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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한 정신적 인간의 고뇌와 영광
T. 만 장편 『요셉과 그 형제들』(전6권), 살림 2001
안삼환 安三煥
서울대 독문과 교수 samhahn@snu.ac.kr
2001년 11월, 대한민국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20세기 독일의 대표적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은 바 있고, 유럽 서사문학의 극점(極點)이어서 더이상 오를 수 없는 작품이라고 하는 『요젭과 그 형제들』(Joseph und seine Brüder)이 우리말로 완역 출간된 일이 그것이다. 역자 장지연은 토마스 만의 4부작 ‘요젭소설’을 6권의 책으로 번역해내고 거기다 또 1권의 해설서까지 덧붙여놓았으며, 많이 팔릴 책이 아님에도 출판사는 이 7권의 책을 귀하게 장정해 출판했다. 그런데,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표하는 사람도 드물고 이 ‘사건’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시끄럽고 지저분한 사건들이 지천으로 터지는 이 나라에서 이것이 무슨 사건이 되겠느냐는 반문이 반드시 나올 줄 뻔히 짐작하면서도 굳이 이런 표현을 쓰는 까닭은 작가인 토마스 만조차도 이 작품을 가리켜 16년 동안의 “지구력과 끈기의 기념비”라고 했을 정도로 이 소설이 정말 대단한 지구력과 끈기의 소산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책의 한국어판 완역본을 내어놓은 역자 또한 자신의 지구력과 끈기를 무언중에 입증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야콥 이야기」 「청년 요젭」 「이집트에서의 요젭」 「부양자 요젭」 등 4부작으로 되어 있는 ‘요젭소설’은 토마스 만이 1926년에 쓰기 시작해서 1943년 1월에 완성한 작품으로서, 그 원형은 구약성서 창세기 27〜50장에 짤막하게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유럽 기독교문화의 후예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이 짤막한 이야기를 토마스 만이 도합 1822면에 이르는 방대한 서사작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아마도 이 인물들과 토마스 만 자신의 유사성이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언젠가 토마스 만은, “내 마음속에는 시대나 보편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할 경우에도 실은 나 자신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면 된다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라고 한 적이 있지만, 사실 이 작가는 작품을 써나가는 도중에 점점 더 야콥과 요젭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해낸 것 같다. 우선, ‘요젭소설’의 서막 ‘하계(下界)로의 여행’에서 남바빌론 우르 출신의 ‘생각 많은 남자’ 아브라함이 왜 나그네 길에 오르는지를 설명하는 부분만 봐도 그렇다.
“우르의 월탑이나 바벨의 마르둑 신전 외에도 생각 많은 남자의 심기를 건드린 또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님로드의 권세도 그렇고 풍습과 관습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신성시했을지 모르나 그의 경우는 달랐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가슴을 마구 휘저어, 점점 더 깊은 회의로 몰아넣었다. 이렇게 회의와 절망으로 고통받는 영혼은 진득하게 한군데 좌정할 수 없는 법, 자리를 뜨는 건 당연했다.”(1권 27면)
즉, 이 ‘생각 많은 남자’가 고향을 떠날 때에는, “무슨 정치적 약속을 받을 기분도 아니었고, 또 받아낼 생각도 없었다. 떠나기 전부터, 앞으로 내가 살 곳은 아모리 사람들 땅이다, 이렇게 점찍어놓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아니, 정황을 보면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가나안이 정해진 목적지였다면 무엇하러 멀리 이집트까지 가봤겠는가”(1권 29면) 말이다. 요컨대, 요젭이 증조부라고 생각하는 아브라함은 이미, 토마스 만의 언어로 표현하면, ‘예술가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바빌론의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라헬이 낳은 아들 요젭은 아버지 야콥의 특별한 총애를 받으며 나르키쏘스적 인물로 자라나던 중, 열한 명의 형제들이 모두 자신에게 고개숙여 절하는 꿈 이야기를 하다가 형들의 질시를 받아 구덩이에 처넣어지고 멀리 이집트로 팔려가는 시련을 겪지만, 이국 이집트에서 결국 대성하여 흉년에 곡식을 얻으러 온 형제들을 구휼하는데, 이것 또한 나르키쏘스적 예술가로 출발했다가 망명이라는 큰 시련을 겪고 이국땅 미국에서 큰 인정을 받아 뒤늦게 미국으로 망명해 들어오는 많은 동포들을 도와준 작가 토마스 만의 고통과 영광의 삶의 궤적과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나르키쏘스였던 요젭이 구덩이에 빠지는 시련을 극복하고 이국에서 겨레의 부양자 역할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내지만, 야콥의 장자권은 요젭에게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부족의 본줄기”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현장에서 필요한 행동을 해온 유다에게 상속된다. 요젭이나 토마스 만이나 “본줄기에서 떨어져나가 더이상 본줄기가 될 수 없었”(6권 814면)던 점에서는 유사성이 있는데, ‘정신적 인간’의 운명이 대저 다 이런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작가 토마스 만이 왜 이 소재에서 그다지도 “지구력과 끈기”를 보였던가 하는 비밀의 열쇠를 발견해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 소설의 주인공 요젭은 ‘성경의 요셉’으로 편협하게 이해되는 것보다는 어느 ‘생각 많은 사람’ 즉 한 ‘정신적 인간’의 삶이 보편적으로 보여주는 그러한 고뇌와 영광의 궤적으로 읽히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말하자면, 작가 토마스 만의 성숙과 더불어 그의 젊은날의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도 그동안 성숙해서 이제 겨레의 부양자 요젭이란 실천적 인물로 거듭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이 이 작품이 품고 있는 보편성이며, 우리나라 독자들이 주목해야 할 점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이렇게 중요한 작품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과 더불어 우리가 세계 문화민족의 반열에 성큼 올라선 느낌까지 든다. 이것이 필자가 역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축하의 뜻을 표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