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새롭게 파헤친 역사적 사실의 힘

김명호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 역사비평사 2005

 

 

연갑수 延甲洙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부장 kabsoo123@korea.com

 

 

초기한미관계의재조명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이르렀다. 이들은 조선측의 온갖 회유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만행을 부리다가 결국 소멸되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이후 조선과 미국 간의 현안이 되었다. 미국은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1866년 말 와추쎄트(Wachusett)호, 1868년 3월 셰넌도어(Shenandoah)호를 파견했다. 그리고 자국 선박의 안전운항을 확보하고 나아가 조선과의 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1871년 4월 강화도에서 무력시위까지 단행했다(신미양요). 조선과 미국이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은 1882년이지만 양국간에는 그전에도 이처럼 굵직굵직한 현안들이 있었다.

박규수(朴珪壽)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셰넌도어호 내항 때까지 평안도 관찰사로 현지에서 사태처리를 총괄지휘하며 외교문서도 직접 작성했던 인물이다. 신미양요 때의 외교문서도 대부분 박규수가 작성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초창기 한미관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것이 연암 박지원 및 환재 박규수 연구자로 알려진 김명호(金明昊)가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 셔먼호 사건에서 신미양요까지』라는, 그동안의 저술 목록과는 다소 이질적인 제목의 저서를 내놓게 된 배경이다.

‘초기 한미관계와 박규수’ 같은 제목의 연구서가 아니라 굳이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이라는 훨씬 포괄적이고 도전적인 주제의 저서를 내놓은 것에서 저자의 학문적 욕심과 역량을 엿볼 수 있다. 기존의 연구성과들은 많지만 사건의 구체적 기술에 많은 오류와 모순이 발견되며 이로 인해 사건의 분석과 평가에서도 분분한 이견이 야기되고 있다(17면)고 판단했기 때문에 저자는 아예 이 분야 연구에서 새출발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중국·미국 등지에서 생산된 외교문서를 비롯하여 각종 공문서와 일기, 서간 등 광범위한 자료들을 꼼꼼하고 치밀하게 상호대조하여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역사적 사실들을 정제해냈다. 그리고 기존 연구물들의 문제점을 일일이 밝혀내며 사안들의 본말을 총괄 정리함으로써 학계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려 연구사의 결절점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저자의 이처럼 치밀하고도 총괄적인 작업 덕택에 평자도 이전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고마운 기회를 가졌다. 이처럼 초기 한미관계사가 탄탄하게 재구성됨으로써 그 속에서 활약하던 박규수의 역할과 사고에 대해서도 좀더 정밀한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는 이 시기 박규수가 이미 대외개방론자로 전환했을 것이라는 과도한 평가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 저작이 기존 연구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그동안 학계에서 읽었던 것과는 반대방향으로 자료를 읽었기 때문이다. 즉 초기 한미관계를 살피는 데서 미국측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과 청국 자료를 보완해 내용을 풍부하게 했던 기존의 연구방향과는 달리, 저자는 조선측 자료를 근간으로 삼았다. 사실 초기 한미관계사는 한반도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당연히 조선에서 생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간 자료를 거꾸로 읽어왔던 이유는 우리가 조선측 자료를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사고의 여유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대외개방’이라는 도식과, 무력에 의한 강제개방은 불가피했다는 생각이 우리를 너무도 강하게 짓눌러왔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개방을 당한 조선의 자료보다는 개방을 강요했던 국가의 자료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대한 이해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국가정책에 관한 문제는 외국의 외교자료에 기본을 두면서도,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조선인의 문제는 결국 조선측 자료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이다. 게다가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자생적인 근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회경제사 연구성과의 영향으로 자생적인 근대사상을 추적했으며, 이는 자생적인 대외개방론에 대한 추적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외부’적 충격에 의한 대외개방의 문제와 ‘자생’적인 근대사상이 교묘하게 결합되었다.

그러한 논리적 결합을 실증해주는 역사적 인물이 있었다고 그동안 연구자들이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박규수였다. 그는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 당시 조정내 척화여론을 무마하면서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박지원의 손자로 북학사상의 계승자였다. 조선의 개화사상 혹은 근대사상은 일본의 무력 위협으로 체결된 조일수호조규 이후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생적 근대사상이 발전하고 있다가 수호조규 이후의 조선에서 그 입지를 확대하고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설명이 박규수를 핵심고리로 하여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생적 대외개방론자 박규수가 왜 일본이 개방을 요구하기 전인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때는 프랑스나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자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 기존 설명의 약점이라고 여겨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 특히 미국의 통상요구에 대한 거절을 담은 외교문서를 작성한 것은 척화론이 비등한 대원군정권에서 어쩔 수 없는 일로서, 박규수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다소 무리한 설명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김윤식(金允植)의 회고 같은 별별 자료가 다 동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명호의 연구로, 특히 셰넌도어호 내항에 관한 조선측 기록인 『동진어모집요(東津禦侮輯要)』에 대한 상세한 분석 등을 통해 박규수가 대원군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과의 분쟁에 주도적으로 대처한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자,기존의 무성했던 학설들이 근거한 설명틀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이 책에서 파헤친 역사적 사실이 갖는 무게와 힘이다.

기존의 설명방식이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확증된 사실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합리적이고 신중한 해석을 가하는 데 그치”고, “대담한 이론의 적용이나 성급한 일반화를 가급적 자제”(20~21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제기는 아마도 저자가 예고하는 다음 연구, 즉 1872년 박규수의 두번째 연행(燕行)과 메이지유신 후 일본 신정부의 성립을 통한 외교문서(書契)접수문제로 빚어진 대일 외교분쟁의 고찰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박규수를 모셨던 김윤식 등에 대한 고찰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