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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공병호 『10년 후, 한국』, 해냄 2004
불안한 시대에 유통되는 빗나간 미래전략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jykim@hanshin.ac.kr
그는 서문에서 “어떻게 하면 한국과 한국인들이 좀더 잘살 수 있을까?”(4면) 를 모색하는 것이 이 책을 쓴 동기라고 말한다. 충정어린 말이다. 또 그는 “누구든 조국을 사랑하고 동족을 사랑하게 마련이다”(6면)라고 말한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그러나 사랑의 방법은 다 다르고,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도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마다 그 세계관에 따라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수는 있다. 나는 이 책에 내가 사랑하는 방식을 적어보았을 뿐이다”(6면)라고 적었다. 이런 그의 진술은 자기절제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사랑방식에 대해 충분히 성찰하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이 책에 대한 나의 독후감이다.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타자를 향한 것이고 그런만큼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는 것이 어찌 악의뿐이겠는가? 공병호(孔柄淏)의 사랑은 내게 그런 사랑으로 보인다. 연민과 자비를 잃은 독단이 넘치고 사태를 왜곡할 만큼 확신이 승하여 독기가 흐르는 사랑, 이런 빗나가고 어긋난 사랑은 곧장 이데올로기가 된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고 힘있다. 먼저 한국의 현재를 진단하고 그에 근거해 지극히 어두운 10년 후 한국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런 위기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말한다. 그가 그려내는 현재 한국의 모습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의 말대로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주력산업이 흔들리고 기업의 해외이전이 계속되고 재정은 적자로 허덕일 위험이 있다. “제대로 된 시대정신이 없다”는 주장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를 수 있어도 현재의 문제를 잘 요약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적 곤경에 대한 개괄적이고 인상적인, 그리고 동의할 만한 분석들을 넘어서면 그의 주장은 곧장 설득력을 잃는다. 그는 우리 사회의 노동문제, 교육문제, 세대문제, 정치문제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거듭하거니와, 문제의 원인을 한결같이 ‘좌파정권’의 집권과 그것을 가능케 한 민중주의, 그리고 세력화된 노동조합에서 찾는다. 그는 이런 자신의 논지를 위해서 근거없는 주장, 독단적 예언, 의미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을 일삼는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는 서울대 폐지론을 비판하면서 “그러잖아도 지난 30여년간 이루어져온 하향평준화의 폐해가 사회 곳곳에 미치고 있다”(56면)고 말한다. 근거없는 주장이다. 고교평준화에 대한 숱한 경험적 연구 가운데 그것이 하향평준화를 유발했음을 입증한 연구는 전혀 없다. 또 우리나라 노조가 산별화를 넘어서 최상위 노동단체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고 말하는데, 그는 민노총과 현대중공업 노조 간의 갈등을 신문에서 읽어보지도 못한 것 같다. 심지어 그는 현재 “근로자와 사용자 간의 권력의 균형추는 노동계 쪽으로 현저하게 기울고 있다”(67면)고까지 말한다. 명백한 왜곡이다. 그는 계속해서 줄어드는 일자리에 대해 근심어린 투로 말한다. 하지만 수출이 호조이고 외국자본이 주식시장을 누벼도 고용이 늘지 않는 번연한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경제성장과 고용의 연계가 깨진 지금, 그는 시장적 메커니즘의 확장만이 해답이라고 말할 뿐이다.
독단적 예언도 거침없이 등장한다. 예컨대 그는 “우리가 미국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전분야에서 미국의 우위는 더욱 견고해질 것”(88면)이라고 한다. 미국은 힘이 세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과연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힘이 더 강해질까? 많이 지나친 발언이다. 그는 북한문제에 대해서도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대안은 흡수통일”(102면)이라고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에 고명처럼 얹어져 그의 문체에 힘을 더해주는 체념과 빈정거림과 협박을 오가는 수사법을 일일이 언급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독단과 독설을 넘어서 의미를 조작하는 이데올로기적 발언들이 도처에서 출몰한다는 점이다. 모호한 표현을 통한 이데올로기적 발언의 예를 보자. 그는 “좌향좌는 ‘가난으로 가는 길’(road to poverty)이다. 지금까지 왼쪽을 선택했던 사회 중 성공한 사례는 없다”(139면)고 단언한다. 하지만 도대체 여기서 좌향좌란 도대체 얼마만큼의 좌파적 정책의 수용을 말하는 것인가? 왼쪽을 바라보기만 해도 사회가 몰락한다면, 꿋꿋이 오른쪽으로 향해 나아가면 번영이 오는 것이 확실하며 그 번영이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말썽 많고 문제 많은 우리 사회는 여전히, 충분히 오른쪽에 있는 사회이지 않은가?
그는 매우 부적절한 방식으로 단어들간의 대립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의미를 왜곡하기도 한다. 예컨대 그는 심심치 않게 자조와 자립의 정신을 각각 평등과 나눠먹기에 대립시킨다(52면). 자조와 평등이 대립한다는 사고방식도 의심쩍지만 평등과 연계된 나눔을 굳이 나눠‘먹기’로 폄훼하는 방식도 고약하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자조와 자립이란 ‘혼자먹기’를 뜻하는 것인가? 그런 독식이야말로 우리에게 만연한 병폐가 아닌가?
아마도 이데올로기적 조작의 최고 형태는 어떤 단어를 배제하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방식일 게다. 그런 점에 주목한다면, 공병호의 책에 어떤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가에 주목해야 하거니와, 그는 한 대목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화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민주화 같은 말이 쓰여야 할 맥락에 그가 쓰는 말은 언제나 민중주의이다. 그는 민중주의란 낡은 군중심리학에 기대어 본능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민중주의에 대한 오해도 오해려니와, 민주주의라는 말을 극력 회피하고서 우리의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모색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그가 민주화라는 단어를 거의 유일하게 사용하는 진술이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뛰던 시절은 인권이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어두운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분명 자조의 정신이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48면)라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미래를 전망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이 책이 이런 입장에 근거하여 무엇을 권고할지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공동체, 기업, 개인이 ‘적응’이라는 지상명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역설한다. 그 가운데 공동체를 말하는 부분은 그가 앞서 주장한 것들과 논리적으로 일관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우리’ 곧 공동체의 해체를 말하며, 기업더러 컨트리 리스크(특정 국가에 기업이 소재함으로써 생기는 위험)를 최소화하라고 말하는 사람의 공동체에 대한 발언이 타당성을 갖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기업과 개인에게 그가 주는 권고의 요점은―기업의 경우 경영주에게 주는 권고라는 점에서 그 둘은 한가지라고 할 수 있다―국가도 조직도 우리의 운명을 보증할 수 없으니 제도에 자신의 주도권을 이양하지 말고 위험을 분산시키며 자신의 기업을 운영하고 인생을 개척하라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개인들에게 생존전략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이 이 책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다.
불안이 시대의 정조(情調)인 오늘날 이런 권고가 아예 힘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며, 아마도 그것이 이 책이 널리 읽히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적응을 위한 노력 속에서도 더 나은 공동체적 삶, 정치적·사회경제적 강제와 협박이 없는 사회, 그리고 평등과 나눔의 삶을 꿈꾼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짐짓 냉정한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며 우리에게 꿈을 버릴 것을 권고하는 꿈 없는 자의 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