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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박정희신화와 박정희체제

 

조석곤 趙錫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 주요 저서로 『한국 근대 토지제도의 형성』 『한국경제성장사』(공저), 주요 논문으로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압축성장을 위한 전제조건의 형성」 「농지개혁과 한국자본주의」 등이 있음. sgcho@sangji.ac.kr

 

 

역사는 전설이 되었고, 전설은 신화가 되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중에서

 

 

1. 머리말

 

영화 「반지의 제왕」은 이국적인(사실은 동양적인) 것에 대한 적의(사실은 공포)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재미있는 영화이다. 역경을 헤쳐가는 영웅들의 모습, 그들이 보여주는 숭고한 인간애 등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며, 때문에 영웅사관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영화를 비판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판타지니까.

그런데 영웅사관은 영웅의 어떤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비현실), 그의 실존적 자아를 부정한다. 그리고 영웅사관으로 표현되는 그 시대에 대해서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영화 속에서 역사가 신화가 되기까지는 2500년이 걸렸지만, 박정희(朴正熙)시대의 경제적 성취와 1987년 이후의 무기력함이 대비되면서 박정희는 너무 빨리 신화 속 영웅이 되었다. 이것이 그 시대의 객관적인 역사해석을 가로막는다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1 이 글의 목적은 박정희체제를 역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박정희신화의 허상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 과제가 중요한 것은 그 시대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올바른 미래전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민족중흥’을 위해, ‘잘살아’보기 위해 ‘총화단결’하자는 박정희 슬로건이 사회적 합의의 소산은 아니었다. ‘지도(指導)’받은 자본주의는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을 20여년도 안돼 ‘국민소득 1000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의 나라로 만들었다. 하지만 성장의 이면에는 취약한 자본시장, 불균형 성장에 따른 양극화, 불모의 복지정책, 희생을 강요당한 노동계급 등이 감춰져 있었다.

박정희 사후에도 군부정권이 잠시 명맥을 유지했지만,1987년 이후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의 승리를 쟁취하였으며, 이후의 경제씨스템도 박정희시대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 글에서는 쿠데타 이후 1987년에 이르는 시기를 ‘박정희체제’, 그후를 ‘87년이후체제’라 부르기로 한다.2 ‘박정희체제’는 최근 들어 개발독재라는 개념으로 정착되어가고 있지만, 87년이후체제에 대해서는 이러한 합의가 없다. 1987년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개발독재 이후 그것을 대체할 축적구조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1987년 이후는 공통점을 갖는다.

사회과학이 현실에 대한 성찰을 기초로 더 나은 미래사회를 모색하는 학문이라면, 박정희체제를 분석하고 미래사회의 전망과 관련하여 그 체제를 평가해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의 과제가 박정희체제 출발점에서의 과제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박정희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성장과제를 계속 추구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근대의 시대이면서, 협동과 혁신을 향한 새로운 모색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탈근대의 시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박정희체제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해한다 함은 그것의 형성·발전·소멸과정을 살펴본다는 것이며, 그것을 당시의 대내외적 여건을 고려하여 살펴본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박정희 개인의 특성과 관련한 ‘편승이냐 리더십이냐’라는 주제와 박정희체제의 운영방식과 관련한 ‘민주화냐 성장이냐’는 주제를 각각 살펴보고자 한다.

 

 

2. 박정희, 위험한 신화

 

3공화국에 관한 논의나 연구에서 박정희체제와 박정희를 동일시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는 정권의 권위주의적 특징 탓이지만, 그만큼 박정희신화가 기승을 부릴 여지가 많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산업화의 성공을 둘러싸고 ‘편승이냐 리더십이냐’는 논쟁이 있는데, 이는 체제의 성공을 박정희의 개인적 특징과 연결시킨 대표적 논의이다. 그런데 편승이든 리더십이든 적어도 산업화에 관해서는 박정희체제의 성공을 전제한 뒤 그것을 인간 박정희의 개성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박정희신화는 박정희체제를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 박정희의 차원에서 접근한 데서 출발한다. 인간 박정희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경우도 변절로 점철된 그의 인생역정에 촛점을 두는 경우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일국의 대통령이 된 인간승리에 촛점을 두는 경우로 나뉠 수 있다. 이처럼 개인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느 측면이 강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질 소지가 있다.

하지만 3공화국의 의사결정에 박정희가 행사한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개성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다. 이승만정부의 반일주의(反日主義)가 박정희체제에서 무력화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3 박정희의 집권에서 죽음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에 의해 새롭게 주조되기도 했으며, 산업화의 방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 변화를 모두 박정희의 개성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큰 틀의 변화는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5·16쿠데타 당시 권력의 향배를 좌우할 결정적 열쇠를 쥔 것은 미국이었다. 이승만정권 붕괴 이후 민주당정권이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자 미국은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었고, 한국전쟁 이후 과잉비대화한 군부는 그 대안 중의 하나였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한 일부 군인들의 쿠데타는 그것이 ‘구국을 위한 용단’이었든 권력욕이든 간에 이러한 ‘미국의 범위’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또한 군부쿠데타는 1960년을 전후한 시기 신생국들이 직면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선택한 일반적인 대응방식의 하나였다. 쿠데타 직후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쿠데타세력을 개혁적·민족주의적 이미지로 이해하는 분위기가 상당기간 지속되었던 것도 사실이다.4

그러나 좌익경력이 있는 박정희로서는 자신이 ‘미국의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을 극단적인 반공주의의 선택으로 입증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된 민족국가의 자립경제 지향이 당시 분위기였지만, 그의 좌익경력을 미국이 주시하는 상황에서 국면을 주도할 능력이 없었던 쿠데타세력으로서는 철저한 ‘반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이라는 명분조차도 정통성의 확보수단으로 선택할 수 없었던 박정희세력은 민정이양 후 선거공약이던 ‘민족적 민주주의’를 지켜낼 논리적 일관성을 상실했고, 오로지 경제성장에 올인하기에 이른다. 쿠데타세력이 민주화와 자립화에 대한 열망을 저버린 이상, 경제성장을 통해 민족주의적 열망을 수용하고 그것을 위해 일본과 수교를 추진한 것은 당시 여건으로 볼 때 불가피했지만, 친일경력이 있는 박정희였으므로 더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구국을 위한 결단’으로 쿠데타를 했을지라도 일단 손에 쥔 권력을 놓지 않겠다고 판단했을 때 쿠데타세력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반공주의와 개발주의뿐이었고, 그것은 영도력의 소산이었다기보다는 벼랑끝 선택이었을 따름이다.

다음은 산업화의 성공을 박정희의 개성과 연결시킨 논의를 살펴보자.이 시기의 경제성장을 인정하면서도 성장의 원천과 유산에 대해서는 후술하듯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당시는 불균형전략에 따라 미국의 개발원조가 쏟아져들어온 시기였으며, 루이스(Lewis) 모델이 상정한 노동시장(한계생산력이 0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무척 많아 약간의 임금유인만 있어도 쉽게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노동시장)의 경우는 특별한 통제 압력 없이도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원의 효율적 투입을 명분으로 진행된 차별화된 성장은 지역차별, 금융지대를 통한 재벌과 중소기업의 차별, 보호무역에 의한 국내가격과 국제가격의 차별, 노동차별 등을 체질화했다.

이러한 차별의 영향을 여기에서 자세히 논할 겨를은 없지만 국가와 재벌의 관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정희체제에서 경제성장의 사령관이 박정희였다면 사단장은 재벌이었다. 그런데 권위주의국가가 해체되고 중앙의 지휘를 받지 않게 되자 사단장들은 무분별한 사업확장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도입된 단기차입이 1997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직접적 원인의 하나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비대해진 재벌체제의 소유독점에 따른 비민주주의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또다른 과제로 남아 있다. 재벌의 소유 및 내부 의사결정구조가 민주적 통제 외부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방만한 경영에 따른 책임이 사회에 전가되는 최근의 비정상적 씨스템 역시 박정희체제의 슬픈 유산이다.

박정희신화의 옹호자들은 반박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주장은 놀라울 정도로 식민지미화론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거나, 독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은 동일한 논리의 다른 표현이다. 두 이론에 공통적인 것은 근대화를 산업화로 간주하고 그것을 최고의 목표로 두는 경제성장제일주의이다.

식민지하 조선을 자본주의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대량의 일본자본(국가이든 기업이든)이 들어왔으며, 그것은 조선경제의 산업화에 기여했다. 패전으로 ‘일시’ 철수한 일본자본은 1960년대 중반 이후 한·미·일 삼각동맹이라는 미·일 중심 패권주의의 정책적 수단으로 다시 복귀했는데, 그 역시 한국의 산업화에 크게 기여했다. 경제성장제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가지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독재가 정당하다면 식민지배도 정당하다. 그러나 조선의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가 정당화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남한의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체제의 독재도 정당화될 수 없다.

성장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체제의 물신성과 비인간성은 무너진 삼풍백화점이나 입시전쟁터가 된 학교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백보 양보하여 이것이 당시 ‘필요악’이었다 하더라도 지금 싯점에서는 ‘필요악’이 아닌 제거해야 할 악이 되었다. 더구나 경제성장 자체의 공(功)마저도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한 개인의 업적으로 치부될 경우 그것은 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개인의 업적으로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잘못된 선택’은 기록에서 삭제되고 ‘성공한 선택’만이 남게 되면, 사회적 통합을 위한 민주적인, 그러나 ‘지루할 수밖에 없는’ 합의과정은 비효율적으로 비칠 뿐이다.

박정희체제의 경제성장은 효율성의 명분 아래 사회적 합의가 아닌 위로부터의 ‘지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심성은 경쟁적으로 변화했다. 좋은 기업, 좋은 직장을 위한 경쟁은 체질화되었고, 적은 ‘자리’를 독점하기 위한 지연과 학맥이 구축되었다. 통합의 사회가 아닌 분열의 사회가 되었다. “잘살아보세”는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이 버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경제가 어느정도의 규모를 넘어서면 국가의 ‘지도’가 통하지 않게 되고, 분열된 사회는 이제 사회적 합의의 룰을 형성하기 위해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최근 드러나는 노조의 보수화, 시민단체의 이익집단화 등은 과거 사회통합의 구심력으로 기능했던 단위조차도 분열의 원심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외에서 살길을 찾을 역량이 생긴 기업은 내수가 부진해도, 자신을 키워준 ‘조국’의 백성들에게 ‘베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기대할 게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사회통합의 비용을 후세에 그대로 전가했다는 것인데, 그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클 수도 있음은 공적자금 투입에서 현실화되었다.

 

 

3. 박정희체제, 강요된 선택의 사후합리화

 

박정희체제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데서 가장 큰 쟁점이 되는 것은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상호관계이다. 박정희정권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그것의 시대적 역할이 산업화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던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체제의 운영 메커니즘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체제는 독재와 개발이 공존했던 체제이다. 이때 양자의 상호작용이 중요한데 여기에서 국가의 자율성 문제와 독재불가피론이 쟁점이 될 수 있다. 이병천(李炳天)은 개발국가를 성공적 개발과 정치적 독재가 서로 공생하면서 병행 발전하는, 강제의 갑옷으로 무장한 특수한 ‘반동적 근대화’의 수동혁명체제로 정의하면서 양자의 보완관계를 강조하였다.5

이처럼 독재와 개발이 공존했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위해서 어느정도 독재가 필요했다는 ‘필요악’ 논리가 의외로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학계에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개발과 독재는 병존했을 뿐 양자가 강력한 인과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 자율성이 강한 국가는 개발주의를 실시할 때 상대적으로 강력한 산업정책을 펼칠 수 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따라잡기(catch―up)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한다.6 한편 자율성이 강한 국가는 상대적으로 쉽게 권위주의정권이 될 가능성이 있다. 2차대전 이후 공업화에 성공한 일부 국가에서 개발과 독재가 공존한 것은 양자가 필연적인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율성이 강한 국가의 자기전화 과정에서 나타난 병존인 셈이다.

이제 이를 좀더 자세히 논증하기 위해 첫째, 한국이 자율성이 강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둘째, 개발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축적체제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그 성공요인과 국가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큰 연관이 없었음을 보이고자 한다. 셋째, 개발과 독재를 연관시키려는 주장의 타당성에 대해 역사적 사례 등을 이용하여 좀더 본격적으로 비판한다.

사실 개발독재는 자율성을 가진 강력한 국가, 보호된 국내시장과 개방된 해외시장이라는 특수한 결합의 산물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제3세계 국가 중에서 권위주의적 개발독재를 실시한 나라는 많지만, 박정희체제가 유독 현저하게 성공한 이유는 국가가 자본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율성은 농지개혁에 의한 지주계급의 해체와 소농의 체제내화라는 내적 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7 외적 조건인 분단상황을 남북대립이라는 ‘적대적 의존관계’로 변형시켜8 군사주의적 강권통치의 이념적 기반을 확보한 탓도 크다. 즉 국가자율성의 원천은 박정희를 정점으로 한 군부정권에 대응할 사회계급이 없었다는 점, 냉전에 의한 남북 대치상황을 독재의 명분으로 활용한 점을 들 수 있다.

국내시장은 보호하면서도 구매력이 큰 해외시장은 개방되어 있던 유리한 대외여건 역시 1960년대 및 1970년대라는 정치지형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제3세계국가들은 일반특혜관세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케네디정부의 개발원조정책의 전환과 신국제분업체제의 형성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수출주도형 전략은 해외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9

다음은 개발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축적체제의 특징을 살펴보자. 개발독재의 내적인 축적구조는 초기자본의 부족을 차입을 통해 해결하고, 차입자금을 상환하기 위해 수출경제에 의존하는 체제이다.10 이 경우 경기순환에 따라 주기적으로 닥치는 채무위기를 극복할 수 있어야 재생산을 지속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자본축적의 편의상 생산성 이득은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분배된다.11 분배가 악화되더라도 실질임금이 상승하고 생활수준이 나아진다면 이러한 억압적 분배구조에 따른 사회적 갈등의 폭발은 지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항상 물가상승률을 앞서야 한다는 전제가 충족될 때만 가능한 것으로, 이 전제가 깨지면 내재된 갈등이 폭발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축적과정을 실질적으로 지탱해주는 것은 노동력인데, 박정희신화나 개발국가론의 경우 의외로 노동자의 역할에 대해 소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박정희체제의 노동공급은 루이스 모델이 적용되는 전형적 사례였다. 보건수준의 향상에 따른 급속한 인구증가는 값싼 청소년 노동력을 시장에 무제한으로 공급했던 것이다. 반공이데올로기와 발전―안정이데올로기 전략을 통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가부장적 노사관계를 강요함으로써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한 것이 사실이지만,12 루이스 모델이 상정하는 무제한적 노동공급이 없었다면 통제에 훨씬 많은 비용을 지불했거나, 통제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율성을 확보한 국가가 ‘성공적 개발’을 하는 데서 필요한 것은 ‘지도’프로그램, 즉 경제개발계획의 수립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경제개발계획은 이미 이승만정부에서도 입안되고 있었으며, 박정희정권의 1차계획 초안은 민주당정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64년의 1차계획 수정은 자립경제론에 기초한 원안의 정책기조를 외향적 공업화전략으로 전환한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한다.

박정희체제는 1960년대 초반 종래의 민족경제론적 시각과 결별하고 수출지향적 성장전략을 추구한 이후 1970년대 초반 중화학공업화로 전략을 변경했다. 같은 시기 한국경제는 고도성장을 경험했는데, 이러한 전략적 선택이 고도성장의 원인이라는 생각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초기 전략의 선회는 성장에 필요한 자본 확보와 관련이 있는데, 이것은 박정희체제 국가기획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장전략의 선회는 한·미·일 삼각동맹에 의한 일본자본 유입과 미국의 원조에 의한 자본유입으로 가능했다. 박정권은 쿠데타 직후부터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자 확보가 긴요했기 때문이다.13 베트남참전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명백한 필요에 의해 개발되고 적극적으로 추진된 정책의 결과”였다.14

친일파 군인이라는 박정희의 전력 때문에 이러한 선택에 큰 문제를 느끼지 않았을 수 있지만, 이러한 전환과정에도 미국은 주도면밀하게 개입했다. 쿠데타 성공 이후 민정이양기까지 미국은 국내정치에 밀접하게 개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군사정부내 민간관료 고용, 최고회의 내부에서 통화개혁 입안자 제외, 군정연장 시도 저지 등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육사 8기생 배제 등의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15 이는 ‘안정’을 원한 미국과 박정권이 정치적으로 타협한 것이었다. 이 타협에서 미국이 사용한 카드는 경제원조였다. 정치적 정당성이 없는 박정권으로서는 원조를 통한 경제성장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입된 자본이 지속적 성장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말의 경제위기는 결국 부실차관기업의 정리와 1970년대 초반의 8·3조치라는 정책적 개입을 불가피하게 했다. 다행히 1970년대 중반의 중동특수는 또다른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이 역시 지속성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고 1970년대 말의 경제위기에서 투자조정과 긴축 디플레이션정책을 불러왔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로의 전환은 외적으로는 수출경공업 재생산구조의 위기, 국제분업의 단계 변화에 대한 대응이었으며, 내적으로는 자주국방의 기반 확립이라는 목표를 가진 것이었다. 중화학공업화에서 자본축적을 담당하는 주체는 사적 자본이었지만, 화폐자본 조달에서 생산물 판매에 이르기까지 자본축적의 모든 측면에서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방식이 전개되었다.16 그러나 좀더 중요한 경제적 동기는 더 많은 성장을 위해서는 더 많은 외화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필요성이 자주국방의 욕구와 맞물려 국제경쟁력 있는 수출산업(규모의 경제)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투융자 예산의 절반을 그 산업부문에 몰아넣는 도박이었으며, 오일달러의 유입 속에서도 결국 중복투자에 의한 구조조정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중반 삼저호황이라는 시장조건의 개선 속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경제의 행운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와 산업화 사이에 논리적 혹은 경험적 선후관계가 있는지를 둘러싼 논의를 살펴보자. 민주주의가 산업화에 도움이 된다는 일반론적 주장에 대해 최근 개발국가체제와 개발주의를 산업화와 국민경제 형성의 세계사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여기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17

김일영(金一榮)은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발전지향적 권위주의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고 보았다. 선진국의 중상주의체제나 후발 자본주의국가, 2차대전 이후의 후후발 자본주의국가 모두 발전지향적인 권위주의체제였다는 것인데,18 즉 권위주의는 국민경제 형성기 산업화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독재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즉 국민경제 형성의 유일한 방법은 ‘산업화→민주화’ 코스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유형화는 구체적인 각국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선뜻 납득하기 힘들다.

강력한 권위주의국가였던 스페인은 효율적 중상주의정책을 실시하는 데 실패하고 세계경제의 패권을 상실하였다. 종교전쟁에 몰두한 독재자 국왕의 개인적 취향과 국민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메스따(Mesta, 목양업자길드)에 대한 특권 부여 등이 실패의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는바,19 이는 독재가 오히려 발전을 가로막은 역사적 증거의 하나이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부유했고, 강한 권위주의국가였으며, 강력한 중상주의정책을 실시했지만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영국에게 빼앗겼다. 영국 산업혁명의 전사로 중상주의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는 있겠지만,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된 혁신은 기술적 애로를 돌파하려는 끊임없는 열정을 가진, “생명력과 정력이 있고 여기에 더해서 필요한 공학적 기술까지 갖춘 인물들이 존재”20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은 보호주의의 그늘 아래 성장했지만 권위주의와 상관없는 나라이다. 이처럼 권위주의와 개발의 상호연관성을 역사에서 검출하려는 시도는 그다지 성공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2차대전 이후 공업화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나라들이 모두 권위주의정권이었다는 것도 독재와 개발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해당 국가에서 권위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 국가의 계급지형에 따른 것일 뿐 개발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개발국가의 권위주의화(독재화)가 개발 성공의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유신체제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한국경제가 1960년대의 성과 위에서 좀더 유연한 발전의 길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일본형 국가주의 지향과 장기집권욕으로 빚어진 1970년대의 유신체제는 그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이병천의 주장은 매우 의미심장하다.21 유신체제의 경제적 산물인 중화학공업화 체계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개발주의의 결함의 증거는 될지언정 성공의 징표는 아닌 것이다.

사실 개발의 성공 여부는 동원능력에 달려 있다. 내외의 자원을 이용하고 동원할 수 있는 효율적이고도 강력한 산업정책의 실시 여부가 개발의 성패를 좌우한다. 모든 권위주의가 개발에 성공하지 않은 것처럼 권위주의 없는 개발도 가능하다. 개발과 독재는 무관한 것이며, 박정희시대에 개발은 권위주의와 공생했을 뿐이다. 오히려 독재는 성장잠재력을 잠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개발과 독재의 상호연관은 개발의 유력한 성공조건인 강력한 산업정책을 권위주의로 치환하고, 권위주의를 독재와 연결시키는 논리적 비약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독재불가피론에 대한 이론적 비판으로 쎈(A. Sen)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그는 민주주의와 발전 사이의 부정적 상관관계를 논증한 기존 연구를 비판하면서 시장개방이나 경제계획 같은 단순한 ‘공식화’로 쉽게 발전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논박하고, 발전개념을 인간이 지닌 실적적인 자유를 확산시키는 과정으로 파악할 것을 제기했다.22

개인을 발전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 행위자로 파악하는 독재불가피론은 한걸음 더 나아가 독재에 기반을 둔 경제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가 가능했다는 주장을 편다. 이는 ‘선의의 독재’를 기대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존재가능성을 떠나 이 논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성과의 분배에 관한 ‘선의’도 포함해야 한다. 하지만 독재체제가 성장의 결과를 배분하는 합리적 기제를 내생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이렇다. 박정희가 살아 있었다면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확산 메커니즘 없는 급속한 성장은 곧 병목을 맞이했을 것이다. 경제성장은 자동적으로 민주화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며, 더 나은 발전을 위해 자유를 지향하는 개인들의 적극적 행동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4. 맺음말

 

박정희는 신화가 되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과거의 인물이다. 눈물나는 가난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시절의 공포정치와 인권유린, 그리고 하소연할 수 없는 권력의 횡포에 대한 막막함에 치를 떨었던 사람도 있다. 그들의 박정희에 대한 인식이 어떤 이론적 수사나 개념화로 바뀌기에는 그 경험은 너무나 생생한 것이었다. 양자는 각각 화해할 수 없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만, 박정희 사후 사반세기가 지나면서 신세대라 불리는 세대가 등장했다. 이 세대는 1960년대 후반 서구의 ‘풍요의 세대’에 비견할 정도로 자유로운 세대라 할 수 있으며, 박정희 씬드롬의 주된 감염자들이다. 그들은 박정희로부터 성장전도사(비전), 청렴성, 당당함 등의 코드를 선택적으로 인식하고, 어느덧 아버지 세대가 되어버린 산업화·민주화의 두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자신있게 표현한다. 어찌 보면 이 씬드롬은 박정희의 덫에 걸려 87년이후체제의 해법을 마련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각성 촉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할 지형은 87년이후체제의 모습이다. 세계화·정보화시대를 여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87년이후체제는 협력과 혁신이 공존하는 사회여야 할 것이다. 혁신의 공간적 기반으로서 ‘동북아’를 주목하는 최근의 논의들은 그런 점에서 매우 실용적이다. 그러나 혁신의 방향설정이 이제는 ‘지도’가 아닌 협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매우 중요해진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할 때는 그것이 귀감이든 타산지석이든 박정희체제로부터 배워올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체제는 지금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는 가까운 역사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체제의 맹점은 분배에 대한 고려가 약하고, 배금주의·물신주의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아래에서 파편화된 개인은 사회적 배려보다는 경쟁 속에서 자신의 몫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권위주의가 통하지 않는 87년이후체제에서는 사회적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룰이 없는 사회가 권위주의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이기적 집단간의 이해를 조정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은 존재해야 하며, 그를 위해 얼마간의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른바 민주화 비용인 셈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합의는 ‘1주(株)1표’의 물신주의로부터 ‘1인1표’의 인본주의로 전환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 땅에서 어떤 수준의 삶의 질을 공유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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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정희신화를 부추기는 논자들조차도 박정희체제의 근본원칙과는 다른 주장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박정희체제는 ‘강한’ 정부에 의해 지탱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그와는 달리 규제완화, 시장의 부활을 외치는 최근 보수세력의 주장은 ‘약한’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박정희의 부활방식은 매우 ‘희극적’이다.
  2. 국가에 의한 신용할당과 노동통제를 박정희체제의 근간이라고 생각한다면 1980년 전후의 정치적 격변보다 1987년 6월항쟁 전후의 변화가 더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해방 이후 한국자본주의를 시기 구분한 것으로, 유철규 엮음 『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역사와 위기』(함께읽는책 2003)가 있다. 1987년 이후 경제적 변화에 대해 유철규는 “내수시장의 역할이 재평가되었고, 미국 일변도의 수출시장 구성이 갖는 한계가 인식되었으며, 본격적인 한국자본의 해외진출이 시도되었고, 투자를 결정하는 주체가 정부로부터 민간대기업으로 바뀌어갔다”고 주장한다(유철규 「1980년대 후반 경제구조의 변화와 외연적 산업화의 종결」, 『박정희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함께읽는책 2004, 78면).
  3. 친일―좌익―극우로 변신하였지만 일관된 것은 그는 항상 군인이었으며, 일본에 대한 일종의 숭배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준식은 군인·영웅·일본에 대한 숭배가 박정희가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사회관·역사관이고, 이 때문에 이승만정권 시절만 해도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지배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이던 반일주의가 박정희시대에 사라졌다고 보았다. 이준식 「박정희시대 지배이데올로기의 형성: 역사적 기원을 중심으로」, 홍석률 외 『박정희시대 연구』, 백산서당 2002, 198면.
  4. 홍석률 「5·16쿠데타의 발발 배경과 원인」, 같은 책. 물론 이런 평가는 이후 급변한다. 강정구는 박정권의 정통성이라는 관점에서 계량화를 시도했는데 그에 대한 민족사적 평가는 겨우 3.6%였다. 강정구 「박정희정권의 대북정책과 통일정책」, 『역사비평』 1997년 가을호.
  5. 이병천 「개발독재의 정치경제학과 한국의 경험」, 이병천 엮음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창비 2003.
  6. 산업정책은 따라잡기 국면에서 매우 중요하며, 모든 선진국들도 이런 과정을 거쳤음을 설득력있게 논증한 장하준 『사다리 걷어차기』(부키 2004)는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한 셈이다.
  7. 조석곤 「농지개혁과 한국자본주의」, 유철규 엮음 『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역사와 위기』, 함께읽는책 2003.
  8. 이종석 「유신체제의 형성과 분단구조」, 이병천 엮음, 앞의 책.
  9. 이제민은 한국이 제3세계주의에 ‘무임승차’하여 상품주기의 전환기에 일찍 수출주도형으로 출발한 것이 성공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이제민 「전후 세계체제와 한국의 수출지향적 산업화」, 안병직 엮음 『한국경제: 쟁점과 전망』, 지식산업사 1995.
  10. 서익진 「한국 산업화의 발전양식」, 이병천 엮음, 앞의 책.
  11. 1970년대 10년간 실질임금은 2.2배 증가한 반면, 노동생산성은 2.6배 증가하여 노동분배율이 악화되었다. 선진국과 비교할 때 한국의 노동생산성 격차보다 임금 격차가 2배가량 더 컸다. 이정우 「개발독재와 빈부격차」, 같은 책.
  12. 김호기 「1970년대 후반기의 사회구조와 사회정책의 변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엮음 『1970년대 후반기의 정치사회변동』, 백산서당 1999.
  13. 유병용 「박정희정부와 한일협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엮음 『1960년대의 대외관계와 남북문제』, 백산서당 1999.
  14. 홍규덕 「베트남전 참전 결정과정과 그 영향」, 같은 책 58면.
  15. 박태균 「군사정부시기 미국의 개입과 정치변동, 1961~1963」, 홍석률 외, 앞의 책.
  16. 이재희 「1970년대 후반기의 경제정책과 산업구조의 변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엮음 『1970년대 후반기의 정치사회변동』, 백산서당 1999.
  17. 이에 대한 간략한 정리는 이병천, 앞의 글 31~34면 참조.
  18. 김일영 「박정희체제 18년, 어떻게 볼 것인가」, 『계간사상』 1995년 겨울호 222~23면.
  19. D. North &R. Thomas, The Rise of the Western World: A New Economic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10장.
  20. 킨들버거 『경제강대국흥망사 1500~1990』, 주경철 옮김, 까치 2004, 216면.
  21. 이병천, 앞의 글 55~59면. 그런데 이병천은 같은 논문에서 개발국가체제와 개발주의를 산업화와 국민경제 형성의 세계사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이해한 견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개발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는 개발독재까지도 보편적인 현상으로 과도하게 일반화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22. 쎈 『자유로서의 발전』, 박우희 옮김, 세종연구원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