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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황현 『역주 매천야록』 상·하·원문교주본, 문학과지성사 2005
『매천야록』은 근대사의 보고(寶庫)
이이화 李離和
서원대 석좌교수, 역사학 history13@hanmail.net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순국을 앞두고 지은 「절명시(絶命詩)」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지식인 되기 어려워라”라고 했듯이, 19세기에 살았던 깐깐한 지식인이요 지사였다. 그를 시인, 문장가 또는 역사가라고도 하지만 시대를 살아온 과정을 더듬어보면 이것이 걸맞은 호칭일 것이다. 그는 선비였으나 부유(腐儒)가 아니었으며, 문벌가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벼슬길에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한때 서울을 떠돌면서 살았으나 말년에 낙향해 문필에 전념하다가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는 꼴을 보고 목숨을 버렸다. 한 친구가 서울 출입을 거부하는 그를 보고 책망하자, “도깨비나 미치광이 짓을 하란 말이냐”라고 대꾸하여 자신의 분명한 의지를 드러냈다.
매천은 말년에 중국 망명계획도 포기하고 역사쓰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대표적 저작물이 『매천야록(梅泉野錄)』이라 할 수 있다. 누가 이 책명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야록’은 ‘야사(野史)’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 책을 두고 야사라고 규정하기를 일찍부터 거부하였다. 물론 예전에는 개인의 역사서술을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따위를 잘 쓰지 않으려 하였다. 이를테면 역사엄숙주의였다. 이런 역사기술방식을 매천은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역사서술이 한 시대의 모습을 바르게 전달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다면 그 시대상을 보여주는 여러 사실을 담아야 할 것이다. 매천은 한 시대상을 정확하게 기술하려 노력하였기에 유언비어 따위의 자잘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기록했던 것이다.
더욱이 근대에 들어 관찬(官撰) 역사기록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 보기를 들어보면, 마지막 왕조실록인 『철종실록』은 문벌정치 아래에서 부실하게 편찬되었으며 『고순종실록』은 식민지시기에 편찬되어 많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누락시켰다. 이런 점에서 『매천야록』은 고종이 등장하고 나라가 병탄(倂呑)되는 시기의 사실을 풍부하게 담아, 근대사의 보고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기저에는 날카로운 비판정신이 번뜩이며 비장한 시대정신이 깔려 있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도 범상하게 넘어가지 않고 서슴없이 재단을 하고 있다. 그 대상은 흥선대원군이기도 하고 고종이기도 하고 왕비 민씨이기도 하였으며, 썩은 선비와 벼슬아치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민중의식을 대변하려 하였다. 그 실례로 두 대목만 인용해보자.
양인에 대한 유언비어. 서울에 ‘양인(洋人)들이 어린아이를 삶아먹는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민가에서는 아이들을 간수하여 밖에 나가 놀지 못하게 하였다. 길거리에 자기 아들을 업고 가는 자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가리키며 “아이를 훔쳐 팔러 간다”고 하니, 모두 그를 치고 밟아 그 사람은 미처 해명도 못하고 죽었다.(역주본 상 272면)
당시 민중의 반외세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에서 그의 처에게 이혼당했다. 그의 처는 미국인이다. 그는 갑오년(1894)귀국했을 때, 임금을 알현하면서 외신(外臣)이라 칭했으며, 안경을 쓰고 궐련을 입에 물고 뒷짐을 지고 나오니, 온 조정 신하들이 모두 통탄하였다.(역주본 하 621면)
서재필이 외국 위세를 등에 업고 거들먹거린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잘못된 신분제도와 부정부패를 질타하였으며 비리를 일삼는 세도가와 양반들을 꾸짖었다. 이런 기술은 자학사관(自虐史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처절한 자성에서 출발한 것이다. “매천필하 무완인(梅泉筆下 無完人)”이라고 할 정도로 철저했던 것이다. 그의 이와같은 비판정신 또는 자기반성은 곧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매천야록』은 두어 군데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나 초역(抄譯)이거나 오역이 많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번에 출간된 『역주 매천야록』은 원전의 오자 오류를 바로잡고 주석을 달고 소제목을 붙이는 등 새롭게 편집하였으며 직역을 위주로 하되 참신한 현대문장으로 번역하였다. 임형택(林熒澤) 교수 등 주로 한문학 전공자들이 8년간의 집단연구를 통해 독회를 거듭하면서 완성한 번역본이다. 다시 말해 교감(校勘), 번역, 주석의 순사(順事)를 밟으면서 토론을 거듭한 끝에 완성된 것이다.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번역본을 완성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원저자의 역사의식을 살려, 원저자의 기록방식을 훼손치 않으려 노력하였다. 그 보기로 고종의 왕비 민씨를 두고 원전에서 민비, 민황후, 명성후, 명성왕후라고 한 표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긴 점을 들 수 있다. 이들 표현은 문맥에 따라 각기 ‘뉘앙스’를 달리하였던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는 매천의 또다른 저작인 『오하기문(梧下記聞)』의 서설을 번역해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오하기문』은 주로 동학농민전쟁과 의병 관련 사실을 담았다. 이 책에서는 동학농민군을 비도(匪徒)로 매도하면서도 그들의 처지와 요구사항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양비론의 관점에서 기술하였던 것이다. 의병 관련 사실을 서술하면서 의병들의 비리도 서슴지 않고 담았다. 그의 계몽사상의 한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 화변(禍變)이 도래한 것이 어찌 우연이랴!”라고 시작되는 그 서설에는 바로 매천의 역사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궁극적 책임을 누구에게 지울 것인가.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 글에서 바로 최고통치자인 국왕과 집권세력으로 군림하던 노론(老論)을 제일차로 지목했다.
번역을 흔히 제2의 창작이라 한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지만, 원저자가 읽고 인용한 전거들과 원저자가 표현하려 했던 의도와 문장 솜씨를 제대로 이해해야 원전을 훼손치 않고 다른 언어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역주 매천야록』은 이런 경지에 상당히 접근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이 번역을 마음놓고 인용해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며 일반독자들도 손쉽게 매천의 역사의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책머리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실은 옮긴이 해제, 상세한 주석 그리고 책 뒤쪽의 자세한 찾아보기도 이 책을 이해하거나 이용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지금 그의 태생지 광양에는 그를 기리기라도 하듯이 매화가 한창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그는 매화를 아호로 삼을 정도로 매화를 사랑하였으니 이 완역본의 출간으로 매화처럼 그의 정신이 다시 피어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