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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일본의 한류 열풍

 

 

황성빈 黃盛彬

리쯔메이깐대학 산업사회학부 교수 seongbin@ss.ritsumei.ac.jp

 

 

 

일본에서 이른바 한류(韓流)가 유행중이다. 작년말에 회의 참석차 다녀온 중국에서도 한류 열풍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두 나라 사이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있었다. 먼저 중국에서는 ‘한류’가 젊은층의 문화로서 받아들여져 ‘현대적인 것’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한류에 열광하는 층은 주로 중년여성들이고, 그들에게 한류는 ‘과거 언젠가 일본에도 있었던 것’ 즉 노스탤지어(nostalgia)의 대상으로 수용되고 있다. 도대체 이 차이는 어디서 왜 나타나는 것일까.

특징적인 것은 이 현상을 바라보는 한·일 언론의 관심이 현저히 높으며, 그 내용 또한 한국과 일본의 정치·역사적 관계라는 거대담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언론에서는 “조선통신사 이래 최대의 문화상품”이라며,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온 나라가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에 배우 배용준이 이룩한 업적과 성취는 대단하다”며 감격해 마지않는다(『동아일보』 2004년 11월 27일자 사설). 일본언론은 뜻밖의 한국붐에 흥분하면서도 한국측의 반응에 놀라며 한국의 일본 인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반가워한다.

한류는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동아시아 각지에서 유행하고 있었지만 일본에는 21세기에 들어서도 좀처럼 상륙하지 못했다. 물론 이전에 한국 또는 조선의 ‘문화’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패전으로 제국이 해체되는 순간 일본에는 200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존재했고 그들은 ‘조선인’이라는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있었다. 문화영역에서는 재일교포뿐 아니라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까지도 활동했다. 이미자(李美子)를 일본에 소개한 오바따 미노루(小畑實),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의 손목인(孫牧人), 길옥윤(吉屋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후에 등장한 이성애·김연자·계은숙 등은 한국의 ‘근대가요’(‘전통가요’라고도 불리지만)이면서, 일본의 가요인 엔까(演歌)를 일본어로 불렀다. 조용필의 경우는 드물게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역시 음악적 실험을 일본에서는 충분히 하지 못했다. 그의 대표곡은 언제나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정치는 어땠을까? ‘군사혁명’세력의 지도자든 민주화세력의 지도자든 일본에서는 일본어로 말하며 일본 정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말하자면 제국–식민지 체제가 해체된 후에도 지속되는 포스트콜로니얼(postcolonial, 식민지 이후)의 문화적·정치적 풍경이었다고 할까. 이런 상황에서 일본인이 칸꼬꾸(韓國) 또는 쬬오센(朝鮮)을 식민지적 상상력의 구속에서 벗어나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본에서 새로운 한국문화로서 주목받은 것은 영화였다. 125만명을 동원한 「쉬리」에 이어 「공동경비구역 JSA」 「엽기적인 그녀」가 잇따라 성공했고, 지금은 연간 수십편의 한국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월드컵 공동개최로 형성된 우호분위기도 이러한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고 분석된다. 그리고 「겨울연가」가 2003년 4월에 NHK의 위성방송채널에서 처음으로 방송되었다. 첫 방송 이후 NHK는 잇따른 재방송 요청에 따라 그해 12월에는 위성방송에서 2차방영을 했고, 작년 4월에는 공중파에서도 방송했다. 마지막회 시청률은 20%를 넘어섰고, 이때부터 ‘후유소나(冬ソナ, 겨울연가) 씬드롬’이라는 사회현상이 생기게 된다.

 

The Quarterly Changbi

 

흥미로운 점은 이 붐이 중년여성층에서 현저하다는 것이다. 배용준의 일본방문 때 나리따공항에 모여든 팬들은 ‘오빠부대’가 아니었다. 중년여성들이 한류열풍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이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이른바 근대화론적 발전단계설인데, 중국이 한국의 70년대라면 한국은 일본의 70년대라는 설명이다. 「겨울연가」의 스토리는 ‘70년대 소녀만화’ 같고, 주연배우는 ‘왕년의 일본배우’를 연상시켜 그 시절에 소녀시절을 보낸 일본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왜 중년남성들에게는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지, 옛날 드라마의 재방송은 왜 인기를 얻지 못하는지, 만약 단순한 복고취향이라면 적어도 패션이나 생활감각에서 지금의 일본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한류스타를 보고 왜 열기가 금방 식어버리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70년대 소녀만화’를 읽은 적이 없다.

사실 텔레비전 시청률이 중년층에서 높게 나타난 원인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설명된다. 원래 NHK 위성방송은 별도의 수신료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년층 이상에서 시청률이 높다. 게다가 밤 10시에서 11시 이후의 시간대에 방송되었다. 따라서 중년여성층이 「겨울연가」에 노출되어 이를 주목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계속되는 재방송의 시청자가 되어 유행을 주도하는 집단으로 부상한 셈이다.

이를 지켜보며 필자는 두 가지 의미에서 해방의 계기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는 중년여성들의 해방이다. 이른바 중년여성은 오바상(おばさん, 아줌마)으로 총칭되며 문화적으로 주변화된 존재였다. 패전 후의 사회개혁으로 남녀평등이 어느정도 이루어졌고, 사회제도에서도 남녀불평등은 상당히 해소되었지만, 군국주의나 경제의 고도성장과 결합된 근대의 가부장주의는 여전히 일본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그들이 현실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져 유행과 소비의 주역으로 부상했다는 설명도 가능한 것이다.

또하나는 ‘아시아 콤플렉스’로부터의 해방이다. 아시아에 대한 콤플렉스가 아니라 아시아에 속하면서 아시아와 달라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 콤플렉스와 관련해서 설명될 수 있겠다. 많은 ‘겨울연가팬’들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변화에 스스로 놀라워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데 이유는 필요없다”라는 「겨울연가」의 대사를 인용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서 차별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 관심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한국에 빠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라는 말을 한다.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과거에는 뭔가 특별하고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터부’였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왜 한류가 아직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다가서지 못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90년대 이후 일본에서 일어난 일련의 ‘아시아붐’의 주역이자 미국이나 유럽에 가는 것만큼 인도나 태국, 베트남을 여행하는 젊은이들은 갑자기 일본으로 찾아온 ‘우리와 다르지 않은 아시아의 문화’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며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에 비해 아시아에 별 관심이 없고, 실제로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는 비율도 낮은 편이던 중년여성들이 오히려 다수담론의 억압에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웠다고 볼 수는 없을까? 에스닉(ethnic)으로 불리는 ‘오리엔탈’ 아시아에 관심을 가지며 보고, 먹고, 몸에 걸쳐보고, 발을 디뎌보는 소비과정의 일환으로, 그리고 그러한 소비를 통해 아시아와는 같으면서 구별되는 근대 일본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 젊은이들이야말로 근대 이후의 아시아 인식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한 세대인 것은 아닐까?

근대 이후 일본의 자의식을 규정해온 ‘탈아입구’ 콤플렉스는 이미 200년 이상을 지속해온 뿌리 깊은 사상이자 관념이고 신체화된 감각이다. 일본의 근대 아이덴티티와 아시아 인식의 정치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이 변화했음을 설명하는 담론이, 결국엔 ‘한국이 변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논의는 일본에서뿐 아니라 한국의 언론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과거의 한국 이미지는 ‘유교’나 ‘데모’ 그리고 ‘남존여비’로 상징되며 부정적이고 어두웠지만, 일련의 한류 열풍으로 부드럽고 로맨틱한 남성, 그리고 역동적이고 밝은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난 얼굴의 조센징이 로맨틱한 욘사마로’라는 특집기사(『조선일보』 2004년 11월 9일자) 제목은 이러한 변화를 날카롭게 뽑아내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과거의 성난 조선인은 ‘반일’의 상징이기도 했다. 물론 ‘반일’이란 일본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지배와 군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려는 세력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일본 극우세력에게는 이러한 ‘반일’의 얼굴이야말로 늘 화를 내고 있는 ‘쬬오센징(朝鮮人)’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성난 쬬오센징이 부드럽고 온화한 쬬오센징으로 변하기를 기대해왔고, 그러한 변화가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며, 좀처럼 성난 얼굴을 풀지 않는 모습에 대해서는 한국 민족주의의 병이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여기에서 간과해서 안될 점은 격동의 한국현대사는 일본도 포함된 냉전체제의 산물이면서 상호연관적인 역사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다시 불거지는 ‘한일협정’이나 ‘김대중 납치사건’의 문제가 어디 한국만의 어두운 역사이겠는가?

2002년 월드컵 직후 “한국인의 생생한 얼굴표정이 전달됐다는 큰 의미를 가진다”며, “데모하는 광경, 대형사고로 통곡하는 장면만을 봐온 일본인들에게는 한국인들이 밝게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변화”였다는 『마이니찌(每日)신문』 키따무라 마사또오(北村正任) 사장의 지적은, 어쩌면 왜 과거에는 웃는 모습이 여과없이 전달되지 않았는지, 한국의 일본특파원에 비해 몇배나 많은 한국특파원을 파견하면서도 왜 부정적 이미지만 각인되는 보도를 계속했는지에 대한 반추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고백하고 있다고도 할 것이다.

한류 열풍으로 한국의 이미지가 개선되고 있다는 지금도 한국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얼마 전에는 심부름쎈터가 관련된 엽기적 살인사건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제가 되었고, 서울역의 노숙자들과 경찰이 거칠게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여과없이 보도되었다. 여전히 한국인은 성나 있었고 거칠었다. 공교롭게도 이어서 ‘일본에서도’라는 멘트 다음에 보도된 일본의 ‘노숙자 대 경찰’의 대립장면은 당사자들의 얼굴을 식별할 수 없게 필터처리가 돼 있었다. 일본인들의 프라이버씨와 일본경찰, 공권력의 권위는 보호된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논의의 배경에 있고, 또 이 붐을 이용하고자 하는 정치적·경제적인 움직임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역사적 갈등을 해소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상상하고 구축하자, 단번에 동아시아 번영을 향해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달리자는 속삭임도 들린다. 이런 문맥에서 역사 속의 ‘조선통신사’도 소환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조선통신사는 문화사절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을 침략한 토요또미(豊臣)를 무찌르고 일본을 다시 통일한 토꾸가와(德川)정권과의 선린외교, 그리고 전후문제 처리를 위한 정치사절이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항간에서는 ‘아시아 공동체’의 논의가 한창이다. 한국정부도 ‘동북아시아 공동체’의 중심국가론을 제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서 불어온 한류 열풍은 충분히 반가운 소식일 수 있고, 정치·경제 통합논의에 문화적 통합까지 내다볼 수 있는 가능성을 던져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한류 열풍이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존재하는 ‘탈아입구’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과 일본이 아시아의 두 선진국으로서 아시아의 번영을 선도해나가자는 담론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과거 ‘대동아공영권’의 문화적 상상과는 얼마나 다른 것일까. 최근에 일본에서 나타나는 반중국 정서는 이러한 문화적 상상이 현실의 정치담론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게 한다.

더이상 과거를 논하지 말자며 ‘미래지향’을 속삭이는 곳 어딘가에는 과거 ‘한일합방’을 유혹했던 그 ‘문명개화론’에 안주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정부의 ‘저자세 외교’를 비판하는 언론은, 일본의 한류에 대해 지나치게 너그러운 것은 아닐까?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인의 한국관이 달라지고 있다며 이제는 우리가 달라져야 할 차례라고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문화가 아시아 대륙을 휩쓴 데 이어 일본도 정벌하고 있다는 식의 아류(亞流) 또는 한류(韓流) 문화제국주의, 또는 ‘조선통신사’적 선진문화전달론에서 어떠한 모순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왜일까? 지금의 한류 열풍은 분명 반가운 것이고 중요한 전기(轉機)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전기는 언제나 위기를 동반한다. 희망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비관주의는 무책임한 것이지만, 비판적 성찰이 결여된 낙관주의는 이데올로기며 선동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