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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쾌감의 중추를 아는 영리한 작가
B. 베르베르 장편 『뇌』(전2권), 열린책들 2002
김도현 金度賢
소설가, NAC & Company 이사 kkumy@chol.com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사람의 뇌를 잘 설계된 장치 속에 넣어놓고, 뇌에 연결된 전극과 회로에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받게 되는 신호들을 똑같이 가한다면 어떨까? 이럴 경우, 그 뇌는 자기가 정상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신체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기실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여러 작품들(특히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에서 「매트릭스」와 「바닐라 스카이」에 이르는 영화들)을 통해 다양하게 표현되어왔다.
뇌 연구는 이처럼 흥밋거리로도 손색이 없지만, 그 결과는 꽤 의미심장하다. 뇌에 대한 인간의 과학적 도전이 마침내 성공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인류가 뇌를 분석하고 재현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또다른 기계적 ‘우리’(호모 싸피엔스가 인간의 정의라고 하니 말이다)를 창조해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의 혼란스러운 공진화(co-evolution) 시기가 있긴 하겠지만, 인류라는 생물학적 종은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얼룩진 답답한 육체의 틀을 벗어나 이내 기계적 진화를 선택하게 될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뇌』(L’Ultime secret, 이세욱 옮김)는 바로 그 ‘뇌’에 관한 이야기이다. 베르베르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다양한 삶의 목표들이 사실상 뇌에 특정한 자극을 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착상으로부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이러한 환원적 태도, 즉 그럴듯한 명분이나 의미로 포장된 인간의 행동이란 것이 조금만 들여다보면 쥐가 먹이를 찾아 미로의 여기저기를 더듬는 행동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식의 생각은 어떤 독자들에게는 발칙하게, 혹은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베르베르는 『개미』나 『아버지들의 아버지』와 같은 전작들을 통해서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갖는 자부심이 과연 그럴 만한 것이냐는 도발적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 바 있다. 그러나 베르베르는 영리하게도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독자들을 피곤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작품들이 갖는 특징이다.
베르베르를 읽는 독자들은 뛰어난 축구선수의 드리블을 보는 것과 같은 종류의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과학적 지식과 신화적 지식 그리고 대개의 경우 추리적인 요소를 교직하여 다양한 층의 독자들이 재미와 지적 포만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작품을 써내는 재주가 있다. 독자들은 그의 현란한 글재간에 기대를 걸고, 그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의 매력은 균형감각에서 온다. 베르베르는 과학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주지만, 과학적 사실성에 연연해하지 않음으로써 부담감에 얽매이지 않을 줄 안다. 예컨대 내측전뇌다발(책에서는 정중전뇌관속이라는 용어를 사용)에 관한 내용은 과학적 지식과 잘 배합된 허구다. 또한 주제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독자들을 피곤하게 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결국 진화에 관련된 이견이 조작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고, 『뇌』에서 인간의 동기에 관한 진지한 토론 없이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그의 그런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할리우드 영화화를 무척 의식하는 듯한 묘사와 장면들로 점철되어 있으니, 독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적극적이라기보다는 구경꾼적인 독서체험을 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의 작품이 그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인기가 있다는 점은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우리나라에서 과학(공상과학이라고 불리는!)소설이나 추리소설은 문학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베르베르를 포함한 수많은 서구작가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전범이라고 말하고 있는 필립 딕의 작품이 영화(「블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의 인기에 ‘업혀서’ 출판되는 현실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에서 베르베르의 열풍은 좀 특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필자는 우리나라의 독자에게 과학이 ‘가미’된 소설들이 널리 읽힌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와 인간을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역사·예술·정치와 같은 요소들 중에서 결코 한몫 빠질 수 없는 과학과 기술이 우리나라에서 문학이라는 그릇에 제대로 담기지 못했다는 것은 독자로서나 (특히!) 작가로서나 별로 행복하지 않은, 부끄러운 상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베르베르의 인기가 부럽다.
베르베르의 소설에 대해 ‘과학적’ ‘지적’이라는 상찬이 실체에 비해 다소 과장되어 있다는 것은 지나친 말일까? 필자의 입장에서 『개미』를 제외한 그의 소설들이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들에 담긴 과학적 엄밀성이나 움베르또 에꼬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지적 광활함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뇌』의 경우에도, 작품에 활용되는 해부학, 신경생리학, 인터넷 그리고 로보틱스에 대한 지식들은 비판적 독자의 눈으로 볼 때 표피적이거나 사실성이 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점이 그의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이유일 수 있다. 술이 약한 사람에게 적당량의 알코올에 다양한 맛과 향을 섞은 칵테일이 적합하듯이, 과학소설의 전통이 비교적 짧은 우리나라에서 과학의 맛을 적절히 배합한 그의 소설이 잘 읽힐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필자는 그의 작품들이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과학소설의 독자층이 두꺼워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칵테일도 자꾸 마시면 주량이 조금씩 늘지 않겠는가. 동시에 과학소설을 써본답시고 끙끙대는 우리 작가들에게도 베르베르의 소설은 자극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다른 어떤 글쓰기도 별반 다르지 않겠으나, 먹고사는 일과 이런 종류의 작품집필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보라, 전업소설가인 그의 팔자와, 한 작가를 계속 번역하고 있는 역자의 존재란 썩 괜찮아 보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