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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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묵 全承默

1922년 전북 진안 출생. 1975년 시집 『배역 없는 무대』로 등단. 시집 『밑불』 『자화상에 걸리는 팻말』 『누워서 보는 별』 『꽃비 내리는 길』 등이 있음.

 

 

 

우중(愚衆) 이미지

 

 

몽준이 돌아서자 바람에 쏠리는 낙엽처럼

모두 한쪽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내 복에 무슨,

박복한 백성들의 남루한 행렬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게 보인다.

여섯시에 예측 보도가 나오자

배꼽 밑 단전에서 환하게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아닐지도 모른다

쫓고 쫓기는 드라마를 따라가다가

생전 처음 종막까지 보았다.

이럴 수도 있구나

철벽 같은 우월자의 울타리가 무너지는 현장

그 우월자를 감싸온 비대 신문의 민망한 얼굴

우리 장삼이사의 유리 같은 슬기가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우중이라는 자막이 스크린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가지치기

 

 

사다리에 올라탄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푸른 하늘에 머리를 박고

나무와 하늘을 나누는 거래를 한다.

세 개 중 두 개를 자르면

하늘은 내게 더 많이 온다.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을

누가 볼까 무섭다.

선택의 독단이 겁이 나는지

가위가 주눅이 들어 머뭇거린다.

행위의 뿌리는 사랑이라고 타이르지만

땀이 속옷을 타고 가랑이로 흐른다.

구상은 손을 안 대도 저리 당당하고

소나무는 벼랑에서 한국 예술을 빚는

산속의 정밀이 자근자근 피부에 스며든다.

구조조정은 비극을 가져오는데

자연에서는 공존과 평화를 낳는다.

 

 

 

하지 못한 질문

 

 

무릉도원의 꽃잎이라도

사람 눈길 한번 안 받고

흘러가버릴 수 있다.

북문 밖 북한산 너럭바위

그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은

57년의 의문을 품고 흐르건만

저리도 흔연스럽다.

가을 햇살이 물속에 걸러져서

순하디순하게 펼쳐진 양지

입술을 나누고 초범자의 겁먹은 손이

하얀 가슴살에 익사한 각시풀

돌아오는 전차칸에서 밀착하듯 던진

질문의 의미를 모른다.

‘설마 결혼할 작정은 아니지요’

조선인 주제에(?)

설마 그건 아니었겠지만

질문에 대한 질문을 하지 못한 채

그는 바다를 건너가 재취 자리

남의 아이를 셋이나 기르다가

할머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