 일으켰고 이내 모든 사람은 먼지를 뒤집어썼다. 또다른 수감자의 모친인 사미르 부인(Mrs. Samir)은 먼지구름을 손짓으로 몰아내며 “전세계가 지금 우리가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지를 볼 수 있기 바래요!”라며 애처롭게 덧붙였다. “그들은 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나요?”

지난여름, 영어교사로 일한 적이 있는 쉰다섯살의 상냥한 여인을 인터뷰했다. 그녀는 네달 동안 사마라(Samarra), 티크리트, 바그다드, 그리고 물론 아부 그라이브까지 해서 네 군데의 감옥에 수감됐다고 했다. 그녀는 온전하게 밤잠을 자도록 허용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 음식도 물도 없이 변호사나 가족과 접촉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매일 수차례씩 심문을 받았다. 언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학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그게 최악이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단연코 아니었다. 일흔살의 그녀의 남편 역시 감금되었고 구타를 당한 것이다. 일곱달간의 구타와 심문 끝에 그는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

남편을 언급하면서 그녀는 울었다. “남편이 그리워요.” 그녀는 흐느끼다 일어나서는 우리가 아니라 방을 향해 “그가 너무도 그리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휘젓고는 가슴을 부여잡고 한참을 더 울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라고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두 아들 역시 억류되어 있고 가족이 완전히 산산조각난 상태이기 때문에 정말이지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라며 그녀는 울먹였다.

인터뷰가 끝나 떠나려고 차를 향해 걷다가 우리 모두는 벌써 밤 열시가 되어서 위험한 바그다드의 밤거리로 나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 머무르며 저녁을 먹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준 것에 대해, 시간을 내준 것에 대해, 자기 이야기를 써주는 것에 대해 고마워했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고맙지만 됐어요. 우리는 지금 집에 가야 해요”라고 아부 탈라트는 말했다. 그때쯤에 우리는 모두 울고 있었다.

바그다드의 간선도로를 따라 보름달을 마주보며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아부 탈라트와 나는 침묵했다. 마침내 그가 물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할 말이 있나요?”

없었다. 전혀.

 

파괴된 사회기반시설

 

이라크에서는 모든 것을 산산조각난 사회기반시설과 진척된 게 거의 없는 재건상황에 비추어보아야 한다. 미국인이 가장 잘하는 일로 판명된 것은 다름아닌 약속, 그리고 선전이다. 연합군 임시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가 바그다드의 안전지대인 그린 존(Green Zone)에서 이라크를 통치하는 시기 동안 그들이 배포한 유인물 내용은 2004년 5월 21일에 배포된 광고문처럼 종종 이런 식이다. “연합군 임시행정처는 최근에 라마디(Ramadi), 케발라(Kerbala), 힐라(Hilla)의 이라크 아이들에게 수백개의 축구공을 나눠주었다. 힐라 출신의 이라크 여인들은 축구공에다 수를 놓았는데, ‘우리 모두가 새로운 이라크에 참여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이라크라는 것의 기본여건을 살펴보면 실업률은 50%로 증가추세였으며, 바그다드에서 사정이 나은 지역도 전기공급은 하루 평균 6시간이 고작이었고, 안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치안상황 때문에 대부분의 재건계획이 지금처럼 거의 완전히 멈추기 전이었고, 이라크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아홉달 정도가 지났을 때인 2004년 1월로 거슬러올라가더라도 상황은 이미 파국에 임박해 있었다. 예컨대 식수 부족은 이라크 중부와 남부 대부분의 지역에 걸쳐 일반적이었다.

그 무렵 나는 벡텔(Bechtel)이 주로 맡고 있던 식수부문에서 어떤 재건이 이뤄졌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할 목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 거대기업은 2003년 4월 17일 6억8천만 달러의 수의계약을 밀실에서 따냈는데, 그것이 9월에는 10억3천만 달러로 증액됐다. 그후 벡텔은 이 프로그램을 2005년 12월까지 연장키로 하는 18억 달러짜리 추가계약을 따냈다.

서방 기자들의 여행이 훨씬 쉬웠던 그 당시, 나는 바그다드에서부터 미국인이 이제는 ‘죽음의 삼각지대’라고 부르는 곳을 거쳐 남쪽으로 힐라, 나자프(Najaf), 디와니야(Diwaniyah)까지 내려가는 도중에 식수상황을 점검하려고 여러 마을에 들렀다. 힐라 근처에서 세파에 지친 얼굴의 노인 하나가 내게 자기 물 펌프를 보여주었는데, 곁에 텅 빈 물동이만 있을 뿐 맥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전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염분이 상수도로 스며든 바람에 그의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염분투성이 물이었다. 이런 상황은 벡텔이 근처의 식수 처리시설을 복구하기로 한 계약상의 의무조항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다른 인근 마을은 염분 문제는 없었으나 메스꺼움, 설사, 신장결석, 급성 복통, 심지어 콜레라 증세까지 증가하고 있는 추세였다. 이런 현상 역시 내가 들른 마을들의 경우 꾸준한 추세로 나타날 것이다.

나머지 여정에는 힐라, 나자프, 다와니야의 시내와 근교에서 식수 없는 마을들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게 되었다. 고대 바빌론 근처의 힐라에는 기술책임자 살맘 하싼 카델(Salmam Hassan Kadel)이 관리하는 식수 처리시설과 배급쎈터가 있었다. 카델은 자기 관할의 대다수 마을들이 식수가 없는 상황인데 무너진 상수도체계를 수리하는 데 필요한 배관물자도 없고 벡텔이나 그 도급업자들과 연락도 없었다고 일러주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흔한 질병들로 앓아누웠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벡텔은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고 돈을 전부 낭비하고 있어요. 건물에 페인트칠이나 하고 있는데 그런다고 오염된 물을 마셔서 죽는 사람들에게 깨끗한 물이 생기나요. 우리는 그들에게 건물에 칠이나 하지 말고 물 펌프라도 하나 달라고 했어요.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식수를 공급하는 데 쓸 수 있지요. 미국인들이 여기 온 뒤 달라진 게 없어요. 우리는 벡텔이 돈을 낭비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증명할 수가 없군요.”

힐라와 나자프 사이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는 1천5백여명의 주민이 집 옆에 졸졸 흘러가는 더러운 시냇물을 식수로 마시고 있었다. 하나같이 이질을 앓았고 신장결석이 상당수 있었으며 콜레라도 놀랄 만한 숫자였다. 아픈 아이를 안은 한 주민이 말했다. “침략 이전이 훨씬 좋았어요. 그때는 24시간 수돗물이 들어왔죠. 지금은 오물을 마시고 있어요. 그게 전부니까요.”

다음날 아침 우리는 나자프 외곽의 한 마을에 이르렀다. 이곳은 나자프 상수도쎈터의 책임하에 있는 지역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땅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는 기존 수도관들에 구멍을 뚫어 물을 뽑아쓰려고 했다. 야간에 그 더러운 구덩이에 물이 고이면서 차올랐다. 아침이면 아이들이 구덩이 주변에 한가하게 서 있는 동안 여인들은 바닥에 남아 있는 더러운 찌꺼기 물을 퍼담았다. 모든 이들이 수인성 질병을 앓고 있는 것 같았고 마을사람들은 몇몇 아이들이 깨끗한 물을 실제로 구할 수 있는 인근 공장에 가기 위해 차량이 많이 다니는 간선도로를 건너려다 치여 죽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여섯달 뒤인 6월, 나는 추와데르(Chuwader) 병원을 방문했다. 당시 이 병원은 바그다드의 거대한 빈민구역인 사드르 씨티(Sadr City)에서 하루 평균 3천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그곳의 책임자인 카심 알누웨스리(Qasim al-Nuwesri) 박사는 자기 병원이 점령상태에서 겪고 있는 고투를 즉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약이 부족합니다”라고 말한 그는 침략 이전에는 이런 경우가 극히 드물었음을 지적했다. “금지되어 있지만 때때로 아이비(IV, 전해질·약제·영양을 정맥 내에 주입하는 장치–옮긴이), 심지어 주삿바늘까지 재사용해야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러고는 그 역시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지역 어디서건 오염되지 않은 물을 구할 수 없다는 끔찍한 식수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는 “물론 우리도 장티푸스, 콜레라, 신장결석 환자들이 있고 심지어 아주 드물던 E형 간염도 이젠 있어요. 그게 우리 지역에서 흔해졌지요”라고 사무적으로 말했다.

길거리에 오물이 넘치고 쓰레기가 널린 사드르 씨티를 빠져나오면서, 우리는 스프레이로 ‘베트남 거리’라고 씌어진 벽을 지나갔다. 바로 아래에는 분명 미국인 해방자들을 겨냥했을, “이곳을 네 무덤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문장이 씌어 있었다.

현재, 붕괴되고 있는 사회기반시설의 측면에서 보자면, 바그다드의 다른 지역도 사드르 씨티가 그 당시 겪었고 지금도 대거 겪고 있는 고통을 치르기 시작한다. 사드르 씨티에 예정된 재건계획에 점점 더 많은 자금이 들어갔지만 그러는 동안 어떤 재건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표시는 거의 없는데, 이는 바그다드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악화일로에 놓인 연료위기로 주유소에서 연료통을 채우려면 이틀씩이나 기다려야 하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도시 전체는 발전기로 돌아가고 있으며, 사드르 씨티처럼 혜택을 덜 받는 다수 지역들에서는 하루에 겨우 4시간 동안만 전기를 공급받고 있다.

 

 

파괴된 도시들

 

점령군의 고압적인 전략은 이제 이라크 삶의 일상이 되었다. 민가를 급습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언제나 옷을 입고 잠자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미군 순찰대가 이라크 도시의 저항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많은 경우 병사들은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그냥 무차별적으로 총으로 갈긴다. 더 흔한 일은 점령군의 공습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엄청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끔찍한 상황 때문에 점령기간 2년도 안된 사이에 10만 이상의 이라크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팔루자가 있다. 공습이나 포격으로 그 3/4이 파편더미가 되어버린 도시, 심지어 주민 대다수가 아직도 자기 집―수많은 집들이 이제 더이상 있지도 않지만―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 폐허 속에서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도시 말이다. 작년 11월경에 이곳에서 자행된 잔혹행위는 작년 4월 실패로 끝난 이 도시에 대한 미 해병대의 포위공격 동안 목격된 잔혹행위와 여러모로 흡사하다. 다만 11월의 경우가 규모면에서 훨씬 방대하긴 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사진증거 자료와 도시 내부 민간인 가족들의 보고를 참조하면, 미군이 이곳에서 집속탄뿐만 아니라 인을 함유한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2004년의 마지막 주에 귀향을 허락받은 몇몇 주민들이 건네받은 군 제작 유인물에는 이 도시 안의 어떤 음식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

작년 5월 팔루자 종합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들은 한달에 걸친 첫번째 포위공격 동안 벌어진 온갖 잔혹행위를 내게 알려주었다. 정형외과 의사인 압둘 잡바르(Abdul Jabbar) 박사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사망자 숫자는 물론이고 자기들이 치료한 사람의 숫자를 추적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도 도심에서 유프라테스 강 너머 반대쪽에 위치한 주 병원이 해병대에 의해 4월의 대부분 동안 봉쇄되었기 때문인데, 똑같은 일이 2004년 11월에 되풀이되었다.

그의 추정에 따르면 최소한 700명의 사람들이 그 4월 동안 팔루자에서 죽었다. “내가 다섯 곳의 쎈터(지역보건소들)에서 일했는데 이곳들의 수치들을 집계하면 그 수치가 됩니다”라고 말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 쎈터에 도착하기 전에 묻혔다는 사실입니다.”

이 도시의 인근지역인 쥴란(Julan)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부패하는 시체의 악취―또다시 이 도시의 전형적인 냄새가 된―가 그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잡바르 박사는 그때도 미국 비행기들이 이 도시에 집속탄을 투하했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집속탄에 의해 다치거나 죽었어요. 그들은 물론 집속탄을 사용했지요. 우리가 집속탄에 맞은 사람들을 치료하기도 했고 그것이 터지는 소리를 듣기도 했으니까요!”

또다른 정형외과 의사인 라시드(Rashid) 박사가 말했다. “사망자의 최소한 60%가 여성과 아이 들이었어요. 그 무덤들을 당신이 직접 가서 확인할 수도 있어요.” 나는 이미 마르티르 공동묘지(Martyr Cemetery)에 들러 정말로 아이들의 것임이 분명한 수많은 작은 무덤을 똑똑히 보았다. 그는 집속탄 사용에 대해 잡바르 박사와 같은 의견이었으며 “내 두눈으로 집속탄을 보았어요. 다른 증거가 필요없지요. 그 폭탄들 대다수가 그때 우리가 치료하던 사람들한테 떨어졌던 겁니다.”

자기 병원이 직면해야 했던 진료위기를 언급하면서 라시드 박사는 개전 후 열흘 동안 팔루자에서 바그다드로 철수하는 것을 미군이 일절 허락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도시 안에서의 환자후송도 불가능했어요. 저 바깥의 앰뷸런스를 보세요. 또한 미군 저격수들은 우리 쎈터 한 곳의 정문에다 사격을 하기도 했지요.” 실제로 여러 대의 앰뷸런스가 병원 주차장에 있었는데 그중 두 대의 앞유리에는 총알구멍이 뚫려 있었다.

두 의사 모두 미군측으로부터 어떤 연락을 받은 일도, 또 어떤 도움을 받은 일도 없다고 했다. 라시드 박사는 그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들은 약은 안 보내주고 오로지 폭탄만 보내주지요.”

이미 팔루자의 황폐함을 닮아버린 병원의 한쪽에 세워둔 차를 향해 걸을 때 한사람이 내 팔을 확 잡아끌더니 소리쳤다. “미국인은 카우보이야! 그게 그들의 역사라구! 그들이 한 짓을 보라구. 인디언에게, 베트남에, 아프가니스탄에, 그리고 이제는 이라크에 말이야! 놀랄 일도 아니지.”

물론 여태까지의 이야기는 11월 이 도시에 대한 총 포위공격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다. 저항의 수위만 고조시켜놓은 4월의 팔루자 작전은, 2004년 첫 몇달간에 일어난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훨씬 대규모로 다가올 사태의 전조에 불과했다. 최근 포위공격의 목표가 저항을 섬멸하고 1월 30일에 예정된 선거를 위해 좀더 확실한 안전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면, 그 결과는 4월의 경우처럼 안전과는 정반대였다.

팔루자가 파괴됨에 따라 투쟁은 다른 곳으로 확산되어 다만 더 강화되었을 뿐이다. 저항세력을 겨냥한 또 한차례의 공중작전이 곧 있을 거라는 경고 때문에 민간인들은 이제 이라크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인 모술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수도에서는 적어도 하루 한차례의 차량폭파가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라마디(Ramadi), 사마라(Samarra), 바쿠바(Baquba), 발라드(Balad) 같은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바그다드 전역에 걸쳐 발생하는 충돌은 끔찍스러울 정도로 규칙적이다.

투쟁의 격화는 양면적이다. 폭력의 톱니바퀴가 위로 향해 있기 때문에 미군의 전략은 갈수록 강압적이 되고 그에 따라 이라크 저항세력 역시 규모와 효과 면에서 점점 커져갈 뿐이다. 모술에 대한 어떤 종류의 ‘포위공격’도 이런 역학을 배가시킬 뿐이다.

팔루자에 대한 최근 공격의 여파에 대한 보도통제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의 거리에서 개들이 시체를 먹고 있고 이슬람 사원들이 완파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들불처럼 이라크 전역에 퍼졌다. 이런 소문은 이라크의 대다수 사람들이 현재 믿고 있는 바, 즉 해방자란 실은 자기 조국에 대한 야만적인 제국주의 점령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해줄 뿐이다. 그러니 저항이 훨씬 더 거세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항이 증가하리라는 것은 이라크인들 사이에서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일이다. 그것을 내게 일러준 인상적인 순간 하나는 작년 6월, 바그다드에서 매일같이 발생하는 차량자살폭파 사건들 가운데서 찾아왔다. 유리창은 깨지고 차체에 총알이 박힌 차들의 영상이 텔레비전 화면을 휙 지나갈 때, 나보다 연장자로 이미 폭력에 이골이 난 통역 하미드(Hamid)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작된 거야. 이런 것은 겨우 시작일 뿐이야. 멈추지 않을 거야. 6월 30일 이후에도 말이야.” 그 날짜는 물론 오래전에 약속된 대로 새 이라크 정부에 ‘주권’을 이양하는 날이었고, 그후에는 이 나라의 폭력이 잦아들기 시작할 거라고 미국의 관리들이 열렬히 예견한 바 있었다. 예견과 어긋나는 현실이라고 하는 똑같은 패턴을 다가올 선거와 관련해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3주 전에 바쿠바의 족장인 내 친구 하나가 바그다드로 나를 찾아와 그의 친구인 나이 지긋한 압둘라(Abdulla) 교수와 함께 다같이 점심을 한 적이 있다. 식사 도중 압둘라는 지금 널리 퍼진 정서를 드러냈다. “이슬람 게릴라는 조국을 위해 지금 미국인과 맞서 싸우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저항은 우리도 받아들일 만하지요.”

부시행정부는 최근 이라크 주둔군을 13만8천명에서 15만명으로 증원했다. 관리의 말로는 다가올 선거에 대비해 더 많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 병력증강은 베트남에서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확전(擴戰)이라고 불렸다.

궁금한 것은 내가 내년 1월에도 여전히 ‘이라크, 그 참상’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게 될까 하는 것이다. 지난 2004년 후반기의 끔찍한 달들―상반기는 단지 그 전조였을 뿐이었는데―은 또다시 다가올 참사를 미리 맛보게 해준 것에 불과한 것으로 입증되는 그런 글 말이다. 그 뒤 2006년, 2007년은 어떻게 될까?

 

덧붙임

 

이 글의 후기로 나는 단지 사람들이 스스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보폭을 크게 하고 멀리 내다보는 것이 긴요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을 뿐이다. 이라크에서의 미국 정책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이 실패한 점령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란에 대한 미국의 무력 위협을 봐도 그렇지만, 이는 곧바로 중국, 그리하여 한국에까지도 영향을 줄 것이다.

[申鉉旭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