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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지금도 계속되는 박정희 패러다임

 

황대권 黃大權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미국 유학중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3년여를 복역한 후 1998년에 석방. 저서로 『야생초 편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등이 있음. bau100@empal.com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

 

1983년 2월, 미국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대학 동아시아 도서관. 암흑과도 같았던 전두환 독재치하를 뒤로하고 한반도의 정치현실을 국제적인 안목에서 연구하고자 유학을 떠난 나는 그 무렵 매일 대학 도서관을 다니며 식사하는 것도 잊은 채 한반도 관련 자료들을 섭렵하고 있었다. 그날도 이미 뱃속에서는 꾸르륵 소리마저 잦아든 지 오래였는데, 무심코 얄팍해 보이는 책자 하나를 꺼내들게 되었다. 흑백사진들이 잔뜩 들어 있는 낡은 화보집이었는데 주로 중국인민군 관련 사진이 많았다. 후반부를 들추니 ‘조선의 빨치산들’이라는 제목 아래 산에서 행군을 하거나 밥을 해먹는 빨치산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 대원들의 사진도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산사람들을 사진으로나마 보게 되니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급히 페이지를 넘겨 출판사를 확인해보니 1950년 뻬이징에서 발간한 중화인민공화국 창설 1주년 기념 화보집이다. 같은 서가에 비슷하게 생긴 화보집이 또 하나 눈에 띄었다. 1960년대에 평양에서 발간한 것이었다. 아마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朴正熙)정권을 비방하기 위해 만든 선전용 책자인 듯했다.

찬찬히 책장을 넘기다보니 긴 칼을 찬 일본군 복장의 한 사내 사진이 나타났다. 그 밑에는 “박정희, 오까모또 중위 시절”1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잘못 보았나 하고 다시 확인해보니 광대뼈가 불거져나온 것이 영락없는 박정희였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아니 이럴 수가! 위대한 민족주의자요 우리의 영명하신 대통령께서 일본군 장교였다니!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그의 치하에서 온전히 교육을 받고 자라난 나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 몇해 전 친구들과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1979) 같은 책들을 가지고 한국근대사 공부를 하면서 간략하게나마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두 눈으로 실제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자 갑자기 견딜 수 없는 모멸감과 함께 눈앞의 터널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두 권의 화보집은 나로 하여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 동아시아의 역사를 제국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반제국주의의 투쟁으로 규정짓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뉴욕 시내의 한 문화쎈터에서 코바야시 마사끼(小林正樹) 감독이 만든 「인간의 조건」(1959~61)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일본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가 너무 길어서 이틀에 걸쳐 보았는데 상영시간이 무려 9시간 47분이나 되었다. 그것도 흑백으로. 「인간의 조건」은 전후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휴머니즘 계열의 문제작 가운데 하나로 일본영화의 전성기를 장식한 거작이다. 관동군(關東軍) 소속의 한 일본군 장교가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 온갖 고난을 겪다가 결국은 죽게 된다는 내용인데, 내가 이 영화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군국주의 전쟁의 참상이 아니라 만주에 있었던 관동군의 병영생활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겪은 한국군의 병영생활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한국군의 모태가 된 인물들이 일본군 출신 장교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똑같은지는 몰랐다. 그러고 보니 박정희 역시 관동군 출신이 아닌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화에 묘사된 한국인은 거개가 밀정 아니면 부역자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 말기에 소련군이 쳐내려오자 일제에 빌붙어 살던 한국인들이 오직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따바리쉬”(러시아어로 ‘동지’라는 뜻)를 되뇌는 모습은 가련하다 못해 비굴하게까지 보였다.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나의 고뇌는 깊어만 갔다.

대한민국은 과연 무엇인가? 에둘러갈 것 없이 미리 말하겠다. 대한민국은 박정희다. 대한민국은 박정희라는 인물의 사상과 인격이 고스란히 구현된 국가체계이자 경제단위이다. 물론 국가 안에는 성격이 다른 수많은 사상과 인격들이 뒤섞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공동체상을 만들어가지만, 현재 대한민국이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은 거의 전적으로 박정희라는 한 인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에게는 모두 아홉 명의 대통령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박정희를 위한 조연 역할에 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18년에 걸친 박정희의 통치는 하나의 국가틀을 만드는 데서나 국민들의 사고방식을 구조화하는 데서 결정적이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철저한 반일주의자였지만 국내에 지지기반이 없는 까닭에 친일파들을 중용함으로써,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적인 것을 추구했던 박정희가 집권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아놓았다.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죽은 이후 역시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全斗煥)과 노태우(盧泰愚)는 통치이념에 대해 전혀 고민할 것이 없었다. 박정희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최대한 밀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이들 세 명의 군인들이 연속적으로 통치한 기간이 모두 합해 32년이다. 이 32년의 통치이념은 한마디로 군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것이 1910년이니까 우리는 무려 82년 넘게 군국주의 아래서 살아온 셈이다. 박정희는 말하자면 일제가 이 땅에 심어놓은 군국주의 문화를 활짝 꽃피운 장본인이자 그 정수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1993년에 실로 30여년 만에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나 오랜 기간 계속된 군사통치의 후유증을 앓다가 그만 자멸하고 말았을 뿐이다.2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공적이 있다면 비록 군사정권의 힘을 빌려 정권을 잡았지만 통치기간 동안 군인들의 정치적 입김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는 것이다. 뒤를 이은 김대중(金大中)정권은 IMF로 일컬어지는 초유의 경제난에 직면하여 ‘불행하게도’ 박정희 패러다임에 의지하여 난국돌파를 시도한다. 박정희 패러다임 자체가 국제자본에 종속되어 국가경제를 운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재임기간 동안 우려할 만한 파탄은 없었다. 한국처럼 우수한 종속적 자본주의시장을 국제자본이 고의적으로 파탄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참여정부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과거사 청산과 박정희 재평가작업은 그러므로 박정희 패러다임으로부터 여하히 벗어날 것인가가 촛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박정희 패러다임의 두 가지 축

 

제목에서부터 이미 ‘박정희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썼지만 나는 이 말을 지난 세월 박정희가 주도하여 이 땅에 심어놓은 통치방식과 경제운영 씨스템, 생활양식, 사고방식 등을 두루 아우르는 의미로 사용하겠다. 박정희 패러다임의 특징을 한두 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나는 잔가지들을 다 쳐내고 딱 두 가지만 얘기하겠다. ‘획일주의’와 ‘경제지상주의’가 그것이다. 그밖의 많은 특징들, 예컨대 부정부패, 관치행정, 고속성장, 정실주의, 공작정치, 생명경시 풍조, 도덕적 해이 따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이 두 가지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먼저 ‘10월유신’을 통해 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군사적 획일주의부터 얘기를 풀어보자. 획일주의는 평생을 군인으로서 그리고 무한권력의 통치자로서 살아온 그의 생애를 볼 때 금방 이해할 수 있는 항목이다. 이것은 박정희 개인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지만 한반도가 처해 있던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와도 관계가 있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던 그 시절에 강대국 사이에서 약소국으로 살아남으려면 국민의 일치단결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게다가 남한은 동아시아에 형성된 공산주의 전선과 직접 마주하고 있는 ‘자본주의 전시장’(show window of capitalism)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공산주의 계획경제보다 더 효율적인 경제체제를 가져야 했다.3 이것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미국의 요구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이러한 내외적인 요구에 부응하여 무자비할 정도로 획일적인 통치스타일을 추구한다. 여기에는 분명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강성대국의 반열에 들고자 하는 박정희의 개인적 야심과 변절로 점철된 자신의 과거사4를 덮어버리고자 하는 정치적 고려도 한몫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과연 경제라는 것이 그러한 획일적인 통제를 통해 온전히 발전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박정희는 여기에 올인하여 빚투성이의 경제나마 고속성장에 성공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박정희처럼 일본제국주의 군대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은 다양성의 통일로부터 힘을 모으기보다 다양성을 일절 용납하지 않는 획일주의에 경도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체제 아래서 오랫동안 살다보면 사람들 사이에 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러다 막상 변화에 직면하면 판단의 옳고 그름을 떠나 눈앞에 보이는 큰 힘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려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일당독재 치하에 있던 공산주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 그 극적인 예이다. 대한민국 현대사도 그에 못지않은 극적인 변화를 여러차례 겪은바, 이 모두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주의 체제의 근본적 취약성에 기인한다. 그나저나 박정희 패러다임의 기본 특성인 획일주의는 정부와 기업은 물론 교육기관과 운동권 단체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어 과연 이것이 한 세대 안에 청산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단적인 예로 인터넷의 특정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리플’을 읽어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획일주의에 물들어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욕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이에서 고민하는 흔적이 별로 없다. 싫으면 무조건 싫은 것이다. 사실 우리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독재 치하에서 중간지대라고는 없는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 주류적 사고방식에 어긋나는 생각과 행동은 끝없는 소외와 핍박을 감수해야만 했으니 사회는 갈수록 획일적으로 굳어져만 갔다. 다행히 민주주의의 확산과 함께 우리 사회의 획일주의가 어느정도 완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고 새로 들어선 참여정부도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굳어질 대로 굳어진 관료들의 체질이 하루아침에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다른 부문도 마찬가지이지만 획일주의의 폐해가 가장 심한 곳은 경제계와 교육계이다. 박정희는 국내의 기업들을 국가경쟁력의 관점에서 수직계열화하여 정부의 지원과 특혜를 선별적으로 나누어주는 방법을 통해 기업에 대한 획일적인 통제를 일삼았다. 정부의 시책을 따르지 않는 기업을 세무조사와 금융압박을 통해 하루아침에 거덜내는 일도 예사였다. 따라서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권력을 향해 줄서기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중에는 이 관계가 역전되어 정부가 오히려 기업의 요구에 끌려다니는 형세로까지 변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정경유착 때문에 나라 전체가 하나의 주식회사로 기능하는 전체주의적 기업국가가 되고 말았다. 대기업일수록 박정희식의 획일주의가 몸에 배어 있으며 사주는 마치 기업이라는 ‘작은 국가’ 안에서 ‘작은 박정희’처럼 권력을 행사했다. 국민의 정부 이래 기업주들 사이에 박정희 향수가 급속히 퍼지게 된 것은 단지 경제가 어려워서만은 아니다.

자본과 적대적 관계에 있다는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이다. 대기업노조일수록 터무니없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내부에 획일주의가 만연해 있다. 이 나라의 노동운동이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노자관계 인식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획일주의에 의해 사고가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변화는 획일주의에 물들지 않은 주변부 노조에서부터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

교육에서의 획일주의야말로 이 땅에 박정희 패러다임이 지속적으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다. 지나친 말인지 모르겠지만 박정희시대에 이 나라의 교육은 마치 병영에서 이루어지는 정훈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생은 교관이고 학생은 사병이었다. 실제로 학생들은 총을 들 수 있는 나이인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교내에서 군사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1980년대 들어 군사훈련은 없어졌지만 학생들은 가혹한 입시제도 아래에서 오로지 성적에 목을 매는 국화빵이 되어갔다. 이러한 획일적인 교육의 목표는 분명했다. 박정희가 구상하는 ‘선진조국’을 이끌어갈 ‘근대화의 기수’를 길러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박정희의 머릿속에 있는 선진조국은 제국주의 일본이며 근대화의 기수는 사관학교 생도를 연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 단적인 예가 일본의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본따 만든 ‘국민교육헌장’이다. 그의 통치기간 내내 대한민국의 모든 교실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한번 외우고 나서야 수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불쾌한 기억 때문에 제국주의 일본을 모방했다고 내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박정희 패러다임의 두번째 특징은 경제지상주의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자본주의시대라고 부른다. 자본주의라는 말은 특정한 경제체제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말 그대로 다른 무엇보다도 경제가 가장 중요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가 중요하다는 것과 경제지상주의는 분명히 다르다. 경제지상주의는 경제를 다른 모든 것들의 가치 위에 두어야 한다는 편향적인 사고방식이다. 경제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 다른 모든 것들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이상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경제가 세상사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악법폐지를 비롯한 참여정부의 개혁정책을 주도하면서 박정희를 비판하자, 반대세력들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의 성공도 모두 박정희가 이루어놓은 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며 민주화의 공로조차 박정희에게 돌리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첫째로 박정희가 없었다면 민주화운동도 없었을 것이며, 둘째로 민주화운동이 성공한 것은 운동세력의 선동보다는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중산층의 참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근히 운동권 사람들을 당시나 지금이나 법을 우습게 아는 범법자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궤변도 이 정도가 되면 예술의 경지에 올라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마치 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의붓아버지가 법정에 나와서 “내가 널 먹이고 재워주지 않았다면 네가 감히 인권 운운하며 이런 자리에 나올 수 있었겠느냐”며 항변하는 것과 유사하다. 먹이고 재워주었다고 하여 그가 저지른 범죄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이 아님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하게 주장한다.“만약 내가 저 아이를 거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 아이는 틀림없이 길거리의 거지가 되었거나 사창가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애엄마가 죽은 이후 공사판을 뛰어다니며 정말 힘겹게 가정을 지키며 저 애를 대학까지 보냈는데 외로움에 지쳐 몇번 저 애 몸에 손을 댄 것이 그렇게도 큰 죄가 됩니까? 그리고 저 애가 지금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성폭력방지법을 제정하자고 운동을 하고 다니는데 그것도 다 내가 돈 벌어서 공부시킨 공로가 아닙니까?” 이런 얘기를 들으면 누구나 다 미친 소리 작작 하라고 윽박지르겠지만 똑같은 논리를 국가 차원에 적용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이가 사창가로 굴러떨어지는 것은 한 개인의 일이라서 나에게 별 영향이 없지만 한 나라가 그같은 처지에 떨어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불행이기 때문일까. 바로 여기에 비윤리적인 박정희 패러다임의 성공 열쇠가 숨어 있다.

박정희는 선진조국 건설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야망을 국가와 일체화시켰다. 그가 곧 국가이고 국가가 곧 그였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행위는 국가의 행위가 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설사 통치권자가 비윤리적인 사고를 저지르더라도 국가라는 전체 틀이 그로 인해 영향받는 것이 두려워 그냥 덮어버리기 일쑤이다. 이런 식으로 자꾸 통치자의 허물을 덮게 되면 국민들 사이에는 묘한 공범의식이 생겨 결국은 윤리의식이 마비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박정희가 국민들에게 끼친 가장 큰 해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최고통치자가 옳다고 믿는 생각과 행동을 흉내내는 것에는 일체의 면죄부가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여성에 대한 성적 차별과 성범죄가 만연하게 된 것이라든지,5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멀쩡한 사람을 용공분자로 몰고 그에 대해 인권유린을 서슴지 않는 행위 등이 그렇다.6 국민 개개인이 통치자를 흉내내어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단계까지 이르면 파시즘체제가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가 경제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인권을 유린하고 생태환경을 파괴하긴 했지만 아무튼 국민 모두가 먹고살 수 있게끔 만들어놓은 공로는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비단 박정희 지지자들뿐 아니라 그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들도 대부분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다. 참으로 암담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인간의 권리가 짓밟히고 삶의 터전이 유린되었는데도, 그것이 중금속에 오염된 쌀이 되었건 햄버거가 되었건 목구멍에 넘길 식량이 넉넉하니 살 만하지 않냐고 생각하는 건지 묻고 싶다. 이러한 인식에는 도대체 이 아름다운 별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이 손톱만큼도 들어 있지 않다. 모두가 경제라는 ‘종교’에 도취되어 세상이 어떻게 되건 말건 돈 앞에 엎드려 주문만 외우는 꼴이다. 경제지상주의자들은 말한다. “인권? 환경? 영성? 다 걱정하지 마라. 모든 건 시장이 알아서 해결해준다. 경기가 좋아져서 일자리가 많아지면 생계형 인권문제는 해결될 것이며, 중산층이 두터워져 정치의식이 높아지면 권력형 인권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또한 악화된 환경도 시장원리에 맡겨두면 친환경산업이 일어나 결국은 좋아지게 되어 있다. 영성도 마찬가지다. 굶주리는 자에겐 떡이 영성이다. 먼저 배불리 먹은 다음에 마음의 양식이니 영적 성장이니 하는 것을 찾게 되는 것이다. 보라, 영성과 종교에 관련된 저 많은 비즈니스를! 저런 장사를 하라고 누가 시킨 일도 권장한 일도 없다. 돈이 되니까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일랑 말고 자기 위치에서 돈 벌 궁리만 열심히 하면 된다. 나머지는 시장이 다 알아서 한다.”

하지만 시장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사회주의 경제와 복지국가 모델의 탄생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이 두 모델의 부작용이 심각하게 드러남에 따라 우리는 다시 시장만능7에 의존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천박한 자본주의와 무너진 산하

 

나는 지난 이태 동안 공동체와 농촌현실을 조사하러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지 않은 데가 없다. 때로 여전히 아름다운 우리의 산하를 보며 감상에 젖은 바도 없지 않지만 도로와 고압선에 의해 갈가리 찢긴 국토를 보며 저 무지막지한 ‘조국근대화’를 저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방이 도로로 둘러싸여 있어 아늑한 땅구석이라곤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8 도로에 의해 포위된 마을로 들어서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웃집으로 마실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은 동네가 없었다.승용차도 없는 이들 낙후된 농촌마을에서 집 앞의 넓은 포장도로는 나와 이웃을, 나와 논밭을, 나와 마을의 숲과 산을 갈라놓은 침입자이다. 그 길 위로 마을의 젊은 것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고, 피땀 흘려 지은 농산물은 헐값으로 팔려나간다. 무엇보다도 서글픈 것은 농민들이 잃어버린 고향산천을 그리워하기보다는 도시문명의 찌꺼기가 하나라도 더 마을에 들어오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생기라고는 없는 마을,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먼 적막함과 부박함이 감도는 마을, 이것이 ‘조국근대화’가 농촌에 남겨놓은 결과이다.

나는 한국의 농촌이 이렇게 피폐해지고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들어버린 것에 대해 박정희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1970년부터 일종의 농촌근대화 작업의 하나로 ‘새마을운동’을 전개한다. 이 역시 특유의 획일주의와 경제지상주의에 입각하여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목적은 농촌을 근대화하여 농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잘살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이야말로 박정희 패러다임이 정확히 적용된 결과 끝내는 파탄나고야 만 구체적 사례이다. 결과가 어찌 되었거나 박정희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새마을운동을 추진해나갔다. 새마을노래도 스스로 만들고 운동이 벌어지는 마을 현장을 몸소 누비고 다녔다. 추측컨대 그는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이 운동을 벌인 것 같다. 하나는 수출주도 산업화정책을 채택하면서 농촌의 젊은 노동력이 대거 도시로 빠져나간 데 대한 농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위로해주는 동시에 진정으로 농촌을 잘살게 해주고 싶다는 소박한 심정이며, 또 하나는 일년 뒤에 있을 제7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농민표를 다져놓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9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평화를 사랑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일제의 강제적인 식민지 근대화에 의해 현저하게 왜곡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명평화의 전통은 촌락공동체 차원에서 생생히 살아 있었다. 원래 근대화는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나며 농촌은 그에 맞추어 서서히 분해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박정희는 어느날 갑자기 농촌에 ‘전통 대 근대’라는 이분법적 칼날을 들이대고 획일적인 변화를 강요함으로써 농촌이 지니고 있던 미덕과 전통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채 천박한 자본주의 시장으로 내몰고 만 것이다. 그 결과 농촌 경관이 도시 변두리처럼 생뚱맞은 시멘트로 뒤범벅되었으며 뭇 생명들에게는 가격이 매겨지고, 마을에 유기체적인 평화로움 대신 무자비한 경쟁관계가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농민들 스스로 잘살아보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위에서 기안하고 공무원들을 동원하여 지도감독하는 형식으로 농촌근대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럴듯한 구호와는 정반대로 농민들을 객체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정략적 차원에서 지원해주지 않으면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한계를 시초부터 가지고 있었다.

생명의 자율성을 무시한 이러한 위로부터의 획일적인 개혁은 결국 누천년을 지속해온 마을공동체를 근저부터 파괴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이기심에 가득 찬 타율적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감히 말하건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야말로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전통파괴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도시야 어차피 식민지시절 일제의 강제적 근대화의 부산물로 생겨난 것으로 한국전쟁을 거치며 잿더미에서 다시 건설되었지만, 농촌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반만년의 역사와 전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것을 하루아침에 얼치기 자본주의 문화로 바꿔버린 박정희의 만행은 그가 이룩했다는 경제기적 열 개를 갖다붙여도 보상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농민들은 도대체 마음을 둘 곳이 없다. 몸은 농촌에 있지만 마음은 도시에 가 있는가 하면 아예 세상과 담을 쌓고 이대로 살다 죽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래 각 행정부서에서는 농촌을 살린다는 명분 아래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지만 대부분이 지금의 고령화된 농촌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관광사업에 치중되어 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조용히 여생을 정리하며 살아야 할 노인들더러 뜨내기 도시관광객을 붙잡아두기 위해 멋쩍은 웃음이라도 지어 보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농업이 경쟁력이 없다고 해도 식량생산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은 농촌을 박물관이나 전시장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높다. 그런 식으로 사업이 계속된다면 박정희가 심어놓은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 대신에 좀더 세련된 상업주의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농촌 본래의 기능이 회복되는 것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하긴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파편화되어버린 농촌의 현실 앞에서 별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비단 농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박정희 패러다임이 더욱 가혹하게 적용된 곳은 농촌보다 도시이다. 한국의 도시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와 도시민의 심성에 대해서는 더 얘기할 것도 없다. 오로지 경제건설에 성공했다는 이유로 박정희를 영웅시하고 과거의 통치방식을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박정희 패러다임에 익숙해져 있고 세뇌되어 있는지를 말해줄 뿐이다. 경제가 아무리 발전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발전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또한 발전된 경제가 국제적 수탈구조를 더욱 견고히하고 지구생태계를 한층 위험에 빠뜨린다면 설사 안방에 앉아 호의호식한들 그것을 과연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아직도 유효한가

 

획일주의와 경제지상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박정희 패러다임은 아직도 유효한가? 유효하다. 유효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다. 특히나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기승을 부리는 한, 박정희 패러다임에 대한 유혹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원래 박정희 패러다임은 일본군국주의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일본이 후발산업국가로서 단기간에 세계열강의 대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은 군대식으로 조직된 효율적인 군산복합체제 덕분이다. 일본식 엘리뜨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인간 박정희에게 우리 민족이 구질구질한 ‘조센징’의 흔적을 일거에 날려버리고 다시는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민족이 되는 길은 군국주의 일본을 따라잡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는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정수를 한국인들에게 아낌없이 쏟아부었고 인내심 많은 국민들은 묵묵히 참아내며 그가 바라던 ‘경제기적’을 일구어냈다. 그가 보지 말라는 것은 보지 않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직 경제만을 바라보며 달려와 이제 겨우 ‘선진조국’의 문턱에 왔나 싶은데 12억 인구의 거대한 중국이 사납게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군사통치가 끝난 지 10여년이 지났건만 달리는 말에서 채찍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10

노무현(盧武鉉)정부는 박정희식의 획일주의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제동을 걸고 있으나―이 역시 만만찮은 저항에 직면해 있지만―경제지상주의에 대해서는 그것을 답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를 갖고 있지 못한 듯하다. 참여정부에 동참하고 있는 왕년의 민주투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독재에 반대하여 그 자리에 오른 것이지 대안적인 정치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실정(失政)과 우왕좌왕이 뒤따랐다. 지금 참여정부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기로에 서 있다. 박정희 패러다임은 획일주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운 씨스템이다. 그런데 획일주의를 완화하면서 박정희 패러다임을 밀고 나가자니 힘에 부치는 것이다. 게다가 말로는 박정희를 연신 부정하면서. 보수주의자들이 참여정부 사람들을 가증스럽게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라도 참여정부는 사태의 본질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분명히 박정희시대의 패러다임으로 복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다. 이왕 획일주의를 허무는 마당에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폭넓게 허용할 것을 적극 제안하고 싶다. 지금 이 정도나마 사회의 다양성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거의가 민간영역의 적극적인 활동 덕분이다. 물론 예전과 비교하면 정부 쪽도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새로운 물결을 담아내기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달리는 말은 언젠가는 지쳐서 멈춰서게 마련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담아둘 수 있는 그릇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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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정희는 일제시절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 처음에는 타까끼 마사오(高木正雄)를 썼는데 이는 창씨개명할 때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그랬듯이 자신의 한자 이름을 변용한 것이다. 나중에 박정희는 오까모또 미노루(岡本實)라는 완전한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된다.
  2. 김영삼은 통치기간 내내 잦은 대형사고로 인해 무려 여덟 번이나 대국민사과를 했을 정도다. 물론 통치자의 관리능력 부재가 큰 이유이긴 하지만 속도전에 의한 외형확대의 오랜 관행이 한꺼번에 무너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말년에는 국난이라고 불리는 IMF사태로 임기를 마쳤다.
  3. 박정희는 쿠데타를 성공시킨 그해에 워싱턴을 방문(1961년 11월)하여 미국의 많은 기업가와 은행가들 앞에서 연설하는 가운데 “우리는 지리적으로 반공주의의 최전선에 있다”라고 말하며 적극적인 투자유치를 호소했다.
  4. 박정희는 식민지 조선의 보통학교 교사에서 일본군 장교로, 해방후에는 광복군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남로당 군책으로, 여순반란 사건 이후에는 다시 한국군 장교로 변신을 거듭했다.
  5. 육영수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박정희의 파렴치한 여성편력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지경이다. 박정희와 그의 부하들이 요상한 술자리에 대학생 신분의 여성까지 동석시킨 것은 그들의 여성관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6. 무자비한 고문과 린치를 일삼은 정보부원이나 경찰들은 자신의 행위가 국민, 즉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행하는 고문은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하는 것이며 자신은 그 대행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7. 여기서 시장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market으로서의 시장(市場)과 mayor로서의 시장(市長)이다. 마켓은 참여자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자유로이 상품거래를 하는 곳이며, 메이어는 보스로서 마켓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시장이 완전하지 않으므로 보스가 관여를 하게 되는데, 문제는 보스가 자신의 구미에 맞게 마음대로 통제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패러다임의 특징들은 대개가 마켓의 원리에 따라 자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박정희라는 보스의 독재적 성격과 야심에서 형성된 측면이 많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도 장사가 잘 안되면 사람들은 불경기를 탓하기보다 보스인 대통령을 탓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도 관치경제를 일삼아온 박정희의 유산이다.
  8. 마을과 자연이 도로에 의해 분리되어 동식물이 서로 오갈 수 없는 상태를 ‘생태적 섬’(ecological island)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경관을 망치는 것은 둘째 치고 생물종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고립된 환경 속에서 개체수가 줄어든 생물들은 점차 퇴화 멸종되어가고, 생물종으로서의 인간은 다른 유기체와의 연관관계를 잃은 채 자동차나 컴퓨터 같은 인공적인 매개체에 의지하여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9. 새마을운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제7대 대통령선거(1971.4.27) 직전인 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 전국 33,267개 리동에 시멘트 335포대가 지급되었다. 당시에 막걸리 한 잔과 고무신 한 켤레에 표가 왔다갔다했던 사정을 이해하면 그것이 얼마나 크고 조직적인 매표행위인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도전자 김대중을 아주 근소한 차이로 따돌렸을 뿐이다. 선거를 치른 뒤 박정희는 종신통치를 위한 유신(1972)을 결심한다.
  10. 친일의 과거사를 청산한다는 참여정부조차도 친일파의 원조격인 박정희가 출발시킨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선진한국’을 조기에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