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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윤리의 가능성

서영채 평론집 『문학의 윤리』, 문학동네 2005

 

 

이수형 李守炯

문학평론가 yeesooh@hanmail.net

 

 

문학의윤리

서영채(徐榮彩)의 『문학의 윤리』는 그의 첫 평론집에서 제기한 “자본주의의 문화적 형식인 문화산업의 논리는, 대세라는 점에서 보자면 필연적인 것이되 그 필연성은 어디까지나 존재조건의 필연성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 그 안에서 힘들여 모색해야 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이다”(『소설의 운명』, 67면)라는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저자는 진정성이나 자율성 개념보다 한층 비타협적인 정언명법(定言命法)으로서의 윤리에 의해 “시장주의라는 우리 삶의 주류 논리”(88면) 안에서 문학(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검증하고 있다.그런데 ‘문학의 윤리’가 “문학은 오로지 윤리적이 됨으로써만 자신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22면)다는 명제를 함축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윤리적 차원에서라면, 사실 ‘자본주의(시장주의)’ 같은 전제조건은 불필요하다. 윤리적인 행위라면 그것은 자본주의에서건, 다른 체제에서건 언제나 윤리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짧은 평을 시작하면서, 윤리가 무엇인가에 앞서 윤리가 왜, 그리고 언제 요청되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린 것은 정언명법으로서의 윤리와 시장주의, 탈이념이라는 전제 사이의 미묘한 틈새 때문이다.

예전과 달리 실천이나 반성을 통해 현실의 비판자로 역할하지도 못하고 상품의 하나로 유통될 뿐이며 다른 문화상품에 비해 인기도 없는 것이 시장주의의 문학이라면, 도대체 왜 문학인가? 물론 이 질문에 반드시 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저자는 그 질문이 도발적이며 불손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고백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에 답하는 것은 다소간 잉여적이며, 그 답의 내용 역시 잉여와 관련된다.

이익과 효용성, 합리성을 좇는 자본가, 정치가, 관료 들이 있다. 그들을 중심으로 이데올로기적이면서 동시에 일상적 관습적인 삶이 구성된다. 그 이면에 “단정한 목적합리성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유령들과 정치적 제도적 사회적 소수자들, 매국노와 반역자와 깡패와 거짓말쟁이 들”(41면)의, 쓸모없는 삶이 있다. 후자의 편에 선 문학은 “편견과 폭력에 의해 추방되고 억압당한 존재들이 목소리와 형상을 얻어 귀환하는 장”(21면)이며, 그것들이 상연하는 역설의 드라마를 견디는 장소이다. “명시적인 정치적 억압에서부터 사회적이거나 제도적 억압, 그리고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층위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작동”(40면)하는 억압으로부터 삶의 온갖 잉여들이 문학에 의해 소환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령, 소수자, 매국노를 불러내는 일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엄존한다고, 혹은 공적 사적으로 억압된 것에 대한 진리성 검사가 필요하며, 그 결과 어떤 잉여(예컨대 고독, 우울)는 이데올로기 조작이라고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저자의 태도는 단호하다. 문학에서 가짜 욕망을 적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이익과 가치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함으로써, 공동체적 이념의 거울에 비추어 개인의 내면을 성찰함으로써 문학은 윤리적 성격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공동체의 윤리가 힘을 잃어가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문학적 글쓰기의 윤리는 스스로의 준칙을 만들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한다. 물론 자율적인 것으로서의 문학적 글쓰기가 종국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자신을 산출한 모더니티의 모럴, 주체성의 절대 자유다. (45면)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이 윤리적인 삶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저자는 어떤 삶이 윤리적인 것인지, 어떤 욕망이 진짜인지에 대해 답해줄 근거가 없는 상황을 상정한다. 그러나 전지구적 자본주의 아래 수행되는 공동체의 해체 혹은 이념의 상대주의가 이념적 공동체에서는 은폐되었던 윤리의 불안을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공동체의 선이라는 명분으로 저질러진 역사상 수많은 비윤리적 행위들을 보건대, ‘공동체의 이익과 가치’가 항상 윤리를 가늠했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해체가 공동체적 윤리의 해체를 낳고 그 결과 자율적인 윤리가 요청되었다기보다는, 윤리는 궁극적으로 언제나 자율적인 것이었는바 그것이 오늘날 더욱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장정일, 김훈, 성석제 등의 소설에서 법의 외설성이나 제도화된 야만이 폭로됨으로써 문명세계의 윤리적 취약성이 드러난다는 분석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다만 저자도 지적하듯이, 윤리의 곤경을 겨냥한 욕망의 폭주에는 전체주의의 혐의가 상존하며, 또한 장수와 깡패가 보여주는 시대착오적 영웅주의가 윤리적 존엄을 환기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은 역사소설 속에서만 가능하거나 우스꽝스러움을 낳는 데 그칠 수도 있다. 저자가 점검하는 또다른 가능성은, 간단히 돌진하는 영웅의 윤리와 대칭되면서 겹치는, 자기모멸과 자부심이 결합된 장인의 기율이다. 처벌욕구와 나르씨씨즘이 교묘하게 얽힌, 매사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이며 금욕적인 보들레르적 댄디를 연상시키는 장인이 윤리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윤리와 그의 욕망이 상호 배제한다는 사실을 괄호친 이후에만 그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장인은 자기 직분 외에는 책임의 영역을 애초에 차단하는, 윤리적 시험으로부터의 회피술에 의해 가까스로 비윤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참과 거짓이 싸울 때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이런 장중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단지 내 편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것, 그것은 충분히 윤리적”(22면)이라고 말할 때,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율성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특히 이념의 공백기에는 더욱더, ‘자율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은 『윤리21』에서 죄와 그에 대한 책임의 관계를 통해 자율성(자유)과 윤리에 접근한다. 서두의 인용문에서처럼 문화산업의 논리가 필연적인 것이라면, 그 안의 누군가가 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어떤 죄가 발생한다 해도 그것은 필연의 결과이지, 필연을 따르는 타율적인 개인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죄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 자유의 가능성이며, 이때 윤리란 자기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빚어진 죄, 필연적이기까지 한 죄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왜 문학인가’라는 질문에 굳이 답할 의무를 느끼는 저자 역시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욕망에 무조건 충실한 영웅의 윤리나 오직 하나만을 책임지며 금욕하는 장인의 윤리에 대해 오늘의 일상에 요청되는 윤리는, 저자가 신경숙의 단편 분석에서 밝혔듯이, 자신의 죄 아닌 죄를 떠맡으려고 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이런 윤리 역시 효용성과 합리성의 세계에서는 일종의 잉여로 취급되겠지만, 그것이 주체를 자율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는 삶의 중핵과 닿아 있다.

1990년대 못지않게 자유가 증대되었던 시기, 해방이나 4·19(이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점에서는 카프 전향까지도) 무렵에도 문학에서 윤리의 문제가 대두된 바 있다. 그때는 또다른 이념의 선택으로 문제가 전화됨으로써 윤리는 합당한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이제 『문학의 윤리』가 제목 그대로 ‘문학의 윤리’ 담론을 본격적으로 개시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