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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미국, 중국과의 대결에 나서다
찰머스 존슨 Chalmers Johnson
일본정책연구소(Japan Policy Research Institute) 소장. 캘리포니아대학의 버클리 및 쌘디에이고 캠퍼스에서 30년간(1962~1992) 강의를 하고, 버클리에서는 중국학연구소 소장과 정치학과 학과장을 역임했다. 1953년 미국 해군장교로 일본을 처음 방문한 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일본 및 동아시아와 관련해서 ‘수정주의’적 관점의 연구를 수행했다. 1976년에는 미국 예술과학원 회원에 선출되었다. 수많은 논문과 16권에 이르는 저서가 있으며, 최근의 대표적 저서로는 『블로우백』(Blowback, 2000)과 『제국의 슬픔』(The Sorrows of Empire, 2004)이 있다. chaljohnson@mindspring.com
*이 글은 National Institute의 웹진 Tomdispatch.com(2005년 3월 15일)에 수록된 “No Longer the ‘Lone’ Superpower: Coming to Terms with China”를 완역한 것이다. 일본정책연구소의 웹싸이트(www.jpri.org/publications/workingpapers/wp105.html)에서 원문과 함께 인용문 출처와 기타 참조사항을 볼 수 있다―편집자. ⓒ Chalmers Johnson 2005 / 한국어판 ⓒ (주)창비 2005
40년 전 내가 중국과 일본의 국제관계 분야의 신임교수로 재직할 당시,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가 “1945년 우리의 승리에서 얻은 최고의 소득은 일본을 영구적으로 무장해제시킨 것이었다”라고 논평한 일이 기억난다. 일본에서 태어나 하바드에서 일본역사를 전공한 라이샤워는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주일 미대사로 봉직한 바 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1991년 냉전 종식 이래, 특히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집권 이래 미국은 사력을 다해 일본의 재무장을 고무하고 심지어 가속화해왔다.
상황이 이렇게 진전됨에 따라 동아시아의 두 초강대국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적대감이 조장되고, 중국과 한반도의 내전에서 남겨진 타이완과 북한이라는 두 문제 지역에서 실현가능한 평화적 해결책이 거부당하고 있으며, 십중팔구 미국이 패배할 향후 중·미간 충돌의 기초가 놓이고 있다. 워싱턴의 이데올로그와 전쟁광 들은 자신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 이해하고나 있는지 불분명하다. 그 결과란 세계에서 가장 급속히 성장하는 공업경제국 중국과, 비록 쇠퇴하고 있긴 하지만 세계에서 두번째로 생산력이 높은 경제대국 일본의 대결인데, 미국은 이 양자간의 대결을 부추기려 하지만 그로 인해 미국 스스로가 소진될 공산도 아주 크다.
우리가 동아시아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부시와 체니(Dick Cheney)가 옹호하는 소규모의 정권교체(regime-change) 전쟁 따위가 아님을 분명히 해둬야겠다. 따지고 보면, 지난 세기 국제관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영국과 미국 같은 부유한 기성 열강이 독일·일본·러시아의 새로운 세력중심이 부상하는 상황에 평화롭게 적응하지 못한 점이었다. 그 결과는 피비린내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러시아와 ‘서구’의 45년간의 냉전, 그리고 유럽과 미국, 일본의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의 오만과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25년간의 베트남전쟁 같은) 무수한 민족해방전쟁이었다.
21세기의 주된 문제는 전지구적 세력구조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런 치명적인 무능함을 극복할 수 있는가 여부이다. 지금까지의 징후는 부정적이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부유한 기성 열강이라 할 미국과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연속성을 유지한 문명인 중국의―이제는 현대적인 초강대국으로서―재등장에 적응할 수 있을까? 아니면 중국의 승세가 또 하나의 세계대전으로 매듭지어지면서, 미국과 일본의 돌출로 구현된 서구문명의 위세가 마침내 끝장날 것인가? 이것이 당면한 문제이다.
터무니없는 정책과 최대의 재정위기
중국, 일본,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은 경제권들이지만, 중국이 (20년 이상 연평균 9.5%의 속도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반면 미국과 일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엄청난 빚을 지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에는 성장률 침체까지 겪고 있다. 중국은 오늘날 세계에서 여섯번째로 큰 경제국이며(미국과 일본이 각각 첫번째와 두번째이다), 캐나다와 멕시코에 이어 세번째로 큰 미국의 무역상대국이다. 미국 CIA의 『2003년 팩트북(Factbook)』 통계에 따르면, 중국은 구매력평가(PPP)로, 다시 말해 물가와 환율보다 실제로 생산한 것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경제대국이라는 것이다. CIA는 2003년 미국의 GDP(국내총생산)를 10조4천억 달러로, 중국의 GDP를 5조7천억 달러로 계산한다. 이를 중국의 13억 인구로 나누면 일인당 GDP가 4385달러이다.
1992년에서 2003년까지는 일본이 중국의 가장 큰 무역상대국이었지만, 2004년에는 유럽연합(EU)과 미국에 뒤져 3위로 떨어졌다. 중국의 2004년 무역량은 1조2천억 달러로서, 미국과 독일 다음으로 세계 3위이며, 일본의 1조7백억 달러를 훨씬 앞선다. 중국의 대미 무역은 2004년 34%나 증가하면서 로스앤젤레스, 롱비치, 오클랜드를 미국에서 가장 번창한 세 항구로 변모시켰다.
2004년 진정으로 의미심장한 무역양상의 변화는 EU가 중국의 최대 경제파트너로 부상한 점인데, 이는 중국과 유럽의 협동블록이 그보다 활력이 떨어지는 일본과 미국의 협동블록과 대결할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가 논평한 대로, “〔2001년〕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지 3년 만에, 중국이 국제적 통상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더이상 그냥 중요한 정도가 아니다. 그 영향력은 결정적이다.” 예컨대 미국에서 팔리는 델(Dell) 컴퓨터 대부분이 중국에서 만들어지며, 일본 후나이(船井)전기의 DVD 플레이어 역시 마찬가지다. 후나이는 연간 1천만 대에 달하는 DVD 플레이어와 텔레비전을 중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데, 미국에서는 주로 월마트에서 판매된다. 2004년 중국의 대유럽 무역은 1772억 달러에 상당하며, 대미 무역은 1696억 달러, 대일 무역은 1678억 달러에 달한다.
세계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는 현상은 널리 알려지고 갈채를 받고 있지만, 옳건 그르건 미국과 일본이 두려워하는 것은 중국의 성장속도와 그것이 장래의 전지구적 세력균형에 미치는 파장이다. CIA의 국가정보회의(National Intelligence Council)는 중국의 GDP가 2005년에는 영국, 2009년에는 독일, 2017년에는 일본, 2042년에는 미국과 같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세계은행의 전임 중국담당국 부국장이자 파키스탄의 전임 재정부장관인 샤히드 부르키(Shahid Javed Burki)는 2025년에 이르면 중국은 구매력평가로 환산할 경우 십중팔구 GDP 25조 달러에 도달하게 되어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며, 20조 달러의 미국과 약 13조 달러의 인도가 그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측한다. 더군다나 부르키의 분석은 향후 20년간 중국이 6%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할 것이라는 보수적인 예측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일본의 몰락은 불가피하다고 예견하는데, 이는 일본 인구가 2010년경부터 급격하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본 내무성은 일본 남성의 수가 2004년에 이미 0.01% 감소했다고 발표하면서, 일부 인구학자들이 21세기말에 이르면 일본 인구가 오늘날의 1억2770만에서 거의 3분의 2나 감소한 4500만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는 주를 달았는데, 이는 일본의 1910년 인구와 같은 수준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의 인구는 대략 14억선에서 안정될 것으로 보이고 남성의 비율이 매우 높다.(『뉴욕타임즈』의 하워드 프렌치Howard French에 따르면, 중국 남부의 한 대도시에서는 정부가 ‘1가구 1자녀’ 정책을 실시하고 초음파검사가 가능해짐에 따라 여아 100명당 태어나는 남아는 129명꼴로 나타나며, 둘째나 셋째 아이를 바라는 부부 사이에는 여아 100명당 남아는 147명꼴로 나타난다. 2000년 중국 전역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태어날 당시 보고된 성비는 여아 100명당 남아 약 117명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인구의 그간 억제되었던 수요와 상대적으로 낮은 개인부채 수준, 그리고 공식통계에 잡히지 않은 역동적인 지하경제를 고려할 때 중국의 국내경제는 앞으로도 수십년 동안 계속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대외부채가 상대적으로 적고 외환보유고로 쉽게 충당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각각 약 7조 달러의 부채를 안고 있는데, 인구와 경제적 영향력에서 미국의 절반도 되지 않는 일본으로서는 더욱 좋지 않은 상황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의 부채 중 일부는 미국이 전지구적인 제국적 입지를 지탱하는 데 협조하면서 생긴 결과이다. 예컨대, 냉전 종식 이후 일본은 주일 미군기지에 약 700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보조금을 지원해왔다. 미국은 방탕한 소비행태와 군사비를 자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려 하지 않고 일본, 중국, 타이완, 남한, 홍콩, 인도에 빚을 짐으로써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점점 불안정해졌는데, 미국이 자국 정부의 지출을 대기 위해서는 하루에 적어도 20억 달러의 자금을 수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나라들의 중앙은행이 달러가치 하락의 피해를 막기 위해 외환보유고 상당부분을 달러에서 유로나 다른 통화로 바꾸기로 결정한다면 최대의 재정위기가 도래할 것이다.
일본은 2005년 1월말 기준으로 약 8410억 달러에 이르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환보유고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역시 (2004년말 기준) 6099억 달러라는 돈방석 위에 앉아 있는데, 그 돈은 대미 무역흑자로 벌어들인 것이다. 한편 미국정부와 조지 W. 부시를 추종하는 일본인들은 가능한 모든 방식을 동원해, 특히 중국에서 떨어져나간 타이완섬 문제를 가지고, 중국을 모욕하고 있다. 뛰어난 경제분석가 윌리엄 그레이더(William Greider)는 최근에 “자신의 물주를 모욕하는 방탕한 채무자는 좋게 말해도 지각없는 사람이다. (…) 미국 지도부는 (…) 점점 망상에 빠져들었으며―문자 그대로 그렇다는 뜻이다―세력균형이 점점 자신에게 불리해지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부시행정부는 일본에 재무장을 종용하고, 타이완에는 만약 중국이 타이완의 독립선언을 막으려고 무력을 사용할 시에는 타이완 편에서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어리석게도 중국을 위협하고 있다. 이보다 더 근시안적이고 무책임한 정책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부시행정부가 벌인 터무니없는 이라크전쟁과 그로 인해 전세계에서 생겨난 심각한 반미주의, 그리고 미국 정보기관의 정치화에 비춰보면 미국과 일본이 실제로 타이완 문제로 중국과의 전쟁을 재촉하는 일이 일어날 법하다.
일본의 재무장
2차대전 종식 이래, 특히 1952년 독립을 획득한 이래 일본은 평화주의 대외정책에 찬동해왔다. 공격을 목적으로 한 군대를 유지하거나 미국의 전지구적 군사체제의 일부가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해온 것이다. 가령 일본은 1991년 대이라크 전쟁에 참전하지도 않았고, 동맹국의 군사적 기여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하는 집단안보협정에 동참하지도 않았다. 1952년 미일안보조약의 조인 이래, 이 나라를 소위 외부적 위협에서 보호해준 것은 공식적으로 일본 본토와 오끼나와(沖繩)섬의 91개 기지에 주둔한 미군이었다. 미 제7함대는 심지어 모항(母港)을 요꼬스까(橫須賀)의 옛 일본 해군기지에 두고 있다. 일본은 이들 기지에 보조금을 댈 뿐 아니라 미군이 오로지 일본의 방위를 위해 주둔한다는 공공연한 허구에 동의하고 있다. 사실 일본은 자국 영토에 기지를 두고 있는 미국 육·해·공군의 운용방식과 배치에 대해 전혀 통제권이 없으며, 양국 정부는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이 쟁점에 대해 일절 논하지 않음으로써 교묘하게 문제를 넘어갔다.
1991년 냉전 종식 이래, 미국은 일본에 (자기방어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력사용을 포기하고 있는) 헌법 제9조를 수정하여―미국 관리들의 어법에 따르면―‘정상국가’(normal nation)가 되도록 거듭 압력을 가해왔다. 예컨대, 2004년 8월 13일 콜린 파월(Colin Powell) 국무장관은 토오꾜오에서 일본이 만약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되기를 희망한다면 먼저 자국의 평화헌법을 폐지해야 할 것이라고 과감하게 말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에 대한 일본의 권리 주장은 전세계 GDP에서 14%를 차지할 뿐인 일본이 유엔 전체 예산의 20%를 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파월의 발언은 일본의 내정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이었지만, 전임 국무부 부장관 리처드 아미티지(Richard Armitage)가 표명한 수많은 메씨지를 되풀이한 것일 뿐이다. 아미티지는 일본을 재무장시켜 미국 무기수출의 주요한 새 시장을 확장하기 위해 수년간 작업해온 미국 정계의 한 극우파의 지도자이다. 이 파벌의 성원으로는 국무부의 토컬 패터슨(Torkel Patterson), 로빈 쌔코다(Robin Sakoda), 데이비드 애셔(David Asher), 제임스 켈리(James Kelly), 국가안보회의의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 그리고 펜타곤과 하와이 진주만 태평양사령부 본부에 근무하는 수많은 장성들이 있다.
미국의 의도는 일본을 워싱턴의 네오콘들이 즐겨 부르듯이 ‘극동의 영국’으로 변모시킨 다음 대리인으로 내세워 북한을 궁지에 몰고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다. 2000년 10월 11일 당시 아미티지 파벌의 일원이었던 마이클 그린은 “우리는 미국과 영국의 특별한 관계를 〔미·일〕 동맹의 모델로 본다”고 썼다. 일본은 지금까지 미국의 이런 압력에 저항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압력이 일본 유권자들 사이에 부활한 민족주의를 보완해주고, 급성장하는 자본주의 중국이 동아시아의 선도적인 경제강국 일본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는 두려움에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관리들은 또한 일본이 북한의 핵 및 미사일 프로그램 개발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은 부시행정부가 평양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대신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겠다는 북한측의 동의에 대한 댓가로) 미국의 통상약속을 이행한다면 북한의 교착상태가 하루아침에 풀릴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2005년 2월 25일 미 국무부는 “미국은 북한을 핵무기 프로그램 협상에 복귀시키려면 ‘적대의사가 없음’을 보장해달라는 북한 지도자 김정일의 요구를 거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3월 7일 부시는 북한이 자국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협상을 거부한 바 있는 존 볼턴(John Bolton)을 유엔대사로 지명했다.
일본의 재무장은 일부 자국민들을 우려하게 하는 한편,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중국, 남북한,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하여 2차대전 시기 일본에 희생당한 모든 나라들의 반대에 부닥치고 있다. 때문에 일본정부는 점진적인 재무장이라는 비밀계획을 추진해왔다. 1992년 이래 일본은 안보 관련 주요법안 21개를 제정했는데, 2004년에만 9개에 이른다.이들 법안의 포문을 연 것은 1992년 처음으로 유엔 평화유지작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파병의 권한을 인준한 국제평화협력법이었다.
그후 일본의 재무장은 군비예산의 증대, 해외 파병의 정당화와 합법화, 미국의 미사일방위(‘별들의 전쟁’)계획 참여 확약―캐나다는 2005년 2월 참여를 거부했다―그리고 국제문제에 대한 군사적 해결의 점증적 수용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런 점진적인 과정은 2001년 부시 대통령과 코이즈미 쥰이찌로오(小泉純一郞) 수상이 동시에 집권함으로써 더욱 가속화되었다. 코이즈미는 그해 7월 미국을 처음 방문했고, 2003년 5월에는 부시의 텍사스 크로포드 ‘목장’에 초대됨으로써 부시한테 최종 인정을 받았다. 그 직후 코이즈미는 이라크에 550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데 합의했고, 2004년 이 병력의 주둔기간을 1년 연장했으며, 2004년 10월 14일에는 개인 자격으로 조지 부시의 재선을 바란다고 했다.
형성중인 새 핵강대국?
코이즈미는 반중국·친타이완 성향의 강경파 정치인들을 내각의 여러 직책에 임명했다. 런던대학 동양학·아프리카학 대학원의 현대중국연구소(Contemporary China Institute) 소장 필 딘즈(Phil Deans)는 “일본에는 친타이완 정서가 괄목할 만큼 증가했다. 코이즈미 내각에는 친중국 인사가 한명도 없다”고 진술한다. 코이즈미의 최근 내각에는 방위청장 오오노 요시노리(大野功統)와 외상 마찌무라 노부따까(町村信孝)가 포함되어 있는데, 둘 다 열렬한 군국주의자들이다. 마찌무라 외상은 타이완의 독립을 지지하고 타이완의 정재계 지도자들과 광범위한 유대를 은밀히 유지하고 있는 모리 요시로오(森喜郞) 전 수상의 우파세력에 속해 있기도 하다.
우리는 타이완이 1895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의 가혹한 군사통치를 겪어야 했던 한국과는 달리, 타이완은 일본 민간행정부로부터 비교적 호의적인 통치를 경험했다. 2차대전 시기 타이완은 연합국의 폭격을 받기는 했지만 전쟁터가 되지는 않았는데, 전쟁 직후 중국 민족주의자들(쟝 졔스蔣介石의 국민당)에 의해 가혹하게 점령당했다. 그 결과 오늘날 타이완에는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고 일본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타이완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인이 진심으로 환영받고 사랑받는 사실상 유일한 곳이다.
부시와 코이즈미는 미·일 양국간의 군사협력을 위한 정교한 계획을 개발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1947년의 일본 헌법을 폐기하는 것이다. 별다른 장애물이 생기지 않는 한, 코이즈미의 집권 자민당은 2005년 11월 창당 50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새 헌법을 도입할 예정이다. 이는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1955년 자민당의 창립 당헌이 기본 목표의 하나로 “일본 고유의 헌법 설립”―이는 2차대전 후 더글러스 매카서(Douglas MacArthur) 장군의 점령본부가 실제로 현행 헌법을 입안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최초의 자민당 정책성명 또한 “일본 영토에서 미군의 궁극적인 철수”를 요구했는데, 이것이 일본의 재무장을 충동하는 이면에 숨겨진 목적 중 하나일 수 있다.
미국의 주된 목적은 엄청난 비용이 필요한 자국의 미사일방어 계획에 일본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지금까지 실패를 거듭해온 ‘별들의 전쟁’ 체제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 일본의 군사기술 수출금지 조치를 폐지시키려 하고 있다. 미국은 또한 육군 제1군단을 워싱턴주 포트루이스에서 토오꾜오 남서쪽의 인구밀집 지역인 카나가와(神奈川)현―현청 소재지는 요꼬하마(橫濱)이다―의 캠프 자마(Camp Zama)에 재배치하기 위해 일본과 적극적으로 협상해왔다. 재배치가 되면 주일미군은 사성장군의 지휘 아래에 놓이게 되는데, 이 사성장군은 이라크와 남아시아를 통괄하는 미 중부군사령부의 존 아비자이드(John Abizaid) 사령관 같은 지역사령관들과 동급이 될 것이다. 새로운 사령부는 동아시아 너머까지 육군의 모든 ‘무력돌출’ 작전을 관장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을 미 제국의 일상적 군사작전에 연루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어림잡아 4만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1군단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작은 사령부 본부까지 카나가와같이 복잡하고 수도권에 위치한 현에 주둔시키면 현재 오끼나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강간, 폭행, 자동차사고 등의 사건들이 재현될 뿐 아니라 대중의 격렬한 반대를 초래할 것이 뻔하다.
한편 일본은 방위청을 성(省, 일본의 ‘성’은 한국의 ‘부部’에 해당함―옮긴이)으로 승격시키려 하고 있는데, 자국 소유의 핵무기 능력을 개발할 가능성도 있다. 독자적 군사력을 과시하도록 자꾸 부추길 경우, 일본은 미국 ‘핵우산’의 종속에서 벗어나는 한편 중국과 북한을 ‘억지’하기 위하여 핵무장에 나서게 될 공산이 충분하다. 군사분석가 리처드 탠터(Richard Tanter)는 일본은 이미 “사용가능한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세가지 핵심 요건―군사적 핵장치, 정밀한 표적체계, 그리고 최소한 하나의 충분한 운반체계―을 모두 충족시키는 확실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논평한다. 제대로 작동하는 핵분열, 증식형 원자로에다 핵원료 재처리시설까지 구비한 일본은 선진적인 열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있다. H-II 및 H-IIA 로켓, 전폭기에 공중 급유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군용급 감시위성들을 보유한 일본은 자국의 무기를 지역 표적에 정확히 발사할 수 있다. 현재 부족한 것은 핵무장한 적의 선제공격을 억제할 수 있는 확고한 보복무력에 사용될 (잠수함 같은) 발사대이다.
타이완이라는 난제
일본은 북한의 위험에 대해 말이 많지만 일본 재무장의 진정한 목표는 중국이다. 일본이 최근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단일쟁점으로선 가장 미묘하고 위험한 사안―타이완 문제―에 전격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보면 이 점이 확실해진다. 일본은 1931년 중국을 침략했고, 그후론 타이완을 식민지로 지배했을뿐더러 전시에 중국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이 오래전부터 인정해왔듯이 당시에도 타이완은 중국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장차 해결해야 할 문제는 타이완이 중국본토로 재통합되는 조건과 시기이다. 이 과정을 심히 복잡하게 만든 것은, 중국내전이 끝나자 1949년 타이완으로 퇴각한 (그리고 거기서 줄곧 미 제7함대의 보호를 받았던) 쟝 졔스의 국민당이 1987년 마침내 이 섬의 계엄령을 끝낸 사실이다. 타이완에서는 그후 생동하는 민주주의가 성숙했고, 타이완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장래에 대해 엇갈린 견해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2000년 타이완 사람들은 국민당의 오랜 권력독점을 끝장냈으니, 쳔 슈이뼨(陳水扁)을 수반으로 하는 민진당(民進黨)이 선거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패전한 쟝 졔스 군대를 따라 타이완으로 들어온 대규모 본토인〔外省人〕들과는 구분되는토박이 타이완인〔內省人〕으로서 쳔 슈이뼨은 당과 더불어 독립된 타이완을 대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국민당은 쑹 츄위(宋楚瑜)를 수반으로 하는 본토파의 강력한 분당인 친민당(親民黨, 2000년 총통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롄 쟌이 선출되자 그의 라이벌인 쑹 츄위는 탈당하여 출마하였고 선거 후 친민당을 결성했다―옮긴이)과 함께 궁극적으로 타이완과 중국의 평화적 통일을 희망한다. 2005년 3월 7일 부시행정부는 존 볼턴을 유엔대사로 지명함으로써 이 미묘한 관계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볼턴은 자타가 공언하는 타이완 독립의 옹호자이며, 타이완정부의 유급 고문관으로 일한 적도 있다.
2004년 5월, 아주 근소한 표차의 치열한 선거전에서 쳔 슈이뼨은 재선되었고, 5월 20일 악명높은 일본 우익정치인 이시하라 신따로오(石原愼太郞)는 타이뻬이에서 열린 그의 취임식에 참석했다.(이시하라는 일본의 1937년 난징학살은 “중국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믿는다.) 쳔 슈이뼨은 겨우 50.1%의 득표율로 승리했으나, 그래도 야당이 분열되었던 2000년의 33.9%에 비하면 상당한 진전이었다. 타이완 외무부는 즉시 코 세카이(許世楷)를 주일 특별대표로 임명했다. 그는 일본에서 약 33년간 살았고 일본의 정계·학계의 고위급 인사들과 광범위한 연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설령 2008년 뻬이징 올림픽과 대미 우호관계를 단념하는 한이 있더라도 타이완 독립을 겨냥한 어떠한 움직임도 “완전히 박멸할” 것이라고 반응했다.
그러나 미국 네오콘과 일본 우파의 책략과는 대조적으로 타이완 사람들은 재통합의 시기와 조건에 대한 중국과의 협상에 열린 자세를 보여주었다. 2004년 8월 23일 입법원(立法院, 타이완 의회)은 쳔 슈이뼨이 재선 선거유세에서 공약한 대로 독립에 유리하게끔 헌법개정을 하지 못하도록 의회표결법 변경을 법제화했다. 이 조치는 중국과의 대립가능성을 전격적으로 약화시켰다. 십중팔구 입법원에 영향을 미친 것은 싱가포르의 신임수상 리 셴룽(李顯龍)이 8월 22일 발표한 경고, 즉 “타이완이 독립을 향해 나아가면 싱가포르는 타이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어떤 아시아 국가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싸울 것이다. 이기건 지건 타이완은 초토화될 것이다”는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 중요한 진전은 2004년 12월 11일 의회선거였다. 쳔 슈이뼨 총통은 이 선거를 자신의 친독립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로 규정하였으며, 자신의 개혁안을 실행할 권한을 위임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쳔 슈이뼨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야당인 국민당과 친민당은 의회 225석 가운데 114석을 획득한 반면 쳔 슈이뼨의 민진당과 그 동맹세력은 고작 101석을 건졌다(10석은 무소속 후보들에게 돌아갔다). 89석을 얻은 민진당에 반해 79석을 획득한 국민당의 롄 쟌(連戰) 주석은 “오늘 우리는 모든 국민이 이 나라의 안정을 원하고 있음을 매우 분명히 알았다”고 말했다.
쳔 슈이뼨이 의회의 통제권을 장악하는 데 실패한 것은 미국에서 196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구입하려 했던 시도가 허사가 되리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 거래에는 유도미사일 구축함, P-3 대잠수함 항공기, 디젤 잠수함, 그리고 최신형 패트리어트 PAC-3 대미사일 씨스템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민당과 쑹 츄위의 지지자들은 가격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었으며, 그중 대부분이 2001년 이래 이 거래를 추진해온 부시행정부에 대한 재정적 뇌물이라고 간주한다. 그들은 또한 이 무기들이 타이완의 안보를 개선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2004년 12월 27일 중국 본토는 국방 목표에 대한 제5차 방위백서를 발간했다. 오랜 관측자인 로버트 비데스키(Robert Bedeski)가 주목하듯이, “처음 보면 방위백서는 영토적 주권에 대한 강경한 진술이고, 탈퇴나 독립 혹은 분리의 어떤 움직임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중국의 결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다음 단락은 (…) 타이완해협의 긴장을 기꺼이 완화할 용의가 있음을 비친다. 즉 타이완 당국이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을 받아들여 ‘타이완 독립’을 목표로 하는 분리운동을 중단하기만 한다면, 양측간의 적대상태를 공식적으로 끝내는 문제에 대해 양안간의 대화가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타이완 역시 이런 식으로 메씨지를 읽은 듯하다. 2005년 2월 24일 쳔 슈이뼨 총통은 친민당 쑹 츄위 주석과 2000년 10월 이후 처음으로 만났다. 두 지도자는 본토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했으나 그럼에도 10개항 합의의 대강을 밝히는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그들은 타이완해협 양측간의 수송 및 교역 연계망을 완전히 개방하고 많은 타이완 기업부문의 대중국 투자금지를 완화하기로 노력할 것을 서약했다. 본토는 즉각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놀랍게도, 이를 계기로 쳔 슈이뼨은 “만약 타이완의 2천3백만 국민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타이완과 중국의 궁극적인 재통일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했다.
미국과 일본이 간섭하지 않는다면 중국과 타이완은 잠정타협을 일궈낼 가능성이 있다(4월말 이후 국민당 주석 롄 쟌과 친민당 주석 쑹 츄위가 연이어 중국을 방문하여 후 진타오 주석과 회담을 가짐으로써 타이완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옮긴이). 타이완은 본토에 이미 1500억 달러가량을 투자했고 두 나라의 경제는 나날이 더욱 밀접하게 통합되고 있다. 또한 13억 인구와 370만 평방마일의 영토, 그리고 급속하게 성장하는 1조4천만 달러의 경제규모에다, 동아시아지역에서 지도국이 되려는 열망까지 지닌 중국 옆에서 독립된 중국어권 국가로 살아가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이 타이완에서 점점 퍼져나가는 듯하다. 타이완은 독립을 선언하기보다는 프랑스어권 캐나다와 다소 유사한 지위―명목상 중앙정부 통제 아래에 있으나 독자적인 제도와 법과 관습을 유지하는, 좀더 느슨한 종류의 중국판 퀘벡―를 추구할 수도 있다.
중국 본토는 이런 해법에 상당히 안도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2008년 뻬이징 올림픽 이전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중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타이완의 급진세력이 중국이 향후의 올림픽에 막대한 투자를 했으니 공격하지 못하리라 믿고 뻬이징 올림픽 한두 달 전에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관측자들은 그럴 경우 중국이 전쟁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지 않을 경우 중국의 국가적 통합성을 훼손하였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중국공산당에 대항하는 혁명이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다.
추락하는 미중관계와 중일관계
우호적이건 적대적이건 경쟁상대가 세력중심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 네오콘의 오랜 신조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소련의 붕괴 후 네오콘이 미국의 잠재적인 향후의 적들 가운데 하나로 중국에 주의를 돌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2001년 집권 이후 네오콘은 미국 핵표적의 상당부분을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또한 타이완의 방어를 놓고 타이완과 정례적인 고위급 군사회담을 시작했고, 미 육군의 병력과 물자 일부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으며, 일본의 재무장을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2001년 4월 1일 미 해군 EP-3E 아리에스II 전자정찰기 한대가 남중국 근해에서 중국 제트전투기와 충돌했다. 이 미 정찰기는 중국의 레이더 방어망을 자극하고 그후 중국이 요격기를 띄우는 데 사용하는 전송문과 절차를 기록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중국 제트기는 추락하여 조종사가 사망한 데 반해 미 정찰기는 하이난섬(海南島)에 무사히 착륙했고, 탑승한 24명의 정찰대원은 중국 당국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자국의 가장 중요한 투자자들 다수가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미국과의 대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곧 분명해졌다. 그러나 정찰기 승무원들을 즉시 송환하면 도발에 대해 비굴한 태도를 보인다는 국내의 거센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국은 자국의 영공 내에서 조종사를 죽게 하고 자국의 군사비행장에 무단으로 착륙한 데 대하여 미국 측으로부터 형식상의 사과를 받을 때까지 11일을 끌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의 언론은 붙잡힌 승무원들에게 ‘인질’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그들의 가족·친지에게 동네 나무에다 노란 리본을 매어놓으라고 부추겼다. 또한, 승무원들이 풀려날 수 있게 ‘멋진 일’을 했다고 부시 대통령에게 환호를 보내는가 하면 ‘언론통제’를 문제삼아 중국을 끊임없이 비난해댔다. 이들은 미국이 자국 영해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달하는, 주변 200마일에 항공기 요격지대를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언급을 피했다.
2001년 4월 25일 텔레비전의 한 인터뷰에서 부시 대통령은 타이완을 위해 중국에 대항해서 “미국의 군사력 전부”를 사용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부시는 “타이완의 자기방어를 돕는 데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사용하겠다고 대답했다. 이것이 9·11 이전까지 미국의 정책이었다. 9·11을 계기로 중국은 ‘테러와의 전쟁’에 정력적으로 동참했고, 미국의 대통령과 네오콘들은 ‘악의 축’과 대이라크 전쟁준비에 몰두하게 되었다. 미국과 중국은 또한 아주 밀접한 경제관계에 있었는데, 공화당의 대기업 파벌은 이를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동이 네오콘의 아시아정책을 눌렀던 것이다. 미국이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동안 중국은 거의 4년간 경제사업에 주력하면서 아시아의 발전소이자 아시아 경제의 잠재적인 조직적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급속하게 산업화하는 중국은 석유를 비롯한 기타 원자재를 왕성하게 소비하는 능력도 커졌는데, 이로 말미암아 세계 최대의 원자재 수입국인 미국 및 일본과 직접적으로 경쟁하게 되었다.
2004년 여름에 이르러 부시의 전략가들은 이라크에 신경이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중국의 성장력과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세력에 또다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공화당은 8월 뉴욕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미국은 타이완의 자기방어에 협력할 것이다”라는 강령을 천명했다. 또한 그해 여름 미 해군은 ‘2004년 여름 맥박작전’(Operation Summer Pulse ’04)이라 이름붙인 훈련을 수행했는데, 여기서 미국의 12개 항공모함 전투단 가운데 7개 전투단의 동시적인 해상 전개작전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항공모함 1개 전투단에는 항공모함 1척(보통 9~10개의 비행편대, 총 85기에 이르는 항공기를 거느린다), 유도미사일 순양함 1척, 유도미사일 구축함 2척, 공격용 잠수함 1척, 탄약·석유공급 겸용선 1척이 포함된다. 이처럼 막강한 함대 7개를 동시에 전개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비용도 아주 많이 들었다. 태평양에 파견된 것은 3개 항공모함 전투단뿐이고 타이완 근해를 순찰하는 전투단은 한 번에 하나뿐이었지만, 중국 국민은 이를 자국을 겨냥한 19세기 포함(砲艦)외교의 재연이 시작된 징후로 여겨 높은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미국의 이런 무력시위와 12월 선거를 앞둔 쳔 슈이뼨의 발언 역시 타이완 사람들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듯했다. 10월 26일 뻬이징에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언론에 “타이완은 독립한 것이 아니다. 타이완은 하나의 국가로서 주권을 누리고 있지 않으며, 향후에도 그것이 우리의 정책, 우리의 확고한 정책이 될 것이다. (…) 우리는 양쪽이 최종적인 결과에 대해, 즉 모든 당사자가 추구하는 재통일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하는 일방적 행동을 취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선언함으로써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
파월의 성명은 충분히 명료한 듯했지만, 그가 부시행정부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혹은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 국방장관을 대변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계속되었다. 2005년 초, 포터 고스(Porter Goss) CIA 신임국장, 럼스펠드 국방장관, 국방정보국장 로월 재코비(Lowell Jacoby) 제독은 모두 의회에서 중국의 군사현대화가 과거의 예측보다 훨씬 빠르게 진척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미국의 군사정책을 4년마다 공식적으로 평가하는 국방검토서(Quadrennial Defence Review)의 2005년판에서는 중국의 위협에 대해 2001년판보다 훨씬 엄중한 견해를 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맥락에서, 11월 2일 치러진 미국 대선과 국무부 수장이 파월에서 라이스(Condoleezza Rice)로 바뀐 것에 영향을 받은 듯이, 부시행정부는 위험천만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2005년 2월 19일 워싱턴에서 일본과 새로운 군사협정에 서명한 것이다. 일본은 처음으로 부시행정부와 함께 타이완해협의 안보가 “공통의 전략적 목표”라는 것을 확인했다. 일본이 타이완해협에 개입할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60년간 이어진 공식적인 평화주의에 결정적인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만큼 중국 지도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없었다.
향후 수년 동안 타이완 문제 자체는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그 대신 더욱 직접적인 중일대결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실로 불길한 사태진전이 될 것인데, 왜냐하면 미국이 이런 사태를 부추긴 책임은 있을 테지만 통제할 능력은 없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중일관계의 폭발을 촉발하는 사례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따지고 보면 2차대전중 일본은 동아시아 곳곳에서 대략 2300만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는데―이는 나찌의 손에 의해 희생당한 러시아인 사상자보다도 많다―일본은 아직도 자신의 역사적 전쟁범죄를 반성하기는커녕 인정하기조차 거부하고 있다. 오히려 정반대로 역사를 다시 쓰면서 자신을 아시아의 해방자이자 유럽·미국 제국주의의 희생자로 형상화하고 있다.
코이즈미는 2001년 수상이 된 후―중국으로서는 뼈아픈―상징적인 행위의 일환으로 야스꾸니(靖國) 신사를 처음으로 공식 참배했으며 그후 매년 계속해왔다. 코이즈미는 외국인들에게 일본 전몰자들을 추념하는 것일 뿐이라고 즐겨 말한다. 그러나 야스꾸니는 군인묘지나 전쟁기념관과는 거리가 멀다. 야스꾸니는 실질적인 천황통치제로 복귀하기 위한 쟁투의 과정에서 희생된 넋을 기리는 신또오(神道) 사원(그곳의 토리이鳥居 아치문이 전통적인 붉은색을 칠한 목재가 아니라 강철로 되어 있긴 하지만)으로서, 메이지(明治) 천황에 의해 1869년에 건립되었다. 2차대전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이 신사를 접수하여 애국심과 민족주의 감정을 고취시키는 데 이용했다. 오늘날 야스꾸니는 1853년 이후 국내외 전쟁에서 죽은 약 240만 일본인의 영령에 봉헌하고 있다고 한다.
연합군에 의해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던 토오죠오 히데끼(東條英機) 장군을 비롯한 6명의 전시지도자들은 석연찮은 이유로 1978년 야스꾸니에 집단 안치되었다. 현재 신사의 주지는 그들이 전쟁범죄자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승자가 패자를 심판한 것”이라고 말한다. 신사 구내의 박물관에는 완전히 복원된 미쯔비시 제로 타입52 전투기 한대가 전시되어 있는데, 플래카드에는 당시 중화민국의 전시 수도인 츙칭(重慶)에서 1940년에 처녀비행을 했다고 씌어 있다. 2004년 아시안컵 축구 결승전에서 일본 국가가 연주될 때 중국 관중들이 야유를 보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야스꾸니의 지도자들은 항상 천황 가문과의 밀접한 유대를 주장해왔으나 고(故) 히로히또(裕仁) 천황은 야스꾸니를 1975년에 방문한 것이 마지막이었으며 아끼히또(明仁) 천황은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중국인들은 일본 수상의 야스꾸니 참배를 모욕으로 여기는데, 이는 어쩌면 영국의 해리(Harry) 왕자가 나찌 복장을 하고 가장무도회에 나타난 것에 비견될 만하다(영국의 왕위 계승서열 3위인 해리왕자는 2005년 1월 한 파티에 나찌제복 차림으로 나타나 물의를 빚은 바 있다―옮긴이). 그럼에도 뻬이징은 근년에 토오꾜오를 달래려고 애써온 듯하다. 중국의 후 진타오(胡錦濤) 주석은 일본 중의원 대변인 코오노 요오헤이(河野洋平)가 2004년 9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붉은 카펫을 깔아 환대했고, 중국 외교부의 고위급 온건론자인 왕 이(王毅)를 일본대사로 임명했으며, 중일 양측이 모두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해의 잠재적 석유자원에 대해 합동탐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모든 제스처는 야스꾸니 참배를 계속하겠다고 고집하는 코이즈미에 의해 무시되었다.
이런 상황은 2004년 11월 두 차례의 중요한 정상회담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칠레 싼띠아고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모임과 연이어 라오스 위엥찬(비엔띠안)에서 개최된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한·중·일 지도자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싼띠아고에서 후 진타오는 중·일간 우호를 위해 야스꾸니 참배를 그만둘 것을 코이즈미에게 대놓고 요구했다. 이에 대한 응답인 듯, 코이즈미는 위엥찬에서 원 쟈빠오(溫家寶) 중국 총리를 의도적으로 모욕하였다. 코이즈미는 원 쟈빠오 총리에게 “〔중국이 일본의 대외원조금 수혜자 자리를〕 졸업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하면서 25년간 계속된 대외원조계획을 일방적으로 끝낼 의사가 있음을 암시했다. ‘졸업’이라는 어휘 역시 일본이 스스로를 교사로 생각하고 학생인 중국을 가르친다는 모욕적인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런 다음 코이즈미는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일본이 노력한 역사에 관해 짤막한 연설을 했는데, 이에 대해 원 쟈빠오는 “중일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중국인이 죽었는지 아는가?”라고 응답했다. 원 쟈빠오는 이어서 중국은 일본의 대외원조―중국은 그것이 필요하지도 않다고 말했다―를 전시에 일본이 중국에 끼친 손해에 대한 보상 대신 받는 돈으로 여겨왔다고 넌지시 말했다. 그는 중국이 일본에 한번도 보상을 요구한 적이 없고, 25년에 걸친 일본의 원조액이 약 300억 달러에 이르는데, 일본이 독일보다 인구도 많고 더 부유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액수는 독일이 나찌 만행의 희생자들에게 지불한 800억 달러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2004년 11월 10일 일본 해상자위대는 오끼나와 근처 일본 영해에서 중국 핵잠수함 한 척을 발견했다. 중국이 사과하고 잠수함의 침입을 ‘실수’라고 했지만, 오오노 방위청장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여 일본의 반중국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때부터 뻬이징과 토오꾜오의 관계는 줄곧 내리막길을 달렸고, 타이완이 미·일 양국의 특별한 군사적 관심사라고 밝힌 미국과 일본의 발표에서 최악의 상황에 달했다. 중국은 이를 ‘혐오스런 짓거리’라고 비난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관계의 추락은 미국과 일본 모두의, 특히 일본의 이익에 해가 되리라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중국이 직접 보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일어난 일을 잊어버릴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그리고 중국은 일본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일본의 번영은 점점 더 중국과의 유대에 의존하고 있다.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상과는 반대로 일본의 대중국 수출은 2001년에서 2004년 사이 70%나 급등하여 일본의 힘겨운 경제회복에 주요 동력을 제공해왔다. 1만8천 개가량의 일본 회사가 중국에서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2003년 일본은 대학교육을 받기 위해 유학을 가는 중국 학생들 사이에서 미국을 제치고 최고 인기국가로 부상했다. 거의 7만명의 중국 학생들이 현재 일본 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는 데 비해, 미국의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6만5천명이다. 미국과 일본이 이 지역의 군사주의화를 추구한다면 이같은 긴밀하고 수지맞는 관계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
다극(多極)의 세계
『타임』지의 토니 케이런(Tony Karon)은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전세계에 걸쳐 통상 및 전략적 협력의 새로운 유대가 미국 주변에서 형성되고 있다. 중국은 APEC에서 지배적인 역할자로서 미국을 대체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최대 경제국들의 주요 무역상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 프랑스 외교정책 두뇌집단들은 냉전 이후 세계에서 ‘다극성’―즉 유일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보다는 서로 다른 다수의 경쟁하는 세력중심들을 선호하는 것―이라는 목표를 오래전부터 촉구해왔다. 다극성이란 이제 단순히 하나의 전략적인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점차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현실이다.”
다극성이 존재한다는 증거와 중국이 다극성을 촉진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한 증거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중국과 이란, EU, 라틴아메리카, ASEAN 간의 관계발전을 눈여겨보기만 하면 된다. 이란은 OPEC 회원국 가운데서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큰 산유국으로 오랫동안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으며, 일본은 이란의 주요 무역상대국이다.(일본의 대이란 수입의 98%가 석유이다.) 2004년 2월 18일 일본 업체들로 구성된 컨쏘시엄과 이란 정부는 세계 최대 유전 가운데 하나인 이란의 아자데간(Azadegan) 유전을 공동으로 개발하는 28억 달러 상당의 프로젝트 투자합의서에 서명했다. 미국은 이란에 대한 일본의 지원을 반대했고, 이 때문에 (캘리포니아 민주당의) 브래드 셔먼(Brad Sherman) 의원은 코이즈미가 일본군 550명을 이라크에 파견하여 미국의 이라크전에 국제적 지지라는 치장을 해준 데 현혹되어 부시가 일본·이란의 거래를 수락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2004년말부터 오랫동안 지속된 이란·일본 간의 제휴가 변하기 시작했다. 10월 28일 중국 굴지의 정유업체인 중국석유화학공사(中國石油化工股뷘有限公司, Sinopec)가 거대한 야다바란(Yadavaran) 천연가스전을 개발하기 위해 이란과 700억~1000억 달러 상당의 협약에 서명한 것이다. 중국은 25년에 걸쳐 이란으로부터 2억5천만 톤의 액화천연가스(LNG)를 사기로 합의했다. 이것은 이란이 1996년 이래 외국과 맺은 가장 큰 거래로서, 여기에는 LNG를 중국 항구에 운송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선박의 건조를 중국이 지원하기로 하는 등 부대혜택도 포함될 것이다. 이란은 또한 중국에 1일 15만 배럴의 원유를 25년간 시장가격으로 수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란의 잔가네(Bijan Zanganeh) 석유장관은 뻬이징 방문중에 이란이 중국의 최대 석유공급자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란은 중국의 장기적인 사업파트너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차이나 비즈니스 위클리』(China Business Weekly)에 이란 정부는 자국의 석유 및 가스의 최대 고객을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꾸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즉 원자력 개발계획을 포기하라는 미국의 이란에 대한 압력과, 이란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여 제재를 가하겠다는 부시행정부의 공연한 의사표시 때문이다.(이런 제재에 대해 중국은 유엔 상임이사국의 하나로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다.) 2004년 11월 6일 중국의 리 쟈오싱(李肇星) 외교부장은 이례적으로 테헤란을 방문했다. 이란의 하타미(Mohammad Khatami)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리 쟈오싱은 중국 정부는 실제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란을 제재하려는 미국의 어떠한 시도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은 또한 이란에 핵과 미사일 기술을 판매한다고 중국을 비난해왔다.
중국과 이란은 2003년 이미 40억 달러라는 기록적인 상호거래를 했다. 프로젝트 중에는 중국이 테헤란 지하철의 첫단계 공사를 하는 일과 8월 3600만 달러 상당의 2단계 선로 연결공사를 하는 계약도 포함되어 있다. 중국은 공항으로 연결되는 19마일의 선로를 포함하여 4개의 다른 계획된 선로를 건설하는 데 최우선 협상대상자가 될 것이다. 2003년 2월, 중국 8위의 자동차제조업체 체리(Chery)자동차는 자사 최초의 해외공장을 이란에 설립했다. 오늘날 이 회사는 이란 동북부에서 연간 3만 대의 체리자동차를 만들어내고 있다. 뻬이징은 또한 중국이 2004년 10월에 착공한 카자흐스탄-신쟝(新疆) 간 장거리 송유관과 연결하기 위해 이란에서 북부 카스피해에 이르는 240마일의 송유관을 건설하는 계약을 협상중이다. 카자흐 송유관을 통해 중국은 매년 1천만 톤의 석유를 보급받을 수 있다. 미국의 으름장과 호전적 자세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현재 국제적으로 전혀 고립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EU는 중국의 최대 무역상대국이고 중국은 EU의 (미국에 이어) 두번째 무역상대국이다. 과거 1989년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있었던 민주화 시위자들에 대한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EU는 중국에 무기 판매금지를 부과했다. 이런 대접을 받은 나라는 버마(미얀마), 수단, 짐바브웨 같은 그야말로 국제적 2류국가밖에 없다. 심지어 북한도 공식적으로 유럽에 무기금수를 당하고 있지 않다. 1989년 이후 중국의 지도부가 여러차례 바뀐 사실을 감안해서, EU는 선의의 의사표시로 금수조치를 해제할 의향을 발표했다. 시라끄(Jacques Chirac)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다극의 세계’로 대체하자는 견해를 가장 강력하게 주창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2004년 10월 뻬이징 방문중에 그는 중국과 프랑스가 “공통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으며, 금수조치를 해제하는 것이 “의미심장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즉 유럽이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사이의 기로에서 중국을 선택한 순간을 기념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부시는 2005년 2월 서유럽 순방중에 “무기 이전은 중국에 대한 기술 이전이 될 것이며, 중국과 타이완 사이의 힘의 균형이 깨지지 않을까 깊이 우려된다”고 거듭 말했다. 2월초 미국 하원은 EU의 잠재적 움직임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411대3으로 찬성하는 표결을 했다. 유럽과 중국은 부시행정부가 이 사건을 지나치게 과장해왔으며, 힘의 균형을 깨뜨릴 만한 무기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고, EU는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새 방위계약을 따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상호간의 전반적인 경제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목표라고 주장한다. 부시의 유럽순방 직후 피터 맨델슨(Peter Mandelson) EU 무역담당 집행위원은 최초의 공식 방문지로 뻬이징을 택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방문목적은 중국과 유럽의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창출할 필요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은 중국을 가공할 군사적 위협이라고 묘사하는 다수의 새로운 정보평가를 내놓음으로써 강경노선을 강화해왔다. 이런 정보가 정치적 용도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중국의 군사현대화가 전쟁시 타이완해협에서 사용되리라 여겨지는 미 항공모함 전투단에 반격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이 주요 주장이다. 중국은 분명 대규모 핵잠수함 함대를 구축하려 하고 있으며, 미군이 통제하지 못하는 위성항해씨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EU의 갈릴레오 프로젝트(미국이 독점하는 위치파악씨스템GPS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우주국 회원국들이 2008년까지 24개의 위성을 궤도에 띄우는 계획―옮긴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미 국방부는 중국이 갈릴레오 프로젝트 기술을 대(對)위성 용도로 바꾸어 사용할까봐 우려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분석가들은 또한 2003년 10월 15일 중국이 우주비행사 한명을 태운 우주선을 쏘아올린 데 대해―그는 다음날 지구로 무사히 귀환했다―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우주에 유인우주선을 띄운 것은 구소련과 미국뿐이었다.
중국은 타이완 맞은편에 이미 500~550대의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배치해왔으며 중국 본토에 대한 미국의 미사일 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사정거리 1만3천km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CSS-4 ICBM24기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에 본부를 둔 안보정책연구소(Center for Security Policy)의 연구원 리처드 피셔(Richard Fisher)에 따르면, “중국이 현재 배치하고 있는 무력은 아마도 미 항공모함 전투단 하나를 충분히 대적하고도 남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펜씰베이니아 대학의 국제관계 교수 아서 로더(Arthur Lauder)도 같은 의견이다. 그는 중국의 군부가 “오늘날 전세계에서 성장하고 있는 군대 가운데 미국과 싸울 수 있는 구체적인 채비를 갖춘 유일한 군대”라고 말한다.
미국이 바란다고 해서 중국의 이런 능력이 없어지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중국이 부시행정부의 위협에 반격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중국은 타이완과 미국이 타이완을 분리시키려 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양국과의 전쟁을 피하려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2005년 3월 중국의 형식상 입법부인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중국에서 타이완이 분리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자국 영토의 일부가 본국을 이탈하려 할 때 무력사용을 승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일본정부는 중국이 이 지역 전체에 군사적 위협이 된다는 미국의 입장을 물론 지지한다. 그러나 자못 흥미롭게도 이라크 문제에서는 미국의 충실한 동맹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존 하워드(John Howard) 정부는 유럽의 무기 금수조치를 해제하는 문제에는 부시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며 양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협상하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15년간의 금수조치를 해제하는 문제에서 EU를 지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시라끄와 슈뢰더(Gerhard Schröder) 독일 수상은 모두 “해제가 이뤄질 것이다”고 말한다(EU는 실제로는 대중국 무기 금수조치 해제를 1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옮긴이).
미국은 라틴아메리카가 자국의 ‘영향권’ 내에 있음을 오래전부터 천명해왔고 이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 지역에서 사업을 할 때 신중하게 처신해왔다. 그러나 중국은 급성장하는 자국 경제를 위해 연료와 광물을 찾아나서면서 워싱턴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여러 라틴아메리카 나라에 공공연히 구애를 하고 있다. 2004년 11월 15일 후 진타오 주석은 5일간의 브라질 방문을 끝냈는데, 방문기간 동안 브라질의 중국 수출과 중국의 브라질 투자 확대를 목표로 하는 12건 이상의 협약에 서명했다. 한 합의서에는 브라질이 중국에 8억 달러나 되는 쇠고기와 가금류를 매년 수출한다고 되어 있다. 그 대신 중국은 기술연구가 일단 완료되면 리우데자네이루와 바이아(Bahia) 사이의 13억 달러짜리 가스관 건설자금을 대기로 브라질 국영 석유회사와 합의했다. 중국과 브라질은 또한 쌍무간 무역실적을 2004년 100억 달러에서 2007년까지 200억 달러로 끌어올릴 목적으로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맺었다. 후 진타오 주석은 이 동반자관계가 “개발도상국에 유리한 새로운 국제질서”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후 몇주간 중국은 아르헨띠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칠레, 꾸바와도 중요한 투자 및 통상협약을 맺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2004년 12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Hugo Chavez)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자국의 석유자원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권을 중국에 주기로 합의한 사실이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5위의 석유수출국이며 보통 석유산출량의 약 60%를 미국에 판매했지만 새로운 협정에 따라 중국은 베네수엘라 동부에 위치한 양질의 15개 유전에서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은 석유를 추출하는 데 약 3억5천만 달러를, 또한 천연가스정에 6천만 달러를 투자할 것이다.
중국은 또한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들을 어떤 형태의 새로운 경제·정치 공동체로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만약 이런 연대가 탄생하게 된다면 이 지역에서 미국과 일본의 영향이 잠식되리란 것은 틀림없다. 2004년 11월 ASEAN을 구성하는 10개국(브루나이, 버마,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타이, 베트남)이 한·중·일 지도자들과 함께 라오스의 수도 위엥찬에 모였다. 미국은 초대받지 않았고 일본의 관료들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한 듯했다. 회담의 목적은 ‘동아시아공동체’(East Asian Community)를 창출하는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2005년 11월에 개최될 동아시아 정상회담의 계획을 짜는 것이었다. 또한 2004년 12월 ASEAN 국가들과 중국은 2010년까지 자유무역지대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에드워드 코디(Edward Cody)에 따르면 “중국과 ASEAN 10개국 사이의 무역은 1990년 이래 매년 약 20%씩 증가해왔으며 지난 몇년간 그 증가속도는 더욱 빨라졌다”는 것이다. 이 무역은 2003년 782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2004년말에는 약 1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일본의 중견 정치평론가 후나바시 요오이찌(船橋洋一)는 “〔동아시아에서〕 세계무역에 대한 역내무역의 비율은 2002년 약 52%였다. 이 수치는 EU의 62%보다는 낮지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지역의 46%보다는 높다. 무역 면에서 동아시아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라고 논평한다.
중국은 이런 노력의 배후에 위치한 가장 주된 원동력이다. 후나바시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는 자국의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지역의 무역상대국들과의 한층 강화된 연계를 이용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주변화하고 일본을 고립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후나바시는 미국이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주로 미국이 야기한―에 편협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반응한 탓에 이 지역에서 얼마나 불신을 받게 되었는지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004년 11월 30일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미첼 리스(Mitchell Reiss)는 토오꾜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서태평양 국가로서 동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지역의 대화와 협력의 틀에서 미국을 배제하려는 어떠한 계획에 대해서도 유감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부시행정부가 중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공동체의 도래를 지연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하기에는 분명 너무 늦어버린 듯한데, 특히 미국의 경제적·금융적 능력이 쇠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일본의 선택은 여전히 더욱 어렵다. 중·일간의 적대관계는 동아시아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데, 항상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2차대전 이전 중국 문제에 관해 일본의 가장 영향력있는 필자 중의 하나였던 오자끼 호쯔미(尾崎秀實, 중일전쟁 시기의 정평있는 중국문제 평론가. 일본이 자체 구조개혁을 수행하면서 중국 공산주의운동과 연합해 동아시아공동체를 수립할 것을 주장함―옮긴이)는 일본이 중국혁명에 적응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에 대항하는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중국인들을 급진화시키고 중국공산당의 집권에 기여하리라는 예언적인 경고를 했다. 그는 “중국혁명의 성공이 왜 일본에게 불리한 것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1944년 일본정부는 오자끼를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했지만 그의 질문은 1930년대 후반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중국이 부유하고 성공적인 나라로 부상하는 것이 왜 일본이나 미국에 불리한 일이 되어야 하는가? 역사는 군사력을 통해 이런 진전을 막으려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반지성적인 대응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홍콩의 한 경구대로, 중국은 막 2세기 동안의 곤란한 시절을 끝내고 이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세계는 이 지역에서 자국의 의지를 강요하려는 중국의 비합리적인 노력은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중국의 정당한 주장들―그중 하나는 다른 국가들이 타이완 문제를 군사화하기를 중단하라는 것인데―에 평화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불행히도 동아시아 사태의 동향을 보면 과거 중·일간의 갈등이 반복되지 않을까 싶은데, 다만 이번에는 미국이 승자 편에 서 있는 것 같지 않다.
[姜美淑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