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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한미동맹의 새로운 전환을 위하여

정욱식 『동맹의 덫』, 삼인 2005

 

 

고유환 高有煥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yhkoh21@hanmail.net

 

 

동맹의덫

올해로 한미동맹 52주년을 맞는다.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기반한 동맹관계는 한국전쟁 이후 정전체제와 냉전기 동북아에서 한국의 안보와 경제발전의 버팀목이 되어왔지만 탈냉전과 남북화해의 진전, 한국민의 반미기류, 대등한 한미관계로의 재정립을 요구하는 노무현정부의 출범, 미국의 세계전략과 동북아전략 변화 등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동맹’이라고 평가받아온 한미동맹이 삐걱거리고 있는 것이다. ‘함께 싸우고 함께 피를 흘려온 동맹’ 얘기는 한낱 수사요, 흘러간 옛노래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올 만큼 ‘동맹피로, 동맹표류 증세’가 보인다. 요컨대 냉전체제에 기초해 50여년간 작동해온 한미관계는 더이상 변화하는 한국과 한반도의 현실에 어울릴 수 없는 ‘낡은 틀’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싯점에서 평화네트워크 정욱식(鄭旭湜) 대표가 쓴 『동맹의 덫』은 한미관계의 반세기를 회고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재조정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책은 ‘민족중심의 자아준거적 시각’에서 한미동맹을 재평가하고 비교적 쉬운 언어로 한반도의 여러 현안들을 잘 설명하고 있다. 평화운동가인 저자의 한미동맹에 관한 기본인식은 “우리 안의 ‘미국주의’를 넘어서자”이며 이에 근거해 ‘동맹의 덫’에서 벗어나는 ‘탈미(脫美)전략’을 내세운다. 친미와 반미라는 이분법을 지양하는 저자가 ‘탈미’라는 단어를 떠올린 이유는 친미와 반미의 표현이 대안을 모색하는 우리의 상상력과 잠재력을 구속한다는 점, 더불어 대미의존도를 줄여나가지 않으면 한반도의 미래는 미국의 정치적 역학관계와 이해관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29면).

저자는 ‘미국의 힘’은 미국이라는 ‘타자(他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전통적인 친미세력이 갖고 있는 ‘맹목적 친미주의’와 “정부·여당과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는 공미증(恐美症)”을 비판한다(같은 곳). “한국의 지배엘리뜨 집단이 이와같은 미국주의에 갇혀 있는 한, 미국을 정확히 인식하기도, 미국을 상대로 우리의 가치와 국익을 극대화하기도 힘들다는 것”(30면)이다.

그러면 어떻게 ‘한미동맹의 덫’에서 벗어날 것인가? ‘국가’전략을 넘어 ‘민족’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부시행정부 때의 남·북·미 삼각관계의 위기구조를 보면, ‘국가’ 차원의 전략에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미동맹을 강화시켜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남한의 국가전략은, 그 자체로도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국가전략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반대로 “전쟁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미국과 담판 짓겠다”는 북한의 국가전략 역시, 민족공동체의 생존권을 미국의 선택에 맡기는 극히 위험한 발상일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국가전략과도 충돌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상충적인 남북한의 국가전략은 미국의 패권주의 강화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남북한 모두 ‘국가’를 넘어선 ‘민족’ 차원의 전략수립이 절실하고, 여기서는 어느 한쪽의 전략이 다른 쪽의 전략에 해(害)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00~102면).

저자는 남북관계를 기본으로 삼아야 하고 한미동맹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미국식 평화, 즉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의한 평화’에 대한 예찬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299면). 그러나 세계정치에서 ‘힘의 논리’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동북아 역학구조에서는 남북한과 한반도의 ‘민족중심 시각’으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이익이 충돌하는 전략적 요충지역으로, 우리 민족의 자율적 선택을 제약하는 구조적 요인들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만으로 한반도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소련―중국―북한의 북방삼각관계와 미국―일본―한국의 남방삼각관계의 대치점이 휴전선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탈냉전과 함께 한국은 러시아·중국과 수교했고, 이들 국가와의 관계도 밀접해지고 있다. 그리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화해·협력시대를 열어나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북방삼각관계와 남방삼각관계가 중첩된 위치에서 쉽게 어느 편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다. 이렇게 어느 편의 입장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으려는 입장에서 나온 말이 ‘전략성 모호성’이란 개념인 것 같다. 김대중정부 임기말의 한러정상회담에서는 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 강화에 동의하고, 한미정상회담에서는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에 동의하는 듯한 공동발표문이 나오는 모순도 우리 정부의 고민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다. 노무현정부가 미국 주도의 MD체제 구축과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것도 탈냉전 이후 변화된 동북아 신질서의 역학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변화된 국제정세에서 언제까지나 미국의 힘을 두려워하고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한국은 영원히 미국의 ‘종속국가’ 역할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의존적 한미관계’에서 ‘대등한 한미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내부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대미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가진 우리로서는 ‘제2의 외환위기’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군사적으로 자주국방이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대미의존를 벗어날 때 진정한 의미의 ‘대등한 한미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은 기존의 한미관계 틀을 급격히 바꿀 것이 아니라 양국 이익의 공통점을 찾아 점진적으로 변화시켜나가야 할 때이다. 현단계에서 우리의 선택은 ‘용미(用美)’ 단계를 거쳐 ‘탈미’를 모색하며, 한미 양자안보동맹에서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으로의 발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역할도 북한의 남침 억제에서 동북아의 세력균형자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주둔군지위협정,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 한미관계 전반을 재점검하면서 국가이익에 맞는 새 틀을 짜야 할 것이다.

‘한미동맹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주국방을 실현해야 한다. 하지만 자주국방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첨단무기의 대미의존 심화와 군사력 강화에 대한 북한의 우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안보에 대한 대미의존도를 줄이는 지름길은 남북간의 군사적 신뢰를 구축하고 긴장을 완화하며 나아가 군축을 실현하는 것이다. 남과 북이 시대착오적이고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중단하고 경제에 역량을 투입할 때 무한경쟁의 지구화시대에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 길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