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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시

 

떠도는 낭만의 기호들

 

 

박형준 朴瑩浚

시인.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등이 있음. agbai@korea.com

 

 

 

국수 삶는 출출한 밤이다

 

우르가를 보는 밤, 곰보는 징기스칸의 후예, 테무친 같은 나의 아들은 잠들고 참으로 고요한 밤이다, 몽골 영화 우르가를 보면서 자꾸만 그대의 초원에 우르가를 꽂고 싶은 밤이다

 

곰보는 징기스칸의 후예, 곰보의 딸은 부마, 집시도 아닌 것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네

 

(…)

 

술을 마시며 우르가를 보는 밤이다, 술에 취해 몽골의 낮은 구릉들에 취해, 우르가의 풍경을 듣는 밤이다

 

나는 고독의 후예, 삶에 취한 밤이면 나도 말을 타고 한세상을 건너가지

 

나도 말을 잘 타지, 그대에게 취한 밤이면 말을 타고 아득한 시간의 저편으로 나는 마구 달려가네, 우르가를 들고 그대의 드넓은 초원 위를 달려가는 나는 고독이 사랑한 生의 후예

 

국수 삶는 출출한 밤이다

―박정대 「우르가」(『서정시학』 2005년 봄호) 부분

 

『서정시학』 2005년 봄호는 특집으로 ‘21세기, 젊은 남성시인들의 시세계’를 내세우고 있다. 이윤학 박정대 박형준 이정록 이장욱 장철문 문태준 배용제 권혁웅 손택수 유홍준 등 11명의 신작시 두 편과 자선시 한 편씩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젊은 남성시인들’이라는 제목의 좌담으로 평론가 이광호 유성호 박혜영 김용희 등이 수록된 시인들의 작품세계를 훑어보고 있다. 나도 과분하게 이 특집에 초대되어 잡지를 일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중에는 90년대 초반부터 활발하게 시작활동을 하여 이미 중견 소리를 들을 만한 시인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좌담을 살펴보니 이광호(李光鎬)는 이런 선정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주류 담론의 보수화가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개성이 발현될 수 있는 시적 공간을 제한한다는 그의 지적에 공감이 갔다. 사실 7,80년대의 최승자 이성복 황지우 기형도 등의 시에 비해 90년대 시들이 확연한 시적 개성이 부족한 것은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한 바 있다. 가령 이 좌담에 참석한 유성호(柳成浩)가 “우리 시대를 규정하고 있는 복합적인 타자들을 시 안으로 불러들이는 데 게으른 것 같”다며 “다만 풍경과 기억을 병치한다든가, 내면으로 침잠해서 시적 완결성을 꾀한다든가, 이런 작법들이 의외로 많”다고 지적한 것이 한 예가 될 것이다. 허나, 나 자신이 특집에 포함되었고 또 거기에 수록된 다수의 시인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시를 토론한 사이여서 그런지 이런 소리가 그저 곱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이 좌담을 설렁설렁 넘기고 특집시들을 읽다보니 좌담자들의 우려가 그저 탁상공론만은 아닌 듯했다. 또 필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윤학 이정록 장철문 등의 시는 더이상 젊은 시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는 것이 민망스럽게 느껴졌다. 이윤학(李允學)의 시는 자기 폐허의 성채에서 빠져나와 ‘참외꽃의 솜털’을 바라볼 줄 아는 동심을 보여준다(「흔적」). 또 장철문(張喆文)은 ‘할머니가 빚은 수제비 반죽을 집어던진 것’이 둥근 달이 되고 그것이 다시 화자의 딸아이에게로 떨어지며 유전되는, 추석날의 아름다운 저녁을 우리들의 심정에 새겨넣는다(「추석」). 9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시세계는 자기 기원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 상처가 시작되는 지점을 우리 현실에 대입하여 보여주었다. 마치 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내달리는 타조처럼 이들의 시는 기억과 현재의 통합을 아슬아슬한 내달림으로 형상화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경향을 지닌 시인들을 21세기의 젊은 남성시인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계절이면 십여종이 넘게 출간되는 문예지에 어느덧 이들의 시가 앞머리를 장식할 만큼 시적 연륜이 쌓인 것도 단적인 이유가 될 듯하다. 시에서 굳이 남성과여성을 가르거나 젊은 시니 아니니 따지는 것도 부질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90년대의 시적 경향을 넘어서서 지금 우리의 현실을 날카롭게 직시하는 시가 새로움의 전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정대(朴正大)의 시는 2000년대의 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낭만성을 시적 역량으로 끌어올린 좋은 본보기가 된다.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앞의 박정대 시를 몇차례 읽다보니, 처음에 새롭게 느껴졌던 것들이 그닥 새롭지만은 않게 다가왔다. 화자는 국수를 삶아 출출한 배를 채우며 몽골 영화 「우르가」를 보고 있다. 시적 공간이 명시되지는 않지만 밤이 깊고 아들마저 잠들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추운 겨울밤이 떠오른다. 화자는 고독에 빠져 뜨뜻한 국수를 삶아 먹고 술을 마시며 게르(Ger, 몽골족의 이동식 천막집) 같은 방 안에서 몽골의 대평원을 쫓고 있다. 눈자위에 붉은 기가 어린 화자는 화면의 평원을 바라보는 어느 순간 자신도 어느덧 말 위에 올라타 아득한 시간의 저편으로 달려가고 있다. 시의 마지막을 “연애처럼 낡고 오래된 지구의 깊은 밤이다”라고 끝내는 것을 보면 고독과 국수와 몽골의 대평원과 술 한잔이 어우러져 낭만의 대단원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그 감동은 거기까지다. 시인은 대평원을 바라보며 자기의 집을 게르로 느낄 만큼 유목적 삶을 한껏 고양하고 있는데, 이 시를 읽는 나는 왜 점점 힘이 빠져가는 걸까. 그 맥빠짐을 곰곰이 돌이켜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박정대의 시에 백석의 「北方에서」라는 시가 중첩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우리 역사를 먼 북방의 동이족들의 삶 속까지 밀고 올라가 기원을 응시하고 있는 백석의 시가 빛나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부끄러움에 대한 치열한 각성에서 비롯된다. 물론 우리는 식민지시대에 살고 있지도 않고 역사에 대한 책무로 시가 알리바이가 되던 80년대의 공간에서 살고 있지도 않다. 때문에 한 시인이 자기의 고독을 낭만화하여 이 비좁은 현실을 탈출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런 낭만성은 문화산책자인 박정대의 아름다움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2000년대에 등단한 많은 시인들의 시에 폭넓게 유포되어 있다. 정작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90년대적 사고를 지닌, 앞서 인용된 시인들이 아니라 이제 막 시집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시단의 젊은 전위들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다보면 ‘낭만성’이란 무엇일까 하는 상념에 빠지곤 한다. 이들의 시를 1920년대 김소월류의 초혼성(招魂性)과 결부시키는 것은 난망한 일이지만, 한 비평가이자 시인으로부터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권혁웅, 『문예중앙』 2005년 봄호)이라는 멋진 수사를 얻은 이들의 시에서 나는 애써 김소월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초혼성이란 다른 말로 하면 ‘불러내기’ 정도가 될 터인데, 주술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 혼령을 불러내는 이 행위 속에는 상상력으로 현실의 엄혹함을 돌파해보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 깔려 있지 않나 여겨진다. 서구에서 앙드레 브르똥(André Breton)이 창안했다고 전하는 자동기술법 역시 당시의 물질문명과 실증주의에 압사되었던 상상력을 자유롭고 새롭게 복권하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면, 이러한 초혼성은 현실에 맞선 치열한 대결의지의 응축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그런데 과연 21세기의 초반부를 수놓고 있는 한국의 젊은 시인들이 재래적이다 싶은 이런 초혼성을 염두에나 두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만 이들의 최근 시의 흐름을 보면 흥미로운 대비가 나타나는데, 크게 상상적/귀향적이라는 대립쌍을 보여주는 점이라고 하겠다. 앨런 메길(Allan Megill)이 『극단의 예언자들』(새물결 1996)에서 모더니즘의 주요한 흐름을 짚으면서 해석하고 있는 이 시도는 21세기 서두의 우리 젊은 시의 흐름에도 한 잣대가 될 성싶다. 이것은 후자가 ‘기원으로의 복귀’를 꾀한다면, 전자는 원래의 기원을 흐려버리고 미래를 향해 도약하는 상상적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1

문태준 손택수 박성우 등으로 대변되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자신의 뿌리찾기에서 사라져가는 전통을 새로운 시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각종 문화적 텍스트를 자신의 주체에 착종한 ‘미래파’들이 서 있다. 귀향적 도정에 선 시인들이 앞세대의 시에서 보이던 자연에 대한 탐구를 더 시원적이며 더 직접적인, 그래서 진정성으로 가득 찬 상황으로 더 멀리 그리고 더 깊게 변조해내고 있다면, 상상적 도정에 서 있는 시인들은 현재가 유기되었으며 모든 것은 무(無)로부터 창조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끊임없이 공격을 가한다. 따라서 이들의 공통점은 자연/문명의 대립쌍으로 묶이면서도 앞세대의 신서정과 실험시에 비해 훨씬 의식적이며 전략적이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한쪽의 예각을 형성하는 시인군의 대표주자 문태준과 손택수의 시에서 나타나는 고립된 산촌마을이나 ‘아버지 찾기’는 지금은 우리 현실에서 보기 힘든 ‘만들어낸’ 이미지에 가까우며, 따라서 이들의 시는 장인적 연마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물론 시인의 체험이 시집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체험은 그들 가계에 전해지는 설화적 공간을 상상화한, 그래서 미적으로 잘 빚어낸 구성체에 가깝다. 또한 ‘미래파’로 명명된 도시적 감수성의 시인들은 황지우 박남철 장정일 등으로 이어지는 실험시의 계보 속에서 현실과의 접점을 흩뜨리고 문화적 텍스트 혹은 유희에 기초한 상상력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읊조린다, 조지아…… 비의 조지아……

기우는 나무 곁에서 흩어지는 바람 속에서

덫에 걸린 고양이처럼 서서히 오그라드는 귓바퀴처럼

조지아…… 오우 조지아,라고.

 

(…)

 

우리는 조금 늦게 철이 들었고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분명하다는 것은

의심할 게 없다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게 싫었다, 아버지

조지아를 더욱 조지아답게!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그것을 보여주었고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졌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의심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게 좋았다.

때때로 빗줄기가 사라지는 조지아의 밤, 그런 날이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숲에 들어가 불을 놓았다

불길이 구름의 모양을 천천히 변화시키는 모습을 바라보며

비를 맞았다 아무도 서로를 추궁하지 않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저지른 일이므로. 제발 조지아, 젖은 머리칼이 약간

얼굴을 가렸을 뿐

―황병승 「비의 조지아」(『문학과사회』 2005년 봄호) 부분

 

최근 1~2년 사이에 등단한 시인 중에서 단연 압도적일 만큼 많은 작품을 문예지에 선보이고 있는 황병승(黃炳承)은 평자들로부터 ‘새로운 시인’으로 불린다. 어느 사이에 우리 시에서 세계와 ‘나’ 사이에 가교를 놓던 은유 대신 의미의 형성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언어들 사이의 비약적 관계망으로 이루어진 환유가 형식적 특징이 되어가고 있다. 앞뒤 맥락을 여러차례 반복해서 읽어야만 겨우 그 가닥을 파악할 수 있는 시형식은 다수의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메뉴가 되고 있다. 앞의 황병승 시는 우선 새로움의 차원을 접고서도 시의 리듬이라는 면에서 재래적 서정에 기반한 시인과 독자들에게까지 호소력을 발휘하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운율과 의미 사이에 끊임없이 차단막을 형성하는 낭만성은 시를 쓸데없이 길고 모호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현을 통해 무의식을 시화(詩化)하는 젊은 시인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지만, 중요한 시적 모티프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는 시인 자신만의 낭만적 산물일 뿐 거기에 독자가 틈입할 공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 시 속의 아버지는 시인의 의미망 속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아버지일 뿐이어서, 우리는 시인이 유장한 리듬에 파놓은 낭만성의 그림자를 추려내 아버지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꽃,

너가 죽었으면 좋겠어

밤의 주머니 속에 들어간 캥거루 새끼처럼, 달이 노랗게 떨고 있어

살아 있는 고통으로부터 밤을 빚었을 때

어둠 속에서 발정난 네 모가지 때문에

아무데서나 불쑥불쑥 사생아들이 태어났고

낡은 아버지의 병든 아침 속에서도

너는 뻔뻔하게, 가녀린 발목을 대롱대며 사다리를 올랐지

네가 쿨렁일 때마다

광란의 비가 내렸고, 잔치의 끝무렵처럼

애인들의 구두가 슬며시 떠나갔고

설사처럼, 굉음을 내며, 쏟아지던 그리움

때문에 압사당한 밤하늘, 너의 미친 노래를 온몸에 휘감고 나자빠진 밤하늘!

―박연준 「봄밤」(『현대문학』 2005년 4월호) 부분

 

작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연준의 시 「봄밤」은 ‘꽃’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관념을 해체한다. 우리의 생(生)은 이 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매순간이 꽃봉오리로서의 삶을 열망함으로써 비극이 벌어진다. 오히려 ‘살아 있는 고통’ 자체로서 ‘밤’인 이 삶을 견디려 할 때 ‘꽃’은 ‘발정난’ 것처럼 우리 삶에 불쑥 출현한다. 병든 아버지를 보살피고 있을 때에도, 애인과 연애를 할 때에도 꽃은 광란처럼 우리 발목을 붙잡고 대롱대며 ‘사다리’를 오른다. 이 작품은 봄밤의 정황을 통해 정념과 광란으로 피어나는 여성의 욕망을 도입부에서 “꽃,/너가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제시함으로써 도발적 이미지로 시를 전개해간다. 그런 점에서 신선하다. 그러나 인용된 부분에서 대충 추려봐도, “살아 있는 고통으로 밤을 빚었을 때” “낡은 아버지의 병든 아침” “광란의 비” “설사처럼, 굉음을 내며, 쏟아지던 그리움” “압사당한 밤하늘” 같은 표현들은 시인의 과다한 낭만성에 의해 감정이 절제되지 않고 그대로 토로되는 아쉬움이 있다.

 

내 몸은 아버지보다 늙었다 아버지

앞에서 자주 눕다 보면 그걸 안다

아침녘에 그이가 내 방문을 열 때

나는 밤새워 뒹굴다가도 쌔근쌔근 숨을 쉬며

잔다, 자는 척 한다 어떤 날은 십 분씩 이십 분씩

아버지가 내 몸 구석구석을 만지는데 그럴수록 몸이

뻣뻣해진다 그러다 잠들기도 한다 病과

 

같이 지낸 9년이 아픈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 저희들의 첩첩산성을 쌓아둔 안정제의

안정한 성곽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한약 팩을 울분으로 잘라내는 습관적 손놀림이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오늘 아침은 아버지 핏발 선 눈이 아프다

아침인데도 그리로 해가 지고 있다

응급실에서 돌아온 아침에 그이는

蘭이 겨울을 나는 법이라든가

癌에 걸렸다가 살아났다는 윗말 김씨 얘기를 한다

그 얘기를 하는 이유를 나는 안다 당신도 안다

그이의 아버지 朴龍文씨(1918~1977) 주민등록증을 지갑 속에

아직까지 넣어 다니는 걸 나도 안다

 

생몰 연대가 없는 금강에서 아버지는 나를

껴안는다 스물일곱의 내가 바라보는 錦江의 노을,

스물일곱에 아버지는 나를 낳으셨다 내 몸을 죽어라

껴안고 있는 그이의 심장이 펄떡거린다

비단강에 몸 푸는 목숨이여,

비단 같은 탯줄을 끊고 비단처럼

아름다운 나라로 가라,

처음 세상 나실 적처럼 우는 아버지,

나는 건강한 産母로 강바람에 오래 달궈진

버드나무 잎들을 미역 대신 따 먹으리라

 

아버지, 불쌍한 내 자식,

―박진성 「나는 아버지보다 늙었다」(『목숨』, 천년의시작 2005) 전문

 

박진성(朴鎭星) 첫시집 『목숨』에는 “상습 불면, 자살충동, 공황발작”(「안녕」)에 시달리는 젊은 시인의 고통이 화려한 언어로 ‘피어나고’ 있다. 여기서 ‘피어난다’고 한 것은 일단 그의 시가 절제된 고통의 신음소리로써 우리를 절실하게 울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피부에 맺힌 병의 무늬를 볼 때 느끼는 어떤 화사하기까지 한, 그래서 시의 장식미로 느껴질 만한 감각적 수사가 읽는이의 머릿속에 우선적으로 압도해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발작 후의 울분, 울분 지나간 자리 측백나무 술렁임 지나 선생을 불러봅니다 고흐 先生, 호칭을 헤매다 며칠을 앓았습니다 고흐 兄은 발작하는 심장에 너무 가깝고 고흐氏는 타라스콩으로 가는 길처럼 멀기만 하고…… 미적 거리를 위한 내 서투른 시작법이 先生이란 것에 기댄 것이겠지만 타인과의 병적 동일시를 통한 정신분열 가능성 의사 몰래 훔쳐본 차트에서 全生의 지문을 봅니다”(「반 고흐와 놀다」). 이 시집에는 이런 유형의 표현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가 시집 뒤에 붙인 시론적 성격이 강한 산문 「病詩」는 오히려 자신이 앓고 있는 병과 시의 관계를 투명하게 들려준다. 특히 이런 구절을 보면 그의 아픔이 강한 시적 환기력으로 다가온다. “내 몸 어딘가가, 혹은 내 정신 어딘가가 끊임없이 아프다는 사실, ‘나―살아 있음’을 강력하게 부정하면서 동시에 삶을 이끌어나가는 동력. 궁극적으로 病은 ‘내가 아픔’을 통해서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거대한 구멍이 아닐까, 혹은 그러한 아픔이 온전히 만날 수 있는 날〔生〕것 그대로의 혼융 상태가 아닐까.” 그렇지만 시집에 수록된 그의 대부분의 시는 아직 이 시론에 미치지 못한 채 자신만의 낭만성에 갇혀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난 아픔은 ‘긴장의 미학’(박수연의 해설)을 제대로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시집 마지막에 수록된 「나는 아버지보다 늙었다」는 이 시집 전체에서 단연 감동적이며, 그에게 미래를 걸어도 좋겠다는 희망을 안겨준다. 다만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마지막 구절 “아버지, 내 불쌍한 자식,”이 사족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버드나무가 늘어진 강가에서 아버지와껴안는 행위를 통해 이미 ‘아버지를 낳는’ 상상력으로까지 진일보한 시적 행위가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의 단정으로 말미암아 여운의 폭이 줄어든다. 이런 점은 앞서의 황병승 시에 나타난 아버지에 대한 관념성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시라는 미적 구성체를 읽고 느끼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 다를 수 있는 문제이고 보면, 중요한 것은 젊은 시인이 보여준 병적 상상력의 진정성에 대한 성찰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은 평론가 박수연(朴秀淵)이 시집 해설에서 지적하고 있는 다음 구절을 떠올려준다. “아픈 실재를 긍정하는 언어들이 긴장의 미학으로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면 한국시단은 훌륭하고 특이한 시인 하나를 갖게 되는 셈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기대는 물론이고 자신의 시론을 입증해줄 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아버지의 아픔을 발견해내는 행위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자신을 보살피는 아버지처럼 껴안고 갈 수 있음을 예시해준다. 이를테면 이것은 자신의 병수발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단순하게 드러낸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 아침은 아버지 핏발 선 눈이 아프다/아침인데도 그리로 해가 지고 있다.” 이런 대목은 화려한 언어들로 채색된 그의 시집 안에서 밋밋하기까지 하지만, 장식적 수사를 걷어버린 단순함이 오히려 오래 여운을 준다. 이 속에는 9년 동안 자신의 병수발을 하느라 늙어버린 아버지를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이 애틋하게 묻어난다. 이러한 마음이 부계(父系)를 거슬러 생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금강’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비단 같은 탯줄을 끊고 비단처럼/아름다운 나라로 가라”는 수일(秀逸)한 이미지를 낳는 힘이 되고 있다.

 

*

최근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보이는 낭만적 상상력은 대개 자신의 고통과 관념, 유희에 매몰된 감상의 산물일 때가 많다. 이들의 시에서 나타나는 표현의 화려함과 환유적 사고, 무의식에 대한 과다한 집착은 전시대의 시와 자신들의 시를 구별해내 독자적 미의식을 창출하려는 조급함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시에서 보여주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말아야겠다는 의지가 이 시대의 새로운 미적 가치를 산출하려는 몸부림으로 이어지는 것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전시대와 단절하려는 의지의 산물인 그들의 새로움을 긍정하고 싶은 연민이 더 크다. 그러나 잎과 가지만을 보며 앞으로 내달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뿌리를 간과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인위적인 시로 연결된다.중요한 것은 키치든 문화든 기억이든 무엇이든 시인이 그것에 대한 ‘중독자’이자 ‘반성자’(김현)가 되지 않으면, 그 양자간의 거리에서 빚어지는 ‘긴장의 시학’은 물론이려니와 새로운 미적 가치도 태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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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남진우 『미적 근대성과 순간의 시학』, 소명출판 2001, 65~67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