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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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목소리

 

87년체제 극복론에 대한 단상 외

 

 

지난달 MBC 「100분 토론」에서는 ‘한국사회 진단’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에 대한 연속기획토론이 방영되었다. 일반적으로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에서 대표 논자들이 나와 서로 공방전을 벌이던 것과 달리, 이 기획방송 1회에는 보수진영, 2회에는 진보진영의 논자들이 자신들끼리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기획된 배경에는, 이제는 더이상 진보–보수라는 대립구도만으로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보기 어려워졌다는 현실적 상황변화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그만큼 한국사회의 담론지형이 다원화되었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유신독재체제 이래 참여정부의 출현까지 한국현대사에서 적잖은 역할을 담당했던 ‘진보’진영의 정체성에 적신호가 뜨고 있다는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다.

『창비』가 특집좌담에서 ‘87년체제의 극복’이라는 주제를 제기한 것도 이같은 상황에 대한 진단과 그 출로 모색의 한 형태로 보인다. 이 기획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갈등과 교착의 뿌리가 1987년 민주화 이행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체제의 특성, 곧 ‘87년체제의 나쁜 균형상태’에 있지 않은지 냉정하게 돌아”보자는(책머리에) 취지에서 진행되었다. 87년체제란 좁게는 386세대의 정계진출로부터 넓게는 2002년 월드컵, 대선, 반미촛불시위, 탄핵반대운동 그리고 시민사회의 확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일궈낸 현상이자 효과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효과 속에 한국사회의 정치적 민주화라는 긍정적 측면과 동시에 경제불황과 사회양극화라는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이 좌담은 의미있고 흥미로웠다.

그런데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의아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그 기획이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정치민주화와 경제침체 혹은 사회양극화가 마치 386체제 속에 내재된 모순구조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민주화에 주력하다보니 경제발전이 소홀해졌다는 잘못된 도식이 자칫 일반화될 소지가 있다. 경제불황과 사회양극화는 민주화의 결과가 아니라,멀리는 박정희시대 이래 우리의 근대화과정이 배태한 기형적 경제구조가 지속되고, 가깝게는 신자유주의가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장·강화된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과거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일익을 담당했던 386체제가 신자유주의의 전지구화라는 국제적 추세 속에서 여전히 주도권을 틀어쥐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야와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혁신이 요구되는가라는 물음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둘째, 화해와 통합을 위해 한나라당의 개혁성향 의원을 좌담의 자리로 불러들인 점 자체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실제 토론과정을 보면 국내적·국제적 현실을 보는 시각차가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대화합이라는 이름하에 적당히 미봉된다는 느낌을 준다. 87년체제의 극복은 본질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냉전적 잔재의 청산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 마련을 통해서 가능하며, 그런 점에서 그것은 일국적 시야가 아닌 동아시아라는 지역적 시야를 요구하는 것이다. 지역적 구체성·특수성을 간과한 채 서구사회를 모델로 시민사회의 영역을 문화적·윤리적 문제로 축소하거나, 자유주의의 이념을 절대화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치열한 토론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백지운 jiwoon-b@hanmail.net

 

이필렬 「위기의 환경운동, 이제는 변해야 한다」를 읽고

학교에서 환경관련 학문을 공부하면서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이필렬 교수의 시평에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이 글은 일부 각론에서 반론의 여지가 있지만 총론에서 타당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 ‘에너지정책 민관합동포럼’의 활동과 무산과정을 보고 이 글에서 지적한 환경운동가들의 ‘권력접근성’은, 환경운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정책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치려고 순수하게 노력하다가 정부의 ‘절반의 진정성’에 얽혀든 실수를 좀 심하게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환경운동가들이 관료(산업자원부장관)에게서 위촉장을 받고, 자문역을 넘어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권한을 행사하려고 한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위치를 유지해야 할 환경단체가 제도권에 편입된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뢰와 도덕성이 훼손되었을 위험이 있다. 참여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언론과 학자들이 ‘검증되지 않은 시민단체 지도자들이 정책결정과 입법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때여서 환경단체는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환경운동에 정치성이 배어든 인상을 주면 시민사회의 지지를 잃을지도 모른다.

이교수가 지적한 또다른의 문제, 즉 일부 환경운동가의 엘리뜨주의와 특권의식은 ‘에너지정책 민관합동포럼’ 과정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2004년 6월 7일 2차회의에서 정부와 환경단체의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한 것이다. 에너지기본법, 전력수급기본계획 등도 토론내용이 되었기 때문에, 전에는 환경단체의 ‘감시대상’이었던 에너지관련 기업들마저 합동포럼의 결과를 노심초사하며 지켜보는 반대상황이 나타날 정도였는데, 비공개 회의방식은 일반시민들에게도 환경운동가들이 대단한 권력을 지닌 사람들로 인식될 수 있게 했다. 시민단체의 대표자가 참여했다면 더더욱 투명하게 정책을 논의했어야 하는데, ‘현안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비공개를 결정했다’는 한 시민단체 간사의 변명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였다.

앞에서 지적한 문제들로 인해 환경운동단체에 일반시민들의 참여가 줄고 어떤 환경단체는 회원도 감소했다는 이교수의 지적에 대해 공감하는 바가 많은데, 나름대로 개선책을 제안하고 싶다. 첫째, 환경단체에서 회원들이 즐겁게 단체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더 모색하면 좋겠다. 회원의 가족과 이웃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환경교육, 오락프로그램을 늘려서 스스로 재미도 느끼고 환경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하자. 환경단체에서 즐거움을 먼저 선사한다면 회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둘째, 환경단체 총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평상시에도 일반회원이 단체의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경로를 다양화하면 좋겠다. 그러면 회원들이 더 적극적으로 상근운동가들과 교류하게 될 것이고 단체의 웹싸이트가 한층 북적거릴 것이다. 이렇게 이미 수천, 수만 회원의 살아숨쉬는 목소리를 지원받고 있는 운동가들은 더이상 상업언론의 기자들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환경단체들은 지금껏 잘해왔고, 시민단체의 의사결정 구조상 잘못은 수시로 시정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몇마디 적어보았다.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도 일부 학자나 운동가의 논쟁을 넘어 일반회원과 시민의 관심과 참여 속에서 진행되길 바란다.

서울대 자연과학대 생명과학부 석사 박훈 parkhun@dreamwiz.com

 

이필렬 교수의 글에 대한 의문

이필렬 교수의 글은 애매했다. 일부 언론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각색할 수 있는 환경운동 비판이었다. 비판의 대상을 뭉뚱그려 ‘환경단체’라고 일컫는 바람에 헷갈릴 수밖에 없었고, 양비론적인 관점에서 표현하는 바람에 혼란스러웠다. 이교수의 생각은 핵폐기장 건설과 새만금간척 반대운동에서 ‘환경운동연합’이 가장 열심히 활동했는데도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하고 회원수도 줄어들었는데 그것은 “환경운동의 방향이나 활동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옳다. 메이저 환경단체들의 활동방식에 대한 비판은 더이상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밖에는 분명한 대상을 말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그것이 모든 환경운동단체의 문제인 양 표현한 것이 문제다. 환경운동연합만 환경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환경운동은 운동의 방식을 벗어나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새만금공사를 중단시키는 일이나 핵폐기장을 막아내는 일의 중심엔 ‘지역주민들’의 생존을 건 싸움이 있었기에 성공 가능했던 것이지, 운동단체들이 열심히 활동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지역주민들은 평가를 얻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고, 회원수를 늘릴 것을 염두에 두고 싸우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런 표현은 꼭 인용하고 싶다. “한국의 환경운동가들이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한편으로 그들의 ‘권력접근성’은 계속 높아져왔다.” 이렇게 모든 한국의 환경운동가들을 평가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일부 환경운동가들과 일부 환경단체들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 필자는 너무 커다란 칼을 휘둘렀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지율스님의 단식을 바라보는 필자의 시각은 ‘왜 지율이 단식을 하는가’를 바라보지 않는 일부 언론과 닮아 있으며, 단식과 비교된 부안의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선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지만, 정황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진정성과 설득력을 지닌 대안적 운동”을 위해서 좀더 신중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환경운동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사람들은 진즉에 삶의 형태를 바꾸는 운동 속으로 성큼 걸어들어갔기에 말이다.

전북 부안군 계화면 갯벌배움터 ‘그레’ 오종환 pashao@hanmail.net

 

지난호 소설들에 대한 단상

유난히 춥고 긴 겨울을 보내고 반가운 마음으로 봄호를 집었다. 치열한 의지와 상상력으로 혹한과 부박한 시세를 이겨내는 작가들의 육성을 듣고 싶은 기대가 컸다. 봄호의 문학란은 풍성하고 알찼다. 그중 소설에서는 구효서의 「소금가마니」가 인상 깊었다. 광포한 아버지와 그들이 만들어낸 시대의 고난을 견뎌내는 모성의 잔결을 어머니가 남긴 책을 짚으며 따라가는 구성이 흥미로웠다. 여기에 꼼꼼한 묘사와 생동감있는 장면이 곁들여지면서 화자의 과거 회상이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재미와 설득력을 갖추게 되었다. 한국현대사의 간난과 여성 고유의 곤궁한 삶의 행로를 복원하면서, 고난의 운명과 벌이는 내면적 고투가 실감나게 그려졌다.

이혜경과 조경란의 작품도 두루 주목할 만했다. 이혜경의 「피아간」은 불임에 대한 몰이해에 시달리는 여성의 고통을, 임종에까지도 완고한 아버지와 집요한 가부장성의 유산을 겹쳐놓으며 입양할 아이, 즉 다가오는 완전한 타자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묻는다. 화자와 입양아가 곧 감당해야 할 소외와 고독을 넘어, 먼 미래의 생명에까지 미치는 근심과 연민의 눈길에 가슴 깊은 곳이 서늘해진다. 조경란의 「형란의 첫번째 책」은 이국의 도시에서 실종된 남편을 찾아헤매는 여성화자를 내세운다. 낯선 풍경 속에서 아내는 점점 남겨진 것들에 대한 확신을 잃는다. 오직 글쓰기 속에서만 존재했던 남편의 자취, 그리고 그를 느끼고 이해한다는 것이 그저 그가 남긴 글을 읽는 일에 다름아니었음을 깨닫는 아내의 이야기는 읽기와 쓰기, 곧 소통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안간힘을 다해 자취를 남김과 동시에 숨어버리는 것, 필사적으로 찾아헤매면서도 외면하는 것, 하지만 그 흔적 없이는 어떠한 출발도 할 수 없는 것. 형란이 남편의 은신처를 찾아냈음에도 그냥 돌아와 지도책에 작은 점을 찍고, 그것이 자신의 첫번째 책이라 명명하는 행위는 의미심장하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환상도가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순간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라는 사소하나 진실한 확인이 아닐까.

강상규 autumn1974@hanmail.net

 

박형준의 계간평과 이숭원의 평론을 읽고

지난호부터 새롭게 부활한 계간평은 문학현장의 생생함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창비』 지면에도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한다. 박형준의 글은 여러모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침묵은 존재의 일체를 그리워하지만 사이가 낳은 갈망의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가 바로 새로운 존재를 있게 하는 생명력을 준다’는 마무리는 여러 생각거리를 파생시킨다. 침묵을 하나의 소리로 보아 여러 시들에서 그 침묵의 형체를 짚어내려는 시도가 좋았고, 자칫 생경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생태적인 시를 침묵에 연관시켜 해석한 것도 흥미로웠다. 흔히 단절과 고독, 소통부재의 현실을 연상하게 하는 침묵이, 이 글에서는 시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 존재한다. 좀더 새로운 것은 언제나 익히 들어오던 말 속에 숨어 있다고, 침묵하지 않는 시는 제대로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역설적인 논리에 깊이 공감한다. 다만 인용시들이 대부분 자연을 노래한 시들에 치중해 있는데, 김지하의 「선풍기 근처에」 같은 일상적으로 와닿는 시들을 좀더 소개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 누구보다 당대를 온몸으로 느낀다는 시인들이 과연 나와 타자의 경계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표현해내고 있는지를 짚어보는 것은 결코 괜한 수고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숭원의 평론은 독자에게 시적 화자가 어떤 위치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글에서 서정적 주체개념이 강조되는 까닭은 이것이 작품과 독자의 소통에 중추적인 기능을 하기 때문인데, 주체가 어디쯤에 있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시적 발언도 각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문태준의 「비가 오려 할 때」와 박노해의 「머리띠를 묶으며」로 극명하게 대조한 부분은 오히려 민중시의 전망을 지나치게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는 산문적 의사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다채로워졌어도 그 발화의 영역에는 명백한 한계점이 있지 않을까. 또 21세기의 시인들이 아무리 내밀한 언어를 구사한다 해도, 한편에선 명령과 선언의 언어도 배제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것 또한 서정적 주체로 온당히 자리매김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시적 화자는 결국 나 아닌 것들과의 화해를 통해 자유를 얻는다. 비록 익숙한 대안(?)이지만 경계의 소멸, 경계의 해체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통합은 이 글에서 시의 화자가 대상물에 이입되는 과정을 통해 적절하게 분석되고 있다.

김정주 niiirvana@hanmail.net

 

여성노동자들의 글쓰기가 지닌 의의

지난호에 실린 루스 배러클러프의 평론 「한국 여성노동자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묻혀 있던 1970, 8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글을 새롭게 주목하여 그 문학적 의의를 되짚어보았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글이었다. 배러클러프는 80년대 당시 가장 주목받았던 여성노동자들의 글 세 편이 “정치와 문학의 접점”에서 “그 자체로 얼마나 힘있게 서 있는지 입증”하는 것을 이 글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이 작품들을 분석하는 데서 계급간 로맨스 문제, 여공의 정조 문제를 중심주제로 잡아 논의를 풀어갔다. 그리고 “국가발전과 계급투쟁이라는 거대서사의 주변부에서 이들 공장노동자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서사를 창조해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의 산업화 경험에 대한 견줄 데 없는 이야기를 써낸 것이다. 이들 없이 20세기 한국의 격동기를 이해하는 것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라는 결론으로 이 작품들의 의의를 평가한다.

이 평론이 이제는 잊혀진, 그러나 필자가 말한 대로 그 의의를 간과할 수 없는 여성노동자들의 글을 새롭게 고찰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에도 한두 가지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이들의 작품은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현장투쟁기록’이면서 동시에 ‘여성노동자의 성장의 서사’이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아쉬운 점은 필자가 이들의 글에서 계급간의 로맨스 문제와 여공의 정조 문제만을 다뤘다는 것이다. 분명 이런 문제들은 ‘계급’적인 측면과 ‘여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이 경험하게 되는 사회의 모순과 억압을 잘 드러내주는 지점이다. 그리고 길지 않은 분량의 평론에서 이 여성노동자들의 글을 전반적으로 짚어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 작품을 분석하면서 그 두 가지 주제만을 뽑은 이유를 먼저 밝혔어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공장노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 노동자가 되어 계급적 각성을 하게 되면서 투쟁의 대열에 나서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개인적인 경험, 가족이나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 느낌, 생각, 깨달음 등 다양한 서사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서사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서사를 읽어낼 때 좀더 다양한 측면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분석이 함께 이루어졌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끝으로 외국인 필자가 우리나라의 문학과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평론을 썼다는 점에 대해서도 한번 되새겨봐야 한다. 노동문학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면서 함께 묻혀버렸던 이 작품들의 문학적, 시대적, 여성주의적 의의를 고찰해야 했으나 우리가 미처 하지 못했던 작업을 루스 베러클러프가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의 더 폭넓은 연구들은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삶이 보이는 창』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 류현영 labor-mai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