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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패자를 위한 파이팅!

영화 「주먹이 운다」

 

 

성은애 成銀愛

단국대 인문학부 교수, 영문학 easung@dku.edu

 

 

인생을 연극무대에 비유하는 정도로는 삶의 피비린내나는 진실을 꿰뚫을 수 없다고 여긴다면,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맨몸으로 끝까지 상대를 제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각의 링은 어떤가? 권투를 소재로 한 영화는 링 위에 올라선 이들이 피투성이가 되면 될수록 잔인하고 치열한 삶의 모습을 더욱더 생생하게 드러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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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는 세상과 정정당당하게 맞짱뜨고 싶었으나 어찌어찌 하다보니 오갈 데 없이 막판에 몰려버린 두 남자의 이야기다. 두 남자에게 권투는 맥빠진 삶의 돌파구 정도가 아니라, 죽기살기로 뚫고 나아가야 할 유일한 생존의 길이다. 중년의 나이, 등 돌린 가족, 뇌 충격에 의한 치매, 감당키 어려운 빚더미, 태식(최민식 분)의 삶은 어쩌면 세상살이가 팍팍하고 아득하다고 느끼는 우리 주변의 중년 가장에 대한 극단적인 비유이기도 하다. 한편 상환(류승범 분)은 어떤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은 쇠털같이 많은데 세상은 도대체 맘에 안 들고,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는 어이없이 죽고, 홀로 남은 할머니는 불쌍하고, 자신은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갇힌 몸이고, 그러니 욕밖엔 나올 것이 없다. 둘 중 누가 더 불쌍하고, 누가 더 막막한지 관객들은 차마 결정할 수가 없다.

감독은 잔인하게도 두 남자를 한 링에 올려놓는다. 등장인물들이 서로 모르는 채 우연히 스쳐지나는 식의 영화적인 잔재주도 부리지 않고 두 사람의 삶을 번갈아 차근차근 보여주던 카메라는, 신인왕전 6라운드 경기에서 이제까지 꼭꼭 쌓였던 두 사람의 팍팍한 삶이 지닌 에너지가 사정없이 분출되도록 배려한다. 관객들은 당황한다. 어어, 누굴 응원한담. 다시는 재기할 기회를 잡을 수 없을 중년의 태식? 첫 단추 안 끼워지면 영영 어긋날 것 같은 청년 상환?

신인왕전은 멋지고 날렵한 ‘액션’이 아니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 뒤엉키고 헛손질도 해대는, 급기야 시큼한 땀냄새 비릿한 피냄새가 스크린 밖으로 흘러나오는 처절한 싸움이다. 그리고 어느새 관객은 때리는 통쾌함보다는 얻어맞는 아픔을 점점 더 실감하게 된다. 자신들을 옥죄는 세상을 향해 날린 그들의 펀치는 링에서 만난 상대방의 콧날과 눈두덩과 복부에 사정없이 꽂히건만, 그 주먹을 맞는 사람 또한 우리가 애태우며 응원하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니던가. 이들을 이렇게 만든 세상은 어디로 가고 똑같이 불쌍한 놈 단둘이 남아서 너나없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오기에 찬 주먹을 받아내고 있단 말인가.

궁금증을 유발하는 두 사람의 승패 문제는 영화의 ‘스포일러’(spoiler)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데, 왜냐하면 누가 이기든 관객은 어차피 패한 사람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또한 승자에게 흐뭇한 미소를 보내면서도 그의 앞길이 그리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에 가슴이 아릿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승패가 결정되는 그 순간이 아니라, 기나긴 6라운드를 끝까지 버틴 두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서로에게 기대며 끌어안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세상의 모든 패배자들, 좌절한 사람들, 그러나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 주먹을 날리는 것 외에는 자신을 증명할 길이 없는 외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 영화의 따뜻한 위로와 애정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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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둘 다 최선을 다했으니 결국 모두가 승자라든가, 혹은 적어도 둘 중의 하나는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으니 다행이라는 식의 손쉬운 감동으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그들에 대한, 혹은 그들의 모습과 겹쳐지는 우리 주변의 안타까운 도전자들에 대한 연민은 두 사람의 웃음이 클로즈업되는 마지막 장면이 지나가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로지 승자만이, 그나마 다음 대결에서 쓰러지기 전까지만 아주 잠깐이나마 버텨낼 수 있는 이 치열한 경쟁사회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패자 태식은 다름아닌 승자 상환의 미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계속 이기면 되지 않겠냐고? 태식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여 아시안게임에서 메달까지 땄으니 사람들은 자신을 기억해줄 것이며, 앞으로의 삶에서도 뭘 하든 계속 이길 수 있다고, 어여쁜 아내와 귀여운 아들을 거느린 가장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래서 계속 승자로 남아야 한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며 자신과 남을 연결시키는 통로를 점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앞을 가로막는 벽을 향해 거지같은 세상, 까짓것 한방에 때려눕혀버리겠노라고 주먹을 들었으나, 정작 때려눕힌 것은 자신의 삶이요, 자신의 아내요,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가느다란 끈들이었다.

그것이 바로 정글 같은 세상과 싸우듯 버텨온 태식의 삶이었고, 태식이 이미 걸어간 그 길로부터 젊은 상환이 크게 벗어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하여 처절하고 감동적인 경기가 끝나서 태식이 어린 아들과 얼싸안고, 퉁퉁 부은 얼굴의 상환이 뒤도 안 돌아보고 링에서 터벌터벌 내려가 병든 할머니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릴 때, 관객들은 그들의 ‘인간 승리’에 환호하기보다는 가슴 아픈 뭉클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야말로 「주먹이 운다」가 나날이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점점 더 많은 ‘패자’들만을 양산하는 이 시대의 아픈 구석을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그늘을 대변하는 주인공들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존재는 주인공들에게 결정적으로 짐이 되고 또한 동시에 힘이 되는 ‘가족’, 혹은 유사가족의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은 두 주인공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고, 삶의 조그만 희망을 불어넣기도 하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도록 한다. 주인공들은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닌 거다. 따라서 주변사람들의 설정은 주인공의 행동을 납득케 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었다. 태식과 아들, 상환과 아버지의 부자관계는 평범하지만 매우 세심하게 극화된 반면, 태식의 아내와 원태, 용대 같은 주변인물들, 상환의 할머니와 박사범 등은 관습적인 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 역시 주인공만큼이나 화려한 거리의 뒤편에서 점점 막판으로 몰리는 수많은 ‘패자들’에 해당될 터이니, 이들에 대한 관습적인 시선은 이 영화의 힘을 잠식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